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삐딱한 시선
빙백마후의 육신에서 흘러나오는 한기에 지부장 제갈축융이 몸을 떨었다.
천외천에 오른 무인의 압박감이 이런 것이란 말인가? 손속을 나눠 보기도 전에 무력한 패배감이 전신을 감싼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겨우 참은 것은 한기를 막아 주는 거대한 존재 덕분이었다.
황극린.
그는 빙백마후의 한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장내를 감싸고 있었다.
화경에 이른 고수의 싸움이 곧 벌어질 것 같았다.
‘제기랄……! 어쩔 수 없다.’
지부장 제갈축융은 겨우 정신을 다잡는다.
이대로 전투가 일어난다면 정사대전이 벌어질 게 뻔하다. 무림맹에서 황극린을 의심하는 세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만뇌문은 정파 문파였다. 북해빙궁의 궁주가 정파의 권역에 와서 황극린을 죽인다면 정사대전이 일어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황극린이 빙백마후의 한기에도 잘 버텨 주고 있었지만, 그래도 황극린이 이길 수 있다고는 생각되질 않았다.
“서, 서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해가 있다면 서로 대화로 풀어 나가는 게 어떨…….”
그 순간.
“후후후……!”
빙백마후가 웃음을 터트렸다.
극도로 분노하면 미소를 짓는 이들이 있다곤 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아니다. 빙백마후의 웃음 속에는 분명히 즐거움의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손주의 재롱을 보는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그래, 그래. 응당 그렇게 나와야지.”
황극린이 만약 소극적으로 나왔다면 오히려 빙궁주는 실망했을 것이다.
그녀는 황극린에게서 북해의 미래를 보았다. 그가 있다면 어쩌면 북해빙궁에서도 구음절맥(九陰絶脈)을 타고난 ‘사내아이’가 태어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북해 최초로 구음절맥을 극복하여 북해의 왕이 될 수 있으리라.
역대 빙궁주들이 이루지 못했던 염원을 이룰 수 있는 존재였다.
왕의 아비가 될 수도 있는 존재가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여 줘서는 안 된다. 아무리 북해빙궁의 마후의 앞이라고 해도 당당해야 한다.
‘뭐지? 왜 욕을 먹고 좋아하는 거야?’
제갈축융이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한다.
북해빙궁주에 대한 정보는 단편적이다. 막강한 무공을 가졌으며, 음기와 한기를 다루는 무공을 익혔다고 했다. 그리고 북해빙궁의 궁주는 북해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발휘할 수 있다. 오늘 빙백마후에 대하여 다른 정보도 추가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여인이다.’
그리고.
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본녀는 참으로 네가 마음에 든다.”
빙백마후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하나, 오늘은 본녀가 누군지 일깨워 줘야 할 필요가 있겠구나.”
제갈축융이 기겁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응당 그렇게 나와야지’라며 미소를 지어 놓고는 이제는 살기를 발하고 있었다. 살갗을 얼려 버리는 냉기와 조화된 살의는 유형화되어 제갈축융의 몸을 굳게 만든다. 늦은 밤 산중에서 호랑이를 만나면 인간은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인간은 초식동물이나 마찬가지다.
“자아, 받아 내 보아라!”
빙백마후가 손바닥을 펼친다.
거대한 폭풍의 중심. 그녀의 손바닥에선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칠흑 같은 고요함이 그녀의 손에 맺혀 있었다.
휘이이잉-!
그리고 돌풍이 일어난다.
손바닥의 주위로 1장 크기의 폭풍이 맺힌다. 그것은 모든 것을 얼려 버릴 듯 냉혹했으며 또한 아름다웠다. 수많은 얼음의 결정들이 폭풍 속에서 휘몰아친다.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졌다.
저토록 거대한 기운을 다루는 데에 전혀 지체됨이 없었다.
‘주, 죽는다!’
제갈축융이 눈을 감는 순간.
눈꺼풀을 뚫는 강렬한 빛줄기가 그의 안구를 강타했다.
콰르으응-!
‘이, 이렇게 죽다니……!’
그렇게 지부장 제갈축융은 정신을 잃었다.
* * *
“허어억!”
하얀 천장이 보인다.
어찌나 땀을 많이 흘렸는지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몸이 짓눌려 있었다. 흠뻑 젖은 이불을 걷어 내고 상체를 들어 올린다. 주위를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다.
“지, 진짜 죽은 건가……?”
그의 목소리를 들은 누군가가 허겁지겁 문을 열었다.
“지부장님!”
“부지부장?”
“괜찮으십니까?”
“자네도… 죽은 건가……?”
“예?”
부지부장의 반응에 지부장 제갈축융의 눈빛이 바뀌었다.
잠시만.
설마 죽지 않은 건가?
‘죽지 않았다는 말은… 빙궁주의 그것을 황 대협이 막아 주셨던 건가? 그때 보았던 그 붉은 빛무리는 역시……!’
황극린은 뇌전의 무공을 다룬다.
