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운명
만뇌문의 문주는 뇌불이다.
그는 어디 가서 뒤를 잡히거나 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실력은 황극린이 잘 알고 있었다. 과거의 무위는 회복하지 못했으며, 아직 주화입마를 겪었던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림에서 그를 제압할 수 있는 무인은 한정적이었다.
하지만 배교라면 뇌불을 제압하는 게 가능할까?
뇌불은 분명히 자신의 기억을 찾으러 간다고 했었다. 기억을 되찾으면 과거의 무위를 완전히 회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던가. 어쩌면 뇌불이 주화입마를 겪고 기억을 잃었던 것이 배교의 농간일 가능성도 있다.
황극린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하나, 그의 얼굴은 한없이 냉정했다. 이럴 때일수록 흥분하면 안 된다. 뇌불은 황씨로 자신의 성을 바꾸었다. 그 행동의 속마음이 어떠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위험에 처했다면 황극린은 구해야 했다.
그것이 황극린의 의무였다.
단숨에 목덜미를 제압당한 사내가 컥컥, 소리를 낸다.
그런데도 함께 찾아온 배교도들은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마치 그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말이다.
“쿨럭……! 이야기를 하려면 이걸 놓아주셔야 합니다만…….”
사내는 황극린의 속도에 당황한 것 같았지만, 해야 할 말은 했다.
그 또한 죽음이 크게 두렵지 않은 듯했다. 황극린은 이런 이들과 많이 조우했다. 흑살문에서 살수로서 훈련받은 이들이 이러했다.
황극린은 손에서 힘을 빼고, 다시금 물었다.
“문주는 어딨지?”
“일단 먼저 말씀드리면 본교는 문주를 납치하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아니, 못 했다고 해도 무방하겠군요. 그는 천하의 뇌불이니까요.”
만뇌문의 문주가 뇌불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다행인 점은 그들은 뇌불이 만뇌문의 문주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입니다.”
배교는 알고 있지만, 뇌불을 납치한 이들은 그가 만뇌문주인 것을 모른다?
뇌불은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난다면 만뇌문에 피해가 올 것이라며 문파를 떠나려고도 했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는 순간에도 자신이 만뇌문주인 것을 밝히지 않았으리라. 그리고 위험에 처한 지금도 만뇌문에 도움의 손길을 뻗을 수 없었으리라.
‘미련한 노인네 같으니라고.’
하지만 황극린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를 위해서 용성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물론, 황실에서도 잡음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해결하면 된다. 그리고 아직 상황을 모두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어딨지?”
“하하하, 너무 쉽게 모든 것을 알아내려 하시는군요.”
“뭘 원하나?”
황극린은 화내지 않았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황극린도 내어 줄 것이 있어야 한다.
“흑살문에 내린 의뢰를 거두어 주시지요. 저희는 그런 다음에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천흉에게 내린 의뢰 말인가.”
“예.”
“천흉이 배교의 소속이라는 말이로군.”
“예,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하하.”
사내는 어색하게 웃었다.
흑살문은 한 번 맡은 의뢰는 포기하지 않는다. 뭐, 몇 번 의뢰를 취소한 적이 있지만 흑살문의 의지라기보다는 여러 이해관계가 상충되어 보통 의뢰자가 의뢰를 포기하는 식으로 한다. 흑살문의 전설은 그런 식으로 중원에 이어졌다.
아무리 배교라도 흑살문의 의뢰를 막을 수는 없는 건가?
그렇다면 배교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 추측할 수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흑살문의 추적 자체를 떨쳐 내려 하는 것이다.
천흉의 의뢰냐.
아니면 뇌불을 구하느냐.
황극린의 선택은 빨랐다.
“네 말이 진실이라면 의뢰를 거두도록 하지.”
“듣던 대로 정말 화끈하시군요. 감사합니다.”
“뇌불은 어디에 있지?”
“아직 의뢰가 취소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때 모든 것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무림에서 꽤 큰 세력과 관련이 있다고 말씀드리죠.”
혈마교?
흑살문?
그것도 아니라면…….
너무 의심 가는 문파가 많았다. 어쩌면 사흑련에 소속된 문파가 아니라 정파의 문파일 수도 있었다. 뇌불은 기억을 되찾기 위해 소림사에 찾아갔을 수도 있다. 그리 미련한 양반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또 모르는 일이었다.
소림사가 뇌불을 납치하고 감금했다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너희 두 사람은 나와 함께 가지.”
“예?”
“넌 상황을 다 알고 있는 모양이니 당분간 나와 함께 다녀 줘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너도.”
“……!”
