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선물
황량한 절벽 아래서 황극린이 멈춰 선다.
남궁운혜가 흠칫 몸을 떨었다. 정확히 무어라 말할 수는 없었지만, 벽면과 가까워질수록 불안감이 고조된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있었다.
“여기서부턴 날 놓치면 안 되오.”
“네.”
황극린이 벽면을 훑는다. 그러자 공간이 왜곡되며 기묘한 틈이 생겨났다. 오색찬란한 광채가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열기. 그러니까 정확히 뜨거운지 차가운지 알 수 없는 바람이 불어 나오고 있었다.
“……!”
이 장소는 위험하다.
본능이 경고한다. 남궁운혜는 저도 모르게 뒤로 발걸음을 물렸다.
“감이 좋군.”
역시라는 말을 생략했다.
남궁운혜 또한 강호 무림에서 특별한 재능을 품고 있었다. 황극린은 그녀가 마지막에 올랐던 경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남궁운혜가 강해졌던 이유는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였지만, 아마 이번 생에서도 그녀는 상당한 경지까지 오를 수 있으리라.
“따라오시오.”
“네.”
결의를 다지고 남궁운혜가 기묘한 틈을 통과한다.
- 끼아아아아-!
- 끼아아아아아아……!
괴이한 울음소리.
귀신이 통곡한다면 이런 소리를 낼까? 난생처음 들어 본 괴음에 남궁운혜의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흔들린다. 대체 이 공간은 무엇이란 말인가? 남궁세가에도 진법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차원이 다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에선 저마다 다른 기운을 발산하는 세 개의 태양이 지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양을 바라보지 마시오.”
“네, 그럴게요.”
조언에 따라 황극린의 뒤를 바짝 따르는 남궁운혜.
그녀는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작열하는 세 개의 태양 아래 그녀는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장소에 혼자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누굴 의지하거나 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 장소에 홀로 남겨진다면 그녀에게도 두려움을 줄 것이다. 만약 혼자 이곳에 갇히게 된다면 목숨을 끊는 게 낫다고 여길 정도로 끔찍한 장소였다.
‘소림사의 고승들이 이곳에 있구나…….’
대체 그들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지금 당장은 진을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었다. 얼른 이 지옥과도 같은 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
그렇게 일각이 지났을 무렵.
진법 내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하는 소림의 고승들이 보았다면 까무러칠 속도로 진을 통과했다.
황극린이 고개를 돌린다.
“많이 긴장했군.”
“아, 은공 덕분에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어요.”
그녀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황극린이 그녀를 빤히 바라본다. 머리카락이 눈을 가리고 있었으니 그녀는 황극린의 시선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왠지 모르게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린다.
“이곳이 만뇌문이오. 갑시다.”
“네.”
남궁운혜가 빠른 걸음으로 후다닥 나아간다.
황극린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분명 살기였었지.’
그녀 자신도 자각하지 못한 살기.
초감각을 지닌 황극린조차도 그냥 넘겨 버렸을 미묘한 살기가 느껴졌다. 살수의 그것과는 종류가 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살기인지도 긴가민가했다.
진을 나서자 그녀에게서 새어 나오던 살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진법 내의 마기(魔氣) 때문인가.’
황극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남궁운혜가 자신에게 살의를 품을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아마 진의 효용 중 하나였으리라.
* * *
- 끼이?
흑주가 구석의 탁상 아래서 얼굴을 삐죽 내밀었다.
“아! 오, 오랜만이야!”
남궁운혜가 어울리지 않게 밝게 인사했다.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쪼그려 앉은 채로 천천히 흑주에게 다가간다. 그녀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있다. 사실 그녀는 흔히들 키우는 강아지에게서 귀여움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외형적인 것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흑주는 다르다.
남들은 무서움을 느끼거나 징그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왜인지 남궁운혜의 눈에는 귀엽게만 보였다. 무언가 하나의 예술품처럼 보이기도 했다.
“만져 봐도 될까요……?”
“그러시오. 흑주.”
- 끼!
흑주가 여덟 개의 다리를 휘저으며 달려왔다. 아쉽게도 남궁운혜에게 간 것이 아니라, 황극린의 앞에서 벌러덩 뒤로 누워 버렸다. 남궁운혜는 아쉬움의 탄성을 내뱉었지만, 그래도 흑주가 애교를 부리는 것도 꽤 볼만했다.
