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만묘신수
“요즘 무림의 분위기가 뒤숭숭하구먼.”
“그러게나 말일세. 정파인인 척하면서 강호에 숨어 있는 마두 놈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모양이야.”
“정말 정사대전이라도 일어나려나?”
“그래도 정파가 이기지 않으려나? 매번 그래 왔었잖아.”
강호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두런두런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혈마교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그들이 중원을 피로 물들인 건 수십 년 전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랜 세월을 살아온 노인들은 마교나 혈교의 무서움을 익히 알고 있었다.
“정파가 이긴다고 해도 우리 같은 백성들은 개죽음을 당할 뿐이지! 어찌 그리 낙관적으로만 생각하는가?”
중강현에서 칠십 평생을 살아온 육 영감이 말하자 주변인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그들은 눈에 거슬리면 죽인다. 피를 본 무림인들은 풀어놓은 호랑이처럼 위협적이다. 눈을 마주치면 죽는다고 보면 돼!”
“에이, 우리 같은 백성들을 설마 죽이기야…….”
청의를 입은 사내가 말하니 옆에 있는 중년인이 헛기침을 하며 조용히 말한다.
“크음, 육 영감님의 아들이 마교도에게 죽임을 당했었다네.”
“아…….”
육 노인은 그들을 보며 혀를 찰 뿐이었다.
“자네들의 가족이라고 무사할 줄 아는가? 사천성은 신강에서도 가까운 지역이니 가장 큰 격전지가 될 것이 뻔하네.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거나 간악한 사파의 종자들이 장악한 땅 위에서 하루하루 겁에 질려 살아가거나, 선택해야 할 것이네.”
“하기야 소위 정파인이라고 하는 무인들도 수틀리면 검을 뽑으니…….”
누군가의 말에 공간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사파의 마두들은 간간이 나타났지만, 사천성에는 청성파와 아미파 그리고 사천당문이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사파의 마두들과 직접 마주한 경험이 있는 백성의 수는 적었다.
하지만 그들은 정파인들과는 자주 마주했다.
중원에 널린 게 무림인이다.
자존심은 하늘을 찌르며, 행여나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머리를 땅에 박아야 한다. 정파인들도 그럴 것인데 사파인들은 어떠리?
“후우, 그런데 사파의 마두들이 정파인 척하고 숨어 있다니… 참으로 무섭군.”
“그러게 말일세.”
육 영감이 심각한 얼굴로 모두에게 조언한다.
“내 듣자 하니 고검문의 문주도 겉으로는 착한 척 위선을 떨었다는군. 산양현에서는 그들을 옹호하는 자들이 많다고 들었네. 우리는 절대 그러면 안 되네. 혈마교에선 백성들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며, 명문거파의 무인들은 혈마교를 옹호한 백성들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네.”
“에이, 그래도 사천성에는 그런 문파가 없지 않겠습니까?”
“흥, 그건 모르는 일이지! 만뇌문이 사파가 심어 놓은 간자일지 누가 알겠는가?”
육 영감의 발언에 모두가 깜짝 놀란다.
중강현에서 만뇌문의 입지는 상당했다. 그런 말을 하다가 만뇌문도에게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어이, 영감. 뭐라고 했어?”
“헙!”
“과, 광견살검……!”
누군가 광견살검 구자광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는 만뇌문의 문도들이 소비하는 식료품이나 필수품들을 구매하러 자주 중강현의 시장에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중강현에서도 꽤 유명했다.
자신만만하게 사파를 욕하던 육 영감마저도 사내의 등장에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다.
“만뇌문이 뭐?”
“그, 그것이 아니오라…….”
“넌 닥치고.”
“죄, 죄송합니다.”
구자광이 육 영감에게 다가간다.
“다시 말해 봐.”
당황하여 말을 내뱉지 못하던 육 영감이었지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알을 뒤집으며 고개를 들어 구자광의 얼굴을 마주했다.
“지, 지금도 보시오! 힘없는 백성이 말 한마디 했기로서니 이렇게 위협을 가하고 있지 않소? 죽일 테면 죽여 보시오!”
“정신이 나간 건가?”
“그래,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하시오……! 죽일 테면 죽이시오! 그게 만뇌문이 사파라는 증거가 될 것이니까! 힘이 약한 백성을 핍박한다고 강호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것이오!”
육 영감의 발악에 모여서 수다를 떨어 대던 백성들이 황급히 자리를 뜬다. 구자광의 분노에 휘말리기 싫었던 것이다.
구자광은 한쪽 입꼬리를 올린다.
저 미친 노인네는 사람을 잘못 보았다. 고작 그런 협박으로 멈출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하라면 못 할 줄 아나?”
“주, 죽일 테면 죽여 보시오……!”
구자광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살의에 육 영감의 광기가 흐려지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참으로 역겨웠다.
구자광이 허리춤의 검을 뽑는 순간이었다.
“후하하하-!”
“…….”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호탕한 웃음이 고막을 뒤흔들었다.
“미친, 뭐야?”
