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171화 (171/316)

171화 살아 있다

북해의 지배자 빙백마후.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빙설난분(氷雪難分)을 막아 낼 줄이야.’

황극린과 손속을 나누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한빙백골소혼장이 만들어 낸 폭풍을 막아 내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빙백마후는 최선을 다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대충 무공을 펼친 건 아니다. 황극린의 실력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려고 했던 것도 있었으며, 욕설을 내뱉은 벌을 주려 했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황극린은 빙백마후의 절기를 막아 냈다.

뇌전의 기운을 품었기에 음기의 무공에 강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빙백마후 수준의 고수에겐 무공의 상성이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펼친 장법은 흔히 무림에서 보이는 장법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빙백마후의 장법은 북해의 폭풍을 담고 있었으며, 얼음의 폭풍은 인간들은 감히 항거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라 할 수 있었다. 자연의 분노 앞에서 인간은 미개한 개미와도 같은 수준이 되어 버린다.

빙백마후의 빙설난분.

그것을 황극린은 막아 냈다. 그가 펼친 한 수가 기억에 남는다.

‘그러고 보니 그런 무공을 사용했던 건방진 놈이 있었던 것 같은데.’

사실 북해에 침입자는 꽤 많았다.

대부분 경계대에 발견되어 처참하게 죽어 나갔지만, 몇몇 이들은 살아서 탈출한 경우도 있다. 물론, 빙백마후까지 나설 일은 거의 없었지만… 20년도 훨씬 지난 과거에 그녀는 뇌전을 사용하는 무인과 마주했던 적이 있었다. 머리를 빡빡 민 땡중이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지.’

빙백마후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한눈에 그의 진가를 깨달았다. 그 누구도 가지지 못했던 음양의 조화를 완벽히 갖춘 육체를 타고난 사내였다. 그 사내의 피를 이어받는다면 어쩌면 북해가 내린 저주가 풀릴 수도 있었다. 북해빙궁도 정상적인 문파로 거듭날 수가 있으리라. 그리고 북해의 폭풍이 중원의 전역을 뒤덮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황극린에게 일 년의 말미를 주었다.

그때까지 선택하지 않으면 만뇌문을 쓸어버린다고 공언했다.

북해의 절대자인 그녀는 한 번 내뱉은 말은 지킨다. 황극린이 만약 끝까지 자존심을 부린다면, 그녀는 직접 나서 그를 잡아 올 것이다. 그의 의지로 오게 된다면 북해의 미래를 꾸려 나가는 데 편하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다 방법은 있다. 이제까지 북해에서 사내를 구해 왔던 방식이 있었으니까. 물론, 황극린에겐 그리 좋은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가 빙백마후의 공격을 막아 냈다고 하더라도, 그 일격에 그는 실력 차이를 깨달았을 것이다. 제정신이 박혀 있다면 옳은 선택을 하겠지.

북해빙궁의 궁도들을 제쳐 놓고 홀로 달려온 빙백마후.

“후우우, 향기롭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향.

단지 몹시도 차가울 뿐인 바람이었지만 빙백마후는 이 바람이 참으로 좋았다. 경공을 펼치며 소모했던 내공이 절로 채워지고 있었다. 북해에서만큼은 빙백마후의 힘은 중원제일이라 해도 무방했다.

그런 그녀의 앞에 누군가 나타난다.

“어떻게 탈출한 것이더냐?”

“…….”

“아니, 탈출한 것이 아니던가?”

만약 도망치려 했다면 빙백마후가 있는 곳으로 오진 않았을 테니까.

빙백마후의 앞에는 그녀의 딸이자 북해빙궁의 부궁주였던 여인이 서 있었다.

“궁주님.”

궁주라는 말에 빙백마후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다시 제자리로 찾아가고 싶습니다.”

과거 북해빙궁을 떠나 새 삶을 찾으려 했던 부궁주.

그녀는 결국 북해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궁주의 명을 따르지 않은 벌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비로소 선택하게 되었다.

“궁주의 자리를 물려받겠습니다.”

빙백마후의 입가에 잔혹하면서도 아름다운 미소가 맺혔다.

* * *

감숙성에서 북해빙궁주와 만나고 온 황극린.

그는 손을 펼쳐 보였다.

“얼얼하군.”

생소한 감각이다.

그녀가 흩뿌린 얼음의 결정들은 아직 황극린의 손에 남아 있었다. 햇볕이 손바닥을 비추고 있음에도 흩어지지 않는다. 마치 의지를 가진 듯이 손을 얼려 버리려 하고 있었다.

물론, 황극린이 혈풍뇌전신공의 기운으로 깨끗이 지워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살아 있다라…….’

단순히 많은 내력을 주입하고, 압축하여, 환을 만드는 것.

그것이 무공의 진리라곤 생각하지 않았건만 빙백마후의 진심 어린 일격은 황극린에게도 꽤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과거의 대마두였던 뇌불과는 같은 무공을 익힌 것도 있었으며, 그는 전성기의 무위를 완전히 회복한 것이 아니었다.

