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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귀환-166화 (166/316)

166화 의심 어린 신문

팽여해는 황극린이 사파와 얽혀 있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인정한 사내였다. 사람을 의심하게 되면 한도 끝도 없이 의심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팽여해는 그런 게 싫었다. 작은 흠을 보고 크게 부풀려서 황극린을 사파의 끄나풀이라 몰아가는 것 자체가 싫었다. 무림맹에서 몇몇 이들은 황극린을 이미 의심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팽여해는 황극린의 유도신문에 당황하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뻔했다.

팽여해가 황극린을 의심하지 않았으며 그를 몰아가려 하지 않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의 임무를 완전히 잊은 건 아니었다. 거기다 그는 혼자 온 것도 아니다. 그의 옆에는 부맹주인 만묘신수가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만묘신수는 팽여해의 실수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아니, 이게 더 불안하군.’

팽여해가 만묘신수의 눈치를 살핀 후, 변명하려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된 것 굳이 숨길 필요는 없겠군요.”

만묘신수가 입을 열었다.

팽여해는 당연히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부맹주의 말을 가로채면서까지 변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무슨 목적입니까?”

“요즘 맹에서는 좋지 않은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소문 말입니까?”

“예.”

만묘신수가 소매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낸다.

그것에는 이미 혈마교의 끄나풀이라는 게 드러난 고검문을 비롯하여, 의심되는 문파의 목록이 작성되어 있었다. 문서의 끝부분엔 익숙한 이름이 있다. 만뇌문이었다.

만묘신수는 쉴 새 없이 황극린의 표정 변화를 살펴보고 있었다.

동공이 흔들리는지, 숨이 가빠지진 않는지, 손을 탁상 아래로 내렸는지, 다리를 떨고 있진 않은지.

인간이란 감정이 있다.

뜻밖의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신체가 반응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황극린은 무심한 표정으로 문서를 바라볼 뿐이었다. 딱히 반응은 없다.

그럼 둘 중 하나.

정말 만뇌문이 사파와 관련이 없거나.

혹은…….

‘이 상황을 예상했거나.’

이미 혈마교에선 고검문이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며, 무림맹이 눈에 불을 켜고 간자들을 색출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으리라. 황극린이 만약 혈마교의 간자라면 이미 혈마교에서 전언이 내려왔을 것이다.

만묘신수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황극린을 평가하려 했다.

만약 그가 사파와 관련되지 않았음에도 의심한다면, 무림맹은 거대한 전력 중 하나를 잃어버리게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최소한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황극린에게 현 상황을 설명했다.

“만뇌문. 개파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아 대룡상단과의 전쟁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소림사의 사대금강인 해월대사와 십팔나한을 쫓아낼 수준의 진법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만뇌문의 성장이 비상식적이라는 겁니까?”

“솔직히 이해하기 힘든 수준이긴 하지요. 안 그런가?”

만묘신수가 팽여해에게 묻는다.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한 후에 입을 열었다.

“큼큼! 만뇌문의 성장이 빠르다는 건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나, 개인적으로는 황 형께서 사파와 엮여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는가?”

“예, 용봉지회에서 보여 줬던 황 형의 모습은 진정한 사내의 표본이었습니다. 무(武)를 동경하여 용봉지회 예선 중에도 하루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사파인이라면 취하지 못할 태도였겠지요!”

“사파인들은 무공 수련을 게을리한다는 말인가?”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저의 감이 말하고 있습니다. 황 형은 뼛속까지 정파인이라고 말입니다. 황 형의 재능이 대단하다고 하여 배후에 누군가 있다고 의심하는 건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묘신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아이… 바보로군.’

무인 중에서 이런 이들은 은근히 많았다.

사람을 한번 믿으면 끝까지 믿는 성향이다.

당연히 이런 이들은 협객이라 칭송받기도 하지만 대부분 믿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고 최악의 결말을 맞이하곤 했다.

물론, 좋은 점도 존재한다.

이용하려는 이들이 많은 만큼 그런 인간의 곁에는 따르는 사람도 많았다. 의심 없이 신뢰를 주는 인간에겐, 그 신뢰를 보답하려는 사람들이 항시 곁을 지키고 있다. 신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인연에 더해 본신의 능력이 갖춰진다면 강호에서 거대한 획을 긋곤 했다.

하지만.

사람을 잘못 골랐다. 만묘신수가 보기엔 황극린은 맺고 끊음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신뢰를 주었다고 해서 보답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아니다.

중강현으로 오기 전에 무림맹이 파악한 황극린의 행적을 모두 알아보았다.

황씨가문을 나온 뒤, 그가 취했던 행동들은 은혜보다는 원수를 갚는 데 치중했다고 보이고 있었다.

특히.

‘황씨가문이 몰락하는 데 사파 문파 중 하나인 흑랑파나 강서성 주변의 중소 사파 문파들의 힘이 컸다는 사실.’

