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173화 (173/316)

173화 정해진 답

“지금 대종남파가 사파와 결탁했다고 하는 건가? 자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아나?”

장내의 시선이 황극린에게 쏠려 있었다. 보통의 무인이었다면 무림맹 장로들의 시선에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았으리라. 하지만 황극린은 태평하게 그 시선을 흘려 냈다. 도리어 당황하는 쪽은 장로들이었다.

황극린이 일순간 발현한 살의.

솔직히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살의인지 단순히 내공을 외부로 발현한 것인지 애매하다. 장로 중 몇몇은 저도 모르게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닭살이 돋아 솜털이 바짝 세워져 있었다. 기세만으로 장로들을 긴장하게 할 수준에 올랐다는 건가?

하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황극린의 지금 발언은 위험했다.

구파일련은 정파 무림을 구성하는 거대한 기둥이었다. 오랜 세월 무림에서 명성을 떨쳐 온 그들은 살아 있는 정파 무림의 역사라 해도 무방했다. 구파일련은 모두가 같은 뜻을 품고 행동하진 않았지만,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뭉쳐 위기를 극복했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자존심 강한 무림인들이었다.

설사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사문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려는 무인이었다.

거기다 장소도 문제다.

이곳은 어느 한적한 객잔 따위의 탁상이 아니다.

무림맹.

그것도 장로들이 모인 회의장이었다. 보란 듯이 종남을 의심하니 다른 구파일련 출신의 장로들도 삐딱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몇몇 이들은 보란 듯이 적의를 드러낸다. 특히 종남파의 적중산이 가장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왜 말이 없나? 지금 대종남에게 사파와 결탁한 것이라고 했나?”

“그렇소.”

황극린이 긍정한다.

장내에 분노 어린 탄식이 흘러나온다.

“종남을 의심하는 건 구파일련을 의심하는 것이나 진배없소.”

“그리고 육대세가의 명예도 먹칠하는 것이지 않겠소?”

특히 적중산의 의견에 동조했던 장로들이 말을 보탠다.

그들의 응원에 힘이 났는지 적중산이 황극린에게 다가선다.

“감히! 종남파를! 의심한다고!”

하지만 상대가 잘못됐다.

어지간한 후기지수였다면 장내의 분위기에 몸이 굳어 입도 뻥긋 못 했을 것이다. 살기 위해서 말을 주워 담고 사과했으리라.

“감히 만뇌문을 의심한 건 말이 되고?”

“…뭐, 뭣이!?”

중주일검 적중산이 순간 뒷걸음질 쳤다.

처음 황극린에게서 뿜어졌던 살의는 장내 모두에게 전달됐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로지 적중산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이 압박감은 뭐란 말인가…….’

마치 장문인이나 무림맹주의 분노를 마주했을 때와 비슷하다.

아니, 어떤 부분에선 그들보다 더…….

그때 천지문의 철수비검 장로가 황급히 적중산의 옆에 섰다. 두 사람이 합세해서 황극린의 살의를 막아 내니 겨우 버틸 만했다. 황극린은 딱히 분노하지도 않은, 처음과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간다.

“만뇌문도 엄연한 정파의 문파요. 함부로 의심했다면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소?”

“대종남을 의심한 것과 만뇌문을 의심한 게 같다는 말인가!”

“뭐가 다르오?”

“뭣?”

“종남과 만뇌문이 뭐가 다른지 말해 보시오.”

황극린의 물음에 적중산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속으로는 만뇌문은 개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작은 문파일 뿐이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내뱉지 않은 것은 무림맹에서의 오랜 정치 경험 덕분이었다. 같은 말을 해도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확연히 다른 결과를 낳는다.

여기서 종남파는 겸손해야 한다.

그렇기에 마땅한 답이 당장 떠오르지 않는다. 종남파와 만뇌문이 뭐가 다른가?

“대종남은 도가(道家)에서 시작하여 전진교(全眞敎)의 무학을 온전히 계승한 문파다! 수천 년 동안 무림의 역사와 함께하며 사특한 마두들을 막아 낸 문파…….”

그때 황극린이 말을 끊는다.

“오래되었다는 것 말고는 만뇌문과 다를 것이 없군.”

“뭐라? 지금 무슨 망발을 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겠소? 종남은 만뇌문을 사파의 끄나풀로 의심하고 있소. 그리고 만뇌문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바요.”

“정녕 네놈이……!”

“증거를 대시오. 사파와 결탁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말이오.”

당연히 종남과 같은 대문파라도 사파와 결탁하지 않았다는 증거 따위가 있을 턱이 없었다.

해 보았자 종남의 역사 따위나 줄줄 읊는 방법밖에는 말이다.

그때 나선 게 바로 천산파의 철수비검이었다.

“종남의 결백함은 나 천산파의 철수비검이 보증하오.”

회심의 일격이라는 듯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피워 올린 채로 말을 이어 나간다.

