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179화 (179/316)

179화 질답

뇌불은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 노력했다.

과거에 그가 자주 다녔던 객잔을 방문해 보기도 하고, 인연이 있던 사람을 찾아가기도 했다. 물론, 인연이 있던 이들과 무조건 만났던 건 아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었고, 어디로 갔는지 소식이 끊긴 인연들도 있었다.

지금은 만뇌문에서 총관이 되어 열심히 노동하고 있는 사마명을 발견한 것은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를 만났다고 하더라도 사마명과는 딱히 이렇다 할 추억 따위는 없었다. 뇌불이 알고 있던 건 그녀의 어머니였으니까.

뇌불은 몇 달 정도만 있다가 만뇌문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자꾸만 머릿속을 간질이는 기억들. 생각날 듯 말 듯하면서 뇌불을 괴롭히는 그 기억의 파편들 때문에 뇌불은 정처 없이 과거를 여행했다. 그 과정에서 몇 가지 생각난 게 있다면…….

‘난 친우를 만나려 했었다.’

천하의 뇌불이 친우로 두는 이들은 몇 안 된다.

애초에 무림공적이었던 뇌불과 친우가 될 사이라면 상대의 배포도 알 만했다. 문제는 친우를 만나려고 했던 것은 기억하지만, 그 친우가 누군지 당최 떠오르지 않은 것이다.

누굴까.

정말 친우가 맞긴 맞을까?

친우라는 놈이 배신해서 뇌불이 주화입마에 걸렸다면, 그는 왜 비동에 갇혀 있었을까?

‘으음, 몸을 회복하려고 비동으로 도망쳤던 건가?’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뇌불은 죽으면 죽었지 도망치진 않는다. 그가 무림공적으로 오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적이 있으면 피하지 않고 맞서 싸운다. 그가 죽인 정파인의 수만 하더라도 수백이 넘어간다. 그중에서는 명문거파 출신의 문도들도 꽤 있었다.

‘산서성이라.’

뇌불은 섬서성을 지나 산서성으로 향했다.

딱히 산서성에서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지만, 왜인지 한번 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기에 무슨 문파가 있었지?’

뇌불은 근처 객잔에 들러 정보를 수집했다.

당연히 과거처럼 아무 거지나 붙잡고 패 버린 후 강제로 정보를 뜯어내진 않았다. 이제 그는 황악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뇌불이라는 존재는 지워 버릴 것이다. 지금 기억을 되찾으려 하는 것도 뇌불로 살아가기 위함은 아니었다. 모든 건 황극린과 문도들을 위해서였다. 지금도 그는 중원 각지에 숨겨 뒀던 영약들을 행낭에 가득 담아 두었다.

돌아가면 극린이 놈이 놀랄 수 있도록.

꽤 볼만하리라.

‘산서성만 갔다가 다시 돌아가야겠군.’

대룡상단과의 전쟁은 거의 끝났다고 들었다.

애초에 그 정도도 해결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갈창해도 보내지 않았던가? 물론, 마음 같아서는 직접 대룡상단 놈들을 끝장내고 싶었지만, 과거의 발톱은 감춰 두어야 한다.

“어이, 정보 좀 사고 싶은데.”

“헛, 정보요?

“그래.”

동냥하고 있는 거지.

뇌불은 그가 개방의 방도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결제자 용태린은 운이 좋았다고 봐야 했다. 뇌불이 주먹이 아닌 은자를 꺼내 들었으니까.

“옜다.”

“은자……? 어떤 정보를 구매하시려는 겁니까?”

“뭐 대단한 건 아니다. 밥 먹으면서 산서성에 뭐가 있는지 알려 다오.”

“뭐가 있는지… 말입니까?”

“그래, 유명한 문파는 뭐가 있으며 산서성 출신 고수들이 누군지, 관광 명소가 있는지 뭐 이것저것.”

“아, 그런 것이라면야…….”

용태린이 미소 짓는다.

운이 좋았다. 몇몇 무림인들은 별것 아닌 정보에도 비싼 값을 쳐 주기도 한다. 눈앞의 노인은 오랜만에 잡은 호구였다.

“저기 객잔에 들어가서 이야기하면 되겠구나.”

“옙! 그러시죠.”

황급히 은자를 챙긴 용태린이 객잔으로 안내한다.

‘홍무객잔이라?’

그런데 왜인지 기억 속에 있는 객잔 이름이었다.

여기에 들른 적이 있던가? 하지만 자세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저기서 밥을 먹다 보면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겠지.

뇌불은 홍무객잔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흐릿한 그림자가 그를 따르고 있었다.

* * *

“뇌불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지요.”

“배교와 뇌불이 인연이 있던가?”

