184화 인질
황극린은 계빈을 제압하기 위해서 음식에 약을 탔다.
거기에 더해 육금연이 말했던 햇빛까지 활용했다. 황극린이 그러한 작전을 세운 것은 천화련을 무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전투에서도 대공녀 계지향은 제대로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리고 대공자 계빈은 햇빛에 대한 영향을 받긴 한 것 같았다.
그리 길지 않은 전투였지만 황극린은 꽤 많은 내력을 소모했다.
계빈이 보여 준 피의 내력은 황극린의 뇌전마저 집어삼킬 듯 흉포했으며 강맹했다.
그렇기에 황극린은 최선을 다했다.
여지를 주지 않으려 했으며, 빈틈이 보이면 그 틈을 확실하게 노렸다.
마지막 순간.
계빈이 보여 줬던 검격은 황극린의 가슴팍에 상처를 입혔다. 조금만 늦었다면 황극린의 심장이 꿰뚫릴 수도 있었다. 간발의 차이였다. 계빈은 소문대로 대단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이제 이립(而立)의 나이가 되었다고 했던가. 황극린은 약관에 화경의 경지에 올랐지만, 그가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전생의 도움이 컸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계빈의 천재성은 어찌 보면 황극린보다 한 수 위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는 역시 무공이었다.
계빈이 익힌 천화련의 무공은 약하지 않았다.
피를 이용한 무공은 특별했으며, 상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황극린은 북해빙궁주를 만나 자신만의 뇌전을 만들었으며.
혈풍뇌전신공은 단순히 하단전의 내력만 활용하는 게 아니었다.
살아 있는 뇌전과 중단전.
심장에 있는 거대한 기운으로 황극린은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두 가지를 동시에 이용한 황극린은 비교적 쉽게 계빈을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극린은 전혀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뒤에서 스산한 살기가 느껴진다.
계지향이 독을 억누른 채 황극린에게 검을 겨누고 있다. 계지향은 계빈에 비해 크게 부족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계지향의 눈빛엔 망설임이 있다. 무엇에 대한 망설임일까? 아마 전력을 다해도 황극린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천화련을 적으로 돌리시려는 건가요?”
“아니.”
황극린의 발이 대공자 계빈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당장이라도 달려들려던 계지향의 몸이 굳었다. 황극린의 의도가 명백했다. 조금만 더 다가오면 머리통을 부숴 주겠다는 거다. 대체 왜?
“원하는 게 뭔가요?”
“천화련에서 네 권한은 어느 정도나 되는 거지?”
설마 몸값이라도 요구하려는 건가?
“제 권한은 한정적입니다. 련주께서 허락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무(無)로 돌아가지요.”
그러니 네가 나한테 뭘 요구하든 여기서 확답하지 못한다.
그런 의미였다.
“그렇군.”
순간, 황극린의 발에 깃든 힘이 늘어났다.
아주 사소한 차이였지만 계빈의 머리통이 점점 눌리고 있다는 걸 깨달은 계지향이 당황한다.
“그만! 여기서 대공자님을 죽인다면… 만뇌문은 결코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할 겁니다.”
“다시 묻지. 천화련에서 대공자가 중요한 위치에 있나?”
“당연히……. 그분은 언젠가 천화련주가 되실 분입니다.”
“그럼 됐다.”
“예?”
“이놈은 인질이다.”
“지금 무슨…….”
“천화련이 내가 원하는 걸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계지향은 생각했다.
대체 그가 말하는 게 무엇일까? 지금 황극린은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 도통 생각나지 않는다. 천화련에서 모은 영약을 원하는 건가? 천화련이 피를 이용하는 무공을 익힌다고 해도 모든 문도가 그런 것은 아니다. ‘축복’ 혹은 ‘저주’라 불리는 피를 이어받은 이만이 천화련의 무공을 익힐 수 있었다. 그렇기에 천화련 내부엔 정상적인 영약이 꽤 있긴 하다.
하지만 영약을 노리기 위해 천화련을 공격했다?
그건 말도 안 된다.
그것도 아니라면…….
‘소림과 천화련의 만남을 알고 있다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까딱 잘못하면 만뇌문은 무림공적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들이 ‘용성’이라는 곳에 가입하기 전에 빠르게 처리될 것이다. 황실이 반발하긴 하겠지만 그들의 품에 들어가기 전에 멸문한다면… 어쩔 도리가 있으리?
아직 이것도 정해진 게 아니었다.
이번 소림사 방장과의 회담에서 모든 걸 정하려고 했다. 그리고 천화련은 딱히 만뇌문을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이렇듯 객잔에서 오래 머물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실수하는 겁니다.”
“실수라.”
