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난주
북해빙궁에 들렀던 당시 황극린은 북해빙궁의 소궁주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왜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인지는 지금 생각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곰 영물의 내단을 막 취한 상태로 일어나서 그랬기 때문인지 아니면 소궁주의 얼굴을 보고 감정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엎질러진 물이다.
북해빙궁이 황극린이라는 이름을 찾아 중원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만큼 그들과 마주해야 했다.
황극린은 성수신의에게 찾아갔다.
최소한 북해에서 얻은 만큼의 영약으로 성의를 표해야 한다. 물론, 그들이 원하는 게 그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굳이 북해빙궁과 싸울 필요는 없었다. 안 그래도 부맹주 만묘신수가 만뇌문을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요지성단(瑤池聖丹)은 완성됐습니까?”
요지성단은 처음으로 만뇌문에서 연단을 시작한 영약이다.
본래 만뇌문의 문도 중 성과를 내는 이에게 하사하려고 했지만,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사용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북해빙궁이 내단의 회수를 원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줄 필요는 없었지만, 일단 준비해 둘 필요가 있었다.
“예, 거의 다 됐습니다. 그런데 아직 장로님을 위한 영약은 완성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성수신의는 혈고독과 여러 영약을 배합하여 황극린만의 영약을 만들고 있었다.
황극린은 성수신의가 과거 품었던 꿈인 ‘인간의 체질을 바꾼다’를 실현시킬 인물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완성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성수신의라 하더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급한 것은 아니니까요.”
“예, 최대한 완성도를 올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성수신의의 방에는 거대한 화로가 있었고, 그 화로의 중심부에는 묵철로 만든 자그마한 항아리가 있었다. 마치 대장간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지만, 항아리 속은 중원에서 공수한 온갖 영약들이 뒤섞인 상태였다. 냄새만 맡아도 항아리 속의 내용물이 얼마나 거대한 기운을 품고 있는지 느껴진다.
‘과연 저 영약이 성공할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성수신의는 황극린의 체질 중에서도 ‘회복력’을 늘리려 하고 있었다. 인간은 상처가 나도 알아서 회복한다. 하지만 작은 상처라도 딱지가 앉고 새살이 돋아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법. 하나, 성수신의는 황극린의 그러한 회복력을 극대화하고 싶었다.
‘황 장로님께서 가진 육체의 한계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의 체질 변화는 여기서 끝일 수도 있었다. 지금도 양기와 음기가 조화를 갖추어 무림에서 흔히 말하는 천무지체(天武肢體)라 말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만약 여기서 끝이 아니라면?
황극린의 육신은 과연 어디까지 변화할 것인가?
그리고 그의 체질을 연구하다 보면 다른 이들도 체질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후자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걸 성수신의도 알고 있었다. 지금은 현재에 충실하여 황극린의 육신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에 충실할 뿐.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연단하고 있는 영약이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
“당분간 자리를 비울 수도 있습니다.”
“어딜 가십니까?”
“북해빙궁의 궁도들이 나를 찾아 난주로 왔다고 하더군요.”
“설마……?”
성수신의는 황극린이 어떤 영물의 내단을 취했는지 알고 있었다. 북해빙궁에 있는 얼지 않는 호수 부근에 사는 곰 영물의 내단을 취했다고 했다. 북해빙궁이 키우는 영물일 가능성이 컸다.
“예, 최대한 일을 키우지 않으려 요지성단을 가져가는 겁니다.”
“그렇군요. 크음… 우리 문도들이 취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게 좋겠지요.”
“아직은 그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니 가서 판단해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장로님이 돌아오시기 전까지 최대한 그것을 완성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황극린은 성수신의의 연단실을 나가 구자광과 제자들을 불러 모아 현 상황을 설명해 주고, 잠시 문파를 떠난다고 했다. 만약 아직도 만뇌문의 본거지가 남창이었다면 황극린은 함부로 자리를 비울 수 없었겠지만, 이미 진법의 힘을 소림사의 사대금강과 십팔나한에게 확인었다.
황극린은 참으로 오랜만에 만뇌문을 떠나 강호로 나서게 되었다.
* * *
황극린이 움직였다는 소식은 무림맹의 귀에도 들어갔다.
연일 회의를 이어 가는 무림맹의 장로들. 몇몇 이들은 황극린에게 호의적인 편이었지만, 당연히 만뇌문을 견제하는 세력에 속한 이들도 존재했다.
“황극린이 난주로 떠났다고 하더구려.”
“들었소이다. 북해빙궁의 궁도들이 찾아왔다고 하더군.”
두 장로의 대화에 종남파 출신의 장로 중주일검(中州一劍) 적중산이 비릿한 웃음을 띤 채로 입을 열었다.