“섬서성에 뿌리를 튼 종남파가 사파와 결탁했다면 모를 수가 없지 않겠소? 거기다 나 철수비검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적 장로를 지켜봐 왔소이다! 그런 내가 보증하겠소.”

철수비검이 반박을 해 보라는 듯이 턱을 까딱거렸다.

황극린은 비웃음을 흘린 채로 대답한다.

“천산파, 아니 철수비검 장로께서 사흑련과 관련이 없다는 증거가 있소?”

“무슨 개소리를!”

“개소리?”

“헙!”

철수비검 장로가 흠칫하며 물러난다. 황극린의 기세가 철수비검에게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제기랄. 이 압박감은 대체 뭐란 말이더냐……!’

철수비검은 하단전의 내력을 잔뜩 끌어 올려 황극린의 그것을 막아 낸다.

“증거를 대라고 하면 만뇌문도 종남파처럼 말할 수밖에 없소. 여기 계신 장로분들께서 옳은 선택을 하시길 바라오.”

역시나 말투가 문제였다.

바짝 엎드려도 모자랄 판국에 저 자신감은 대체 뭐란 말인가? 천하칠대고수 중 일인이 이 자리에 와도 예를 차린다. 그런데 황극린의 저 오만한 태도는 몇몇 장로들의 심기를 거슬렸다.

“나 단천노수도 종남파가 사파와 연관되어 있지 않다는 걸 보증하오.”

“무량수불, 빈도도 보증하겠소이다.”

“화산의 무정옥검(無情玉劍) 본인도 마찬가지요. 우린 같은 섬서성의 문파이니 더 신뢰가 가지 않겠소?”

만뇌문이야 어떻게 되든 간에 구파일련에 속한 이들은 적극적으로 청성을 보증하고 나섰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에게 종남의 명예가 조금 흔들리는 건 오히려 달가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종남의 명예가 곤두박질쳐 추락하는 것은 기를 쓰고 막아 낼 것이다.

그들은 위기에서 하나가 된다.

“그렇군.”

처음에도 그랬지만 황극린의 목소리는 무심했다.

딱히 별 상관 없다는 듯한 태도.

하지만 몇몇 이들은 왜인지 황극린의 목소리에 묘한 감정이 깃들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왠지 모르게 서늘해졌다고 할까.

다른 장로들의 합세에 다시 자신감을 찾은 적중산.

그가 다시 황극린을 압박하려는 순간이었다.

“이제 알겠소? 대종남을 의심하는 게 어떤 의미인…….”

“남궁세가의 남궁헌원이오. 우리 남궁세가는 만뇌문이 결백하다는 것을 보증하겠소.”

바로 욕설이 튀어나올 뻔한 적중산이다.

예전부터 이상하게 남궁세가는 황극린을 감싸고 돌았다. 수상할 정도로 말이다.

‘무림오화 중 하나인 남궁운혜가 황극린과 연인 관계라는 소문이 정말인가?’

만약 혼인할 사이라면 남궁세가가 그렇게 싸고도는 게 이해가 된다.

다만, 문제는 황극린을 옹호하는 문파가 하나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클클, 나 철담협개(鐵膽俠丐)도 만뇌문을 보증하오! 종남이나 만뇌문이랑 다른 점을 모르겠군!”

“단목추휘입니다. 저도 철담협개 장로님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황극린을 보증함으로 인하여 상황이 반전됐다.

과거에는 그들의 보증만으로는 만뇌문을 믿을 수 없다는 게 주된 의견이었다. 하지만 황극린이 종남을 걸고넘어짐으로 상황이 묘해졌다. 만약 그들의 보증으로는 만뇌문에 대한 의심을 거둘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종남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최소한 겉으로는 말이다.

- 어찌하시겠습니까?

- 기다려 봅시다. 적 장로가 묘수를 떠올리겠지요.

모두가 적중산과 황극린을 지켜본다.

어느샌가 두 사람의 대립이 이번 회의의 중점이 되었다.

“후후후후…….”

적중산이 뜬금없이 웃기 시작한다.

“북해빙궁의 궁주가 자네에게 혼인을 제안했다고 들었네.”

북해빙궁!

적중산은 만뇌문에게 사파와 관련이 없다는 증거를 대라고 하지 않고, 만뇌문을 왜 의심하는지 언급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종남과 만뇌문이 근본적으로 무엇이 다른지 구구절절 말할 필요가 없었다.

종남은 북해빙궁주와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거기다.

“자네는 또한 소림의 요구를 철저히 묵살했었지. 자네가 익힌 비급이 천하의 대마두이자 무림공적에 오른 뇌불의 것이라는 걸 부정하지 않겠지?”

“맞소.”

