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174화 (174/316)

174화 돌발 행동

무림맹주.

천하칠대고수 중 한 명이자 현 하북팽가주.

과거 정파와 사파가 활발하게 전쟁하던 시절과는 달리 무림맹주라는 직책이 여러 정파 무림 내부의 이해관계가 얽혀 정치적으로 선출된다고 하더라도, 아무나 무림맹주가 될 수는 없었다. 무림맹주 팽사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후기지수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무림 최고의 기재 중 한 명이었으며, 수많은 마두의 목을 베어 왔고, 종국에는 무(武)의 끝이라 일컬어지는 화경의 경지에 발을 디딘 무인이었다. 물론, 화경이라는 경지에 대해서는 무림에서도 아직 설전이 많긴 했다. 무공마다 다르며 상상에 따라 화경의 고수가 그 아래 경지의 고수에게 패배했던 경우가 없었던 게 아니니까.

그렇다고 해도 화경은 무림에서 일컫는 최상승의 경지였으며, 모든 무인이 꿈꾸는 경지이기도 했다. 화경의 고수들은 모두 일문의 대종사가 될 자질을 타고났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최근 화경에 오른 황극린과 무림맹주 팽사혁이 눈을 마주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라 했던가.

맹주는 황극린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걸 단숨에 알아차렸다.

‘거짓이 아니었군.’

이제껏 황극린이 맞붙은 무인들이 대단하긴 했지만, 천하칠대고수에 비하면 몇 수 아래인 고수들이다. 그렇기에 황극린의 명성이 부풀려졌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화경에 이른 고수의 안목과 범인들의 시선은 다를 테니까.

약관의 나이에 화경에 접어들었다는 소리를 듣고 솔직히 무림맹주도 믿지 못했었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있었다.

“파천뇌권 대협.”

무림맹주의 발언에 장로들이 술렁인다. 황극린의 별호는 참으로 많았다. 아직 권룡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었으며, 수라공자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파천뇌권은 가장 마지막에 생긴 별호였지만, 황극린을 인정하는 자들이 그 별호를 입에 올렸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장로들에게 한 것과는 다르게 황극린이 예를 차린다.

그것에 불만을 가진 장로들도 있었지만, 속 좁은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회담이 끝이 난 것이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황극린의 말에 맹주가 부맹주 만묘신수를 바라본다.

그가 전음으로 현 상황을 요약해서 전해 주었다. 완전히 이해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맹주로서 의견을 내자면 비무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러자 적중산 장로가 빠르게 입을 연다.

장로 열 명과 황극린의 비무가 펼쳐진다면 그의 실력을 만천하에 공개할 수 있게 된다. 화경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 아래라는 것이 드러난다면 만뇌문을 압박하기 더 수월해질 것이다.

“이건 수라공자가 제안한 비무입니다, 맹주님. 수라공자는 자신에게 씌워진 불명예를 씻어 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자신이 원하는 게 아니라 황극린이 원해서 해 주는 것이다.

이럴 때도 정치가 생활화된 적중산 장로였다.

그의 말에 무림맹주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비무를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소?”

“예?”

“파천뇌권 대협이 이기면 어떻게 되는 것이오?”

“그건…….”

“만뇌문에 씌워진 의심이 사라지는 것이오?”

“그래도 어느 정도는…….”

“만약 장로들께서 승리한다면 어떻게 되오? 파천뇌권 대협이 사파인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오?”

적중산이 최대한 표정 관리를 했다.

황극린이 그딴 망발을 내뱉었다면 조목조목 반박했을 테지만, 무림맹주에겐 그럴 수가 없었다.

“미리 말씀드렸듯이 이건 수라공자가 원한 겁니다.”

그러자 무림맹주가 황극린을 바라본다.

“황 대협?”

“예.”

“정말 비무를 하시고 싶소?”

“만뇌문을 더 의심하지 않는다면 굳이 비무할 생각은 없습니다.”

“알겠소.”

무림맹주는 지끈거리는 머리의 고통을 참아 냈다.

사실 무림맹에서는 만뇌문의 일만 신경 쓰는 게 아니다. 지금 모인 장로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각자 역할이 있었으며, 무림에선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매일 펼쳐지고 있다. 만뇌문을 의심하는 일에 더 이상 심력을 쏟고 싶지 않았다.

“만뇌문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무림맹 내에는 황 대협을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고, 나도 솔직히 완전히 만뇌문을 믿지 못했소. 그렇기에 계 부맹주를 사천성으로 보냈소이다. 계 부맹주?”

“예.”

“자네가 사천성에서 보고 들은 것을 이곳에서 전부 말해 줄 수 있겠나?”

“예, 그러하겠습니다.”

“황 대협, 적 장로?”

“예.”

“잠시 부맹주의 이야기를 듣고 비무 건에 대하여 대화할 수 있겠소?”

“예, 그게 맹주님의 뜻이시라면야…….”

“알겠습니다.”

적중산과 황극린도 수긍했다.