황극린은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최소한 황극린이 살아온 길을 보면 그러했다. 그는 확실한 이익이 돌아올 때만 움직였다.

그것만으로 황극린이 사파의 끄나풀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었다.

단지, 의구심이 깊어질 뿐.

팽여해는 황극린을 의심하지 않으려 했지만, 부맹주는 달랐다.

만뇌문이 사파와 관련이 있다고 확정하고 그를 몰아세우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의심되는 부분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만뇌문의 성장과 황극린의 행보에는 의심되는 부분이 많은 게 사실이었으니까.

“당연히 그것만으로 만뇌문을 의심하진 않습니다.”

“예, 그러셔야지요.”

황극린의 목소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왜인지 서늘함이 느껴졌다. 만묘신수는 긴장으로 굳은 손목을 살살 휘저으며 말을 이어 나간다.

“돈황에 들르신 적이 있지요.”

“예.”

“광사탑에도 들렀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황극린은 무표정하게 만묘신수를 바라본다.

무림맹은 아닌 척하지만 무림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정보를 수집한다. 흑살문에도 전속 정보부대가 존재하는 것처럼 무림맹도 그러하다. 솔직히 황극린은 무림맹이 그것까지 알고 있다는 것에 꽤 놀라긴 했다. 돈황은 정파의 권역이 아니다. 상종 못 할 범죄자들이 득실거리는 무법 지대였다.

‘으음, 광사탑에서 그녀를 만났었지.’

황극린은 돈황의 정보 문파인 요희루에서 정보를 구매하여 광사탑을 방문했다. 당시엔 그녀가 천흉이 아닐까 의심되었기에 움직인 것이다. 당연히 무림맹의 입장에서 보기엔 정파의 후기지수가 광사탑에 들른 것은 이해하기 힘들 일일 테다. 거기다…….

‘광사탑주와 함께 있던 것이 혈마교의 공녀라는 것도 알고 있는가?’

그것까지 알고 있다면 아무리 열변을 토하더라도 의심에서 벗어날 순 없었을 것이다.

“예, 들렀습니다.”

“무슨 이유로 광사탑에 방문하신 겁니까?”

“광사탑주를 만나기 위해서 갔습니다.”

만묘신수의 눈이 번뜩였다.

“…기련노괴(祁連老怪)를 말입니까?”

“예.”

“무슨 이유였습니까?”

변명하려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황극린은 전혀 흥분하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제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보고 싶어서 찾아갔습니다.”

“…….”

만묘신수가 입을 다물었다.

사실 그는 황극린의 말에서 빈틈을 찾아내려 했다. 그는 이미 황극린이 의문의 여인과 북해의 경계도 넘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대체 무슨 목적인지, 정파의 후기지수인 황극린이 굳이 왜 사파의 권역에 찾아갔는지 신문하다 보면 황극린 또한 빈틈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황극린의 대답으로…….

‘북해에 대한 질문까지 틀어막아 버렸군.’

만묘신수가 재밌다는 듯이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황극린은 보통내기가 아니다. 무림맹에서 만뇌문을 의심한다고 하는데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 모습도 그러했으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술술 대답하는 것도 그러하다. 마치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모종의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말이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찌 되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광사탑주와는 싸우지 못했습니다. 당시의 저는 기련노괴의 상대가 되지 못하겠더군요.”

“호오, 그 말씀은 지금 황 장로님이시라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그것도 장담할 수 없겠군요. 당시의 안목과 현재의 안목은 다를 테니까요.”

황극린은 부드럽게 대답했으며, 만묘신수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북해빙궁에 대한 것도 물어보았으며 황극린이 굳이 청성산으로 거처를 옮긴 이유도 물어보았다. 역시나 황극린은 막힘없이 모든 질문에 답했다.

‘크하하!’

옆에서 그걸 지켜보는 팽여해는 만면에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황 형은 사파인이 아니지!’

저토록 당당한 목소리와 단호한 표정을 보아라!

뒤가 구리다면 무언가 당황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황 형은 그러지 않는다. 역시 팽여해가 인정한 사내! 무림맹에서 만뇌문을 의심하는 이들이 이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당황할까?

팽여해는 스스로 만족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반대로 부맹주의 의심이 깊어지는 것도 모르는 채 말이다.

‘행동하는 건 마치 노회한 무림 고수로군. 이제 약관이 되었다고 했던가.’

두 번째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거나, 아니면 특정 세력에서 특수한 목적으로 훈련을 받았다면 이해가 된다. 황극린의 행적은 확실히 기이하면서도 의아한 부분이 많았다.

“혹시 중원 각지에서 영초를 사 모으는 이유는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다른 문파들과 같은 이유에서지요.”

“설마 연단(練丹)을 하는 겁니까?”

“예.”

“만뇌문엔 참으로 인재가 많군요. 혈금유나 옥보단이라는 단약도 중원에서 상당히 인기라던데 말입니다.”

“운이 좋았지요.”

