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다섯 수
“그런데 갑자기 왜 비무를 하는 거람?”
“글쎄? 그냥 친목을 위해 비무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것 치고는 분위기가 무거운걸?”
사실 비무를 한다는 소식만 듣고 달려온 이들도 있었다. 최근 환영신창을 잡아 낸 황극린과 무림맹의 전투대를 이끄는 종남파 장로의 비무. 무림인들 사이에서 친선 비무는 종종 일어나는 연회와도 같았건만, 왜인지 분위기가 밝고 쾌활하지 않았다.
청명쾌검 장서이가 이끄는 철혈검대의 대원들이 진중한 표정으로 단상 위에 마련된 귀빈석에 앉아 있었으며, 그 옆으로는 만뇌문의 문도들도 처음으로 중강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두 세력 사이에 감도는 긴장감이 자연스레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근데 수라공자는 화경에 올랐다고 하지 않았었나? 청명쾌검 대협이 밀리는 것 아냐?”
“수라공자라니! 자네는 저 얼굴을 보고서도 그런 흉측한 별호를 입에 담는가?”
“그, 그런가?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라! 화경의 경지에 오른 고수가 그 밑의 경지에게 패배할 리가 없지 않은가?”
무림에선 편의상 경지를 나누고 있긴 했다.
사실 어느 순간부터 중원 무림에서 굳어진 개념이었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았지만, 초절정에 이른 고수는 절정에 이른 고수에게 패배하지 않는다. 초절정을 이기려면 절정 고수가 최소한 세 명이 필요하다. 뭐 그런 이론들이 무림에 상식처럼 퍼져 있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더라도 무림의 세계에 관심이 있다면 금방 알아낼 수 있는 개념들이다. 애초에 순위를 나열하기 좋아하는 중원인들의 특성상 그런 개념은 다른 이름으로라도 퍼지게 되어 있었다.
“무공도 모르는 것들이 입만 털어 대는구나.”
“응? 지금 나보고 한 말이…….”
퉁명스럽게 들려오는 비아냥에 고개를 돌린다.
“어, 그래. 너한테 한 말이다.”
“…….”
자연스레 눈을 깔고 말았다.
평균보다 머리 하나는 큰 중년 사내. 얼굴에는 그의 일생이 어땠는지 알려 주는 흉터들이 가득했다. 거기다 허리춤에 찬 검을 보건대 무림인이 확실하다.
“뭐, 그리 쫄 필요는 없다.”
“아… 어…….”
사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누군가 흉터 가득한 중년인을 알아보는 이가 있었다.
“설마 천풍검객(天風劍客) 광세웅 대협?”
“사천에서도 날 알아보는 자들이 있군.”
“사천이든 아니든 광세웅 대협을 모르면 되겠습니까? 낭인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자라 꼽히는 광 대협을 모를 수가 없지요!”
광세웅은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했지만, 내심 기분이 좋았다.
자신이 누군지 직접 밝히는 것보다 이렇게 누군가 자신을 알아보는 게 그림이 더 좋았다. 그래야지 자신의 발언에 무게가 실린다.
“천풍검객이라면…….”
“북경의 그 해결사……?”
수군대는 소리가 퍼져 나간다. 누군가는 그의 이름을 들어 보았었다. 얼굴을 몰랐을 뿐이다. 천풍검객이라는 별호를 처음 듣는 이가 있다면, 그들은 알아서 주위 사람들에게 천풍검객이 얼마나 대단한 낭인인지 직접 설명하고 있었다.
천풍검객은 가만히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길 기다렸다.
정치라는 게 이렇다. 굳이 나서지 않아도 밑밥을 던져 놓으면 아랫것들이 알아서 분위기를 잡아 준다. 그걸 잘 이용하면 백 마디를 해야 할 것도 한 마디로 해결할 수도 있다.
그는 처음 말을 섞었던 사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화경이라면 그 아래 경지에게 패배할 리가 없다고 했던가?”
“어… 예…….”
당황했지만 그래도 은근히 친절함을 담은 천풍검객의 말에 대답한다.
그러자 천풍검객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을 뿐이다.
“진짜 화경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진짜 화경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환영신창을 꺾었던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좌중에게서 환영신창의 이름이 나오자 천풍검객이 혀를 찼다.
“그가 과거에는 꽤 유명한 무인이긴 했지. 창 하나로 수많은 마두를 격퇴한 낭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정말 화경에 가까운 고수였을까?”
“……!”
모두가 깜짝 놀란다.
예상과는 달리 환영신창이 그리 대단한 고수가 아니었다면? 황극린이라는 사내가 그를 이겼다고 화경에 올랐다고 말할 수가 없게 된다.
하지만 이곳은 중강현이다.
황극린과 환영신창의 비무를 직접 본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무위가 평범한 무인들과는 달랐다는 것을 말이다. 군데군데에서 그런 목소리가 튀어나오자 이제는 천풍검객이 아닌 호리도(狐狸刀) 좌혼지가 등장했다.
쌍둥이라 불릴 정도로 둘은 닮아 있었는데, 얼굴이 아니라 분위기가 그러했다.
특히 입은 옷이 비슷해서 분간하기가 쉽지 않았다. 명확하게 다른 점은, 그는 허리춤에 도(刀)를 차고 있었다.
그는 북경에서 황극린과 소림사의 소문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왔다.