“구 대협, 인사드립니다! 전에 화음현에서 뵌 적이 있었지요?”
“너는……?”
“하북팽가의 팽여해입니다! 하하하하!”
구자광이 과거를 돌이켜 본다.
용봉지회에서 팽여해와 황극린이 이야기하던 것을 몇 번 목격한 적이 있었다.
- 화가 나시는 건 이해합니다. 하나, 지금은 참아 주시길 바랍니다.
전음으로 팽여해가 의사를 전달해 왔다.
“왜 참아야 하지?”
“그건…….”
팽여해가 설명하려는 순간이었다.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팽여해와 함께 온 창백한 피부의 사내.
그리고 구자광은 그를 알고 있었다.
“만묘신수(萬妙神手)……?”
“아직 절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다행입니다.”
“무림맹의 부맹주께서 여기까진 어쩐 일이오?”
눈치를 보아하니 목적을 가지고 온 것 같았다. 최근 소림사와의 상황이 일단락되고 한숨을 돌렸다 싶었는데, 이제는 부맹주였다. 안 그래도 미친 노인네 때문에 짜증이 난 구자광의 표정이 그리 좋진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부맹주에게 적의를 드러낸 것은 아니다.
무림맹과 굳이 싸울 필요가 없었으니까. 자신이 실수하여 만뇌문에 피해가 간다면 어찌 문주님과 장로님께 고개를 들 수 있겠는가?
“만뇌문주님을 뵈러 왔습니다.”
지금 뇌불은 없었다.
황극린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도 뇌불이 어딨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었다.
“지금 문주님께선 출타 중이시오.”
“기다리겠습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오.”
“그럼 황 장로와 대화를 해야겠습니다.”
“…….”
무림맹의 부맹주까지 나섰다.
설마 소림의 일로 또 협박질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소림의 땡중들과 똑같이 진법에 가둬 버리고, 만뇌문의 무서움을 일깨워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구자광 혼자서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
여러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분노가 사라진다.
만뇌문이 모욕당한 것보다 무림맹의 부맹주가 중강현까지 모습을 드러낸 것이 더 심각한 사안이었다.
“흥, 운 좋은 줄 알아. 내가 과거였으면 너 같은 늙다리는 한 번에 죽여 버렸어.”
“크, 크으음…….”
구자광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솔직히 힘없는 백성이라는 자신의 약점을 무기 삼아 휘두르는 노인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무림맹의 부맹주가 보는 앞에서 성격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모두 다 만뇌문에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다. 그들이 말린 것을 보면 분명히 이유가 있으리라.
“저기 추풍객잔에서 기다리고 계시오. 내 장로님께 무림맹에서 손님이 찾아왔다고 전하고 오겠소.”
“예, 기다리겠습니다.”
광견살검이 황급히 만뇌문으로 돌아가려 할 때.
팽여해가 소리친다.
“구 대협! 황 장로께 이 팽여해가 찾아왔다고 꼭! 전달해 주십시오-!”
“알겠다!”
구자광이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하북팽가 놈들은 타고나기를 장사로 태어난 것인지 목청이 커도 너무 컸다. 거기다 그들이 익히는 무공에도 분명히 목청을 키우는 묘리가 숨겨져 있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구자광이 떠나가고.
부맹주 만묘신수가 고개를 갸웃한다.
“꽤 성장했군.”
“예? 죄송합니다! 제가 딴생각에 빠져 있느라 듣지 못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팽여해가 예를 담아 부맹주에게 묻는다.
그의 아버지가 무림맹주라 하더라도, 팽여해는 고작해야 일개 전투대의 대원일 뿐이다. 이렇게 부맹주와 함께 특별 임무에 투입된 것만 해도 영광이었다.
부맹주는 팽여해의 커다란 목청에도 아무렇지 않은지 무표정하게 광견살검의 경공을 바라볼 뿐이다.
“아니다. 가자.”
“예! 부맹주님.”
팽여해의 커다란 목소리에 모두가 주목한다.
정파 무림의 심장이라는 무림맹. 직위상으로는 그 무림맹에서 서열 2위인 부맹주가 중강현을 찾아왔다. 만뇌문을 만나기 위해서.
대룡상단과 소림.
그리고 무림맹까지.
평생 가도 한 번 볼까 말까 한 기인 인사들이 중강현에 등장하고 있었다.
* * *
“만묘신수?”
“예.”
황극린이 묘한 얼굴을 했다.
그는 만묘신수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뭐, 실제로 만나 본 적은 없었지만, 그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중원에서 유명한 무인이었으니까. 애초에 무림맹의 부맹주급이면 작은 일을 해도 소란이 일이 마련이었다.
그런 부맹주가 만뇌문을 찾아왔다.
문주를 찾았다고 했던가?
그의 방문은 소림사와 관련이 있으리라.
아직 만뇌문과 소림 사이의 매듭은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무슨 이유로 찾아왔는지 말하던가?”
“아닙니다. 그냥 문주님을 찾았습니다. 제가 출타 중이라고 하니 장로님과 만나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
“예, 그리고…….”
