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과거의 인연
정파 무림에서 가장 위협적인 적을 꼽자면 대부분 혈마교를 꼽는다.
중원일통(中園一統)이라는 야욕을 가지고, 그들은 강호를 몇 번이나 뒤흔들어 놓았다. 혈교와 마교가 합쳐지기 이전에도 말이다. 현시점에 이르러서는 혈마교과 직접 부딪쳐 본 고수는 정파 무림의 심장이라 불리는 무림맹에서도 몇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하북팽가의 가주이자 무림맹의 맹주인 만천무제(萬天武帝) 팽사혁은 그들의 무서움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후기지수 시절 혈마교의 정예와 부딪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혈교와 마교가 완전히 합쳐지지 않았던 무렵이라 혈마교에선 소교주 쟁탈전이 한창이었다.
그가 싸웠던 것은 소교주 후보 중에서도 중위급 실력을 지닌 사내였다.
만천무제는 용봉지회의 우승 경험도 있으며 현재는 무림맹주라는 자리에 오를 만큼 재능이 뛰어났었지만, 혈마교 소교주 후보에게 승리를 가져오지 못했다. 패배한 것이 아니라는 게 그나마 위안거리라고 했지만… 소교주도 아니고 후보 중 한 명에게 가로막힌 경험은 팽사혁의 뇌리에 똑똑히 박혀 있었다.
“최근 무림의 동태가 심상치 않구나.”
평화로웠던 무림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평화로운 척’을 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명문거파들의 전력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니 인명의 손실이 없었다. 십 년이 멀다 하고 정사대전이 벌어졌던 과거의 무림과는 전혀 달랐다.
구파일련과 육대세가를 필두로 한 정파 무림의 힘은 역대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팽사혁은 우려스러웠다.
“혈마교 놈들이 온다면 제가! 다! 부숴 버리겠습니다-!”
우우웅-!
탁상에 올려진 찻잔이 떨린다.
팽사혁도 무림맹 전체 무인 중에서 덩치로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앞에 앉은 청년 또한 덩치로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팽사혁보다 조금 더 커 보인다.
“의기는 좋다만, 목소리를 낮추거라.”
“예, 아버지.”
팽사혁의 지적에 팽여해가 찔끔하며 목소리를 낮춘다.
원체 팽가의 인물들이 목청이 좋다 보니 정파 무림 내에서도 하북팽가의 사람들과 가까이서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물론, 팽사혁도 천하칠대고수라 불리기 전에는 팽여해처럼 자신감을 목소리로 표출했던 경험이 있었지만, 무림맹의 맹주가 된 이후로는 고수의 풍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떠하냐?”
팽여해에게 의견을 묻는 무림맹주.
“당장이라도… 무림맹의 진정함 힘을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중원 무림에 간자를 심어 놓았다 한들, 결국 힘 대 힘으로 싸워야 할 것입니다. 싸움에서 승리한다면 혈마교는 다시 신강성에 박혀 지내겠지요!”
자신 있게 답하는 팽여해.
무림맹주가 고개를 젓는다. 사실 팽여해의 의견을 듣고 참고하기 위해서 질문했던 건 아니다. 애초에 무림맹에는 군사부(軍師府)라는 조직이 있으니, 팽여해에게 답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연일 원로들도 회의를 이어 가고 있다.
무림맹주 팽사혁이 아들이자 언젠간 하북팽가를 이끌어 갈 팽여해를 불러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는…….
따악! 쿠웅!
“컥!”
딱밤을 얻어맞은 팽여해가 뒤로 나자빠진다. 손가락 하나로 후기지수 중 최고라는 칠룡을 밀어내 버렸다. 천하칠대고수라는 위명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물론, 찰나의 순간 팽여해도 반응을 하긴 했으니 팽사혁의 분노가 더 커지진 않았다.
“힘으로 모든 게 해결되진 않는다.”
“…결국, 힘으로 모든 게 결정되는 것 아닙니까?”
팽여해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무림맹주는 천천히 설명한다.
“무림맹의 전력은 역대 최고라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혈마교는? 흑사회는? 만독문은? 북해빙궁은? 그리고 그 외에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사파 문파들은 힘이 없다고 생각하느냐?”
“그들도 강하겠지요. 그러니 더 기대됩니다!”
팽사혁이 한숨을 내쉬고 만다.
어찌 저리 단순 무식할까? 뭐, 그게 팽여해의 장점이기도 하다. 승부욕이 강하기에 재능이 있음에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만약 정사대전이 발발하게 된다면 많은 이들이 죽을 것이다. 최대한 피를 흘리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네가 무림맹에 와서 사귄 전우들이 죽는 모습을 보면 어떨 것 같으냐? 천랑대(天狼隊)의 대원들이 네 눈앞에서 죽는다면? 넌 어떤 선택을 할 거냐?”
