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접근
황극린이 무림맹을 떠난 뒤.
강호에는 금의위가 찾아오고 황극린이 종남의 적중산 장로를 회의 중에 공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 당연히 강호에선 난리가 났다. 누군가 악의적으로 퍼트린 소문으로 만뇌문의 평판은 바닥을 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소문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게 밝혀진다면?
만뇌문은 무림맹의 의심으로 황실의 품으로 떠날 수도 있었다. 새로이 탄생할 영웅이 강호의 영웅이 아니라 황실의 병사로 전락하게 될 수도 있었다. 강호는 분명 황실을 존중하긴 하지만 그들의 세상과 강호 무림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히 무림맹에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애초에 혈마교의 간자를 색출해 낸다면서 다른 문파를 의심했던 일이 독이 되어 돌아왔다.
“강호 전역에서 항의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총군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무림맹주 팽사혁은 죽을 노릇이었다.
상황을 수습해야 하는 건 자신이었다. 뿔난 강호인들의 마음을 다독여야 하는데, 그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만약 황극린이 정말 황실의 소속이라도 되는 날에는…….
‘생각하기도 싫군.’
총군사를 바라보며 맹주가 묻는다.
“어떻게 하면 되겠소?”
“황 대협을 설득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어떻게 설득해야 하겠소?”
“황 대협이 원하는 걸 주어야겠지요.”
“원하는 것이라…….”
“먼저 적 장로에게 직접 만뇌문을 찾아가 사과하라고 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때로는 물질적인 것보다 진심 어린 사과 한 마디가 더 큰 효과를 낼 때도 있으니까요.”
“그리 하겠소.”
어제 장로 회의에서 내도록 공격당했던 장로 적중산.
그는 만뇌문으로 찾아가서 그에게 빌고 또 빌어야 할 것이다. 황실의 개입으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렇다고 해도 다른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부군사 사마태강이 입을 연다.
“만뇌문을 포기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포기하라? 황실에 만뇌문을 내어 주라는 말이오?”
“제가 보기엔 만뇌문을 붙잡아 둘 방법이 없습니다. 그의 행보로 볼 때, 보통의 정파인들과는 다른 행동성향을 보이고 있지요. 무림맹에 정식으로 입맹을 신청한 것도 대룡상단과의 마찰이 생긴 뒤였지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무림맹에 가입했단 말이오?”
“예,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만뇌문을 버리라고 하는 것이오? 지금은 우리가 만뇌문을 버릴 입장이 아닐 텐데.”
“소림사는 아직 만뇌문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무림맹은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습니다.”
“전 부군사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소림과 만뇌문을 동시에 설득해야 합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총군사께서도 아실 텐데요.”
두 군사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친다.
복잡한 문제였다.
무림맹주로선 최대한 평화롭게 상황을 해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금씩 실타래가 꼬이기 시작한다. 시간이 더 지나면 풀어내기가 불가능해질 정도로 얽히게 될 것이다.
“일단 두 분의 의견은 잘 알겠소. 조금만 더 생각해 보겠소. 일단 종남의 적 장로를 만뇌문에 보내는 것은 찬성하시오, 부군사?”
“예, 억지로 밀어낼 필요는 없겠지요. 일단 반응을 보는 게 중요할 듯합니다.”
그렇게 정리했을 무렵.
무림맹주의 방에 특급의 서신이 도착한다.
“천화련이 움직였다 하오.”
두 군사가 눈을 빛낸다.
천화련은 평소 활동이 거의 없는 문파다.
대부분 문파가 사문의 출신 무인들을 무림맹의 요직에 올리려는 것과 달리 그들은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무림맹에 진출한 유일한 천화련 출신이 부맹주직에 오른 만묘신수 계립이었다. 그렇다고 그는 사문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천화련에서 조금 특별한 무인이라 말할 수 있다.
아무튼, 천화련의 움직였다는 건 무림에서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정사대전을 종결시킨 문파였다. 그들의 작은 움직임은 정파 무림에 큰 영향을 줄 것이 분명했다.
“목적이 무엇입니까?”
“아직 그것까진 알 수 없다는군. 확실한 건… 천화련의 쌍둥이가 움직였다는 것이오.”
그들이 등장한 것은 천화련이 개최한 용봉지회에서였다.
그들은 당당히 나란히 용과 봉의 자리에 올라 용봉지회에서 우승했다. 당시만 해도 역대급의 천재라는 소문이 자자했던 두 사람이다.
‘무슨 목적일까.’
