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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귀환-176화 (176/316)

176화 대가

군사부.

무림맹주와 함께 군사부의 수장 총군사 제갈서운과 부군사 사마태강이 마주 앉아 있었다. 대화의 중점은 당연히 금의위에 대한 것이었다. 대체 왜 금의위 부지휘사가 직접 무림맹을 찾아왔을까? 무림맹주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황극린을 만나러 왔을까?

사실 총군사과 부군사는 그러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상황을 파악했다.

그들은 무림맹주를 보좌하며 상황마다 적정한 해결법을 내놓는 이들이었다. 무림맹의 의사 결정은 장로들과 회의를 거쳐 이뤄지지만, 위급한 상황일 땐 그런 회의를 거칠 수 없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총군사는 대뜸 입을 열었다.

“맹 내에서 만뇌문의 지위를 격상시켜야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오?”

무림맹주 팽사혁이 묻는다.

“금의위는 만뇌문을 황실의 충직한 수하로 삼을 심산입니다. 만뇌문이 핍박받고 있을 때 찾아온 것을 보면 계산된 행동이었겠지요. 아마 무림맹에서 만뇌문을 의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준비했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시기에 찾아올 수가 없지요.”

“만뇌문을 포섭하려 한다는 말이오?”

“예.”

이제는 무림맹주가 부군사 사마태강을 바라보았다.

총군사와 의견 충돌이 잦은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그와 같은 의견을 내세웠다.

“파천뇌권은 무림맹의 소중한 전력입니다. 사흑련과의 전쟁이 벌어지면 화경에 이른 고수 한 명은 전쟁의 명운을 가를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 정파 무림의 소중한 후기지수들의 피가 덜 흐르겠지요.”

무림맹주가 한숨을 내쉰다.

두 군사는 현명했다. 동시에 같은 답을 내놓으니 맹주로서도 마음이 흔들린다. 회의실에서 보여 줬던 황극린의 태도를 상기하면 화도 난다. 하지만 그 전에, 그를 의심했던 장로들의 탓도 있었다.

만약 무림맹에서 하북팽가를 그런 식으로 몰아갔다면 그는 참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황극린이 어떤 마음으로 행동했을지 이해가 갔다. 무슨 일이든 자신에게 대입해 보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맹주님, 지금 막 황 대협이 방을 나섰습니다.”

“알겠네.”

예상보다 이르다.

두 사람의 대화가 결렬됐다고 보는 편이 좋을까? 아니면 오히려 마음이 잘 통했다고 보아야 할까? 아무래도 팽사혁은 마음이 급해졌다. 만약 만뇌문이 황실 쪽에 붙게 된다면 후대는 무림맹주 팽사혁의 실책 중 하나로 평가할 가능성이 컸다.

무림맹주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맹주라는 직위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그의 이름은 정파 무림이 존속되는 한 영원히 유지된다. 하지만 최소한 무림맹주가 되었으면 업적을 남기고 싶은 게 사람의 욕심이었다.

매일 쏟아지는 사건 사고들에 머리를 싸매면서도 버티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무림맹주 팽사혁이 빠르게 황극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황극린, 네 이놈!”

적 장로를 위시하여 황극린에게 분노한 장로들이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무림맹주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는다.

“이런 머저리들이!”

* * *

적중산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

난생처음 겪어 보는 굴욕이다. 그 누가 중주일검 적중산을 이리 대할 수 있겠는가? 거기다 일격에 내상을 입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치욕스러웠다. 그는 구파일련 중 하나인 대종남파 출신의 무림맹 장로였다.

그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여기지 않았다.

이미 소림이 밝힌 것처럼 만뇌문은 배교와 결탁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런 증거가 있을진대, 고개를 조아리진 못할망정 기습을 가했다.

‘기습이 아니었다면… 내가 그리 쉽게 당했을 리가 없다!’

적중산은 소림의 안평대사를 설득했다.

다른 장로들은 적중산과 달리 황극린의 실력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것으론 장로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무림맹주의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황극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최소한 기습을 가한 것에 대한 사과를 받아야 한다.

그것이 무너진 구파일련의 자존심을 세우는 길이었다.

“감히 회의실에서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느냐!”

황극린이 나오자마자 천지문의 철수비검이 으름장을 놓았다.

금의위? 그들은 멀찍이 서서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황극린과 황실은 그리 깊은 관계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금의위가 만뇌문을 의심하여 찾아왔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럴 가능성이 훨씬 크다.

