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169화 (169/316)

169화 해괴한 요구

“벌써 왔다고? 사천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마나 먼데……. 그런데 혼자 왔다고 했느냐?”

“예, 지부장님!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만뇌문의 문주도 나타나지 않을까 했는데, 이번에도 혼자 왔다는 건가? 화경에 이른 고수이니 뭐 그럴 만도 하긴 한데…….”

무림맹 감숙지부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한다.

그는 평소에도 혼잣말을 자주 하며 생각이 많기로 유명한 위인이었다. 걱정이 많다고 할 수도 있으며, 호기심이 많은 인물이기도 했다. 황극린의 등장에 감숙의 지부장인 제갈축융은 두 눈을 반짝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렇게 생각만 하는 것보다 두 세력의 만남을 지켜보는 게 더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얼른 가 보세!”

“예.”

타다다닷!

지부장 제갈축융이 경공을 펼쳐 빙궁도들이 머무는 외곽 전각으로 달려간다. 그의 옆으로 누군가 따라붙는다.

“지부장님!”

“어, 부지부장도 왔구만그래!”

“예! 바로 달려와야지요!”

보통 무림맹 지부의 부지부장은 구파일련이나 육대세가 출신이 많았지만, 그는 흔치 않은 중소문파 출신으로 부지부장까지 오른 위인이었다. 당연히 무위가 뛰어난 부분도 있었지만, 제갈축융과 성정이 비슷하여 지부장의 적극 추천이 있었기에 부지부장에 오른 것이기도 했다.

그 또한 황극린과 북해빙궁의 만남에 관심이 지대했다.

호사가(好事家)라고나 할까?

물론, 두 사람은 무림에 관련된 일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몇십 년 만의 북해빙궁의 등장은 두 사람의 피를 끓어오르게 만드는 일이었다. 과연 무슨 목적으로 만뇌문의 황극린을 찾은 걸까? 북해빙궁에 대하여 퍼진 소문들은 모두 진실일까?

오늘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그렇게 외곽 전각으로 달려가던 두 사람.

왜인지 경공의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헙?”

“뭐지?”

으슬으슬하다. 전각과 가까워질수록 추위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초겨울이긴 했지만, 지부장과 부지부장은 제대로 의복을 갖춰 입었으며 내공의 도움으로 웬만한 추위에는 크게 위축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피부에 전해지는 한기는 두 사람조차 걸음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자연적인 추위가 아니다. 인위적인 차가움이다. 석빙고(石氷庫)에 들어가는 느낌이라 할까?

“북해빙궁도들이 진법을 펼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허! 그럴 수도 있겠군!”

부지부장의 추측에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북해빙궁도들은 추운 지방에서 더 강한 무위를 자랑한다고 한다. 난주 또한 그리 더운 지방은 아니었지만, 북해에 비해서는 한여름이나 다름없는 기온이었다. 만약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 북해빙궁도들이 인위적으로 전각 주위의 기온을 바꿔 버렸을 수도 있다.

지부장 제갈축융은 중원에서 가장 진법을 잘 다룬다는 제갈세가 출신이다.

잘 구축된 진법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진법의 힘이라면 이렇듯 기온을 급격하게 내리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무한히 지속되는 건 아닐 것이다.

황극린이 도착하자마자 진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마 미리 준비해 놓고 있었으리라.

‘조금 더 신경 썼어야 했군.’

아무리 호사가로서 중원 무림의 일에 관심이 많은 지부장이라고 해도 그의 임무는 감숙 무림에서 위험을 차단하는 것이다. 진법을 구축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게 실책이었다.

“안 되겠군. 부지부장.”

“예.”

“자네는 지부의 전투대를 준비시켜 주게.”

부지부장의 발걸음이 뚝 멈춘다.

그는 마치 나라를 잃은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실감 나게 모든 대화를 재구성하여 들려줄 터이니 걱정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그렇게 부지부장은 홱 몸을 돌려 떠나간다.

아무리 북해빙궁과 황극린의 만남이 궁금하다고 하더라도, 지부장의 명령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지부장 혼자만 외곽 전각에 도착했다.

황극린은 가만히 서서 전각의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칠 듯한 냉기가 전각 내부에서 흘러나온다. 누군가 문을 연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전각의 문은 냉기가 만들어 낸 바람에 의해 자동으로 열린 것이다.

황극린을 안내한 감숙지부의 무인은 오들오들 떨며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자네.”

“지, 지부장님을 뵙습니다!”

“그래, 자네는 버티기 힘들 것 같으니 물러나 있게.”

“예, 예엣!”

무인이 물러나고.

황극린이 고개를 돌린다.

“지부장님이신가 보군요. 황극린입니다.”

“파천뇌권 대협의 이야기는 누누이 들었습니다. 이리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전 감숙지부장 제갈축융입니다.”

이미 감숙지부의 지부장이 제갈세가의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뭐, 황극린에게 그건 딱히 중요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만뇌문은 제갈세가와 거의 동맹을 맺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수 그 아이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만뇌문에 폐만 끼치는 것이 아닌가 모르겠군요. 하하.”