“만뇌문은 참 신기하군. 몇십 년 동안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던 북해빙궁의 궁도들이 황극린을 찾아 모습을 드러내고 말이야. 북해빙궁과 무언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소?”
“어허, 속단하는 건 금물이오. 지금 무림의 분위기가 뒤숭숭한 것은 알고 있지 않소?”
그의 말에 반박하는 건 단목세가 출신의 장로 단목추휘였다.
“왜 무림의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고 생각하시오? 다 혈마교의 잔당들이 강호에 쥐새끼처럼 숨어 들어온 것이 드러났기에 그렇소. 만뇌문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문파인 것은 여기 있는 대부분이 공감하는 부분 아니겠소?”
“중주일검 장로의 말이 맞소.”
“약관의 나이에 화경? 그리고 그는 그 사악한 대마두 뇌불의 진전을 이어받았소.”
“잔혹한 손속도 정파인이라고 볼 수 없지.”
종남파의 장로 적중산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 때문에 종남의 명성에 금이 갔다. 황극린은 종남의 장로이자 철혈검대의 대주인 청명쾌검의 비리를 밝히고, 수많은 백성이 보는 앞에서 패배를 안겨 주었다.
물론, 그것으로 종남이 휘청거릴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명문거파라 불리는 문파들은 체면을 몹시도 중요하게 여긴다. 심지어는 목숨보다 사문의 체면과 명예를 더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다. 구파일련이나 육대세가가 무림에서 압도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데에는 그러한 의지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중주일검 적중산은 황극린이나 만뇌문이 대가를 치러야 생각하고 있었다.
당장에는 명분이 없었지만, 명분이야 만들면 그만이 아닌가? 거기다 만뇌문은 의심 가는 구석이 너무 많았다. 부맹주인 만묘신수가 자리를 비운 것도 그 탓이 아니던가?
“만뇌문의 황 장로는 어엿한 화경에 이른 고수라오. 다른 문파들처럼 함부로 문파 내부를 수색하고 의심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은 행동이오.”
“맞소. 거기다 파천뇌권(破天雷拳)은 과거 동려대협이라는 별호로 불렸던 만큼 무림에서 이름 높았던 협객이었소. 어찌 잔혹한 손속을 가졌다고 말하시오?”
파천뇌권은 황극린이 화경의 경지에 올라 있다고 밝혀진 이후 새로이 생겨난 별호였다.
대룡상단이 수작을 부려 만들어 낸 수라공자(修羅公子)라는 별호가 있었지만, 정파의 초고수에게 어울리는 별호는 아니라 생각하여 황극린과 만뇌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그를 파천뇌권으로 부르고 있다.
파천뇌권이라는 별호가 언급되자 중주일검 적중산이 혀를 차며 말한다.
“수라공자는 돈황에서 기련노괴와 만났으며, 북해의 경계도 넘어섰소. 대놓고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데 맹에서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무림맹의 위신이 얼마나 떨어지겠소?”
“그것만으로는 만뇌문이 사파와 관련이 있다는 걸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소?”
“중원의 수많은 문파가 맹의 수색에 동참해 주었소. 만뇌문만 의심을 피해 가는 것도 공평한 처사는 아니지 않겠소?”
“이미 부맹주가 갔는데 여기서 뭘 더 하자는 말이오? 설마 철혈검대 대주의 일로 이러는 것이오?”
“어허! 날 뭘로 보고! 설마 사사로운 감정으로 만뇌문을 의심한다는 그런 소리요!”
갑론을박이 펼쳐진다.
무림맹은 하나의 뜻으로 뭉쳤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저마다 다른 의지를 가지고 무림맹의 패권을 놓고 다투고 있었다.
같은 사안이더라도 이렇게 의견이 첨예하고 대립하고 있었다.
무림맹의 장로 중에서도 만뇌문을 옹호하는 자들이 있긴 했다. 남궁세가나 단목세가 그리고 청성파가 그러했다.
하지만 중립을 고수하는 이들은 대부분 적중산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무림맹이 대대적으로 혈마교의 끄나풀을 찾으려 하고 있었지만, 큰 성과를 내지 못한 상황이다. 거기다 북해빙궁이 황극린을 지목하여 만나고 싶다고 한 것을 보면 분명히 무언가 있다.
거기다 만뇌문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과거 만뇌문의 문도들과 비무전을 했던 문파들의 말에 따르면 문도들의 재능도 대단하다고 했다. 그것뿐인가? 만뇌문은 막대한 자금력으로 영초나 영약을 잔뜩 매입하고 있었다. 만뇌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문파가 이상하다는 입장이 대다수였다.
“수라공자가 대단한 고수라는 것은 인정하오. 하지만 화경에 올랐다고 하여 의심받을 행동을 해도 유야무야 넘어간다면, 무림맹은 어떠한 대업도 이뤄 내지 못할 것이오. 일단 감숙지부로 황 장로가 떠났다고 하니 지켜봅시다. 북해빙궁이 무슨 목적으로 수라공자를 만나려고 했는지 들어 보고 판단하면 되지 않겠소?”
