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압박
남궁운혜는 자신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황극린은 분명히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었다. 그렇기에 그를 생각하게 되는 건 당연한 것이었지만, 왜인지 자신도 모르게 집착하게 된다. 황극린의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다 알고 있어야 한다는 압박감마저 느껴진다.
이게 연모의 감정일까?
창천뇌검이 물었던 것처럼 그녀도 그러한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가문의 여인들에게 물은 적도 있었다. 사내를 연모할 때 어떠한 감정을 느끼느냐고 말이다. 어떤 생각이 드는 것인지 남궁운혜는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남궁세가의 여인들은 열성적으로 그녀에게 사랑이란 무엇인지 알려 주었다.
이제껏 남궁운혜는 혼인이나 사내에게 관심을 가졌던 적이 없었다. 혼인을 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도 들었기에, 이제 사내에게 관심을 가지는 여인에게 자신들이 느꼈던 감정을 모두 알려 주었다.
그녀들의 경험담을 모두 들은 남궁운혜는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가진 것은 사랑이나 연모의 감정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무의식적인 집착. 무언가가 마치 그를 떠올려야 한다고 강요하는 듯하다. 마치 영혼에 새겨진 기억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남궁운혜는 위험을 무릅쓰고 만뇌문이 있는 청성산을 찾았다. 그는 목숨의 은인이니, 적당한 명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황극린이 온다는 말에 긴장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왜 긴장하는 걸까?’
순수한 의문.
하나,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청성산이 소란스러워졌다. 최근 화제의 중심인 황극린이 등장한다. 그가 무림에 나타날 때마다 무언가 일이 터진다. 이번에는 소림의 무승들이 죄다 실종됐다. 청성의 장문인은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당하고 있는지 짐작하고 있었지만 청성의 모든 문도에게 그걸 설명해 주진 않았다.
“아… 이번에는 가리셨구나!”
“그러게. 관심이 부담되셨던 걸까?”
청성의 여협들이 술렁인다. 최근까지 황극린은 얼굴을 떡하니 드러냈다. 당연히 그가 있는 곳이면 관심이 집중된다. 오죽하면 사내들까지 그의 얼굴을 뚫어지도록 바라보겠는가? 적당히 잘난 얼굴이라면 질투라도 할 법했지만, 워낙 출중했던 터라 질투심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사내들도 황극린의 외모에 감탄할 뿐이었다.
그렇게 청성산이 술렁이고 있을 때.
남궁운혜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있던가? 그를 떠올리면 헝클어진 머리가 생각날 뿐이었다. 마치 일부러 얼굴을 가린 듯했다. 얼핏 드러나는 얼굴은 본 적은 있지만, 제대로 그의 눈을 마주한 적은 없는 것 같았다.
“…….”
또 무언가가 그녀를 압박하고 강요한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은 감정이 솟구친다. 하지만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할 순 없었다. 남궁운혜는 압박을 참아 내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오랜만에 은공를 뵙는 날이다.
“음.”
남궁운혜와 발견한 황극린.
죽립을 눌러썼다지만 그의 감각을 속일 순 없었다. 그들에게선 남궁세가의 냄새가 났다. 정확히 말하면 남궁세가가 익힌 ‘내공’의 냄새였다. 청성 장문인의 청아한 향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로 순수했다.
‘왜 또 여기에 있는 거지?’
황극린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간다.
어차피 장문인실로 가는 길목에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마주쳐야 했다.
“오랜만이오, 남궁 소저.”
“……!”
순간이지만 남궁운혜의 몸이 굳었다.
그녀는 겨우 입을 열었다.
“…죽립을 눌러썼는데도 저를 알아보시는군요.”
“냄새가 나서 말이오.”
“냄… 새……?”
남궁운혜의 동공이 크게 흔들린다. 죽립을 눌러써서 다행이었다.
무슨 냄새라도 난다는 말인가? 당장이라도 의복에서 무언가 냄새가 나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은공의 앞에서 결례를 범할 수는 없다.
“아무튼, 남궁 소저께서 청성엔 무슨 일이오?”
“그건…….”
그때, 창천뇌검이 등장했다.
그는 허허로운 미소를 지으며 황극린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예, 남궁 대협.”