허연 입김을 뿜어내며 제갈축융이 말한다.

“예,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제갈수는 기존 만뇌문의 문도였던 백씨 형제나 비청하와 경쟁하듯 수련하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연단을 시작한 만뇌약방의 영약을 취하며, 황극린과 구자광의 지도 아래서 무공을 익히고 있다. 그들이 곧 무림에 모습을 드러낼 일도 얼마 남지 않았다. 황극린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엇다.

“다행이군요! 과거엔 그 아이가 뭘 할 수나 있을지 걱정했는데, 파천뇌권 대협을 만난 이후로 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들어갈까요?”

“예.”

문이 열린 것은 알아서 들어오라는 의미일 것이다.

웬만한 무인은 저 추위에 버티지 못하고 전각 안에 들어갈 수도 없을 것이다.

황극린과 지부장이 안으로 들어간다.

물론, 황극린은 차갑다라는 것만 느끼고 있을 뿐, 추위에 몸을 떨고 있거나 하진 않았다.

‘허허, 역시 화경의 고수인가? 나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데, 정말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로구나.’

옆에서 황극린을 흘끔 바라본 지부장이 혀를 내둘렀다.

역시 화경의 고수란 말인가? 이런 환경에서도 전혀 티를 내지 않는다. 아직 무림에서는 황극린의 무위를 의심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지부장은 그 의심이 헛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위험할 수도 있겠군요.”

“예.”

사실 지부장과 황극린이 생각하는 ‘위험’은 조금 달랐다.

지부장은 북해빙궁도들이 펼친 진법으로 인해 위험성이 높아졌다고 판단했다. 추운 지방에서 북해빙궁도의 무공의 위력이 몇 배는 증폭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상식이었으니까.

하지만 황극린은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기온이 떨어졌기에 북해빙궁도들이 강해지는 게 아니다.

휘리리릭-!

전각의 중심부로 갈수록 바람의 세기가 더욱 강해진다. 지부장은 있는 대로 내공을 끌어 올려 추위에서 육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 감숙지부장과 황극린인가?

폭풍 속에서 전해지는 전음.

“그, 그렇소!”

- 두 사람만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다. 전각을 둘러싼 무인들의 접근은 허락하지 않는다.

“일단… 알겠소! 알겠으니 일단 이 빌어먹을 추위부터 어떻게 좀……!”

- 들어와라.

스르륵.

문이 열린다. 휑한 방 안에서는 열 명의 북해빙궁도들이 한 사람을 경배하듯 부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심에 앉은 여인.

고고하게 쳐든 턱.

만물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심오한 눈동자.

그리고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지독한 냉기(冷氣).

황극린의 예상이 맞았다.

그들은 북해와 같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진법 따위를 펼친 게 아니었다. 북해빙궁도들이 온전한 위력의 무공을 펼치기 위해서 기온을 낮춘 게 아니었다.

‘저 여인의 존재 하나만으로 주변의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다.’

북해빙궁.

북해에서만 강하다면 그들은 강호 무림에서도 주목받지 못했으리라. 북해빙궁은 몇 번이나 중원에 모습을 드러내어 그들의 강인함을 중원에 각인시켰었다. 그 중심에는 북해빙궁의 중심인 빙궁주가 존재했다.

빙천마제(氷天魔帝)라 불리며.

빙천마후(氷天魔后)라 자칭하는 존재.

“제법이로구나.”

그녀의 눈빛에는 항거할 수 없는 냉기가 깃들어 있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주한 눈동자에 서리가 낀다. 또한, 심장이 미칠 듯이 뛰기 시작한다. 극한의 냉기에 생존하기 위해 인간의 육신은 뜨거운 피를 전신으로 퍼트린다.

지부장 제갈축융은 헛바람을 들이켜며, 숨을 멈추었다.

폐가 얼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도 전음을 보낸다.

- 화, 황 대협, 위험합니다. 저, 저 여인은……!

- 제 뒤에 서십시오.

- 예?

- 한결 나아질 겁니다.

아니, 이런 경우가 다 있는가?

제갈축융은 무림맹 지부의 지부장이다. 당연히 천하칠대고수급의 고수들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고수에게서도 이러한 위압감을 느끼진 못했다. 사흑련의 사대마제가 더 강하다는 걸까? 아니면 저 여인이 특출 나게 강한 것일까?

지부장은 불공평함과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 와중에 들려온 황극린의 전음이 아니었다면, 당장 뒤돌아서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황극린의 말에 따라 그의 뒤에 섰다.

그리고.

“아아……!”

폭풍이 몰아치는 북해에서 바람을 막아 주는 거대한 고목의 뒤에 선 기분이 이러할까? 더군다나 고목은 죽은 게 아니다. 생명의 원천인 화기(火氣)를 마구 뿜어내고 있었으며, 얼어붙을 것만 같았던 폐를 따스하게 녹여 준다.