안 그래도 복잡했던 맹주와 군사들의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 * *
황극린은 무림맹이 있는 정주에서 만뇌문도들의 선물을 구매했다. 저마다의 성격을 고려하여 선물을 구매했기에 꽤 시간이 걸렸지만, 은근히 재미가 있었다. 남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하는 것이 즐거움을 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커다란 봇짐에 문도들을 위한 선물을 담은 후, 정주를 떠나갔다.
‘당분간 무림맹이나 소림사에서 시비를 걸진 않을 거다.’
황극린은 금의위의 제안대로 하는 게 좋다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일단 문도들의 의견도 들어 보아야 했다. 그리고 아직 돌아오지 않은 뇌불의 의견도 중요하다. 그는 만뇌문의 문주였으니까.
물론, 문주라는 양반이 여행을 한답시고 문파를 떠나 있던 세월이 있으니 돌아오면 구박을 좀 해야 할 것이다.
‘이제 당장 해결해야 할 건 북해빙궁인가.’
북해빙궁의 궁주는 어이없는 제안을 해 왔다.
당연히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어떤 이에게는 매력적인 제안일 수도 있었다. 북해빙궁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모두 부인이 되는 일이었으니까. 하나, 황극린은 그 제안의 말로를 예상하고 있었다.
결국, 북해빙궁주의 꼭두각시가 될 뿐이다.
북해빙궁의 종마(種馬)는 쓰임이 다하면 버려질 게 분명하다.
‘이것도 용성에 들어가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긴 하다만…….’
용성에 소속된다면 황실에선 만뇌문을 적극적으로 비호할 것이다. 제아무리 북해빙궁이라도 황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건 부담스러운 일일 터. 금의위의 등장 덕에 여러 문제가 동시에 해결됐다.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지만 시간은 벌 수 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상황을 돌파하려면 나는 그 힘을 손에 넣어야 한다.’
북해가 아닌 곳에서 북해빙궁주와 싸워 이길 수준의 힘이 필요하다.
그래야지만 황극린은 흑살문의 문주와도 싸워 볼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화경에 이른 고수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두 사람이다. 황극린은 같은 화경이라도 수준 차이가 얼마나 클 수 있는지 빙백마후를 보고 깨닫게 되었다.
마차에 앉아 빙백마후와 일 합을 겨루면서 얻은 심득을 체화한다.
그렇게 정주로 향한 지 칠 주야가 지났을 때였다.
마차가 섰다. 마부로 고용한 이가 당황한 목소리로 황극린을 불렀다.
“소, 손님……? 끄헉!”
이미 황극린은 기척을 느끼고 마부의 옆에 서 있었다.
“어, 언제 나오셨습니까? 아니, 그것보다…….”
마차의 앞에는 죽립을 푹 눌러쓰고 피풍의를 두른 이들이 있었다.
딱 봐도 수상해 보인다. 거기다 마차를 정면으로 막았으니 무언가 목적이 있다고 추정할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있으시오.”
“예? 예엡……!”
마부는 황극린이 누군지는 몰랐으나 무림인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괜한 일에 휘말려서 목숨을 잃기 싫었다. 강호에선 언제나 목숨을 아껴야 하는 법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명월교(明月敎)에서…….”
“배교인가.”
“…….”
친절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하던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살이 베일 듯한 긴장감이 마차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주변에서 벌레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글쎄.”
황극린은 그들에게서 진에 남겨져 있던 냄새를 맡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굳이 알려 줘야 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정말 배교가 멸문한 게 아니로군.’
혈교, 마교 그리고 배교.
특정한 사상을 가지고 무림을 뒤흔들었던 마도 문파였다. 특히나 배교는 혈교나 마교에서도 혐오할 정도로 괴이하고 패륜적인 실험을 자행했던 문파였다. 인간의 혼을 빼내는 술법을 연구하기도 했으며, 인간의 시체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했다. 언제든 인간을 터트릴 수 있는 혈고독도 배교의 산물이었으니… 무림에 참으로 많은 악의를 남겼다고 할 수 있었다.
황극린은 배교가 멸문하지 않았다면 언젠가 자신을 찾아오리라 예상했다.
그렇기에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뭐… 구유섭신귀혼진(九幽攝身鬼魂陣)을 보셨으니 저희가 찾아오리라는 것도 예상할 수 있으셨겠지요.”
“그렇다고 해 두지. 찾아온 용건은?”
“본래 청성산의 하부는 저희의 것이었습니다. 흑사회는 저희에게 그 장소를 빌려 사용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다시 돌려받고 싶은 건가?”
“솔직히 그러면 좋겠습니다만… 그럴 생각이 없으시지요?”
“그렇지.”
“그럼 다른 제안을 하겠습니다.”
사내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황극린에게 던졌다.
제목이 없는 서책이다.
“북해빙궁주와 맞설 힘을 드리겠습니다.”
“무공서인가?”