황극린의 옆에 앉은 구자광은 취조하듯이 질문 세례만 해 대는 부맹주가 마음에 들지 않아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장로님도 화내지 않는데 자신이 나선다면 폐가 될까 봐 최대한 참고 화를 꾹 눌러 담고 있었다.

그런 구자광의 심기를 헤아리듯 황극린이 말한다.

“이 정도면 무림맹의 의심에 대한 만뇌문의 대답은 모두 했다고 생각합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요즘 강호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아서 말입니다.”

“예, 압니다. 그래서 성실히 답을 드렸지요. 하나, 이제 그만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

만묘신수는 아직 질문할 것이 남아 있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만뇌문 진법의 정체였다. 소림사 방장의 말에 따르면 만뇌문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진법은 배교의 것으로 의심된다고 했다.

대마두라 불렸던 뇌불의 무공.

그리고 과거 혈교나 마교와 더불어서 최악의 문파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배교의 진법.

한 가지만 가지고 있어도 문제가 될 것인데, 만뇌문은 두 개나 가지고 있다.

운이 좋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만묘신수는 여기서 끝내기로 했다.

어차피 질문으로 황극린에게 자백은 받지 못한다. 오늘 대화를 통해 황극린이라는 사내가 어떤 성향인지 파악할 수 있었으니 그걸로 만족하기로 한다. 오늘만 날은 아니지 않던가?

“예, 그러도록 하지요.”

“후우우-!”

팽여해가 다행이라는 듯이 뜨거운 숨을 내쉰다.

깐깐한 부맹주도 의심을 거둔 모양이었다. 평생의 호적수이자 목표로 생각하던 황극린과 드디어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암, 사내끼린 술을 부딪치고 속에 있는 대화를 나눠야지만 진심을 나눌 수 있는 법이지!’

맹주도 그걸 알기에 자신을 보냈으리라 생각했다.

부맹주는 그런 팽여해의 마음을 짐작한 듯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럼 전 먼저 일어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또 뵙도록 하지요.”

만묘신수는 팽여해에게 회포를 풀라는 듯 어깨를 툭 치고 자리를 떠나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광견살검은 혀를 차며 구시렁댔다.

“부맹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여기까지 왔으면 우리 문파를 사파로 확정하고 움직인 것 아닌가?”

“하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구 대협! 아마 황 형의 단호한 대답에 부맹주께서도 의심을 거두셨을 겁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광견살검도 참 성격이 많이 죽었다.

과거였으면 뒤를 생각하지 않고 부맹주고 뭐고 들이박아 버렸으리라. 그리고 팽여해의 말대로 부맹주는 말문이 막혀서 도망친 것이 아니던가? 어떠한 질문에도 망설임 없이 척척 대답하는 황극린을 옆에서 보고 있자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럴 게 아니라, 오랜만에 봤는데 술이라도 한잔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제가 다 내겠습니다!”

“오호, 역시 팽가의 공자라 그런지 배포가 크구만? 크크!”

왠지 죽이 잘 맞는 팽여해와 구자광이다.

두 사람이 황극린을 빤히 바라본다. 여기서 황극린이 거부하면 술자리는 없는 것이었으니까.

왠지 모르게 절박함이 담긴 구자광의 얼굴을 본 황극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거기다 팽여해는 황극린이 꽤 좋게 생각하는 무인이었다. 전생에서는 적이었지만, 이제는 그래도 친우라 말할 수 있는 사이였다. 그와 술자리를 가지며 알아낼 게 많을 것 같기도 했고 말이다.

“오랜만에 한잔하도록 하지.”

“크하하하-! 무공으론 황 형에게 안 되겠지만, 술로는 절 이길 수 없을 겁니다!”

“쯔쯧,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황 장로님은 술로도 천하제일이다.”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을 때, 황극린은 슬쩍 만묘신수가 떠나간 자리를 바라본다.

그가 묻지 않은 게 있다. 부맹주는 만뇌문의 진법에 대한 것은 질문하지 않았다. 마치 비장의 한 수로 남겨 둔 듯이 말이다.

‘이럴 가능성이 없진 않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무림맹이 작정하고 만뇌문을 사파의 끄나풀로 몰면, 아무리 황극린이 항변한다고 하더라도 의심의 눈초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황극린으로선 그들이 그런 무모한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우릴 배척하기만 하는 정파를 고집할 필요는 없으니까.’

황극린은 기존의 정파인들과 사고방식이 다르다.

애초에 그는 살수의 훈련을 받고, 사흑련 중 하나인 흑살문에서 자란 무인이었다. 정파가 오롯한 선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며, 사파가 절대 악(絶對惡)이라 여기진 않았다. 만약 만뇌문을 위협한다면 황극린은 정파의 탈을 버릴 각오 또한 되어 있었다.

그의 목적은 사파 진영의 궤멸 따위가 아니다.

전생에 생겨난 흑살문과의 악연을 정리하고, 만뇌문의 문도들의 안전을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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