이 거대한 사내의 등에 코를 박아 버리고 싶었다.

“크, 크으음!”

겨우 참아 낸 지부장이 헛기침한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중앙에서 오만한 자세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여인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린다.

“호오, 소궁주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로구나. 대단하구나! 정말 대단해! 사내 중에서 북해의 음기(陰氣)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이는 네가 중원에서 유일할 것이로다! 자랑스러워해도 좋으니.”

“빙궁주십니까?”

이미 확신했지만, 그래도 물어보았다.

“그렇단다. 본녀가 빙천이니라. 그리 서 있지 말고 앉도록 하라.”

황극린은 거절하지 않고 앉는다.

그리고 그 뒤로 지부장이 몸을 숨긴다. 빙천마후는 이제 지부장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황극린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빙천마후, 그녀의 눈동자에서 욕망이 들끓고 있었다.

그녀의 냉기는 버틸 만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서 비치는 괴이한 욕망은… 황극린으로선 왜인지 참아 내기가 힘들었다. 신경에 거슬린다고 할까.

“왜 저를 찾은 겁니까?”

“후후, 예상보다 참을성이 없구나. 본녀가 널 왜 찾았을 것 같으냐?”

빙천의 미소를 본 빙궁도들이 움찔한다.

그녀가 웃는 날은 일 년… 아니,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진귀한 일이었다. 그런데 사내를 혐오하는 북해빙궁주가 사내를 보고 웃고 있었다.

“모르겠습니다만.”

빙천마후의 미소가 짙어진다.

“네 죄는 알고 있느냐?”

“예, 얼지 않는 호수에서 영물을 잡았습니다.”

“그것도 목숨값을 받아야 할 죄는 맞단다. 하나, 본녀는 해웅이 죽은 것에 대해서는 너를 칭찬해 주고 싶구나.”

“…….”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곰 영물의 이름이 해웅인가? 왜 칭찬을 해 준다는 걸까?

‘확실히 소문대로 정신이 오락가락한 여인이로군.’

황극린이 흑살문에 있었던 시절.

특급 살수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적이 있었다. 북해빙궁의 궁주는 외관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아름답다고 하지만, 그 내면은 썩어 문드러졌다고 했다. 오죽하면 그 혈마교의 교주도 북해빙궁주와의 만남을 꺼린다는 소리까지 나왔을까?

“후후후, 궁금한 것이 많은 얼굴이로구나.”

“해웅이라는 영물을 잡은 것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는 말입니까?”

“그렇단다. 본녀는 해웅이 죽은 것으로 전혀 슬프지 않았어. 오히려 통쾌했지. 호호호호!”

“…그럼 왜 여기까지 와서 절 찾은 겁니까?”

“제안하러 왔단다. 네겐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일 테다.”

“무슨 제안입니까?”

북해빙궁주의 미소가 더없이 짙어진다.

왜인지 황극린은 그녀의 미소를 부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껴야만 했다.

“북해의 아이들에게 네 씨를 뿌릴 기회를 주도록 하마.”

“……!”

“…….”

황극린의 등에 숨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부장이 깜짝 놀란다.

이건 또 무슨 미친 소리란 말인가?

“북해는 왕을 기다리고 있었단다. 수천 년 동안 북해의 대지가 내린 저주는 그 누구도 해소하지 못한 저주이자 축복이었지. 하나, 너라면 가능하다. 사내이지만 음기를 타고났으며, 양기 또한 충만하니… 네가 있다면 북해의 저주를 해소할 수 있으리.”

“…….”

“소궁주와 마주한 적이 있었지? 그 아이의 이름은 도린이라 한다. 그 아이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차기 궁주가 될 아이란다. 도린이가 네 아이를 잉태하게 될 것이다. 아니, 도린이만이 아니다. 나찰과 선녀들도 안을 수 있단다. 네가 원한다면 본녀 또한 품을 기회를 주도록 하마!”

“…….”

“혈마교의 교주에게도 허락하지 않은 기회란다. 아니, 세상 어떤 누구에게도 그러한 기회를 주지 않았음이야. 네겐 그럴 가치가 있다! 네 후대 중에서 북해의 왕이 탄생하는 거란다. 진정한 제왕이 탄생할 수 있음이야! 어떠냐? 흥미롭지? 기대되지 않느냐? 호호호호!”

- 저, 저 무슨 헛소리를…….

지부장이 경악하며 황극린에게 전음을 보낸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황극린이 흔들리지 않을까? 북해빙궁의 여인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와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사내라면 흔들릴 수밖에 없다. 특히 빙천마후의 외모는 제갈축융이 이제껏 본 적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설마 황극린이 북해빙궁의 꼬드김에 넘어간다면…….

모두가 황극린의 입을 주목하는 가운데.

그가 입을 열었다.

“미친년이로군.”

지부장은 안도감을 느끼는 동시에.

‘허억!’

빙천마후의 주위로 몰아치는 살을 찢어 버리는 한기에 위기감을 느껴야 했다.

‘서, 설마 여기서 죽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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