‘나도 키우고 싶다…….’
강아지를 키우는 이들은 많았다.
간혹 고양이를 키우는 이들도 있었지만, 남궁운혜는 딱히 흥미가 없었다. 자신 하나 신경 쓰기도 힘든데 누가 누굴 키운단 말인가? 하지만 흑주는 정말 달랐다.
“와서 만져 보시오.”
솔직히 황극린은 남궁운혜가 흑주에게 왜 이리 관심이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진 않았다. 자신이야 흑주를 충실한 수하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거부감이 일진 않았지만, 만뇌문에서도 대부분 흑주의 생김새를 무서워한다. 마치 잘 제련한 묵철처럼 은은한 광채를 내고 있었기에 멋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남궁운혜의 취향이 특이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관심을 가졌던 게 딱히 없었군.’
전생에서 황극린과 남궁운혜는 혼인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매일 음울한 분위기를 발산하며 살아갔다. 딱히 관심을 가지는 것도 없었다. 솔직히 당시에 그녀가 황극린을 사랑했었느냐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단지 황극린은 그녀의 아픔을 이해해 주려 노력했을 뿐이었다. 물론, 창천뇌검을 살해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긴 해도 그 당시에는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남궁세가에서의 생활.
남궁운혜는 딱히 목적 없는 삶을 살았다.
당시에야 임무에 성공하기 위해서 남궁운혜가 그런 모습인 게 다행이라 생각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미안해진다. 지금은 없었던 일이 되어 버렸지만, 황극린에겐 기억이 남아 있었다. 남궁운혜가 자신을 죽이려 쫓아오던 때가 떠오른다.
‘그땐 확실히 눈빛이 살아났었지.’
남궁세가에서 목적 없이 살아가던 남궁운혜와 황극린을 죽이기 위해 쫓아오던 그녀는 달랐다. 무언가 악에 받친 듯하면서도, 그녀의 눈동자엔 생기가 흘러넘쳤다. 목적이 생겼었기 때문일까.
그녀가 실의에 빠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던 천흉 납치 사건을 어느 정도 해결했다고 했지만, 막상 남궁운혜를 보고 있자니 미안해진다. 만뇌문의 문도들과 인간적인 정을 나누고 살아왔더니 황극린도 꽤 많이 변했다.
“후후후후……!”
남궁운혜가 흑주의 복슬복슬한 배를 만지는 데 성공했는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잠시만 흑주와 놀고 있으시오.”
“네.”
잠시 뒤, 황극린이 무언가를 가지고 왔다.
흑주가 그것의 냄새를 맡고 화들짝 일어선다. 그러고는 남궁운혜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아…….”
남궁운혜가 아쉬움이 담긴 얼굴을 했다.
그녀에게 황극린이 다가갔다. 그러곤 노르스름한 광채를 발하는 둥근 알 하나를 건네준다.
“받으시오.”
엉겁결에 알을 받은 남궁운혜.
흑주가 무언가 구시렁대는 듯한 소리를 냈지만, 황극린의 손길에 진정이 됐는지 다시 벌러덩 배를 보이곤 복종의 자세를 취한다.
“이건 뭔가요?”
“흑주의 알이오.”
“알……?”
“그 알에서 영물이 태어날 가능성은 그리 높진 않소.”
흑주는 최근 들어서 실을 뽑아내는 양이 확 줄어들어 있었다.
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영물이라 홀로 알을 낳을 수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거미와의 교미를 통해 알을 가지게 되었는진 확실하지 않았지만, 흑주는 두 개의 알을 낳았다.
이미 한 개의 알은 부화했지만, 당연히 영물 인면지주가 아니었다.
살펴본 결과 ‘내단’과 비슷한 장기는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력이 깃들어 있진 않았다. 아마 여러 방법을 통해 채워 넣어야 할 것이다.
높은 확률로 영기가 깃든 영초나 영약을 먹여야 할 것이다.
더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거미가 인면지주로 바뀔 수 있냐는 것이다. 영약을 쏟아부었는데 막상 효과는 미비할 수가 있다. 만뇌문이 영약을 대규모로 매입하고 있긴 했지만, 영물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거미에게 영약을 먹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생김새는 흑주와 비슷하고, 평범한 거미보다는 확실히 지능이 높소. 알을 깨고 나온 뒤, 처음 본 사람을 잘 따르는 것 같더군.”