뇌전의 기운을 끌어 올려 북해빙궁주의 냉기를 막아 낸 것이다.
‘대체 그걸 어떻게 막았을까?’
동시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생겨난 얼음 폭풍. 그것은 천재지변(天災地變)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어찌 그러한 힘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다. 단지, 그것을 본 순간 죽음을 떠올렸을 뿐이다.
그런데 황극린은 그것을 막아 냈다.
‘내공(內功)의 한계는 어디까지란 말인가?’
제갈축융의 머리에 폭풍과 그에 맞서는 뇌전이 그려진다.
내공이라는 것은 자연이 내려 준 선물이다. 인간은 내공심법을 통해 그 거대한 기운을 단전에 담는다. 심지어 짐승들도 내력을 담아 ‘영물’이라는 존재로 새로이 태어나기도 한다.
‘그들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만약 지부장의 경지가 조금만 높았다면 그 압도적인 경지에 이른 두 사람의 격돌을 두 눈으로 직접 지켜볼 수 있었으리라. 그것이 너무 아쉬웠다. 죽다 살아난 기쁨보다 그것이 더욱 아쉽다. 만약 그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면… 지부장은 더 높은 경지를 바라볼 수도 있었으리라.
물론, 그 거대한 충돌의 근처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수확은 존재했다.
당장이라도 내공을 운기하고 싶었다.
‘아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지부장이 자신의 볼을 힘차게 두어 번 찰싹 때린다.
“그래, 내가 기절하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가?”
지부장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반나절이 지났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
자신이 무사한 것을 보면 황극린 또한 그러리라.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기에 지부장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설마 자신을 지키다가 곤욕을 겪었을지 누가 아는가?
‘만약 나 때문에 황 대협이 중상이라도 입었다면…….’
어찌 그 은혜를 갚을 수 있으리?
애초에 북해빙궁주의 앞에서 그를 살려 준 것만 해도 큰 은혜였다.
“그것이…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다?”
“예, 북해빙궁주와 황 대협 모두 큰 상처 없이 전각 밖으로 나왔습니다.”
“오오, 그것 다행이군! 지금 황 대협은? 어디 계시는가?”
“급히 사천성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무언가 고민이 있으신 얼굴이었습니다.”
“허어!”
지부장의 입에서 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감사 인사도 드리지 못했는데, 벌써 갔다고?
“황 대협께서 따로 전하신 말씀은 없으신가?”
“예, 딱히 없으셨습니다.”
“허허, 내가 알아서 처리하라는 말씀이시군. 그렇군. 알겠어.”
이쯤 되니 부지부장의 얼굴에 궁금증이 깃들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가 오갔던 걸까? 무슨 일이기에 북해빙궁주씩이나 되는 거물이 황극린을 찾아왔을까? 북해빙궁주가 떠날 때 보였던 미소가 뇌리에 박혀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와 같은 그 찬란한 외모에 무림맹의 무인들도 넋이 나갔었다.
그에 반해 황극린은 전혀 즐겁지 않은 듯 보였다.
“북해빙궁주는 황 대협에게 북해로 오라고 했다네.”
“예? 북해로 말입니까?”
“그래, 북해의 여인들을 안을 기회를 준다고 했지. 혼인을 요구했다고나 할까.”
북해빙궁주가 정파의 무인에게 혼인을 요구했다.
이것은 중원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애초에 그게 혼인이라 말할 수 있을까?’
북해빙궁주의 여인들을 모두 품을 기회를 준다 했다.
웬만한 사내라면 그 제안에 홀라당 넘어갔으리라. 강호 무림에서 영웅은 삼처사첩(三妻四妾)을 거느린다고 하는데, 북해빙궁에 간다면 몇 명의 처를 거느리는 건가?
‘물론, 그 뒤의 일도 고민해 봐야겠지.’
문제는 북해빙궁이 여인들만의 문파였다는 점이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대부분 음양의 조화를 갖추어 새로운 생명을 싹틔운다. 북해빙궁의 여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분명히 그녀들을 있게 해 준 아버지가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북해빙궁엔 여인뿐이다. 북해에 간 사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황극린의 선택이 옳았다. 물론, 그처럼 단번에 거절하기란 쉽지 않을 제안이었다.
“무림맹엔 어떻게 보고하시겠습니까?”
“무림맹에선 음흉한 노괴들이 황 대협의 명성을 깎아내리려 혈안이 되어 있다네.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그들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훼방은 놓을 수 있겠지. 자네는 북해빙궁주와 황 대협이 한차례 부딪쳤다는 보고서를 작성하게. 황 대협이 감숙지부를 지켰다고 꼭 언급하고.”
“예,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지부장이 이렇게 노력한다 하더라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도라도 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황 대협의 행동은 칭송받아야 마땅한 행동이지만…….’
강호는 그리 순진하게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각자의 이해득실이 걸려 있는 상황이다. 만약 북해빙궁에서 만뇌문의 황극린을 원한다는 소문이 퍼질 때, 어떤 반응이 나타날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 * *
“허허, 그 소식 들으셨소?”
