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자극적인 맛
황극린이 마차를 멈춘다. 여인은 빠르게 눈을 감았다. 점혈당한 척을 하고 있어야 한다. 사실 그가 이렇게 자신을 데리고 다닐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황극린이 방심하게끔 조치를 해 놓아야 했다. 언제든 탈출할 준비를 해 놓은 것이다.
황극린이 마차에 들어와서 말한다.
“일어나라.”
“…….”
자신은 점혈당했으니 움직이면 안 된다.
그것을 상기하고 있었지만…….
“점혈을 당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
“거기 있으려면 있고.”
잠시 고민하던 여인이 고개를 든다. 황극린은 마차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모닥불을 피워 놓고 있었다. 뭐 하는 거지?
그때 고기 굽는 냄새가 났다.
냄새를 보면 돼지고기와 닭고기였다.
‘그냥 육포로 때울 줄 알았는데, 직접 고기를 굽는다? 그리 급하게 움직이지 않는군.’
밖으로 나간 여인이 살짝 당황한다.
반나절이면 그래도 꽤 멀리 왔어야 한다. 하지만 오히려 사천성과는 멀어졌다. 도리어 산서성과 가까워졌다고 할까? 대체 뭘 하려는 걸까?
‘설마 바로 천화련으로 가는 건 아니겠지? 나를 데리고……?’
그렇게 되면 상황이 복잡하게 꼬인다.
배교는 만뇌문에 뇌불이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흑살문의 의뢰를 취소시킬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흑살문에게서 벗어나 천화련과 싸우게 된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골치가 아프다. 흑살문도 무서웠지만, 천화련은 더 무섭다.
배교는 분명 강한 문파는 맞았지만, 대놓고 세력을 키워 온 그들보다는 확실히 부족하다. 물론, 배교가 작정하면 그들에게도 큰 피해를 입힐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자신들이 원하는 대계를 이루지 못한다.
하지만 여인은 황극린을 자극할 수 없었다.
그는 정파인이었지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사내였다. 대룡상단이나 소림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뒤에 흑살문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황극린의 성격이 그런 듯하다. 그를 적으로 돌리면 몹시 위험하다.
여인은 일단 따져 묻지 않고 황극린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먹어라.”
“네? 가, 감사해요.”
납치했으면서 먹을 것까지 챙겨 주다니.
만약 자신이었다면 절대 이런 호사를 누리지 않게 했을 것이다. 팔다리를 꽁꽁 묶고 제대로 된 진실을 들을 때까지 영혼의 고문을 했으리라. 이렇게 보면 마음씨가 선한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을 여인이 아니었다.
“……?”
그렇게 황극린이 건네준 고기를 한입 베어 문 여인.
자신도 모르게 눈이 크게 뜨인다. 입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고기를 품고 있을 뿐이다.
“무으?”
황극린은 전혀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잠시 황극린의 눈치를 보던 여인이 고기를 씹기 시작한다. 날카로운 이에 고기의 육즙이 혀에서 팡팡 터진다. 이게 뭐지? 동시에 터져 나오는 기묘한 양념! 뇌를 자극하는 황홀한 맛에 마치 머릿속에서 화약이 터지는 듯했다.
펑~ 펑펑!
‘이, 이 자극적인 맛은 대체 뭐란 말인가!’
난생처음 느껴 보는 맛이었다.
평소 음식이라면 그냥 배만 채우면 된다는 주의였지만,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 정도의 맛이다. 고급스러운 맛은 절대 아니었다. 몹시 자극적인 맛이었다. 그리고 먹고 있는데도, 욕심이 생겨났다. 황극린이 굽고 있는 다른 고기도 맛보고 싶다. 닭고기가 이러했으니 돼지고기는 어떠할까?
황극린이 그녀를 바라본다.
“네 이름이 뭐지?”
“냠냠, 제 이름은 육금연이랍니다.”
“자, 이것도 먹어라.”
“아, 감사해요! 냐아암!”
여인은 반나절로 생각했지만, 그녀가 굶은 시간은 거의 하루였다. 아마 황극린의 동태를 살피느라 배가 고픈 줄도 몰랐을 것이다. 더 굶길 수도 있었지만, 황극린은 하루가 지나고 그녀에게 고기를 선사했다. 황극린표 특제 양념을 듬뿍 발라서.
여인의 정신적인 방벽을 뒤흔든다.
그렇다고 완벽히 넘어왔다고 장담할 수 없었지만, 이름 정도는 쉽게 대답해 준다.
“배교에서 네 직책은 뭐지?”
“냐암, 저는 부교주랍니다.”
“…….”
황극린이 잠시 질문을 멈추었다.
그리고 여인도 씹던 것을 멈추고 황극린을 바라본다.
‘일부러 속이는 건가?’
황극린은 당연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배교의 부교주라면 최소한의 무력은 갖추어야 했다. 뭐, 중원 전체로 따지자면 여인도 약한 무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배교의 악명과 비교하면 황극린의 입장에선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천흉도 부교주라 했지 않은가?