황극린이 지체하지 않고 서책을 펼쳐 읽는다.
사내는 그런 황극린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그라면 이것의 힘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욕망을 품게 될 것이다. 무인이란 족속들은 모두 똑같다. 아니, 인간이 그러하다. 더 강한 힘을 손에 쥘 수 있다면 어떠한 악행도 서슴지 않고 벌이게 된다.
특히 황극린처럼 위험에 처한 인간이라면 더더욱.
배교는 북해빙궁주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황극린이 그녀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도 말이다.
“마공이로군.”
“혹, 황 대협께서도 마공에 대하여 선입견을 가지고 계신 겁니까?”
“선입견?”
“예, 마공이면 무조건 나쁘고, 정종의 무공이라면 옳은 무공이라 생각하시는지 묻는 겁니다.”
“차이가 있을 뿐, 뭐가 옳다고는 할 수 없지.”
“역시 경지에 이른 무인의 안목이로군요. 맞습니다. 마공은 절대적으로 나쁜 게 아닙니다. 정종 무공에 비해서 조금 더 패도적인 방식으로 내력을 다루는 방식의 무공을 우리는 흔히 마공(魔功)이라 부르지요. 황 대협께선 그것을 보고 어떤 걸 느끼셨습니까?”
“꽤 신선한 무공이로군.”
“예, 맞습니다. 평범한 방식으로는 북해빙궁의 마후를 처단할 수 없을 겁니다. 황 대협은 힘을 원하시지 않습니까? 마후의 힘에 굴복하기 싫으시지요? 혼천마공(混天魔功)을 익혀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만약 황 대협께서 원하신다면… 비급의 후반부도 내어 주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인가?”
“예.”
사내는 자연스럽게 혼천마공이라는 것을 황극린이 익히도록 유도할 생각인 듯했다.
당연히 황극린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걸 익혀 대성하게 된다면 네놈들이 부리는 강시가 되는 건가?”
“…….”
황극린이 배교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사내였지만, 지금은 피풍의를 꽁꽁 싸매고도 몸이 움찔 떨리는 게 보였다.
‘이 사내는 대체 뭐지?’
아무리 봐도 이상하긴 했다.
흑사회를 공략하여 자신들의 본거지로 삼더니 배교의 절진을 완벽히 개조하여 새로운 진법으로 탄생시켰다. 거기다가 그들이 배교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리고, 혼천마공을 익히면 결국 어떻게 되는지도 알고 있었다.
보통내기가 아니다.
그리고…….
“흑살문.”
“…….”
사내는 마치 비밀을 은밀히 이야기하듯 중얼거린다.
“황 대협이 흑살문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이번 생에서도 황극린이 흑살문과 연을 맺은 적이 있긴 했다. 그것으로 뭐 어쨌단 말인가? 흑살문과 만났다고 협박이라도 하는 건가?
사내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이어 나갔다.
“황 대협은 흑살문이 심어 놓은 사흑련의 끄나풀이 아닙니까?”
당연히 아니었다.
왜 자신을 그렇게 의심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황 대협의 전투 성향은 살수의 그것과 닮아 있었습니다. 또한, 황 대협은 본교의 사람을 의뢰에 넣으셨더군요. 본래 흑살문이라면 받아들이지 않을 의뢰를 말입니다. 보통 관계가 아닌 것쯤은 쉽게 예상할 수 있지요.”
의뢰를 넣었다?
황극린의 눈이 번뜩인다.
‘그게 이렇게 되는 건가?’
황극린은 흑살문을 통해 천흉을 제거해 달라는 의뢰를 넣었다.
천흉과 배교가 관련이 있으리라 의심하긴 했지만, 배교라는 단체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황극린이 207호로 죽었을 때도 활동하지 않았기에 크게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천흉은 배교의 사람이었으며, 천흉이 이끄는 사망교(死亡橋)도 배교의 작품이이었다.
‘다행이로군.’
안 그래도 천흉을 제거해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지금 저희를 죽이시면 크게 후회하실 겁니다.”
황극린이 무슨 행동을 할지 예상하기라도 한 듯이 사내가 말했다.
“내가 흑살문과 관련이 있다고 소문이라도 낼 생각인가?”
“그건 황 대협께 통하지 않을 것이라 잘 알고 있습니다. 금의위가 용성의 자리를 제안했으니… 후후, 그래도 저희는 같은 배를 탄 입장이겠지요. 그게 아닙니다.”
“그럼 내가 왜 후회하지?”
“황 대협께서는 만뇌문의 문주를 찾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순간, 황극린의 신형이 사라졌다.
“컥!”
순식간에 사내의 목덜미를 움켜쥔 황극린.
“자세히 듣고 싶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