“예, 교주님과 뇌불은 친우 사이였다고 했습니다.”

“친우?”

“네.”

황극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배교나 뇌불이나 둘 다 무림공적이다. 물론, 배교는 멸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뇌불도 지금 그러하지 않은가? 이해하지 못할 부분은 아니다. 황극린은 여인에게 질문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지금 그는 어디에 있지?”

“먼저 조언 드리자면, 그를 찾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아니, 찾더라도 저희가 알려 줬다고는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황극린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 내고 있었다.

천흉에 대한 의뢰까지 포기했다.

“그는 지금 천화련에 있습니다.”

“천화련?”

“네.”

황극린의 눈썹이 꿈틀한다.

천화련이 왜? 설마 천화련의 무인들이 뇌불을 알아본 건가? 그런데 왜 무림맹에선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지? 만약 뇌불이 잡혔다면 무림맹에서도 난리가 나야 정상이었다. 그는 전대의 대마두였으며… 소림사의 파계승이었으니까.

“그런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그들이 왜 뇌불을 사로잡았다는 걸 알리지 않은 것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저희는 뇌불이 천화련에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상하군.”

황극린의 시선에 거대한 압박감이 어렸다.

배교의 두 남녀는 그 시선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허튼수작을 부리는 거라면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어찌 수작을 부리겠습니까? 이미 황 대협께는 본교의 비밀을 많이 알려 드렸습니다. 오히려 본교의 교주께선 황 대협을 잘 모시라는 명을…….”

“그래서 내게 혼천마공을 준 건가?”

“그건…….”

“난 네놈들이 어딨는지 찾아낼 수 있다.”

그의 말엔 허언이나 거짓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마차에서 나눈 대화로 그녀는 황극린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런 대화가 없더라도 이제껏 무림에서 보인 황극린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저흰 흑살문이나 황실과 대립하고 싶지 않답니다. 거짓을 고하지 않을 거예요.”

흑살문이 황극린의 배후에 거대한 세력이 있다고 유추한 것처럼, 배교 또한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황극린이 혼자서 저리 성장했다는 걸 믿는 게 이상하다. 오늘만 봐도 흑살문의 지부를 제집 드나들 듯 다녀왔지 않은가?

배교는 ‘당장’ 흑살문과의 대립을 피하려고 의뢰자인 황극린을 찾아왔다.

그렇기에 그를 속일 생각은 없었다. 패륜적인 악행을 저질러 무림공적이 되었지만, 배교는 약조는 지키는 문파였다. 물론, 그걸 믿는 이들이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천화련의 무인이 뇌불을 사냥했습니다. 저희는 그걸 정말 우연히 목격할 수 있었고요. 천화련의 그림자는 뇌불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를 사로잡아 그들의 성으로 데려갔을 뿐입니다. 아마 지금도 죽지 않았을 거랍니다.”

“그걸 어떻게 단정할 수 있지?”

“그들의 무공은…….”

여인이 주변을 살핀다.

왜인지 겁에 질린 듯한 모습이다. 누군가 지켜보는 이가 없는지 확인 한 여인이 말을 이어 나간다.

“인간의 피를 이용한답니다.”

“…….”

황극린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애초에 황극린은 과거의 생에서도 천화련과 엮인 적이 없었다. 천화련의 련주를 죽여 달라는 의뢰는 몇 번이나 들어왔지만, 당연히 흑살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니, 흑살문이 제시한 가격을 지불할 사람이 없던 게 문제였지.

그리고 황극린이 창천뇌검을 죽이는 임무를 맡고 흑살문에 버림받아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때도 천화련의 무인들과는 마주한 적이 없었다. 이번 생에서는 만난 적이 있긴 했지만…….

‘그와는 관계없겠지.’

부맹주 만묘신수.

그는 언젠가 천화련에 칼을 빼어 든다. 당연하게도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왜 천화련을 배신하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당시의 황극린은 도망자 신세였기에 그런 정보에는 딱히 큰 관심이 없었으니까.

아무튼.

배교의 말이 사실이라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정말 천화련이 문주를 데리고 있다면…….’

복잡한 상황이었지만, 황극린의 결단은 빨랐다.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내 사람을 건드리는 건 참지 않을 것이다. 만뇌문을 만들며 다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의문이 있군.”

“네, 뭐든 말씀하시지요.”

“뇌불이 어느 정도 수준의 고수인지는 알고 있나?”

“예, 화경에 오른 고수로…….”

“그런 뇌불이 패배한 것도 모자라 납치당했는데, 너희는 그것을 ‘우연히’ 목격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뇌불을 제압한 상대는 더 강하다.