“내가 뭘 했소?”

“방심한 적 장로를 공격했지 않느냐! 적 장로께서 얼마나 큰 내상을 입은 줄 아느냐!”

“아, 내상을 크게 입었소? 그리 진심을 담은 것은 아니었는데.”

“뭐라……?”

황극린은 적중산을 바라본다.

그는 내상을 입어 창백한 인상이었지만, 두 눈에서 이글거리는 분노를 감출 수는 없었다.

“언젠가 빚을 받으러 갈 테니 기다리고 있으시오.”

“허!”

“황극린 네 이놈!”

기습한 것도 모자라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여 주는 황극린에게 다른 장로들이 분노한다.

그때, 누군가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무림맹주 팽사혁이다.

장로들은 팽사혁이 황극린을 타박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화경에 이른 지 십 년이 훌쩍 넘은 고수였다. 황극린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무림맹주의 앞에서는 함부로 할 수 없으리라.

하나, 장로들의 헛된 착각일 뿐이었다.

“모두 입을 다무시오!”

“……!”

만천무제(萬天武帝) 팽사혁의 분노가 장로들을 향한다.

그 기세에 장로들이 당황하며 뒤로 물러선다. 그가 작정하고 내뿜은 기세는 성난 호랑이의 그것과 비슷했다. 조금만 몸을 움직이면 커다란 발톱과 이빨에 육신이 찢길 것 같았다.

“황 대협, 대화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무림맹주의 말투가 달라졌다.

장로들을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개중에도 현재 무슨 상황인지 예측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적중산과 함께 이곳에 왔지만, 혹시 몰라 거리를 두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시지요.”

“그럼 맹주전으로 가시지요. 장로들께서는 회의실에서 부군사가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도록 하시오.”

“…….”

거역할 수 없는 절대자의 명령.

평소와 전혀 다른 무림맹주의 태도에 장로들은 황극린에 대한 분노를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황극린과 팽사혁이 떠나갔다.

그리고…….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구나.’

부맹주 만묘신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황극린은 다음 날 무림맹을 떠났다.

무림맹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이미 종남파의 적중산이 황극린에게 일격에 쓰러졌다는 소문이 무림맹 전체에 쫙 퍼져 버렸다. 황극린을 옹호하던 이들이 퍼뜨린 것이 분명하리라.

현 상황은 무림맹에게 아주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안 그래도 중원 전체에서 혈마교의 끄나풀을 찾는다며 난리가 났었다. 좋지 않은 말들이 나돌고 있는 상황에서…….

“적 장로, 이걸 어떻게 책임질 생각이시오?”

어제까지만 해도 은근히 적중산의 편을 들었던 점창파의 단천노수 장로가 적중산을 압박한다.

마치 자신은 황극린을 전혀 의심해 본 적이 없다는 듯.

‘이 비열한 구렁이 같은 놈……!’

적중산은 당장이라도 욕을 내뱉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지금 저들은 ‘정치’를 하고 있었다. 과거의 무림맹은 사흑련과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정파의 연합체였지만, 지금은 각 문파의 의견을 내세우기 위한 정치판이라 할 수 있었다. 최소한 장로 회의실에서만큼은 그들은 정치 모사꾼으로 변모했다.

황극린을 압박할 때와 마찬가지로.

“크음, 아직 만뇌문의 혐의가 완전히 벗겨진 것은 아니지 않겠소? 그러니 조금 더 면밀하게 조사하여…….”

그러자 화산파의 무정옥검 장로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한다.

“이미 돌이킬 수 없소. 만뇌문이 황실의 휘하에 들어가게 되면 무림맹이 어찌 조사할 수 있단 말이오?”

무림맹은 황실과의 대립을 최대한 피해 왔었다.

그들과 맞서 봤자 크게 이득은 없었고, 황실도 무림을 존중해 주었다. 만약 황실이 영입을 제안한 만뇌문이 사특한 집단이라는 주장을 한다면, 그것은 황실을 모욕하는 일이 된다.

사실 만뇌문의 장로를 소환하여 장로들이 압박한 것은 만뇌문이 소속된 세력이 없었던 탓도 컸다. 남궁세가나 개방 그리고 제갈세가 등이 그들을 옹호했지만, 그들보다 더 큰 무림맹의 집단이 만뇌문을 압박했었다. 하지만 황실의 개입으로 무림맹 내부의 싸움이 아니게 됐다.

“아무리 그래도 소림의 말을 들어 보아야 하지 않겠소…….”