혹시 모르니 미친 노인네와 벌였던 설전에 대해서도 말했다.
돌이켜 보니 팽여해는 마치 다른 이유가 있어서 구자광의 분노를 막아 세운 것처럼 느껴졌다.
“잘 참았군.”
과거의 광견살검이었다면 먼저 손부터 썼을 것이다.
그는 확실히 과거와는 달라졌다.
“아하하, 아닙니다. 만뇌문을 위해서라면 성질을 죽여야지요! 하하!”
황극린의 칭찬에 구자광이 헤벌쭉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인다.
“그럼 가지.”
“저, 저도 같이 말입니까?”
“싫나?”
“아닙니다! 모시겠습니다!”
구자광과 황극린이 부맹주가 기다리고 있는 추풍객잔으로 향했다.
이미 소문이 퍼졌는지 구경꾼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어허, 비키시오!”
구자광의 말에 백성들이 길을 튼다.
동시에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황극린이 오늘은 머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잘생겼는지 보려 했는데…….”
“그래도 봐 봐, 하관만 보이는데도 기품이 뚝뚝 흘러넘치잖아.”
“그건 그렇네. 후우!”
구자광은 마치 자신이 칭찬을 받는 것처럼 으쓱하며 앞으로 나섰다.
추풍객잔 안으로 들어가니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이미 부맹주가 객잔을 통으로 빌린 것이다.
“빨리 오셨군.”
중앙에는 팽여해와 부맹주 만묘신수가 앉아 있었다.
중강현과 청성산의 거리가 꽤 됐지만, 한 시진 만에 황극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까지 황극린의 행보를 보면 일부러 기다리게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라 할 수 있었다.
“만뇌문의 장로 황극린입니다.”
“부맹주 계립이오.”
“크흐. 황 형, 저도 있습니다!”
부맹주의 옆이라 그런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팽여해.
그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뚝뚝 묻어났다. 황극린이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이리 보니 또 반갑군.’
과거 팽여해는 황극린을 쫓는 추격대에 속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를 보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새삼 깨닫게 해 준다고 할까?
“오랜만이오.”
“자자, 이리 와서 앉으시지요!”
부맹주와 황극린이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한다.
‘화경에 올랐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나.’
일류에 오른 고수가 절정에 이른 무인을 이길 때도 있는 게 실전이었다. 전투에서 변수는 수를 헤아릴 수 없었으니까. 만묘신수는 전투에서만큼은 세 명의 부맹주 중에서도 최고라 말할 수 있었다. 그는 오랜만에 만난 광견살검의 성장을 경공을 보고 한눈에 알아봤듯, 황극린의 기세와 걸음걸이를 살펴보고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추측할 수 있었다.
‘무의식적으로도 보법을 자유자재로 펼치고 있군. 언뜻 보면 빈틈이 많아 보이지만… 함정이로군.’
솔직히 부맹주 만묘신수는 황극린에게 감탄했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어찌 저러한 실력에 올랐단 말인가?
물론, 감탄은 감탄이었고 임무는 임무였다.
“제가 찾아온 것은 만뇌문과 소림사의 일 때문입니다.”
역시 그랬나.
황극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시군요.”
“현 무림의 상황은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예, 혈마교의 비밀 지부가 발견되었지요.”
사실 황극린이 밝혀낸 것이다. 원래라면 몇 년 뒤에나 밝혀질 것이었지만, 소림사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정보를 풀었다.
“알고 계시니 대화가 빠르겠군요. 맹에선 만뇌문과 소림사의 대립이 더 격화되지 않길 바라고 있습니다.”
“비급을 내놓으라 하지 않으면 본문은 소림에 따질 생각이 없습니다.”
황극린이 명확히 입장을 밝혔다.
기다렸다는 듯이 부맹주가 대답한다.
“일단 소림사에겐 확답을 들었습니다. 중원에 침투한 혈마교도들을 모두 찾아낼 때까지는 만뇌문과의 일을 덮어 두기로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예, 그러니 맹에서는 만뇌문의 확답을 원하고 있습니다.”
황극린의 눈이 가늘어진다.
무림맹이 만뇌문의 확답을 원한다고? 뭐, 그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확실히 지금 상황은 이상하군. 고작 그걸 전하려고 부맹주씩이나 되는 인물이 직접 움직인다?’
황극린이 팽여해를 바라본다.
그는 오랜만에 본 황극린이 반가워 임무도 잊은 채로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술판을 벌이고 싶었지만, 옆에 부맹주가 있기에 꾸역꾸역 참고 있다. 아니, 애초에 사내끼리 진심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술잔을 나누는 게 정석이 아니던가?
맹주가 황극린이 사파와 연관되어 있는지 알아보라 했었으니, 술잔을 기울이는 게 임무를 등한시했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런 생각으로 음음, 고개를 끄덕이는 팽여해.
황극린이 그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혹시 다른 목적으로 찾아왔소?”
“예! 사실은 맹주께서… 헙!”
팽여해가 두툼한 손바닥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