피풍의를 둘러쓴 이들 중 가장 키가 작은 이의 손목을 낚아챈 황극린이다. 잠깐 새어 나온 목소리에서 여인이라는 걸 알아챘다. 중앙에 서서 대표로 말하던 사내의 냄새보다 이 여인의 단전에서 풍기는 사특한 기운이 더욱 짙었다. 모르긴 몰라도 배교에서 꽤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내가 대표로 나선 것은 아마 여인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것도 있으리라.
어쩌면 이 여인이 천흉이 아닐까?
그런 의심도 들었지만, 황극린은 그것까지는 아니라 판단했다. 전생에서 황극린은 천흉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최소한 이 여인보다는 훨씬 짙은 기운을 풍겼으리라.
사내는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황극린이 사로잡은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입을 열었다.
“예, 그러도록 하지요. 역시 황 대협은 보통이 아니십니다.”
“마차에 타라.”
황극린이 마차에 숨어 있던 마부에게 말한다.
“언사(偃師)현으로 가 주시오.”
“예, 예!”
황극린이 기막을 펼쳐 마부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게 했다. 피풍의를 걸친 두 남녀가 마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들은 마부를 해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도 황극린이 기막을 펼친 것을 눈치챘었다.
“은근히 배려심이 있으시군요. 소문에 의하면 가로막는 건 뭐든 죽여 버리는 화끈한 성격이라 했는데…….”
“너한텐 그럴 수도 있지.”
농담처럼 내뱉은 말도 아니다. 아무렇지 않게 무심한 듯 내뱉은 황극린의 말이다. 그런데 왜인지 사내의 등줄기가 스산해진다. 고작 말로써 자신을 이리 긴장하게 만들 사람이 몇이나 될까? 황극린은 그게 가능하다.
“하하하, 주의하겠습니다.”
알아서 고개를 숙이는 사내.
그리고 그 옆의 여인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기묘한 동행이 시작됐다.
과거 수많은 패륜적 행위로 무림맹의 공적이 되어 몰살된 문파의 후예들과 무림공적 뇌불의 무공을 이어받은 황극린. 그들이 향하는 곳은 언사현의 흑살문 지부였다. 황극린은 흑살문 지부 위치를 대부분 꿰고 있었다.
* * *
침묵이 내려앉은 마차 안.
마차가 흔들려서 쿵쾅대는 소리만 울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사내는 왜인지 여인의 눈치를 보는 듯했고, 황극린은 한숨도 자지 않고 두 사람을 감시했다. 황극린 수준에 오르면 며칠을 자지 않고 참을 수도 있었다. 아니, 칠 주야도 넘게 버틸 수 있다.
“…너무 감시하시는 것 아닙니까?”
여인의 입술이 달싹이는 걸 보았다.
그녀가 배교의 사내에게 전음을 보낸 것 같았다.
“편하게 있어라.”
“그렇게 말씀하셔도 그리 뚫어지도록 바라보시면… 뭐, 됐습니다.”
황극린은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며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황극린이 멸문한 흑사문도 비슷하지 않았던가? 흑사회의 회주였던 냉혈신마가 최상급에 속하는 마공을 손에 넣은 것은… 혈마교의 공녀 중 하나인 ‘마령’이라는 여인 덕분이었다.
물론, 마령이 천흉이 아니라는 사실은 북해에 가기 전에 알아낸 사실이었다.
하지만 방식이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배교 또한 마공의 하나를 황극린에게 전달했다. 그것을 익히면 더 성장할 수 있다며 유혹하려 했었다. 확실히 그들이 건넨 혼천마공엔 그러한 힘이 담겨 있었다. 물론, 힘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무공이긴 했지만 말이다.
“배교는 혈마교의 하위 세력인가?”
이제껏 감정을 딱히 드러내지 않았던 사내였지만, 지금은 약간 격앙된 목소리를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말을 내뱉자마자 사내가 움찔한다.
여인이 전음을 쏟아 낸 것 같았다.
“그걸 믿는 것은 모두 황 대협께서 판단하실 문제기도 하고요.”
여인의 질책이 있었기 때문일까? 목숨을 위협받아도 당황하지 않던 사내가 조금 당황하며 말을 내뱉었다. 아니, 겉으로는 거의 표가 나지 않았지만, 초감각으로 무장된 황극린의 감각으로 그가 당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미묘하게 떨리는 목소리를 통해서 말이다.
황극린이 여인을 바라본다.
“말을 하지 못하나?”
“…….”
“배교도 내게 궁금한 것이 있을 텐데.”
“…어떻게 제가 상급자라는 걸 알아챈 건가요?”
여지껏 침묵하던 여인이 물었다.
