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최강의 무공
적혈강(赤血罡).
천화련의 직계들만 익힐 수 있는 무공이었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생명의 원천은 피에 있었다. 피가 과도하게 흐르면 죽으며, 피는 항시 따스함을 유지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뜨거워지거나 차가워지면 인간은 죽는다.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졌다는 듯이 말이다.
적혈강은 인간의 피를 이용하는 무공이다.
정확히 말하면 피에 깃든 무한한 가능성을 이용하는 기운이었다.
그건 인간의 진원진기(眞元眞氣)와는 또 다르다.
인간은 피를 흘려도 당장 죽지 않는다. 인간의 육신은 끊임없이 피를 생성한다. 소위 영약이라는 것들은 수십 년에서 수백 년까지, 자라는 데 오래 걸린다. 물론, 중원 땅이 워낙 넓다 보니 아직 발견되지 않은 영약은 무수히 많으리라. 다만, 발견되기 어려울 뿐.
그렇기에 천화련의 직계들은 축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영약을 취하지 않고도 내력을 상승시킬 수 있었다. 인간은 피를 조금 흘려도 죽지 않으며, 계속해서 피를 생산한다. 인간이 대지 위에서 멸종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천화련은 영원히 내력을 얻을 ‘영약 농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막대한 양의 혈류가 흐르기 시작한다.
핏빛으로 물든 검강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계빈은 생각했다.
저런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말이다.
보아라.
강호에는 이토록 고수가 많지 않은가?
지나가는 객잔에서 저러한 고수를 만나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꾸르르륵!
파아아아앗!
계빈의 검에서 발출된 적혈강.
그것이 한 줄기의 섬광을 완전히 봉쇄했다. 다만, 계빈은 방심하지 않았다. 사내의 눈동자는 무언가 다른 게 있었다. 이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사내.
그의 온몸에 뇌전이 흐르고 있었다. 내공을 뇌전으로 방출한 것이 아니다. 그 스스로 뇌전이 되어 부딪쳐 왔다. 황급히 적혈강을 두른 계빈. 하지만 사내의 속도가 워낙 빨라 밀려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대공자!”
계지향이 외쳤지만, 그녀는 나서지 않았다.
대공자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지금 당장은 나설 수 없었다. 거기다 아까부터 기묘한 감각이 단전을 감싸고 있다. 지금 상태에서 무리하게 내공을 운용하면 큰 내상을 입을 게 분명했다.
쿵!
벽이 부서진다.
충격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계빈이 밖으로 떨어진다.
“…….”
점소이였던 사내는 뻥 뚫린 구멍에서 천화련의 대공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육금연은 멀찍이 서서 그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객잔으로 사람이 가지 않게끔 했던 건 그녀의 노력이다. 도망칠까도 생각했지만, 그녀의 발목에는 가느다란 실이 묶여 있었다. 아마 풀린 걸 감지하면 황극린은 당장 쫓아올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도주를 포기했다. 거기다 천화련의 대공자나 대공녀와 얼굴을 마주친 일도 없었기에 그리 위험부담이 크다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긴장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황극린에게 천화련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 것은 그녀 본인이었다.
‘천륜을 거스른 대가.’
세상에는 많은 ‘저주’가 존재한다.
혹자는 축복이라 말하기도 한다. 남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힘을 가진 경우가 많았으니까.
하지만 배교의 육금연은 잘 알고 있었다.
천화련이 어떤 힘을 사용하는지, 그들에게 어떠한 제약이 있는지를 말이다.
북해빙궁의 여인들은 폭풍이 몰아치는 곳에서 최고의 힘을 낼 수 있으며, 더운 지방에선 힘을 잘 발휘하지 못한다. 천화련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피의 힘을 탐하는 대가로 작렬하는 태양에 저항할 수 없는 체질을 타고났다.
그들이 밤에만 움직였던 이유.
그것은 태양을 보면 약해지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저들은 중독된 상태였다.
천화련의 대공자가 황극린의 계획을 눈치채고 있었다고 해도, 이제는…….
꾸르르륵.
괴이한 소리가 들린다. 동시에 핏빛의 강기가 대공자의 몸을 뒤덮고 있었다.
‘저건……!’
계빈이 고개를 들어 황극린을 바라본다.
그의 뒤로 태양이 높게 떠 있었다. 육금연이 예상한 대로 흘러갔다면 그는 황극린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어야 했다. 태양의 방향까지 계산한 작전이었으니까. 혹시 모르는 일이었고, 최대한 안정적으로 계빈을 제압하려고 했다.
하지만 계획은 실패했다.
천화련의 대공자는 이미 태양을 극복한 듯 보였다.
‘이제 황극린을 믿는 수밖에 없나.’
만약 황극린이 위험에 처한다고 해도 육금연은 나서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배교에 소속되어 있었고, 천화련과는 당장은 척을 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도 육금연은 황극린이 승리하기를 바랐다.