“설마 흑주가 낳은 건가요?”
“그렇소.”
“그런데 이걸 왜 저한테…….”
“키우고 싶지 않소?”
남궁운혜가 몹시 당황했다.
매번 자신에게 쌀쌀맞은 태도로 굴었던 황극린이었다. 갑자기 이런 호의를 베푸니 적응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필요하지 않으면 다시 주시오.”
“아, 아뇨!”
남궁운혜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죄송해요…….”
“아니오. 본문의 전문가가 말하기를, 영약을 지속적으로 취하면 영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더군. 하나, 당연하게도 소모한 영약에 비해 큰 내단은 가지지 못할 것이오.”
“네네…….”
남궁운혜가 황극린이 하는 조언을 듣는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알을 쓰다듬고 있었다.
“솔직히 영약을 주는 것은 추천하지 않소. 흑주처럼 지능이 높은 놈은 보기 힘드니까.”
애초에 인면지주가 사람을 따랐다는 경우는 없었다. 흑주가 특별한 것이다.
독을 다루는 만독문에서도 흑주를 길들이려다 실패하고, 놈의 독액만 뽑아내지 않았던가?
“네네… 꼭 흑주처럼 키워 내 볼게요……. 정말 감사드려요.”
멍하니 황극린의 말에 반대로 대답한 남궁운혜.
황극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한다.
“그럼 흑주랑 더 놀다가 갈 때 말 하시오.”
“네네… 꼭 말할게요.”
황극린이 떠난 지 일각이 지나서야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자신에게도 처음으로 애완동물이 생기는 것이다. 거기다 흑주가 낳은 거미라니…….
‘꼭 영물로 만들어야 해.’
목표가 생긴 남궁운혜의 눈동자엔 활기가 생겨났다.
* * *
소림의 방장 천선대사(天仙大師).
그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림의 사대금강 중 하나인 해월대사와 최정예라 할 수 있는 십팔나한이 한 달 동안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만뇌문의 세력이 그들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일이 생긴 것은 확실했다.
혈마교의 비밀 지부가 나타나는 바람에 소림의 방장 천선대사는 온전히 그들에게만 정신을 쏟을 수는 없었지만, 이제는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만뇌문이나 청성파에 정식으로 확인해 보아야 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를 말이다.
만약 소림의 최정예 무승들이 무언가 일을 당해 전멸했다면.
천선대사는 확실한 선택을 해야 했다.
그가 직접 숭산을 떠나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방장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
소림의 방장 천선대사는 기다렸다는 듯 불호를 외며 서신을 받아 들었다.
놀랍게도 서신은…….
‘해월.’
해월대사가 보낸 것이다.
그는 해월의 글씨체를 알고 있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경박한 느낌으로 쓰이긴 했지만, 해월대사가 쓴 글이 맞았다.
“아미타불…….”
서신을 읽어 가던 천선대사.
오랜 정신 수양으로 어떠한 일에도 당황하지 않는 방장이었지만, 서신의 내용을 보고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해월대사는 무언가에게 겁을 먹고 있었다.
‘만뇌문과의 싸움을 잠시 포기해야겠다고?’
천선대사가 알고 있는 해월대사는 이럴 성격이 아니었다.
자신이 죽더라도 소림의 명예를 위해 싸우다 죽을 위인이었다. 설령 겁을 먹었다고 하더라도 이리 표현하지 않을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글에서도 공포에 질린 것이 표가 난다. 당장이라도 복귀하여 십팔나한과 함께 면벽 수행을 하겠다는 말에서 천선대사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때도 그러했지.’
20년도 훌쩍 넘은 그날.
해월대사가 왜인지 달라졌던 때가 있었다. 물론, 해월대사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오긴 했지만, 당시 사대금강이었던 천선대사는 해월의 상태를 걱정했었다. 그는 왜인지 중원에서 암약하는 이들과 자주 부딪쳤다.
이번에 해월대사는 과연 무엇과 부딪친 것일까?
만뇌문과 싸웠을까? 청성파의 무언가와 마주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확인해 봐야겠구나.’
그때와 다른 점은 천선대사는 이제 소림의 방장이라는 막강한 지위에 올라 있단 점이다.
설사 무림맹의 맹주라고 할지라도 그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천선대사는 붓을 들었다.
먼저 만뇌문과 청성파에 알아보아야 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그들이 해월대사의 변화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