“만뇌문에 대한 일 말이오?”
“그렇소.”
“당연히 들었지. 빙백마후가 나타나서 황극린에게 혼인을 요구했다고 하지 않았소?”
빙백마후에 대한 악소문은 무림 전역에 퍼지고 있다.
그리고 덩달아 황극린에 대한 은밀한 소문 또한.
“경박하기 그지없군! 그런데 정녕 수라공자가 그 요구를 거절했다고 보시오?”
“그건 또 모르는 일이지 않겠소?”
황극린은 만뇌문의 세력을 키울 당시부터 많은 문파와 부딪쳤다.
첫 시작은 대룡상단이었다. 그들은 만뇌문을 무너뜨리기 위해 대정회의 힘을 빌렸다. 대정회에 속한 문파들은 황극린에게 처참히 패퇴하여 중상을 입었다. 육대세가 중 하나인 모용세가의 무인들 또한 황극린에게 당했다.
그 이후에도 만뇌문은 패도적인 길을 걸었다.
소림사와의 싸움에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으며, 종남파의 장로이자 무림맹 철혈검대 대주의 명성 또한 처참하게 박살 냈다.
쉬쉬하고 있지만, 무림에선 말이 나오고 있었다.
만뇌문이 중원의 기틀을 뒤흔들고 있다고 말이다.
구파일련과 육대세가로 굳은 무림맹의 굳건한 세력 구도가 만뇌문의 존재로 인해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소문을 퍼트리는 세력이 존재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리라.
종남파 출신의 장로 중주일검 적중산은 평소 친분이 있던 원로들을 불러 모아 황극린에 대한 악담을 퍼트렸다. 겉으로는 중원 무림의 안위를 걱정하는 듯 보였지만, 결국은 만뇌문의 명성을 깎아내리는 중이었다.
“빙백마후는 사대마제 중 하나요. 수라공자가 화경의 경지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화경에 오른 지 수십 년이 지난 노괴라 할 수 있지. 정녕 수라공자가 혼인 요구를 거절했다면… 그렇게 쉽게 떠나는 게 말이 되오?”
“허허, 그것도 그러하군.”
“분명히 두 사람이 은밀한 대화를 나눴을 게 분명하오.”
“쯔쯔읏! 천박하기 그지없구려!”
“후우, 그러게나 말이오.”
물론, 무림맹에는 황극린의 악담을 퍼트리는 이들만 있는 건 아니긴 했다.
적극적으로 만뇌문을 옹호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중소문파를 중심으로 한 세력들이 적중산과 같은 입장이라는 게 문제였다.
“만뇌문은 자기네들이 무슨 대단한 명문거파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소.”
중소문파 천지문(天智門) 출신이었지만 무림맹 장로의 자리까지 오른 철수비검(鐵袖飛劍) 장로가 입을 열었다. 천지문은 대정회의 소속이었으며, 중소문파의 모임에서도 발언권이 강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적중산이 모른 척 철수비검에게 물었다.
그러자 철수비검 장로가 분개하듯 말한다.
“북해빙궁과 그러한 대립이 있었다면 당장 무림맹에 와서 맹주께 도움을 청해야 할 것인데,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소. 소림사의 요구도 웬 개가 짖느냐는 듯이 무시하더니 이번에도 똑같지 않소이까?”
“허허, 과격한 말씀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틀린 말은 아니로군요.”
황극린은 감숙성에서 빙궁주와 만난 이후 바로 만뇌문으로 돌아갔다. 무림맹으로 직접 오려면 시간이 빠듯했겠지만, 그것은 만뇌문의 문제였지 철수비검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만뇌문의 행보 하나하나가 아니꼬울 뿐이었다. 이제 막 개파한 문파가 왜 이리 사건 사고를 많이 만든단 말인가?
“장로 회의를 다시 개최하도록 합시다. 만뇌문을 어떻게 처리할지 확실히 결정해야 하오.”
“그럽시다. 남궁세가나 제갈세가가 반대하겠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훼방을 놓을 순 없을 것이오.”
“갑시다!”
적중산을 중심으로 한 장로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만뇌문이 북해빙궁의 궁주를 막아 낸 업적 따위는 그들에게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도 트집을 잡으려면 얼마든 잡을 수 있었다. 황극린이 빙백마후와 격돌해서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는 게 무언가 의심이 되지 않는가?
처음엔 작은 질투로 시작했던 감정.
몇몇 이들은 광적으로 만뇌문을 사파의 끄나풀로 몰려고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명성이 드높아지는 건 아니었지만.
인간은 언제나 옳고 이성적인 판단만을 내리는 게 아니다. 만약 그러했다면 인간사(人間事)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일은 없었으리라.
그리고.
북해빙궁주가 중원에 나타났다는 정보는 사파 무림에도 퍼져 나가고 있었다.
만독문에도.
혈마교에도.
그리고 흑살문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