그런 고수가 배교도들이 지켜보는데 그냥 갔다고? 배교와 천화련이 한통속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본교는 천화련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본교에서는 땅을 살피는 술법과 진법을 교차하여 감시망을 만들었는데, 정말 우연히 뇌불이 패배하고 잡혀가는 것을 목격했답니다. 만약 두 고수가 작정하고 주변을 살폈다면… 발각되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제아무리 천화련의 그림자라도 뇌불을 상대한 후에는 지칠 수밖에 없었겠지요. 운이 좋았습니다.”

솔직히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황극린은 다른 것을 묻기로 했다.

“천화련의 무공이 인간의 피를 이용한다는 건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의 의미랍니다. 그들은 인간의 피를 취하여 내력을 보충합니다. 아니, 내력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힘을 얻게 되는 것이죠. 그들은 절대 중원의 영웅 따위가 아니랍니다.”

“배교와 비슷하군.”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배교의 천흉 또한 사망교라는 문파를 만들어 중원을 혼란에 빠트렸다.

그녀는 살아 있는 이들의 생기(生氣)를 흡수하여 점점 더 강해졌다. 인간이 품은 기운은 그 어떠한 명산의 정기보다 더 순수했으니까. 물론, 극한의 순수함은 독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천화련의 본거지에 있다는 건 확실한가?”

“네, 교주께서는 그들의 성에 방문하신 적이 있답니다. 그곳 지하에 인간의 피를 뽑는 목장(牧場)이 있답니다.”

혐오감이 들었다.

천화련.

흑살문.

배교.

그들은 기괴하고 섬뜩한 방법으로 그들의 힘을 키우고 있었다. 천화련은 정파의 탈을 쓰고 배교처럼 행동하고 있었으며, 흑살문은 대놓고 살수들에게 혈고독을 주입한다. 황극린에게 혼천마공을 익히라고 제안한 배교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천흉이 배교에 소속되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차라리 혈마교가 훨씬 낫겠군.’

혈마교는 순수하게 힘을 숭배한다.

강자존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들은 스스로의 힘을 단련하며 정상에 오르려 노력했다. 그가 만났던 혈마교도들은 일견 순수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뇌불을 납치한 이는 누구지? 천화련주인가?”

“아뇨. 천화련주였다면… 그때 진법이 모두 파괴되었을 겁니다.”

천화련에는 천화련주 외에도 뇌불을 능가하는 고수가 있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천화련의 힘이 대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어쩌면 흑살문보다 더 상대하기 힘들 가능성도… 아니, 분명히 그러할 것이다.

그렇지만 황극린은 뇌불을 구할 것이다.

황악은 그의 사부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황극린 자신이 납치됐다고 하더라도 뇌불은 그리 행동했을 것이다.

- 네가 만든 양념장이 먹고 싶었을 뿐이다.

뭐, 그렇게 말하면서 말이다.

황극린은 계획을 수정했다. 본래라면 용성에 소속되는 건 뇌불이나 문도들과 상의한 후 결정해야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뇌불이 납치된 마당에 언제까지고 무림맹과 황실 사이에서 저울질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황극린은 품속의 금패를 매만졌다. 남궁세가에서 준 금패였다.

‘활용할 수 있는 건 모두 활용한다.’

북해빙궁의 일도 남아 있었고, 흑살문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나씩 처리하기엔 황극린의 몸은 하나였다. 그렇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뇌불을 구해 내는 게 가장 중요했다.

“잠시 자도록.”

“네?”

여인이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한다.

동시에.

툭.

배교의 두 남녀의 몸이 축 늘어졌다. 황극린이 두 사람을 기절시켰다.

그리고.

황극린이 작고 붉은 약병을 꺼낸다. 뚜껑을 열자 기묘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이 냄새는 황극린만 기억할 수 있는 냄새였다. 쪼르르, 흘러내린 투명한 액체가 사내의 입으로 들어간다.

“크륵.”

성수신의가 만든 황극린을 위한 추종향(追從香)이다.

그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냄새의 ‘길’을 남길 것이다. 물론 무한히 향을 뿜어내진 않지만… 몇 달은 지속될 것이다. 혹시 몰라 챙겨 오길 잘했다.

황극린이 여인을 어깨에 짊어진다.

당연히 그들에게서 원하는 답을 들었지만, 배교의 간부로 추정되는 여인은 바로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거짓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대충 마차에 여인을 실은 황극린.

그가 마부를 대신하여 마차를 몰기 시작한다.

마차가 출발하자 기절한 줄로만 알았던 여인의 눈이 작게 뜨인다.

‘후후, 전 점혈당하지 않는 몸을 가졌답니다.’

하지만 여인은 모르고 있었다.

청각에 모든 감각을 집중한 황극린.

그가 여인의 눈꺼풀이 뜨이는 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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