“원수를 갚을 겁니다. 몇 배로, 그들이 피눈물을 흘리도록 말입니다!”
감정을 이입했는지 팽여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맹주는 그런 아들에게 감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코웃음 친다.
“상대는 어떨 것 같으냐? 네가 몇 배로 원수를 갚았다고 치자. 네가 죽인 혈마교 교도들의 전우들은 너뿐 아니라 하북팽가와 무림맹의 맹원들에게 복수하려 할 것이다.”
“…….”
“네가 운이 좋아 죽지 않았다면 전우들의 죽음에 복수하겠답시고 사파의 무인들을 죽여 버리겠지. 그리고 사파의 무인들은 또 너와 지인들에게 복수할 것이고.”
증오는 증오를 낳는다.
“복수가 두려워 원수를 갚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아니다.”
“그럼 제게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딱밤을 맞고, 이마에 피멍이 들었지만 팽여해는 할 말을 했다.
“왜 그 잔혹한 혈교가 마교에게 붙었는지 알고 있느냐?”
“모릅니다!”
따악!
“자랑이다.”
“큭! 이번엔 반응할 뻔했는데……!”
아쉬워하는 팽여해였다.
맹주는 말을 이어 간다.
“압도적인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힘이요?”
“그래, 혈교는 자존심이 강한 문파였다. 사파제일(邪派第一)을 천명하고 마교는 이교도 집단이라며 배척했었지. 당연히 마교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혈교가 누구한테 패퇴했던 겁니까?”
“천화련.”
“어……?”
팽여해가 고개를 갸웃한다.
무언가 간질간질한 것이 뇌리를 자극한다. 그러고 보니 무림맹 신입 교육 때 무림의 역사에 대한 것을 배웠던 것 같았다.
“물론, 천화련 혼자 한 것은 아니지. 무림맹도 있었으며 소림도 있었다. 당연히 본가도 혈교를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웠지. 하나, 혈교를 상대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공을 세웠던 건 천화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천화련…….”
현 무림에서 천하제일문이라 불리는 건 천화련이다.
무림의 태산북두라 불리는 소림보다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팽여해는 천화련의 천재 쌍둥이 남매를 떠올렸다. 십대 중반 이후로는 마주한 적은 없었지만…….
‘정말 강했지.’
지금도 그들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나, 그렇기에 즐거웠다. 그는 투기(鬪氣)로써 성장하는 무인이었다. 강자를 만날수록 강해진다. 28회 용봉지회에서도 ‘그’와 만나 더욱 성장했었다.
“압도적인 무력. 당시의 천화련은 그걸 가지고 있었지.”
“지금은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과거 혈교를 멸문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천화련의 고수들은 모두 죽었다. 천화련의 힘은 미지수지. 거기다 혈교와 마교는 힘을 합쳐 완전한 문파가 되었다. 과거처럼 천화련이 그들을 압도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흐음!”
팽여해는 생각한다.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처음엔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더니, 나중엔 압도적인 무력이 있으면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더 강해지라는 말씀입니까?”
“강해질 수 있겠느냐?”
팽여해가 제 가슴을 퉁퉁 친다.
“당연하지요! 어정쩡한 무력이 원한을 낳아 무림을 파멸로 이끈다면 저 팽여해가 압도적인 무력을 손에 넣어 보겠습니다!”
투기가 샘솟는다.
팽사혁이 아들을 불러 이렇게 말한 이유가 아들의 승부욕을 자극하기 위함이었다. 잠깐의 대화로 팽여해의 눈빛이 확 달라졌다.
‘정말 정사대전이 일어난다면… 넌 더욱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무림의 전력은 역대 최고.
팽여해가 거룡이라는 별호로 불리며 후기지수 중에서 주목을 받는다 하더라도 부족하다. 한참 부족했다. 그가 속한 천랑대는 무림맹 내에서도 경험이 많은 이들로만 구성되어 있었지만, 살아남으려면 그 자신의 힘을 길러야 한다.
“좋다. 하나, 압도적인 무력이 없다면 내가 했던 말을 떠올려라. 인간의 원한은 실로 무섭다. 그러니 네 모든 언행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네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항시 고민해라. 그래야 높이 올라갈 수 있다.”
“예, 아버지!”
모두가 잠들었을 심야에 아들을 부른 목적 중 일부가 달성됐다.
그에게 물을 게 더 있었다.
“그리고 네가 말해 줘야 할 게 있다.”
“무엇입니까?”