그렇게 부맹주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저는 사천성 부근에서 만뇌문의 입구로 통하는 절벽을 조사했습니다. 물론, 들어가진 못했지만… 만뇌문으로 유일하게 통하는 출입구를 통해 거수자가 오가지는 않는지를 감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끔 만뇌문의 광견살검 구자광이나 문도들이 판매하는 상품을 들고 나오는 것을 보고, 그 뒤를 따르기도 했습니다.”

“수상한 점은 크게 없었습니다. 판매하는 상품들은 대룡상단이 사용하는 유통망을 이용했으며, 사흑련에게 전달되는 물품들은 없었습니다. 만뇌문에서 매입하는 영약들 또한 밖으로 유통된 적이 없습니다. 모두…….”

그때 적중산이 트집을 잡는다.

“이것도 의심이 되는군요. 만뇌문의 문도는 열을 넘지 못한다고 알고 있는데, 대체 그 많은 영약이 왜 필요한 건가?”

다른 장로들도 그것이 의문이었는지 황극린을 바라본다.

“귀하의 문파가 영약을 쟁여 놓는 것과 같은 이유요.”

“…….”

자꾸만 종남을 들먹거리는 황극린이었으니, 적중산은 분노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종남은 종남산에 기거하는 문도의 수만 천을 헤아리는 거대 문파라네!”

“아, 그렇군요. 몰랐습니다.”

존대를 들었지만, 왜인지 더 화가 난다.

“자네가 이곳에 소환된 이유를 망각하고 있는 모양이군! 의심을 받고…….”

이제는 황극린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적 장로.”

“예?”

“그만하시오. 아직 부맹주의 보고가 끝나지 않았소.”

“예…….”

적중산이 분을 삭이고 자리에 앉는다.

부맹주가 몇 달 동안 사천성에 있으면서 만뇌문의 동태를 살펴본 결과를 보고했다. 요약하자면 대외적인 활동 부분에서 만뇌문이 의심 가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조사 내용입니다.”

“그래서 부맹주의 의견은 어떻소? 만뇌문이 사파와 결탁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오?”

장로 중 하나가 묻는다.

“제 개인적인 판단을 여쭤보시는 것이라면… 예, 그렇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만뇌문이 사파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고 상정하고 조사에 임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오늘 장로들과 대화하는 것을 모두 목격한 부맹주는 확실히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만뇌문은 사흑련과 관계가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는 사파인이어서는 안 된다.’

무림맹의 전력이 역대 최고라 말할 수 있는 만큼.

사파 또한 마찬가지다.

약관의 나이로 화경에 이른 무인이 사파라면?

사파의 계략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키워 낼 수 있는 고수라면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음모론을 믿는 것보다는 상식적으로 판단하는 게 낫다. 만약 황극린이 사파 출신이 맞다면 굳이 정파에서 저리 활동할 필요가 있었을까? 사파 내에서 더 안전하고 완벽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납득할 수 없소!”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적중산이 발끈한다.

최소한 만뇌문이 사파라는 걸 밝히지 못하더라도 황극린의 가면은 벗겨 내야 한다. 이대로 가다간 만뇌문이 구파일련을 위협할 문파로 성장할 가능성도 있었다.

만뇌문은 주제를 파악해야 한다.

무림의 태산북두라 불리는 소림사도 우습게 보는 문파였다. 그들이 더 성장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자리에서 차이를 알려 주지 못한다면, 이제껏 공을 들인 이유가 모두 사라지게 된다.

“그만. 더 이상 언성을 높이면 회의실에서 내보도록 하겠소.”

“…….”

또 맹주에게 가로막힌다.

“만뇌문에 대한 조사를 더 진행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 판단하고 있소. 그러니 여기서 끝을 내도록 합시다. 이의 있으신 분 계시오?”

그때, 그가 나선다.

안평대사(安平大師).

소림의 십팔나한 중 일인이며, 십팔나한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나다 알려진 무승이었다. 그의 눈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소림이 반대하오.”

안평대사는 ‘소림’을 언급했다.

그의 말에 적중산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만뇌문에 설치된 진법을 겪어 보았소. 그곳은 살아 있는 지옥이라 불릴 만큼 고통스러운 곳이었소이다.”

황극린이 안평대사를 바라본다.

확실히 만뇌문의 진은 지옥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소림사는 그것이 배교(拜敎)의 진이라 확신하고 있소.”

“배교!”

이건 장로들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배교라니? 만뇌문이 사용하는 진이 배교의 진이라고?

“설마 만뇌문은 사흑련에 소속된 문파가 아니라… 배교와 관련된!”

황극린은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맞소.”

“뭐라!”

“지금 그게 사실인가!”

“하나, 달라지는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달라지는 게 왜 없는가! 배교 그 잡스러운 종자들의 만행은 중원 전역이 알고 있다네! 오죽하면 혈교나 마교에서도 배척했던 문파였네!”

“맞소. 만뇌문이 배교랑 관련이 있다면 묵과할 수는 없소.”

배교라는 말에 만뇌문을 옹호하던 단목세가나 개방도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꿋꿋하게 제갈세가와 남궁세가는 만뇌문을 옹호한다.