화경에 이른 고수는 자신들만의 무공 체계를 구축한다.

뇌불의 무공이 진리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황극린은 발전 가능성을 보았다. 체질을 개선하여 강해지는 것도 한 방법이었지만, 황극린은 진정한 무공의 성장에도 관심이 있었다.

흑살문의 살수이던 시절.

황극린은 무공의 배움이 늦었다는 이유로 한계에 도달했다.

지금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간을 뛰어넘어 빠르게 성장했다.

빙백마후와의 만남은 황극린에게 계기가 되었다.

더 강해질 길을 발견했다.

황극린은 만뇌문에 도착하자마자 연공실로 들어갔다.

지금 그는 생각했다.

‘살아 있는 뇌전을 만든다.’

뇌불의 심득을 따라가는 것만이 아닌.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때가 되었다.

* * *

빙백마후와 황극린의 만남 후, 석 달이 지났다.

“형아!”

“응?”

“이것 봐! 나도 이제 손에 진짜 뇌전을 담을 수 있게 됐어!”

“정말이더냐?”

“으응!”

백온후가 활짝 웃으며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의 손에는 뇌전이 흐르고 있었다. 황극린이 보여 주었던 파괴의 힘이 깃든 그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뇌전도 퍽 위험해 보였다. 뇌전의 성질은 검에 담는 것이 편하다. 권(拳)이나 장(掌)에 깃들게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

휙휙휙!

동시에 옆에서 검을 강렬하게 휘두르는 소리가 났다. 비청하가 백온후의 성장에 위기감을 느끼고 더 수련에 열중하고 있다. 백온후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사형! 이것 봐요!”

“…….”

백온후가 말을 걸어오자 어쩔 수 없이 검을 내려놓은 비청하.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백온후를 바라본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았지만, 실력은 거의 비등하다. 비청하는 만뇌문의 문도 중 최고가 되어 황극린과 뇌불에게 보답하겠다는 마음으로 수련하고 있었다. 사형제였지만 동시에 경쟁자였다.

그렇기에 비청하는 백씨 형제의 발전이나 제갈수의 성장을 경계했다.

하지만…….

“어때요? 어때요? 정말 예쁘죠?”

콰짓-! 콰지직-!

비청하의 입꼬리가 씰룩인다. 머리로는 그를 경쟁자로 생각하고,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건만…….

“크, 크음! 괜찮구나.”

“그렇죠? 맞죠? 정말 열심히 했어요. 헤헤헤.”

더 칭찬해 달라는 눈빛을 번쩍이는 백온후였다.

비청하는 자연스레 경계심이 녹아내렸다. 고된 수련을 함께하며 문도들 사이에서 정은 쌓이고 또 쌓였다. 그가 아무리 밀어내려 해도 이젠 그럴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

“예쁘구나. 더 열심히 하면 검에 뇌전이 깃드는 것처럼 날카롭게 만들 수도 있을 거다.”

“네! 열심히 할게요! 아, 제갈 사제!”

비청하에게 칭찬을 잔뜩 받은 백온후가 이제는 목표를 바꾸었다.

나이로는 제갈수가 훨씬 위였지만, 사형제 관계라는 게 나이로 정해지는 건 아니었다. 가장 늦게 들어온 제갈수. 백온후가 사형이었고 제갈수가 사제였지만… 백온후는 사형의 위엄을 전혀 보이지 않은 채로 제갈수에게 다가갔다.

제갈수는 수련하는 척하면서 흘끔흘끔 백온후가 펼치는 뇌전을 훔쳐보았었다.

백온후가 먼저 스스럼없이 다가와 주자 제갈수는 헤벌쭉한 얼굴로 외쳤다.

“사형! 멋집니다!”

“정말요? 아직 안 보여 드렸는데……?”

“하하, 얼른 보여 주십시오!”

“응! 알겠어요!”

그렇게 백온후의 성장에 문도들 모두가 기뻐하고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모두 모여라! 장로님께서 오셨다!”

만뇌문의 교관 구자광이 등장했다.

또한, 황극린까지!

모두가 긴장한 얼굴로 정렬했다.

“응?”

“장로님, 머리가……?”

“여, 역시 주공! 멋있습니다!”

삐쭉삐쭉 선 황극린의 머리카락.

머리카락 사이로 마치 백온후가 손바닥에 발현했던 뇌전처럼 미약한 기운이 실시간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너희는 무공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황극린은 대뜸 물었다.

누가 먼저 대답해야 할까? 모두가 고민하는 와중에.

황극린이 상대를 지목했다.

“아, 넵! 무공이란… 심신을 단련하여 완전한 육신에 이르는 수단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자광의 대답.

틀린 게 아니다.

“전 무공이란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도요!”

“무공이란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여 자연과 동화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호흡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공심법을 익히면 호흡으로 단전에 내력을 쌓듯, 무공이란 육신 전체가 호흡하여 천지간의 기운을 온전히 이해하려는 방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백건악, 백온후, 비청하, 제갈수.

