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158화 (158/316)

158화 알아보다

대규모의 사절단.

소림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십팔나한이 출정했다. 선두에는 당연히 사대금강 중 하나인 해월대사가 있었다. 당당하면서도 겸손한 걸음. 합장을 한 채로 행과 열을 맞춘 채 나아가는 소림 무승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위엄에 놀라 눈물을 흘리며 절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스, 스님 아저씨! 제발 도와주세요!”

범접할 수 없는 기세에 백성들 대부분이 멀찍이 서서 바라보고만 있는 가운데,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 한 명이 소림의 행렬을 가로막았다.

“야! 어서 나와!”

“지금 뭐 하는 거냐!”

어른들은 불같이 화를 낸다.

저들은 배워 먹지 못한 자신들과는 다른 사람들이다. 꾀죄죄한 소년이 가로막았다는 소문이 돈다면, 동네 사람 전부를 욕먹이는 짓이다.

“저거 황 씨네 막내 아녀?”

“길동아! 어서 비켜라!”

아무렇게나 수염을 기른 힘깨나 쓰게 생긴 사내 한 명이 콧김을 내뿜으며 다가온다. 길동이라 불린 소년을 떼어 내려 한 것이다.

“아미타불, 괜찮소이다.”

해월대사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소가 어찌나 자애로운지 중년 사내가 멈칫하고, 저도 모르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길동이라 불린 소년을 떼어 내고자 손을 뻗고 있는 와중이었기에 어정쩡한 자세가 되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아이야, 무슨 일이더냐?”

“그, 그게… 저희 아버지가… 갑자기… 흐윽……!”

“울지 말고 찬찬히 말해 보아라.”

해월대사는 아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의 뒤에 정렬한 십팔나한은 표정을 찌푸리지도 않고 대기했다. 그것을 본 백성들이 역시 소림이라며 치켜세워 주었다. 눈이 마주쳤다고 검을 뽑아 대는 무림인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저게 바로 소림사!

“아버지가 갑자기 기침이 멈추지 않아요……! 피도 나와요……! 죽을병에 걸렸다는데… 전 아버지를 잃고 싶지 않아요. 제발, 제발… 부탁드려요. 아버지를… 아버지를 도와주세요, 흐윽!”

소년의 외침.

백성들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과연 해월대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소년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듯이 슬픈 눈을 했다. 소년은 그의 눈빛에 희망을 보았다. 모두가 칭송하는 소림의 무승이 도와준다면, 아버지의 병도 금방 나을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소년도 예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이야.”

“네에……!”

“손목을 내어 주지 않으련?”

“네엡!”

해월대사가 소년의 맥을 짚는다.

그의 기맥이 어떻게 뚫려 있는지, 기골이 어떠한지 알아보는 과정이었다. 소년은 기대하고 있었고, 해월대사는 진중한 얼굴로 그의 몸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미안하구나.”

“네……?”

“우리는 인연이 아닌 모양이구나.”

“이, 인연이요?”

“그렇단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업(業)이라고 하는 건 불가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소년과 해월대사는 인연이 될 수도 있었다. 아니, 벌써 연을 맺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해월대사는 모든 인연과 이어질 수 없다는 진리를 알고 있었다.

인간은 살아가며 매 순간 누군가를 만나고 선택한다.

‘미안하구나. 너를 도와준다면 세상 모두를 도와줘야 하느니.’

나한전주이자 사대금강인 해월대사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또한, 소년에게도 조건 없는 도움은 훗날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립해야 한다. 누군가의 손을 빌리는 게 습관이 되면 좋지 않았다. 만약 아이의 재능이 뛰어났다면… 소림의 품으로 들어오는 조건으로 그의 아버지를 만날 수도 있었다.

‘하나, 인연이 아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사대금강이라면 그와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해월대사는 나한전 전주였다. 필요하다면 소림을 위해서 살생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기에 그의 의지는 굳건하다.

“스스로 견뎌 내거라. 하늘이 도와주신다면 아버지를 치료할 수 있을 게다.”

“그런……!”

“미안하구나.”

해월대사는 슬픈 미소를 지은 채로 소년을 밀어냈다.

힘이 없는 소년은 속절없이 밀려나 바닥에 주저앉았다. 묘한 침묵이 감돌고 있다. 다들 알게 모르게 소림사가 소년을 위기에서 구해 주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무림의 태산북두라 칭송받는 소림이라면 당연히 그러하리라 하는 생각이 은연중에 자리를 잡았으니까.

그렇게 소림사의 사절단은 마을에서 떠나갔다.

소년의 울음소리가 커져만 갔지만, 함부로 소년을 위로하는 사람은 없었다.

‘소림의 높으신 스님조차 버린 아이.’

‘함부로 다가가선 안 돼.’