소림의 안평대사가 불호를 왼다.

그도 복잡한 표정이었다. 소림은 황실과의 공존을 오랜 세월 주장해 온 장본인이었다. 그는 당장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최소한 방장의 답신을 받아야 했다. 그렇기에 그는 미안하다는 듯이 적중산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됐소. 이번 일은 적 장로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오.”

“그걸 왜 내가 책임져야 하오?”

“파천뇌권의 말을 듣지 못했소? 언젠가 적 장로에게 빚을 받겠다고 했지 않소? 혹, 다른 장로들의 이름을 언급했소?”

“허? 그게 대체 무슨 논리…….”

“철수비검 장로의 생각은 어떠시오?”

천산파의 철수비검 장로.

그는 열렬히 적중산의 편에 서서 만뇌문을 의심했었다.

적중산은 어젯밤 그의 처소로 찾아가 차를 마시며 대화까지 나누었다. 최소한 오늘 회의에서 그의 편에 서 줄 사람은 있어야 했다. 철수비검 또한 만뇌문을 혐오했었다. 그러니 최소한의 발언을 해 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강호란 냉정한 곳이다. 특히 정치를 한다는 장로들이 모인 회의실에선 더더욱.

“나도 파천뇌권 대협을 의심했던 것은 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소. 적 장로의 말만 믿고 너무 몰아세운 건 아닌지…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외다. 후우우……!”

“나 장로!”

“중주일검 장로도 인정하시오. 부정한다고 이번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오.”

“제기랄! 모두 다 내 탓으로 돌리겠다 이것이오!”

“어허, 회의실에서 너무 흥분한 것 같소이다.”

“그만 진정하시오. 사태의 해결을 위해 모인 자리지 않소?”

적중산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안 그래도 내상을 입어 무공도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황극린처럼 무력으로라도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고 싶었지만…….

여기서 지금 그는 최약체였다.

명분으로나 힘으로나 말이다.

“그래도 우리의 잘못도 있으니 파천뇌권께 사죄할 방법을 찾을 것이오. 적 장로께서도 잘 한번 생각하시길 바라오. 이번 일을 잘 해결해야 맹주님의 분노도 가라앉을 것이오.”

장로들이 중주일검 장로를 달랜다.

물론, 그 이면에 어떤 감정이 깃들어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적중산이다. 모두가 원망스러웠지만, 그는 여기서 더 흥분한다면 사문에 어떤 피해가 갈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굽혀야 할 때였다. 분통하고 원통스러웠지만… 어제 금의위가 찾아온 이후 황극린은 갑이 되었다.

“크흑…….”

결국, 억울함에 적중산이 깨문 입술 사이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일편단심 수준으로 황극린을 옹호하던 남궁세가의 남궁헌원은 쌤통이라는 듯이 미소를 머금었다.

‘당신의 고난은 여기서 끝이 아닐 것이오.’

황극린은 영리하게도 금의위에 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금 더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무림맹에도 여지를 준 것이다.

물론, 저울질이 과하면 독이 될 것이지만…….

최소한 무림맹에서 그를 의심하고 핍박하던 이들에게 후회라는 감정을 새겨 줄 수는 있으리라.

* * *

“같은 종류일까.”

햇빛이 전혀 들지 않은 폐쇄된 공간. 작은 등불에서 새어 나오는 미약한 빛으로 서신을 읽은 백발의 공자가 서신을 접었다. 그가 읽은 서신은 마치 식물이 생명을 잃어 가듯 노르스름하게 변하더니 썩은 나뭇잎처럼 부서졌다.

“밖에 있느냐.”

“예, 대공자님.”

“련주께서는 대전(大殿)에 계시느냐.”

“예, 그렇습니다.”

“그래.”

백발의 공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만에 그의 흥미를 끄는 존재가 등장했다.

화경에 오른 젊은 무인. 심지어 나이가 자신보다 어리다고 했다. 북해빙궁의 궁주가 혼인하자고 했단다. 참으로 흥미롭지 아니한가? 그는 어떤 선택을 할까? 그리고 소문대로 그의 실력은 사실일까?

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무림에 출두할 때가 되었다. 소림의 방장이 청했으니 천화련도 응해야 한다. 또한, 그가 직접 알아볼 것도 있었다.

10년 동안 무림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천화련의 대공자.

신룡(神龍)이자 신기공자(神技公子)라 불리고 있으며, 전생의 207호가 죽을 즈음에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던 계빈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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