그런데 또 반응을 보면 여인이 당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워, 원래 내가 이런 실수는 안 하는데!’
자신도 자신이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반나절 동안 굶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음식에…….
약을 탄 건가?
물론, 육금연은 배교의 부교주답게 평범한 약물에는 중독되지 않는 몸을 가졌다. 점혈이 통하지 않는 것도 그 이유였다.
꼬치를 꿴 고기를 입에 넣고 멈칫하고 있던 육금연.
황극린이 말한다.
“먹어라, 약을 탄 건 아니니.”
“저마이가여?”
심각한 표정을 지은 여인이 겨우 꼬치를 입에서 뗐다.
“정말인가요? 이 고기를 먹으면… 다른 잡념들이 사라지고 정신이 멍해진답니다. 미약을 타지 않고서는…….”
“네가 오랫동안 굶었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난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네가 거짓을 고하지 않는 이상.”
“아…….”
“그러니 먹어라.”
“음… 네.”
육금연이 음식을 허겁지겁 먹는다.
황극린은 이것저것 육금연에게 물어보았으며, 육금연은 배교의 비밀이라 할 수 있는 걸 제외하곤 거의 다 말해 줬다.
“후우우, 정말 잘 먹었네요. 이렇게 많이 먹은 게 몇십 년 만인지…….”
“보이는 것보다 꽤 나이가 많나 보군.”
“…그건 대답할 의무가 없는 거죠?”
수북하게 쌓인 나무 꼬치들을 본 육금연이 흠칫하더니, 그것을 뒤로 치운다.
그리고 황극린을 바라본다.
허겁지겁 고기를 먹을 때와는 다르게 배부르니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지금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 잠시만, 여기는… 설마 천화련이 있는 산서성으로 가시는 건…….”
“산서성 부근으로 가고 있다.”
“…….”
육금연이 심각한 얼굴을 했다.
아직 황극린은 천화련의 힘을 모르고 있다. 황극린이 대룡상단을 꺾고, 소림사의 의지를 막아 낸 것도 대단한 업적이긴 했다. 하지만 천화련은 다르다. 흑살문이 강하다곤 하지만, 그들은 만들어진 상황에서 최고의 힘을 발휘하는 존재들이다. 정면으로 싸운다면 천화련의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을 잊으셨나요? 천화련은 피를 취하는 무공을…….”
“그게 어쨌단 거지.”
“네?”
“그들이 무서운 무공을 익혔다고 도망쳐야 하나? 내 사람을 버리고?”
“그건…….”
“난 내 사람을 버리지 않을 거다. 소중한 사람이 죽고 혼자 살아남는 것보단 같이 살아남는 게 좋겠지.”
“그러다가 황 대협께서 죽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육금연 자신도 죽을 수 있다.
이 사내가 천화련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왜 자신까지 데려간다는 말인가? 정말 제정신이 아닌 건가?
“나도 죽지 않을 거다.”
확신에 찬 목소리.
육금연은 황극린의 그런 목소리에 기이한 감정을 느꼈다. 무언가 생각해 둔 게 있단 말인가? 흑살문을 믿고 있는 건가? 아니면 자신의 실력을 믿는 걸까? 여인은 어쩔 수가 없었다. 황극린은 이미 육금연이 점혈당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에게서 자력으론 탈출할 수 없다.
“…천화련은 황 대협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강하답니다.”
“그렇겠지.”
“죄송하지만 본교는 천화련과 당장 적대할 생각도 없고요.”
“그래.”
“저는 황 대협께 거짓을 고하지 않았답니다. 제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에요. 그러니 저는 이만 여기서…….”
“너보고 직접 싸우라 하지 않겠다. 정체를 숨기고 있으면 네가 배교 출신인 것은 모를 것이다.”
“제 말을 믿지 못하시는군요.”
당연했다.
육금연이 거짓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당장 그녀를 보내 줄 수는 없었다.
“뇌불이 천화련에 있다는 게 확실하면 보내 주도록 하지.”
“천화련의 지하 감옥에 들어가실 건가요? 그곳의 경계는 삼엄하답니다. 애초에 혼자서 거기까지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답니다.”
“천화련의 성까지 갈 생각은 없다.”
“그럼 어떻게 확인을 하시겠는다는…….”
“천화련의 대공자가 움직였다는군.”
천화련의 대공자.
배교는 중원에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고 있지만, 중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계빈은 천화련 무공의 정수를 모두 이어받은 천재였다. 황극린 또한 역대급의 천재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 전에 중원 최고의 천재로 추앙받았던 게 계빈이였다.
천화련이 움직였다는 소문이 이미 퍼졌다.
사실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들르는 현마다 개방을 찾아간 게 도움이 되었다.
“난 대공자를 납치할 거다.”
“…네?”