그런 생각과 함께 그녀의 입가에 침이 고였다.
* * *
“날 노렸구나.”
계빈은 당연한 소리를 지껄였다.
황극린은 그를 보고 있자니 분노가 타올랐다. 살수는 감정을 숨겨야만 했다. 하지만 흑살문의 살수가 아닌 만뇌문의 장로로서 황극린은 분노를 토해 내고 있다. 그것이 과거와 다른 점이다.
“…설마 자네가 황극린이었나?”
모르면 바보였다.
뇌전의 기운을 자유자재로 다루어 파천뇌권이라는 별호가 붙어 있었다. 적혈강은 어떠한 성질의 기운이라도 막아 냈지만, 그의 뇌전은 무언가가 달랐다. 마치 살아 있는 듯 적혈강의 응집을 해제했으며 집요하게 파괴 행각을 멈추지 않았다. 계빈의 경지가 조금만 부족했어도 처음 공격에 당했을 것이다. 그만큼 위험한 뇌전이다.
계빈이 알기로 뇌전을 사용하는 문파는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그렇다.”
“싸우면서 친우가 될 수도 있겠군.”
의문 모를 소리를 지껄이는 계빈.
그가 검을 든다. 검 끝에 피 몇 방울이 묻어 있었다.
황극린의 뇌전 박치기에 상처를 입었지만, 그 순간 검을 휘둘렀다. 황극린의 어깨를 살짝 베어 낼 수 있었다. 물론, 손해는 계빈이 훨씬 컸다. 지금도 그와 부딪힌 가슴팍에선 뇌전이 흐르고 있다. 적혈강으로 막아 내지 않았다면…….
‘화경의 초입이라 했던가. 벌써 그 경지까지 오른 모양이로군.’
그렇다고 해도 계빈은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운 듯한 표정이었다. 천화련의 무공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는다. 최강의 무공이다.
“자네의 맛이 어떤지 보겠네.”
검 끝에 손을 가져다 대려는 계빈.
당연하게도.
황극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
황극린의 소매 속에서 묵철 암기가 튀어나왔다. 당연히 암기에는 뇌섬사가 걸려 있었으며, 계빈이 피하더라도 쫓아갈 것이 분명했다.
쉬익!
계빈은 ‘황급히’ 몸을 틀었다. 방심하고 맞아 줄 것은 절대 아니었다. 뇌전이란 날카로운 것에 깃들수록 위력이 더 강해진다. 뭐, 대부분 성질의 것들이 그러하지만 특히 뇌전은 위험하다.
‘빠르다.’
하지만 완전히 피한 것은 아니었다.
피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암기가 방향을 꺾어 계빈에게 쇄도했다.
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묶는다.’
혈천망(血天網).
피의 그물이 계빈의 손에서 폭발하듯 뻗어 나갔다. 살아 있듯 팔딱대는 뇌전을 잡아먹듯 집어삼킨다. 그리고.
“연결되어 있다는 게 자네에겐 독이 될 것이네.”
적혈강이 품은 기운은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황극린이 출수한 암기에는 실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을 타고 상대의 기운을 억압한다. 거미가 먹잇감을 노리듯 진득한 피의 기운이 뇌섬사를 통해 황극린에게 접근한다.
“내력 싸움으로 내게 이길 것이라 생각하는가!”
우웅!
크게 말하지 않았지만, 내력의 파장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가공할 내력이었다. 천화련의 대공자가 왜 최고의 후기지수로 불렸는지 알 수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육금연은 긴장감에 주먹을 꽉 쥐었고, 천화련의 계지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생각이 있다면 연결된 실을 끊을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황극린의 내부부터 잠식된다. 감히 천화련의 대공자에게 내력 싸움에서 이길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지금도 보아라. 계빈의 장악력이 커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적혈강이 황극린의 손에 닿는다.
그런데.
황극린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나면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의 눈빛은 심연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뭐지?’
의아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쿠릉!
어디선가 천둥소리가 들린다. 하늘은 아니었다.
“……!”
분명히 조금 전까지 압도하며 황극린의 뇌전을 밀어냈었다. 하지만 적혈강이 황극린의 손에 닿은 순간, 혈풍뇌전신공의 뇌전이 폭발했다. 그리고.
카드드드득!
적혈강이 반대로 압도된다. 마치 감점된 듯이 적혈강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계빈은 적혈강을 제어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뇌전의 속도는 계빈이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다.
“크윽!”
손을 타고 전해진 뇌전.
그것은 팔꿈치와 어깨를 거쳐 심장 부근에 도달했다. 그리고 사방으로 뻗어 나가 계빈의 온몸을 감전시키려 했다. 포악한 맹수의 난동처럼 그의 내부를 진탕시키고 있었다.