“역시 그렇군. 대체 그 무공은 어떻게 얻은 건가? 내 이런 자리에서 말하기 미안하지만, 자네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고 황씨 가문에 거두어졌다고 들었다네. 당연히 당시에는 무공도 익히지 않았다고 들었다네. 황씨 가문이 무관을 만들어 자네에게 무공을 익히게 해 준 게 열다섯이라 들었네. 내 말이 틀렸나?”

술렁술렁.

황씨 가문과 관련된 이야기는 잘 모르는 이들도 있었다. 특히 황극린 정도의 고수라면 당연히 아주 어릴 때부터 무공을 익혔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열다섯? 지금 열다섯이라고 한 건가? 다섯 살이 아니고?

“맞소.”

“그럼 자네는 무공도 익히지 않고, 대마두 뇌불의 비동을 찾아내서 홀로 무공을 익혔다는 말이 되는데…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말이 안 될 것은 없소.”

“허허허허, 자네의 말은 지금 자네가 비급을 보고서도 육신의 혈도를 모두 깨닫고, 내공을 느끼고, 비급에 적힌 구결만으로 단전을 만들고 무공을 익혔다는 말…….”

“맞소.”

적중산이 흠칫한다. 이렇게 당당하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최소한의 겸손도 없단 말인가? 아니, 그것보다 이게 사실이라고?

여러 정황으로 볼 때, 황극린은 홀로 무공을 익힌 게 아니다.

아무리 천재라도 비급 하나만 덜렁 던져 준 걸로 어떻게 저리 성장할 수 있단 말인가? 무림에서 손꼽히던 고수들은 모두 좋은 사부가 많아 최고의 무공을 익혔다. 물론, 삼류의 무공으로 뜻밖의 수준까지 올라간 이들이 몇 있긴 하지만 황극린은 화경에 올랐다고 하지 않았던가?

“자네의 말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또 증명하라는 것이오?”

“당연하지 않은가? 자네는 존재 자체가 의심되는 구석밖에 없어. 그걸 이 자리에서 증명한다면 만뇌문에 대한 의심은 모두 사라질 것이네! 그러니 당당하다면 한번 증명해 보게!”

“알겠소.”

“정녕 증명할 방법이 있는 것인가?”

비웃음을 지은 채로 묻는 적중산.

황극린이 간단한 해답을 내놓는다.

“검을 뽑으시오.”

“뭐?”

“이 자리에서 실력을 증명해 보이면 되지 않겠소?”

“……!”

적중산이 당황했다.

‘이 미친놈이 회의장에서 비무를 하자는 건가?’

황극린이 무림맹에 오기만 하면 어떻게 그를 요리할지 다 계획해 두었다. 하지만 그와 대화하면 할수록 무언가 상황이 꼬이는 것 같았다. 여기서 적중산이 비무에서 패배한다면? 황극린이 천고의 기재라는 게 증명되는 셈이 아닌가?

당연히 적중산은 싸워 줄 생각이 없었다.

“신성한 장로 회의에서 무력을 쓰겠다는 건가!”

“달리 증명할 방법이 없지 않겠소?”

“잠시만.”

그때 천지문의 철수비검이 나선다.

“황 장로는 이미 화경의 경지에 올랐다고 들었소. 그런데 적 장로와 비무하여 승리한다고 해도 황 장로의 말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오.”

“그럼 어쩌란 것이지?”

이제 황극린의 말투를 지적할 시기는 지났다.

철수비검 장로는 꾸역꾸역 화를 눌러 참고 말을 이어 나간다.

“당신이 정녕 하늘이 내린 무(武)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맹의 장로 열 명을 상대로도 승리할 수 있지 않겠소이까?”

무림맹 장로들은 초절정에서도 최상급에 오른 고수들이었다.

두세 명도 아니고 열 명이라면 아무리 그래도 황극린이 불리하다.

당연히 철수비검은 황극린이 거절할 것이라 생각했다.

무림맹 장로 절반을 홀로 상대하는 걸 어찌 수락할까? 만약 황극린이 패배한다면 그는 이제까지 쌓은 업보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종남을 능멸한 죄와 오만했던 죄를 마주해야 한다.

적중산도 황극린이 그것을 거절하리라 생각했다.

그는 황극린이 화경에 올랐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아니, 화경의 경지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오랫동안 무림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장로들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다.

“좋소.”

황극린의 대답에 장내가 침묵에 휩싸인다.

처음엔 종남파나 구파일련을 얕잡아 보았다면, 이제는 장로들을 얕잡아 보는 황극린이었다. 그냥 지켜보던 장로들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건 당연하다.

물론, 황극린으로선 그들의 태도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먼저 의심한 것은 저들이다. 그런데도 그런 행동이 전혀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장로들이 무림맹에서 의사 결정을 하기 위해 정치를 하고 있다고 해도… 이해해 주기 싫었다.

“시간 없으니 바로 비무장으로 가지요.”

황극린이 먼저 앞서 나갈 때.

회의실의 밖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맹주님께서 입장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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