처음엔 소림이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다 높으신 뜻이 있기에 저리 행동했다고 생각한다. 소년의 맥을 짚어 보고, 운명이라도 느낀 게 아닐까? 도와주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소년을 도와주는 이들이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소년의 아비가 걸린 병의 치료비를 대 줄 여력이 있는 사람도 이 마을에는 없었다. 여유가 있더라도 소년의 가족을 도울 돈으로 자기네 가족을 챙기는 게 훨씬 낫다고 판단했다.

모두가 소년을 외면한다.

홀로 남은 소년은 비참하게 땅을 긁으며 흐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림자 하나가 소년의 몸을 가렸다.

“집이 어디냐.”

“……?”

퉁퉁 부은 두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늘이 져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목소리가 참으로 부드럽다.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된다.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었던 해월대사의 목소리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부드러움이다.

“저, 저… 끄윽… 저요?”

“그래.”

사내는 생각했다.

과거를 떠올렸다. 해월대사의 행동은 나쁘다고 욕할 게 아니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으며, 소림사가 그들을 모두 구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무너져 가는 소년을 왠지 모르게 돕고 싶었다.

이유야 갖다 붙인다면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로 소년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유년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도울 수 있으니까.’

사소한 변수로 커다란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소년은 딱 봐도 무공에 재능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언젠가 소년이 다른 곳에 재능을 개화하여 은혜를 갚을 줄 누가 알겠는가? 물론, 은혜를 바라고 하는 행동이 아니다. 그렇기에 사내는 스스럼없었다.

“가자.”

소년이 사내의 손을 맞잡는다.

마치 바위를 만지는 듯이 거칠었으며, 단단했다.

그리고.

따스했다.

* * *

황극린은 해월대사의 뒤를 쫓았다.

그의 잠행술은 이미 살수 시절부터 갈고닦아 온 최고의 기예였다. 거기다 인피면구까지 썼으니 황극린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골치 아픈 유형의 인간이로군.’

그리고 황극린은 해월대사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게 되었다.

소림사의 고승들과 만나서 대화해 본 적은 없었지만, 일반적으로 소림사에 가지는 인식이 있었다. 며칠 동안 지켜본 해월대사는 황극린이 생각한 고승과는 확실히 달랐다.

나한전(羅漢殿)의 전주이기 때문일까?

그의 가치관은 평범하진 않았다. 보통의 무림인과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면, 쉽게 이번 상황을 타파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쉽게 그들을 물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애초에 십팔나한 전원을 끌고 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하나,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단지 그의 예상보다 더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걸 깨달았을 뿐. 황극린은 그가 앞으로 나아가며 하는 행동으로 어떤 성격인지 알아냈다. 살수의 기본 덕목 중 하나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

황극린은 개방이나 하오문을 통해 해월대사에 대해 알아보았지만, 그를 직접 추적하며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슬슬 만나야겠군.’

황극린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다.

인피면구를 벗고, 옷을 갈아입는다. 이제는 만뇌문의 장로로서 그와 직접 이야기할 시간이었다.

* * *

중강현에 도착한 해월대사와 십팔나한.

“어서 오십시오.”

청성의 원로 노해일룡(怒海一龍) 장선자를 비롯하여 수십의 청성의 문도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명목상으로 그들은 싸우러 온 게 아니다. 물론, 십팔나한 전원을 끌고 왔으니 여차하면 무력을 행사하겠다는 의도도 있었지만, 최소한 청성과 싸울 생각은 아니리라.

그리고 청성 또한 소림사와 오래도록 연을 맺었으니 최소한의 도리를 해야 했다. 사대금강 중 하나가 왔으니 청성에서도 원로가 나와야 한다.

“아미타불, 노해일룡 대협이시군요. 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예, 30년 만이로군요.”

무려 30년.

두 사람은 강호에서 한창 활동하던 시절에 만난 적이 있었다.

“먼 걸음을 달려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청성의 전각에서 일단 휴식을 취하시지요.”

해월대사가 자애로운 미소를 짓는다.

“괜찮습니다. 빈승의 목적은 청성에 있는 것이 아니니, 청성파에 괜히 피해를 줄 수 없지요.”

해월대사의 의지는 굳건했다.

당장이라도 만뇌문으로 직행하겠다는 뜻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직선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건 그대로군.’

최대한 시간을 끌라는 청성 장문인의 명령이 있었다. 그렇기에 청성산으로 그들을 안내하고, 휴식을 취하게 하도록 하려 했다. 하지만 첫 계획부터 어긋나고 있었다.

“만뇌문이 청성산 산자락에 터를 잡았다고 들었습니다.”

“예.”

“염치없지만 그곳으로 안내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음…….”

노해일룡이 최대한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장문인께서 해월대사를 뵙기만을 고대하시고 있었습니다.”

장문인이라는 말에는 해월대사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청성에 찾아와서 장문인께 인사도 드리지 않는다면, 그것도 도리가 아니었다. 해월대사는 지킬 것은 지킨다.