“배교가 남긴 진을 이용했을 수도 있지 않소?”

“진이라는 건 개조해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남궁 장로의 말이 맞습니다.”

회의실이 소란스러워진다. 모두 다 각자의 말을 내뱉고 있었다. 안평대사는 의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황극린을 마주하고 있다. 그 지옥에서 버티고 버텼다. 그로 인해 정신적인 깨달음을 얻어 한 단계 성장했지만, 그렇기에 더 의심이 간다.

만뇌문은 정상적인 문파가 아니다.

분명히 뒤에 무언가가 있다.

“수라공자뿐 아니라 만뇌문도들 전체를 소환해서 조사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식솔들도 철저히 심문하여 만뇌문을 진신을 밝혀 내야 합니다! 그들 또한 사특한 배교에 세뇌당한 이들일 수도 있습니다!”

황극린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참을 때까지 참았다. 무림맹은 잡탕에 불과하다. 정파 무림의 진짜들은 각자의 문파에서 무공을 수련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 무림맹에 더 이상 말로 하는 건 소용이 없다.

“더 이상 만뇌문을 모함하는 건 참을 수 없군.”

“참을 수 없다? 지금 뭘 참을 수 없다는 건가?”

분노한 것인지 기뻐하는 것인지 모를 적중산의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 식솔들도 심문한다고 했나?”

적중산은 속으로 마구 욕을 내뱉었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말을 했는데, 자꾸만 자신한테 딴지를 걸지 않은가? 자신이 가장 앞에서 상황을 주도한 것은 맞았지만, 관심이 쏠리는 게 달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말했으면 어쩔 텐가? 뭐, 나와 싸우기라도 할 텐가?”

그래도 지금 분위기에선 황극린이 무력행사라도 불사할 분위기였다.

오히려 그 편이 황극린의 평판을 깎을 기회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빨라도 너무 빨랐다는 것.

“못 할 것도 없지. 준비해라. 간다.”

“뭐? 뭘 준비하란…….”

연무장에 갈 필요가 있는가?

모욕을 당했으면 참지 않는다. 만약 다른 구파일련이 이런 취급을 받았다면 문파 전체가 길길이 날뛰며 이런 발언을 한 자들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명문거파는 때때로 목숨보다 사문의 명예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하니까.

황극린도 그러기로 했다.

“잠시!”

급박한 상황에 무림맹주 팽사혁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다. 속된 말로 골 때리는 상황에 어떻게 수습할지 고민하고 있던 맹주였다. 그런데 황극린이 저리 무모하게 행동할 줄은 몰랐다.

“컥!”

뇌전을 내뿜으며 달려간 황극린의 일격에 적중산이 벽면에 처박혔다. 다행히도 한 방에 기절하진 않았지만, 회심의 기습에 코와 입에서 연신 검은 피를 토해 내고 있다. 내상을 입은 것이다.

“이노오옴… 쿨럭……!”

“감히!”

“회의실에서 무력을 써!”

다른 장로들이 황극린을 에워싼다.

“좋소. 내게 불만이 있는 자들은 모두 덤비시오.”

만묘신수는 멍하니 황극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어쩌자고? 뭘 하려고 저러는 건가? 회의실에 올 때부터 막 나가긴 했다.

‘마치… 다른 생각이 있는 것처럼……?’

고오오오.

“다들 그만두시오! 맹주의 이름으로 말하겠소!”

팽사혁이 나선다.

천하칠대고수에 오른 팽사혁. 급격하게 부풀어 오른 근육에 옷이 터져 나갈 듯하다.

황극린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어쩌면 장로 전체와 팽사혁을 상대할 수 있음에도.

그렇기에…….

‘정말 뭔가 있는 건가?’

‘화경에 이르렀다는 말이 정녕 사실로군. 방금 움직임은 나조차도 놓쳐 버렸다.’

‘그런데 맹주의 앞에서도 저리 자신만만한 것을 보니…….’

장로들은 싸움도 불사할 생각이었지만, 황극린을 어느 순간 인정하게 되었다.

특히 적중산의 꾐에 넘어가서 황극린의 실력을 의심했던 이들의 마음속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물론, 그렇다고 의심이 사라졌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적중산을 때려눕히고 저리 당당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니 무인으로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장내의 모두가 일촉즉발의 상황에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군사부입니다! 급보입니다!”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무엇이냐!”

“금의위(錦衣衛)가 찾아왔습니다!”

금의위.

무림을 견제하고자 만든 황실의 무력 조직. 황실의 압도적인 재력으로 키운 그들의 힘은 구파일련 문파 한 개의 힘을 가지고 있다 추정하고 있다. 정파 무림 전체로 보면 엄청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그들은 명분과 정통성을 가진 황실의 병사들이었다.

“금의위……? 그들이 왜?”

장로들도 당황한다.

무림맹에 금의위가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부맹주 만묘신수는 저도 모르게 황극린을 바라본다.

그는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이 태평하게 입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설마……!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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