적중산의 의견에 대다수의 장로가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 북해빙궁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낸 후에 움직여도 늦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의심 가는 대화가 오간다면 각오해야 할 것이다.’
적중산은 명분이 생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뇌문이 사파와 내통했다는 증거만 있다면 공개적으로 그들을 압박할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만뇌문의 명성은 땅에 처박힐 것이며, 그로 인해 주저앉았던 종남의 명성 또한 과거의 위상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모두가 북해빙궁과 황극린의 만남을 주시하는 가운데.
황극린은 만뇌문을 떠나 난주로 향했다.
* * *
타다다닷!
황극린은 강맹한 체력을 무기 삼아 경공을 펼쳤다. 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달리기만 했다. 그런데도 딱히 지치지 않았다. 말을 탈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화경에 이른 시점부터는 달리는 게 말보다 더 빠르다. 거기다 수차례의 환골탈태를 거쳐 진화한 육신의 체력이 황극린의 최고 강점 중 하나였다.
물론, 화경의 고수도 사람이니만큼 아예 지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천성에서 난주까지 달려가는 것은 황극린으로서도 그리 쉽지는 않았다. 황극린은 난주에 도착하여 바로 북해빙궁의 궁도들을 만나러 가지 않았다.
그는 외곽 지역에 있는 객잔에서 하루 정도 휴식을 취했다.
북해빙궁이 정확히 어떠한 이유로 황극린을 찾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최대한 체력을 회복한 후 그들을 만나야 했다.
운기조식으로 경공에서 소모한 내력을 완벽히 보충하고, 체력까지 회복한 후 황극린은 난주의 중심가로 향했다. 중심가의 반점이나 객잔에서는 당연히 북해빙궁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워낙에 귀가 밝은 황극린이었기에 정보 수집을 겸하여 그들의 대화를 엿듣기도 했다.
“처음엔 정말 선녀인 줄 알았다니까?”
“그러게 말이야. 그 아름다운 외모에 미소까지 지어 줬다면 정말 황홀했을 것 같아.”
“떽, 북해빙궁은 마공을 익힌 마녀들이라네. 선녀라니?”
“그런데 북해빙궁이 만뇌문의 황 대협을 만나고 싶어 했다지?”
“무슨 일일까?”
“어쩌면…….”
당연히 딱히 도움이 되는 정보는 없었다.
북해빙궁 궁도들의 외모가 대단하다는 것 외에 궁도 중에서 다섯 명이 특이한 관을 머리에 이고 있다고 했다.
그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사실.
북해빙궁의 최고 전력이라 불리는 ‘선녀’들이 다섯이나 왔다는 것이다.
물론, 선녀가 다섯이라 하더라도 황극린에겐 크게 위협적이진 않았다.
이곳은 폭풍이 몰아치며 한기(寒氣) 가득한 북해가 아니다. 그들은 북해에서 싸울 때 가장 강하다.
‘선녀나 나찰보다 더 높은 지위의 궁도가 왔느냐가 관건인데.’
개방의 정보에 따르면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밝히지 않았다고 했었다.
황극린은 정보를 취합하여 북해빙궁의 누가 왔는지 유추할 수밖에 없다. 뭐, 조금 있으면 만날 수 있을 테지만.
무림맹 감숙지부에 도착한 황극린.
입구에서는 총 열 명의 무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북해빙궁도들이 찾아왔으니만큼 경계 인력을 늘린 듯하다. 황극린이 다가가자 그들 중 한 명이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다가온다.
“무슨 용무로 지부를 찾아 주셨습니까? 당분간 외지인은 중한 일이 아니고선 들이지 말라는 지부장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만뇌문의 황극린이오.”
“아, 만뇌문의 황 소협이셨… 어… 파, 파천뇌권?”
“예.”
황극린도 파천뇌권이라는 별호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니,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감숙지부 무인들의 호위 아닌 호위를 받으며 황극린이 지부 안으로 들어간다. 긴장된 분위기. 그들이 향하는 곳은 지부의 외곽이었다. 북해빙궁은 사파인들이다. 손님이라 할 수 있겠지만, 환영할 만한 손님은 아니었다.
그렇게 도착한 허름한 전각.
황극린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타다다닷!
“황 대협, 지부장님이 오시고 계십니다.”
뒤편에선 감숙지부의 지부장과 부지부장이 달려오고 있다. 하지만 황극린은 그들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차갑군.”
전각 내부에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알 수 있었다.
내부에서 새어 나오는 한기가 얼마나 강렬한지 말이다. 한서불침의 육체를 가진 황극린이 차갑다고 느낄 정도라면…….
그 순간.
전각의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