육금연의 팔뚝에 소름이 돋아났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알고 있는 걸까? 한 번만 삐끗해도 돌이킬 수 없는 길이었다. 더군다나 황극린은 계빈에게 이길 수 있다는 말인가? 그의 곁에는 쌍둥이 동생 또한 함께한다. 그리고 어쩌면 뇌불을 납치한 ‘그’도…….
“그러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넌 살 수 있을 테니까. 다 먹었으면 일어나라, 미리 장소를 선점해 두어야 하니까.”
육금연은 자리에서 일어서 황극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황극린에게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확인할 기회가 된다. 만약 상황이 악화된다면 그녀는 가차 없이 목숨을 끊을 것이다. 배교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지만 황극린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어쩌면 미래엔 만뇌문이 천화련보다 더 무서운 문파로 거듭날 수도…….’
물론, 아직까진 희망일 뿐이었다.
그의 계획이 성공해야 한다. 그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말이다.
* * *
“악!”
육금연은 황극린이 잠든 틈을 타 탈출을 시도했다.
식사를 마치고 두둑해진 포만감으로 허튼 생각을 했다. 그녀는 지금 죽고 싶지 않았다. 천화련의 대공자를 납치하는 건 너무 위험한 짓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죽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렇게 육금연은 회심의 기회를 노려 도망치려 했지만…….
그녀의 팔과 다리에 보이지 않는 실이 묶여 있었다.
내공으로 안력을 돋우자 겨우 보이기 시작한다.
‘이건 천잠사(天蠶絲)……?’
육금연이 당황하고 있을 때, 황극린이 뇌섬사(雷纖絲)를 당겼다.
“두 번은 없다.”
“…….”
“밥 먹어라.”
“…네.”
육금연은 자포자기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화경에 이른 고수의 손아귀에서 어찌 빠져나간단 말인가?
주르륵.
저도 모르게 입가에서 침이 흘러내린다. 절대 황극린이 구워 준 고기 때문에 쉽게 탈출을 포기한 건 아니다.
육금연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황극린.
그가 고개를 들었다.
왜인지 바람에 피 냄새가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천화련의 대공자라…….’
* * *
계빈.
그가 무림 출두를 선언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는 소림사 때문이었다.
다른 문파들은 잘 모르겠지만 소림사와 천화련은 긴밀한 연을 맺고 있었다. 무림맹주라는 정파 무림의 최고 권력이 있었지만… 사실 천화련주와 소림의 방장이 무림의 정책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번째는 황극린의 존재였다.
계빈은 처음 용봉지회에 참가하고 중원에 실망했다. 아버지의 말로는 중원엔 강자가 득실거린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참가한 용봉지회에선 강자는커녕 가능성이 보이는 이들도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절대자의 자질을 타고난 계빈이었으니, 심각한 수준 차이에 중원 무림 자체에 실망했다.
차라리 무림에서 적수를 만나는 것보다 천화련 내의 고수들과 비무하는 게 훨씬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
그는 몹시 기대하고 있었다.
황극린이라는 무인은 어느 정도로 강할까?
자신을 만족시켜 줄 수 있을까.
“대공자님, 이제 가시지요.”
계빈과 비슷할 수준으로 창백한 피부의 여인이다. 병약하게 보였지만 외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뿐, 그녀는 계빈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또래 무인이었다.
“그러자꾸나.”
아쉽게도 황극린은 무림맹에 들른 후 며칠 만에 사천성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섬서성에 들렀다가 사천성으로 향하면 된다. 만월이 떴으니 이제 움직일 때가 되었다. 계빈과 그의 쌍둥이 여동생이자 대공녀 계지향이 밖으로 나선다.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데도 두 사람은 전혀 추위를 타지 않았다.
“사천성까지 가려면 꽤 걸리겠군요.”
“오랜만의 외출이지 않느냐? 벌써 돌아가고 싶으냐?”
“밖은 재미가 없으니까요.”
“그렇긴 하지.”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다.
그들은 느긋했다. 품위 없이 경공을 펼치며 달려가지 않는다. 소림사 방장과의 만남은 꽤 중요한 일이었지만, 천화련은 언제나 갑의 위치에 있었다. 오랜만에 그들의 애를 태워 주는 것도 괜찮으리라.
“그래도 기대되지 않으냐? 황극린이라는 사내 말이다.”
계빈의 새빨간 입술이 호선을 그린다.
“네, 화경에 올랐다고 하니 강하겠지요. 대공자께서도 주의하셔야 할 겁니다.”
“그러했으면 좋겠구나.”
계빈은 차라리 그가 자신보다 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재밌지 않겠는가. 이제껏 그는 정상에만 올라 있었다. 아등바등 따라오는 칠룡들의 성장을 보고 있자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어느 세월에 자신을 따라잡는다는 말인가?
황극린은 다를 것이다.
어쩌면 처음으로 친우가 생길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아버지는 중원 무림에 꽤 친우가 많았던 것 같은데… 그는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인연을 만드는 것도 재밌는 일이리라.
계빈과 계지향이 영제(永濟)현을 떠났다.
곧 섬서성이었다.
황극린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