“천화련은 만뇌문에게 어떠한 악감정도 없었습니다. 대공자께서도 당신을 찾으려 했었지만, 그 목적은 친분을 쌓기 위함이었지요.”
“그렇군.”
황극린은 그런 계지향의 말에도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대체 그의 목적이 뭐지?
아마 여기선 말해 주지 않을 것이다.
계지향 스스로 자신의 권한이 없다고 말했으니.
그때 황극린이 입을 열었다.
“인질 교환을 할 생각이 있으면 말해라.”
“인질… 교환이요?”
“그래.”
대체 천화련이 누굴 데리고 있다는 말…….
순간, 계지향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표정으로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감정을 숨기는 건 그녀의 장점이었으니까.
“뇌불.”
“뇌불…….”
“너희가 그를 데리고 있다고 들었다.”
이미 알고 있는 건가?
어떻게?
계지향은 ‘그곳’에 잡혀 온 뇌불의 소식을 듣긴 했지만, 찾아가 보진 않았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억지로 인간의 피를 취하지 않고 수련하고 있었으니까. 인간의 피는 그 어떤 생명보다 더 강대한 가능성과 힘을 지니고 있었다. 계지향이 계빈보다 부족한 것은 어쩌면 그러한 탓도 있었다.
아무튼, 황극린은 이미 뇌불이 천화련에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이유는요?”
“그것까지 알아야 하나?”
“인질을 교환하려면 저희가 납득할 이유를 말씀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뇌불은 내 사부다.”
계지향이 눈을 가늘게 뜬다.
“그가 사부라고요? 뇌불이 무림공적이라는 건 알고 계시겠죠?”
황극린은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그는 만뇌문의 중심이 된 무공을 창안한 무인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그뿐이다.”
황극린은 기절한 계빈을 어깨에 둘러업었다.
“너희 대공자를 찾고 싶다면 석 달 뒤, 뇌불을 데리고 청성산으로 와라. 만약 뇌불이 죽거나 수작을 부린다면 대공자는 죽을 거다.”
“당신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겁니다.”
“이 와중에 협박인가?”
“…….”
아무리 봐도 지금은 천화련이 훨씬 불리한 상황이었다.
뇌불은 분명 가치가 있는 인간이다. 하지만 천화련의 대공자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계빈은 아버지보다 더욱 많은 것을 타고난 인재였으니까.
“석 달 뒤다.”
황극린이 떠나간다.
계지향은 실로 오랜만에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오늘 있었던 일을 천화련에 가서 보고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황극린은 대공자를 데리고 떠나갔다.
무림이 발칵 뒤집어질 일이었지만…….
당연히 천화련은 대공자가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않을 것이다. 천하제일의 문파의 대공자가 기껏해야 만뇌문에게 납치당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거기다 그것을 밝힌다면, 왜 천화련이 뇌불을 데리고 있었는지도 드러날 수 있었다.
천화련은 이 일을 조용히 해결할 것이다.
평화적으로 해결하든, 조용히 만뇌문을 학살하든 말이다.
계지향은 차가운 눈으로 떠나가는 황극린을 바라보았다.
왜인지 그녀는 오라버니가 납치당했음에도 딱히 슬픈 표정은 아니었다.
* * *
“뭐 하는 거지?”
먼 거리에서 배교의 부교주 육금연이 바라보고 있다. 당장이라도 황극린에게 궁금한 점을 쏟아 내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함부로 다가오지 못했다.
- 그가 기절한 게 맞나요?
“그래.”
- 중간에 깨어날 가능성은…….
“없다.”
확신에 찬 황극린의 말에 육금연이 다가온다.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이 천화련 대공자 계빈을 바라보았다.
“이게 천화련의 대공자…….”
왜인지 입맛을 다시는 표정이다.
“…정말 인질 교환이 성공할 거라 보는 건가요? 그들은 뇌불과 계빈을 교환하는 순간, 당신을 죽일 거랍니다.”
“난 죽지 않는다.”
그렇기에 교환 장소는 만뇌문이었다.
진법 내에서라면 어떠한 변수라도 극복해 낼 자신이 있었다.
“네 정보가 맞다는 걸 알아냈으니 놓아주겠다.”
“네? 정말요?”
부교주 육금연은 왜인지 아쉬운 얼굴을 했다.
“왜? 같이 가고 싶은가?”
“그, 그건 아니고… 으음.”
“그럼 가도록.”
“정말요? 정말 놓아주시는 건가요?”
황극린의 대답은 없었다.
단지, 기절한 계빈을 마차에 물건처럼 실은 다음 마부석에 앉았을 뿐이다.
육금연은 황극린을 그냥 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 잠시만요!”
“너도 납치당하고 싶나?”