이제까지 그게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적당히 둘러댈까, 아니면 진실을 말할까 고민하던 황극린이 결심했다.
“냄새가 다르거든.”
“…….”
여인은 빤히 황극린을 바라보았다.
크게 당황하거나 하는 모습을 보여 주진 않는다.
“배교와 혈마교는 관련이 없는 건가?”
“네, 배교와 혈마교는… 복잡한 관계지요. 쉽게 말하자면 견원지간(犬猿之間)이라 말할 수 있겠네요.”
사내가 흘끔 여인을 바라본다.
그것으로 황극린은 여인이 거짓을 고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질문과 질문 사이의 공백이 길긴 했지만 말이다.
“황 대협께서는 혈마교와 관련이 있습니까?”
“없다.”
“그럼 왜 천흉을 죽이려 하시는 거죠?”
여인의 질문에서 황극린은 천흉과 혈마교가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사실 이 질문이 아니더라도 오늘 대화를 종합해 보면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지흉을 만난 적이 있다. 가만히 두면 천흉은 내게 피해를 줄 것 같더군.”
“그렇군요.”
여인은 납득했는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흉이 배교의 교주인가?”
“아니요.”
이번에는 길게 답하지 않은 여인이었다.
그런가.
뭐, 여인의 말을 모두 믿을 필요는 없긴 했지만… 왜인지 여인이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뇌문은 흑살문과 관련이 있나요?”
“없진 않다.”
“그렇군요.”
황극린은 흑살문에게 의뢰를 맡겼다.
또한, 엄밀히 말하면 황극린은 흑살문의 출신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흑살문의 무공을 거의 알고 있었으니까.
“왜 날 찾아왔지? 혼천마공을 익히게 하기 위해서인가?”
“그건 부가적인 이유지요.”
사내는 자꾸만 여인을 바라본다.
무언가 불만이 있는 듯했지만,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황극린에게 질문했다.
“마지막 질문이에요.”
“말해라.”
“배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지요?”
배교?
딱히 별다른 생각은 없다. 혈마교나 북해빙궁을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사실 그들이 만뇌문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황극린은 굳이 나서 그들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군.”
그러니 황극린은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배교가 뇌불을 납치했을 수도 있다.
“본교는 황 대협과 싸우지 않기를 원한답니다.”
“그런 것 같군.”
저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찾아온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아니, 만뇌문과 싸우기 싫어한다기보다는 흑살문을 무서워하는 걸 수도 있다. 그게 올바른 판단이다.
“배교가 추구하는 게 뭐지?”
문파들은 대부분 목표가 있다.
현에서 가장 큰 세를 구가하는 문파가 된다든지, 만독문처럼 어떤 고수라도 죽일 독(毒)을 만들어 낸다든지, 혈마교처럼 천화련에 복수하고 중원일통을 꿈꾼다든지.
그녀의 대답으로 배교의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
물론,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축복을 내리는 것.”
역시나.
뚱딴지같은 대답이다. 아마 여인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축복이라…….
“이제 도착한 것 같군.”
흑살문의 지부에 도착했다.
황극린은 천흉에 대한 의뢰를 취소할 것이다. 취소 비용이 상당할 터였다. 이미 흑살문은 천흉에 대한 추격을 꽤 진행했을 테니까.
그렇기에 황극린은 말했다.
“너희가 말한 것이 거짓이라면 후회할 것이다.”
“네, 거짓을 고하려고 저희가 위험을 감수하고 여기까지 찾아온 건 아니니까요.”
“들어가지.”
그렇게 기묘하게 결성된 조합이 흑살문의 지부 안으로 들어갔다.
* * *
“의뢰를 취소했다고?”
흑살문의 특급 살수 암귀가 서신을 보고 어이없는 웃음을 짓는다.
오랜만에 직접 나서 표적을 죽일 기회가 왔다. 꽤 재밌는 상대였다. 물론, 흑살문도 이번 의뢰에서 꽤 많은 살수를 잃었지만… 그들의 실전 경험은 미래의 흑살문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암귀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다짜고짜 취소란다.
적어도 반년 뒤라면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을 텐데…….
‘똥개 훈련 시키는 것도 아니고.’
암귀는 혀를 차며 서신을 불태웠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흑살문은 의뢰를 통해서만 움직인다. 그들이 살수 문파로 존립하는 한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있군.’
절대적인 규칙이 있었기에 하지 못했던 일.
‘혈귀 사냥을 해 보도록 할까.’
아직 모든 것이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정황상 확실하다고 암귀는 생각했다.
천기피독신주를 강탈해 간 것은…….
‘황극린.’
그놈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