“네가 마지막에 참가한 용봉지회, 기억하느냐?”
“예, 기억하지요.”
팽여해는 소림사의 천덕에게 패배했다.
패배 이후 팽여해는 피를 토하는 수련으로 성장하고 또 성장했다. 그때의 경험은 팽여해에게 상당한 투기를 심어 주었다.
“황극린이라는 아이는 어떠했느냐?”
“황극린……!”
팽사혁의 얼굴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까지는 아들을 걱정하는 아비의 눈빛이었다면, 이제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무림맹 패자(霸者)의 눈빛. 팽여해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린다. 이런 아버지의 앞에서 허튼소리를 했다간 딱밤으로 끝나지 않는다.
팽여해가 과거를 떠올린다.
황극린.
손목 젖히기 싸움에서 자신에게 승리한 괴력의 사나이.
하나, 그는 힘이 전부가 아니었다.
‘천덕과 싸우는 그의 모습은… 괴물이었지.’
팽여해도 누군가에게 괴물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온 천재였다.
하지만 황극린은 그런 그보다 한 차원 높은 괴물이었다.
“강했습니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 내가 묻는 건 황극린이 얼마나 강하냐가 아니다.”
팽여해가 의아한 듯이 팽사혁을 바라본다.
“아버지, 정확히 말씀해 주십시오.”
“무언가 이상한 점이 없었느냐?”
“이상한 점이라뇨?”
“사파인처럼 보이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
팽여해가 두 눈을 부릅뜬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정파인이 아니라고? 팽여해가 단순 무식한 성격이라 해도 노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는 무림맹 천랑대의 대원이었다. 그렇기에 무림에서 일어나는 일은 듣기 싫어도 귀에 들어온다.
가령 산양현의 고검문이 실은 혈마교가 심어 둔 간자들이었다는 것.
중원엔 그러한 문파들이 더 있다는 것.
“설마……?”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만 말해라.”
심각하게 고민하던 팽여해가 입을 연다.
“그는 사나이였습니다.”
“…….”
“최소한 사파인은 아니었습니다. 진짜 사내였지요.”
“그래?”
“예.”
“알겠다.”
“끝입니까?”
“그냥 직접 황극린을 만나 본 네 의견을 듣고 싶었을 뿐이다. 요즘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워낙 많아서 말이야.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혼란스러운 법이니까.”
“누군가 황 형을 모함하고 있는 겁니까?”
“모함이라고 할 수는 없지. 솔직히 그의 무위가 비상식적인 수준인 건 사실이니까.”
“강하다고 사파인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나도 그러했으면 좋겠구나.”
“대체 누가 의심한 겁니까?”
팽사혁은 소림사의 방장이라고 굳이 대답해 주지 않았다.
팽여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른다. 그는 불의라고 생각하는 일에는 겁도 없이 나서곤 했다. 아들에게 일일이 모든 걸 알려 줄 생각은 없다.
물론, 직접 알아낸다면 어쩔 수 없다. 팽가는 자식을 부모 입맛대로 교육하지 않는다. 한순간의 선택으로 어떤 결과를 맞이하는지도 깨달아야 한다. 그렇기에 굳이 황극린을 의심하는 이가 소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차피 소림 외에도 황극린의 비정상적인 강함과 만뇌문의 성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은 무림에 널렸으니까.
“제가 직접 황 형에게 다녀오겠습니다.”
“네가 왜?”
“의심하는 자들이 있다면 믿어 주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눈으로 직접 확인했는데, 의심이 사실이라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제가 설득해 보겠습니다.”
“설득이라…….”
역시 아들은 아직 어렸다.
솔직히 팽사혁은 젊은 시절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때 묻지 않은 순수했던 시절의 후기지수. 그렇기에 더욱 빛이 난다.
“사천성으로 가게 해 주십시오.”
“좋다.”
“정말입니까?”
이렇게 단번에 허락해 줄 줄은 몰랐다.
말하는 것을 보면 팽사혁도 황극린을 의심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너 혼자서는 위험하다. 의심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어떤 행동을 보일지 예상할 수 없다. 환영신창이나 철혈검대의 대주에게 했던 것을 보면 말이지.”
“천랑대주님과 함께…….”
“아니, 천랑대주로는 변수를 차단할 수 없지. 부맹주와 함께 움직여라.”
부맹주.
그라면 정확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팽여해는 이번 여정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황극린의 배후에 사파의 세력이 있다면 팽여해는 세상의 냉정함을 깨달을 것이다.
그가 어떤 세력과도 관련이 없다면…….
‘네 순수함을 지킬 수 있겠지.’
물론, 후자의 경우에는 팽여해는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얻을 수도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