“일이 끝난 후,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허허,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더 권하기 힘들어지는군요.”

“아미타불, 사죄드립니다.”

“아닙니다. 바쁘신 걸음을 하셨으니 어쩔 수 없지요. 하나,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예, 듣겠습니다.”

“만뇌문은 천하의 절진으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 장소로 안내한다고 해도… 아마 만뇌문과 대화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아미타불.”

불호는 외는 해월대사.

그는 대수롭지 않게 답한다.

“진이라면 저도 일가견이 있습니다. 그리고 만뇌문의 문도가 나올 때까지 진 앞에서 기다려도 될 것입니다.”

“허허, 너무 고생하는 것 아니십니까?”

“이슬 냄새를 맡으며 자연과 함께하는 것은 고생이라 말할 것도 아니지요. 또한, 기다림은 정신 수행의 연장선이니 긍정적인 마음으로 기다릴 뿐입니다.”

노해일룡이 미소를 짓는다.

속으로는 참으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며 불평하며 말이다.

“알겠습니다. 안내는 해 드리겠지만… 최소한 청성산에선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예, 당연하지요. 소림도 만뇌문과 싸울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소림의 최정예인 십팔나한을 뒤에 두고 저리 말하는 것을 보면 어이가 없었지만… 그들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청성파는 당장은 만뇌문을 돕는다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소림과 척을 지면서까지 그들을 도울 수는 없었다.

구파일련은 서로가 경쟁 상대이긴 하지만 위험이 닥치면 함께 뭉친다.

만뇌문과의 연은 소림보다 깊다고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노해일룡이 마지못해 해월대사를 안내하려는 순간이었다.

“굳이 청성산까지 갈 필요 없습니다.”

“…….”

사내가 등장했다.

대충 머리를 올린 것에 불과했지만, 타고난 기품이라는 것이 옥과 같은 얼굴에 깃들어 있었다. 뒷짐을 지고 여유롭게 다가오는 사내. 해월대사는 대번에 그가 누군지 알아챘다.

“아미타불, 황 장로시군요. 이렇게 빨리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습니까?”

질문으로 대답하는 황극린.

해월대사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왜인지 황극린은 그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극린은 여유롭게 다가와서 노해일룡에게 포권지례로 예를 표했다.

“청성에서 만뇌문과 소림 때문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허허허, 아닙니다.”

황극린의 초감각에 느껴지는 해월대사의 강렬한 시선. 그는 아주 작게 동공을 움직이며 황극린의 전신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래서 소림사에선 무엇을 얻기 위해 이렇게 먼 발걸음을 해 주셨습니까?”

해월대사가 불호를 왼다.

왜인지 모르게 황극린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짜증이 난다. 평소 부동심(不動心)으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지만, 왜인지 황극린의 말투, 분위기 그리고 기운이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그가 ‘놈’의 무공을 익혔기 때문일까?

황극린을 바라보고 있자니 소림의 명예를 땅바닥에 내팽개친 그가 떠오른다.

“아미타불, 황 장로께서는 알고 계시리라 사료됩니다만… 서신을 다섯 번이나 보냈습니다.”

“예, 서신은 보았습니다. 그래서 거절의 서신도 보냈습니다만.”

“그건 거절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요. 만뇌문이 익히고 있는 건 천하의 마공으로…….”

“마공? 이상하군요. 제가 본 혈풍뇌전신공의 서두에는 이것은 소림의 무공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 창안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만, 해월대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소림의 무공이 마공이라는 뜻입니까?”

“아미타불, 같은 꽃을 보고도 누군가는 그걸 가꿔 줘야겠다고 생각하는 반면… 또 누군가는 꽃을 꺾어 버리기도 하지요. 부정적인 마음이라면 선의를 보고도 악의로 변질되는 것이 진리입니다.”

황극린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정종 무공과 마공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섭리를 거스르느냐 거스르지 않느냐의 차이겠지요.”

“섭리를 거스른다는 게 무엇입니까?”

“혈풍뇌전신공과 같은 마공은 역천의 무공입니다. 인간이 손대서는 안 되는 무공이지요. 잘못 익히다간 황 시주께서도 심마에 빠질 겁니다.”

“딱히 신뢰가 가지 않는군요.”

“아미타불, 믿음이란 황 시주께서 어떤 마음가짐이냐에 따라…….”

“최소한 소림의 방장께서 그런 말을 했다면 모르겠습다만.”

“…….”

해월대사의 미소가 자애로움을 더했다.

“저보다 무공의 수준이 낮은 이에게 조언을 듣는 것만큼 지루한 것도 없겠지요.”

“시주께선 오만하시군요.”

“……!”

두 사람의 담화를 지켜보던 청성의 장로 노해일룡이 입을 떡 벌린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해월대사를 도발한 건가? 그의 뒤에는 십팔나한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제아무리 화경에 올랐다고 해도……!

“오만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해월대사의 눈동자가 금색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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