황극린이 포권지례로 창천뇌검에게 인사했다.
과거 그는 황극린이 딸아이의 납치범이라 생각하고 공격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 후에 오해가 풀려 감정을 해소했다. 그렇다고 황극린은 남궁세가와 엮이는 걸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남궁세가는 대룡상단과의 대립 때부터 만뇌문을 도와줬다.
“무림맹에서 만뇌문을 옹호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허허허,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했던 일 아니겠습니까? 만뇌문과 남궁세가가 어디 보통 사이입니까?”
능청을 떠는 창천뇌검이다.
눈치가 있다면 황극린이 남궁세가의 도움을 계속 거절하려 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왜 우리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 하냐고 따지기도 뭣하다.
“소림과 대립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남궁세가가 도울 것이 있으면 돕겠습니다.”
남궁세가는 언젠가 황극린에게 빚을 갚아야 했다.
그렇기에 만뇌문에게 금패를 선물했다. 물론, 지금은 황극린이 금패를 내세워 남궁세가에 도움을 청하지 않았기에 공식적으로 청성산을 방문한 것은 아니었다. 죽립을 눌러쓰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황극린의 말에 창천뇌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장서서 장문인실로 향한 황극린. 창천뇌검이 그를 따라가다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본다. 남궁운혜가 자신의 소매 냄새를 맡고 있었다.
“왜 그러느냐?”
“아니에요.”
남궁운혜는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 * *
“해월대사와 십팔나한이 진법에 갇혀 있다니…….”
창천뇌검이 황당함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엔 당연히 믿지 못했다. 진법이라는 건 구축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유지하는 건 더 어렵다. 내공을 주입하여 진의 근간을 흔들면 깨져 버리기 일쑤다. 그렇기에 놀라웠다.
소림의 정예들이 속수무책으로 진법에 갇혀 나오지 못한다니.
물론, 그런 수준의 진이 중원에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만뇌문이 그러한 진을 구축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직 중원에는 공표하지 않았습니다.”
청성산의 장문인이 말한다.
“하기야 믿기 힘든 일이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청성의 장문인 태을종객은 고개를 젓는다.
남궁세가의 가주는 아직 그 소식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산양(山陽)현에서 혈마교의 비밀 지부로 추정되는 문파가 발견되었습니다.”
“혈마교의 비밀 지부 말입니까?”
“예.”
산양현은 섬서성 남쪽에 위치한 현으로 하남성과 호북성과 매우 가깝다. 지리적으로 어디든 이동할 수 있었다. 소림사가 있는 숭산과도 그리 멀지 않다고 말할 수 있었다.
“확실한 겁니까?”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지만, 가능성이 높습니다.”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던 창천뇌검의 시선이 문득 황극린에게로 향한다.
“소림 고승들의 위치를 밝히지 않는 건, 설마……?”
“혈마교의 비밀 지부라는 게 드러난다면 공표할 생각입니다. 아마 소림도 어찌할 방도가 없겠지요.”
소림은 무림의 태산북두라 불리며, 모든 무인에게 존경받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혈마교와의 싸움에서 앞장서려 할 것이다. 중원 무림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도 있겠지만, 그들은 명문거파로서 정파 무림을 지키려 한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소림사는 만뇌문에 더는 무인들을 투입하지 못할 것이다.
“은인께서 금패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있었군요.”
사실 창천뇌검으로선 황극린이 금패를 사용하여 도움을 요청한다면 편했다. 창천뇌검 수준의 고수가 움직일 땐 명분이 필요했다. 소림사와 만뇌문이 대립하고 있는 와중에 그가 만뇌문의 편을 든다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정파 무림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다가오고 있었다.
정파 권역의 끄트머리도 아닌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섬서성에 혈마교의 비밀 지부가 있다니?
황극린은 그런 창천뇌검에게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창천뇌검 대협께서 청성산으로 온 것은 만뇌문을 돕기 위함입니까?”
슬쩍 남궁운혜를 바라본 창천뇌검.
그가 답한다.
“예, 그렇습니다.”
황극린은 잠시 고민한 후, 입을 연다.