“그게 아니라… 으음, 그거 있잖아요, 그거.”
육금연은 말을 하면서 입에 침이 고이는 걸 느꼈다.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되다 보니 그걸 먹고 싶었다. 이번에 그와 헤어진다면 다시는 먹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휙.
황극린이 소매 속에서 무언가를 던졌다. 양념이 든 병이었다.
“이건…….”
“남은 거다.”
히이이이잉-!
세 마리의 말이 앞으로 나아간다. 황극린은 정말로 배교의 부교주를 놓아주었다. 거기다 그 ‘양념’까지 선물해 주었다. 당최 그의 인간성이 어떠한 부류인지 예측할 수 없다. 평소에는 감정도 없는 살수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놓아주고, 양념을 선물해 주는 것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멍한 눈으로 황극린의 마차를 바라보던 육금연.
그녀가 정신을 차린다.
“나도 돌아가야겠지.”
왜인지 아쉬웠지만, 이제 그녀도 제자리를 찾아가야 할 때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흑요석처럼 번뜩였다.
* * *
“여긴…….”
덜컹거리는 내부에서 계빈은 기절에서 깰 때마다 또 기절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걸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황극린의 암기가 그의 관자놀이를 타격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정신을 차렸음에도 아무런 고통이 없었다. 땅도 흔들리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 같다.
계빈은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장면을 기억했다.
분명히 꿰뚫었다 생각했던 황극린은 멀쩡했었다.
‘내 예상보다 더 강했군.’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온다.
역시 강호는 넓다. 아버지가 했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재밌구나.’
계빈은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황극린과 계지향이 대화를 나누는 순간 그는 기절했었지만, 이렇게 살려 두는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살아만 있다면 천화련에선 언제든 그를 구출하러 올 것이다.
등불도 없는 방이었지만, 계빈은 그것이 익숙하다는 듯 주변을 살폈다.
그가 갇힌 공간은 꽤 넓어 보였으며 아무도 감시하는 이가 없어 보인다.
‘점혈을 했군. 하나.’
정상적인 점혈은 계빈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가 피의 기운을 발현하려는 순간이었다.
- 끼이이이.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린다.
계빈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방이었지만, 붉게 빛나는 여덟 개의 눈동자가 마주한다. 순간 이것이 무언지 한참이나 고민했다. 그리고 알아낸 사실.
“괴물?”
천화련의 대공자라도 어두운 방 위에 둥둥 떠오른 그것이 인면지주의 눈동자라는 걸 알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가장 간단한 답을 내놓았다.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단어의 진동이 인면지주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
- 끼이이이이이-!
마치 침을 뱉듯 무언가를 뿜어내는 흑주.
놈의 엉덩이에서 뜨거운 거미줄이 발사되었다.
“설마… 침을 뱉은 건가?”
손과 발이 묶인 계빈은 그것을 닦아 낼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쿠르으응.
마치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굉음이 들린다.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계빈은 그 소리를 듣고 자신이 갇힌 곳에서 쉽사리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깨어났군.”
“황극린.”
“석 달만 참아라. 그럼 살아 나갈 수 있을 거다.”
계빈은 그를 보면서도 딱히 분노하지 않았다.
단지, 호승심이 일었다. 그는 어떻게 하여 이렇게 강해졌을까? 역시 그는 자신과 같은…….
“너는 피를 먹는다지?”
계빈은 평범한 식단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것은 배교의 육금연에게 들은 내용이다.
그의 말에 계빈이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나에 대하여 조사를 면밀하게 했군. 이 몸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건가. 역시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이로구나.’
만약 어중이떠중이들이 저리 행동했다면 계빈은 살의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계빈은 보았다. 황극린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말이다. 그는 계빈의 유일한 호적수가 될 것이다. 계빈의 머릿속에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드높은 산의 정상.
절대 고수가 된 두 사람이 서로의 눈을 마주한다. 누가 중원의 최강자인지 가리는 자리. 황극린과 계빈은 서로를 이해하듯 외로운 눈동자를…….
“넌 인질이다.”
황극린의 말에 계빈이 상념에서 깨어난다.
인질이라?
천화련에 만뇌문이 원하는 것이 있었던가? 아니, 황극린이 원하는 게 있던가?
“그래, 자네가 원하는 게 무엇인가? 내가 들어줄 수 있다면 들어주도록 하마.”
미래의 호적수.
그가 원하는 게 있다면 들어줄 의향이 있다. 계빈은 인자한 얼굴로 황극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흑주의 실에 사지가 꽁꽁 묶여 초라하게 갇힌 계빈이 그런 말을 하니 황극린은 조금 황당했다.
‘예상과는 다른 성격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