네 사람 다 자신들만의 생각을 내놓았다. 만뇌문에서는 무공이란 무엇이라고 정의하고 가르치지 않았다. 모두는 각자 조금씩 다른 생각을 가지며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서로 경쟁하며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황극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틀린 게 아니다.

“오늘은 내가 최근에 느낀 무공에 대하여 너희에게 보여 주고자 한다.”

안목(眼目)이라 한다.

육대세가나 구파일련의 출신들이 강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구파일련에서 자질이 좋은 문도들을 받는 것도 한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기준점. 그들은 보통의 문파 출신들과는 전혀 다른 기준점을 둔다. 주변의 사형제들은 모두 출신 지역에서는 알아주는 기재들이며, 그들의 사부는 중원에서도 명성이 드높은 고수들이다.

육대세가나 구파일련에서 평범하게 생각하는 수준이 보통의 무림에선 고수라 불리며 기재라 칭송받는다.

황극린은 그들의 안목을 높여 줄 것이다.

그가 빙백마후를 보고 깨달은 것과 마찬가지로.

만뇌문의 문도들 또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으리라.

그렇다고 강요할 생각은 없다.

보고 느낀 것을 어떻게 체화(體化)하느냐는 스스로의 문제였다. 그리고 황극린은 문도들을 믿고 있었고, 황극린에게 잘 보이려고 대답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생각을 자신감 있게 말한 부분에서 희망을 보았다.

황극린이 신형을 움직인다.

그의 발이 떼어질 때마다, 손이 휘둘러질 때마다 비가 쏟아질 때만 볼 수 있었던 천둥 번개가 내려친다. 그의 움직임엔 자연의 신비가 담겨 있었다.

권무(拳舞).

그가 펼치는 무공은 초식이 아니라 마치 아름다운 춤사위를 보는 듯했다.

쿠르으응…….

맹수가 사냥감을 발견하고 몸을 웅크린다.

쿠웅-!

사냥감이 움직이기 전에 쏜살처럼 쇄도하여 목줄을 움켜쥔다.

쿠우우우-!

날카로운 송곳니로 목덜미를 꿰뚫어, 사냥감의 생명을 빼앗는다.

그리고.

고오오오오…….

포식한다.

자연의 섭리란 그런 것이다. 맹수는 사냥감을 사냥하여 배를 불린다. 그러자 사냥할 때와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뇌전이 황극린의 전신에 흐르기 시작한다.

포식을 마친 맹수들은 새끼들에게 먹이를 나눠 주며 그들의 성장을 기다린다. 사냥을 끝낸 후에는 살의와 살기가 눈 녹듯이 사라진다.

상대를 찢어 죽일 듯이 터져 나가던 뇌전이 부드럽게 헤엄치듯 황극린의 전신에 맺혀 있었다. 그의 머리는 삐죽삐죽 솟아올랐으며, 그의 의복이 작게 펄럭이고 있었다.

패도적인 뇌전에서.

마치 새끼를 쓰다듬는 듯한 뇌전으로.

황극린의 권무를 본 문도들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다.

백온후가 펼쳐 보였던 미약한 뇌전과는 전혀 달랐다. 그리고 황홀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살아 있다.”

“…네?”

권무를 마친 황극린이 대뜸 내뱉은 말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한다.

무엇이 살아 있다는 말인가?

황극린이 연무장 바닥에 널려 있는 돌멩이를 들어 올렸다.

“어딜 가든 볼 수 있는 자갈에도 기(氣)는 깃들어 있다.”

“기…….”

“우리가 다루려는 뇌전도 마찬가지겠지.”

“…….”

황극린은 원론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뇌전을 살아 움직이듯 움직이려면 어떤 의지를 가지고 내력을 움직여야 하느냐. 혹은, 빙백마후의 빙결 조각을 보고 무슨 심상을 떠올렸느냐는 설명하지 않았다. 황극린은 오히려 그렇게 세세히 설명해 주는 것이 독이 되리라 생각했다.

저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성장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들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답을 내렸느냐 지켜보는 게 꽤 즐거운 일이 되리라.

황극린 자신의 성장보다 더욱.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짓는 문도들을 보며 황극린이 말했다.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숙제다.”

구자광 또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황극린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 어디로 가십니까?”

“무림맹.”

“무림맹이요?”

모두의 표정이 굳는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무림맹에서 황극린에 대하여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북해빙궁과 엮어 만뇌문의 명성을 흠집 내려는 이들이 즐비하다. 과거엔 그들도 무림맹을 정의롭고 공명정대한 집단이라 생각했었지만… 그런 환상을 버린 지 오래다. 그렇다고 사파를 정의롭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세상사가 어떠한지 깨달았을 뿐.

그들이 믿을 것은 오로지 만뇌문의 사형제들이었으며.

교관 구자광과 장로 황극린.

그리고 문주인 뇌불이었다.

“다녀오면 너희만의 답을 들려주길 바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