사아아아.
어쩔 수가 없었다. 계빈은 혈천망을 해제하고 황급히 몸을 굴렸다. 더 이상 황극린의 뇌전이 내부를 장악하게 둘 순 없었다.
“쿨럭…….”
피.
아까운 피가 계빈의 입가에 흐르고 있었다. 그가 전투 중에 피를 흘린 적이 얼마나 있을까? 천화련에서도 그가 피를 흘리도록 만든 상대는 손에 꼽힌다. 경지에 이른 지금은 그 수는 더욱 줄어들었다. 거기다 상처에서 난 피가 아니다.
내부에서 올라오는 진득한 피.
계빈이 가지고 있는 힘의 정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검은 피에서는 아직도 파괴적인 뇌전이 흐르고,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치지직.
치직!
“이건 대체…….”
이상했다.
내력 싸움에서 자신이 패배할 일은 상정하지 않았다. 아무리 태양 아래서 싸운 것이라고 해도 불가능했다. 황극린이 자신처럼 ‘축복’을 받은 건가?
예상했던 바였지만…….
분노가 솟구쳤다.
“감히 내 피를!”
타닷!
이제 적당히 해 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해야 한다. 어느샌가 그의 검에 맺힌 적혈강은 암혈강(暗血罡)이 되었다.
혈천혼암(血天混暗).
천화련의 저주를 이어받은 자들의 피는 결국 검게 변한다. 파괴력은 증대하며, 그 어떤 기운이라도 집어삼킬 포악스러움을 지니고 있었다.
사각!
공간이 갈리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계빈은 인상을 찌푸렸다.
황극린은 그 자리에 없었다.
‘뒤.’
뒤를 점했다고 유리한 게 아니다.
상대가 그것을 알았다면 오히려 독이 된다. 계빈은 황극린의 권격을 예상하고 피했다. 그리고 그의 심장이 있을 곳에 검을 찔러 넣었다.
황극린의 눈이 보인다.
심장의 솟구치는 피가 보인다.
죽이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계빈은 멈출 수가 없었다.
그의 심장에서 피가 솟구치는 걸 보니 살심(殺心)이 끊임없이 치솟았다.
폭혈류(暴血流).
피는 폭발한다. 검 끝에 모인 검은 혈류가 사방으로 비산할 것이다. 그것은 황극린의 심장을 찢어 놓을 것이며, 그의 뼈와 근육을 분해할 것이다.
촤아아악!
큰 힘을 소모하자 살심으로 가득 찼던 계빈의 눈동자가 정상적으로 돌아온다.
아까운 피를 잃었다는 생각에 진심을 내보이고 말았다.
‘큰일이로군.’
짧은 순간이었지만, 황극린은 자신을 이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천화련의 피는… 그를 각성하게 만들었다.
“대공자님!”
계지향이 경악한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다.
다시 여유로운 오라버니로 돌아가야 할…….
“커억?”
순간적으로 전해지는 극심한 고통.
그 고통은 심장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피가 흘렀다면.
뜨거운 것이 자신의 얼굴을 적셨어야 했는데?
‘아니다. 분명히 나는 황극린의 심장을……!’
그렇게 빠를 수가 없다.
순간적으로 전해졌던 검 끝의 감촉. 그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황극린의 심장은 분명히…….
계빈의 몸이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베어 낼 것이 없었다. 또다시 심장에 충격이 전해진다.
쿵!
“커헉!”
쿵! 쿵! 쿵! 쿵!
고통이 퍼질 때마다, 목에서 피가 울컥울컥 솟을 때마다.
계빈은 막무가내로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에서는 적혈강이 마구 방출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콰지지지직!
소름 끼치는 소음이 들려온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르다.
쿠릉!
다른 어떤 곳도 아닌 자신의 심장에서 천둥소리가 터져 나왔다.
“쿨럭!”
계빈이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앞에 누군가의 발이 있었다.
‘마지막 그는 인지의 한계를 넘어선 속도를 보였다. 그건 말도 안…….’
계빈은 자신이 환영을 베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너무나 속도가 빨라 계빈의 머릿속을 혼란에 빠트릴 만큼 빨랐다.
‘대체 뭐였지? 이놈의 무공은…….’
당시를 기억해 낸다.
순간적으로 황극린 주변의 공간이 비틀어진 것처럼 보였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당시를 생각할 수 있는 것만으로 계빈이 얼마나 뛰어난 고수인지 알 수 있었다.
“잠시 잠들어 있어라.”
고요한 목소리가 들린다.
계빈은 황당했지만…….
‘죽진 않겠군.’
황극린에겐 무언가 목적이 있었다. 죽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의 흐릿한 시야에 무언가 보인다.
‘저건…….’
계빈의 몸이 힘없이 쓰러진다.
바닥에 보이는 피. 그것에 얼굴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