그는 대룡상단과의 마찰 때부터 남궁세가의 도움을 바라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에겐 소중한 것이 있다.
과거인지 미래인지 모를 기억 때문에 껄끄럽다는 이유로 남궁세가를 무조건 밀어낼 필요는 없었다. 이미 무림맹에서 남궁세가의 도움으로 대룡상단의 정치 수작질을 가볍게 넘긴 바가 있었다. 언젠가 때가 된다면 그들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매번 이렇게 찾아오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남궁세가의 도움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정말로 남궁세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올 수도 있겠지요. 금패는 그때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주님께서도 위험을 감수하시고 이곳까지 오신 것이 아닙니까?”
그때, 남궁운혜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무엇을 말이오?”
“그건…….”
남궁운혜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서 자신이 받는 거대한 압박을 어찌 이야기할 수 있으랴? 이상하게 볼 것이 뻔했다. 은공께 그런 모습은 보여 주기 싫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적당한 사실을 섞어 말을 돌린다.
“소림사가 만뇌문을 공격할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도움을 청하지 않으셨지만 이리 찾아뵈었습니다.”
태을종객이 흥미롭다는 듯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공녀가 그에게 관심이 있다는 소문이 영 거짓은 아니었나 보군.’
용봉지회 때에도 그런 소문이 돌았지만, 만뇌문과 남궁세가가 직접적으로 연을 맺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기에 이제는 사그라든 소문이었다. 하지만 태을종객은 그것이 사실에 기반한 소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매번 이리 찾아오실 수는 없지 않겠소?”
황극린이 창천뇌검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남궁운혜가 아니었다면 그는 만뇌문을 돕기 위해 직접 움직이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은인이긴 했지만, 소림사는 자비를 베풀 줄 아는 문파였으니까. 만약 황극린이 정말 위험에 처하면 금패를 사용해서라도 도움을 청하리라 생각했다.
남궁운혜는 솔직히 말해서 억울했다.
그를 돕기 위해 찾아왔지만, 이제는 찾아오지 말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왜인지 모르게 그가 남궁세가를 부를 일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이미 화경의 경지에 올랐다고 하지 않았는가?
시간이 더 지나면 황극린은 더 강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목숨의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지금도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에게 은혜를 갚을 수 없었다. 남궁세가와 아버지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하나, 남궁운혜는 참아 냈다.
은혜를 갚겠다고 난리를 치는 게 오히려 민폐가 되니까.
“그래도 남궁세가의 마음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황극린 또한 그들을 밀어낼 생각은 없었다.
남궁운혜는 그의 말에 약간의 안도를 느끼면서, 입을 뻐끔거렸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막상 입에서 튀어나오지 않는다.
보다 못한 창천뇌검이 나서려는 순간.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예, 말씀하십시오.”
남궁운혜가 황극린에게 부탁이라는 말을 했다.
창천뇌검도 궁금했는지 가만히 지켜본다. 남궁운혜는 솔직히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녀의 무의식은 황극린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 말라 경고하고 있었음에도, 왜인지 그에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고 답을 구하고 싶었다. 왜 자신이 그에게 집착하게 되었는지 말이다.
그러나 남궁운혜는 그것에 대하여 말할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온갖 생각이 난무하는 가운데, 그녀가 찾은 답은…….
“그… 거미는 잘 있나요?”
“거미? 아, 흑주 말이로군. 잘 있소.”
“잘 있다니 다행이군요. 혹시 볼 수 있을까요?”
남궁운혜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절한 부탁이라 생각됐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은인께 그리 부담되지도 않고, 그와 조금 더 같이 있을 수 있는 좋은 이유였다. 물론, 태을종객이나 창천뇌검은 거미라는 말에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시오.”
남궁세가가 만뇌문을 걱정해서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야박하게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흑주를 만나게 해 주는 거야 간단했다.
“거미가 만뇌문에 있는 것입니까?”
창천뇌검이 묻는다.
“예, 그렇습니다.”
“그럼 잠시 딸아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잠시 장문인과 할 이야기가 있어서 여기서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던가.
굳이 시간을 끌며 보여 줄 이유는 없었다.
“갑시다.”
“어, 네? 아, 네.”
남궁운혜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