안 그래도 객잔 등지에서 황극린이라는 후기지수의 명성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열띤 작업을 펼치고 있던 두 사람이다.
왜 그랬냐고?
개인적인 원한은 없다.
단지 뭣도 없는 후기지수가 화경에 올랐다느니 천하칠대고수에 버금가는 고수라느니 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리고 그들은 황극린에게 질투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무지한 중원인들에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알려 주기 위해서 자신들이 나섰다고 여겼다.
“환영신창이 그리 대단한 고수였다면 왜 돌연 은퇴를 선언했을까?”
좌혼지의 말에 광세웅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용살단? 대룡상단? 이름은 거창하지만… 북경에서는 환영신창이 모종의 사정으로 무림에서 손을 씻고 나갔다고 판단하고 있었소.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아마 내상을 입었기에 제대로 강호에서 활동할 수 없었을 거라고 판단하고 있었소.”
“……!”
“화경에 가까운 고수? 상식적으로 그러한 고수가 상단의 밑으로 들어가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천하칠대고수라 불리는 이들의 면면을 잘 보시오. 모두 한 문파의 장문인이거나 거대 가문의 수장들이오.”
그러고 보니 화경의 고수라 불리는 이들은 출신이 화려하다.
남궁세가의 가주, 화산파의 장문인, 소림의 방장…….
그들의 출신만 들어도 그들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 예상이 된다. 그런데 대룡상단……?
분명 손꼽히는 부호였지만, 사실 명문거파와 비교하기엔 초라하다고 할 수 있었다.
“환영신창의 명성이 부풀려졌기에 당연히 ‘수라공자’의 명성 또한 과장된 것이 아니겠소?”
“북경에선 모두가 이렇게 여기고 있소.”
좌혼지의 말에 광세웅이 화룡점정을 찍었다.
북경.
무림맹이 있는 정주가 강호의 중심이라면, 북경은 국가의 도읍이었다. 조금 다른 성질이었지만 중강현과 북경의 차이는 크다. 한 번이라도 북경에 가 보았다면, 중강보다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 수 있었다. 사천성의 성도만 하더라도 중강현보다 훨씬 웅장한 건물들이 즐비하다.
북경에서 당연한 정보라면 어느 정도 신뢰가 간다.
웅성웅성!
광세웅과 좌혼지의 말에 주변인들이 모두 혹하고 있었다. 심지어 황극린과 환영신창의 비무를 직접 보았던 이들도, 이들에게 설득당한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그들이 무공의 고수가 아니라서였다. 애초에 무공을 익혀 본 경험도 없었으니 그들이 보여 줬던 전투가 얼마나 수준이 높은지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니 잘 지켜보시오.”
“무림맹의 철혈검대는 진짜지. 내가 청명쾌검 대협을 예전에 만나 봤었는데… 그 실력은 참으로 대단했소. 거기다 종남의 장로가 아니오?”
“그렇지. 환영신창과는 다르게 무림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진짜 고수지.”
모두가 설득된다.
황극린이 화경의 고수라면 당연히 청명쾌검에게 이길 것이라는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
북경에서 온 두 낭인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분위기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마주했다. 이미 여론은 흔들리고 있다. 여기서 황극린이 패배하기만 하면… 그의 명성은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이렇게 한다고 그들이 얻는 게 있느냐고?
당연히 있다.
그들의 말이 맞았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 얼마나 짜릿한 쾌감을 선사해 주는지 모른다. 아무도 몰랐던 것을 자신들이 먼저 알고 있었으며, 무지한 백성들을 계몽했다는 게 얼마나 보람찬 일이던가?
그렇게 반전된 철강무관의 분위기 속에서.
한 사내가 등장했다.
“별 쓰레기 같은 새끼들이 입만 나불대고 있네.”
“……?”
북경의 두 낭인은 오랜만에 쌍욕을 들어 보았다.
의아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리니, 오랜만에 익숙한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광견?”
“그래, 이 새끼들아.”
낭인들과 광견살검 구자광의 살기 어린 눈동자가 부딪친다.
“큭, 요즘은 명견이라 불린다던데.”
“그러게… 주인의 진짜 모습을 간파하니 으르렁대는 꼴이 귀엽군.”
과거였다면 광견살검은 그들의 도발에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았을 것이다. 일대일로는 과거에도 광견살검이 두 낭인보다 강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합공한다면 광견살검은 결코 이겨 낼 수 없었다.
하지만 구자광은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릴 뿐이다.
가소롭다는 듯이 광세웅과 좌혼지를 바라본다.
“눈깔이 있다면 장식품으로 가지고 있지 말고 잘 봐라. 우리 장로님이 얼마나 강한지 말이야. 사과는 그 이후에 듣도록 하마.”
광견살검이 당장 검을 뽑지 않았다는 게 놀랍긴 했지만…….
“그럼 내기할까?”
북경에서 온 낭인 광세웅이 말했다.
광견살검은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뭘 걸래? 네 목을 걸래?”
광견살검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두 낭인은 약간 당황했지만… 기세에서 밀릴 수는 없었다. 기껏 만들어 놓은 여론이 반전될 수도 있다.
“좋지. 오늘이 미친 개의 목을 자르는 날이로구나.”
“재밌겠군! 크크크!”
광견살검이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내공을 담아 크게 소리쳤다.
“자, 여기 있는 모두가 증인이오! 우리 장로님께서 이기면 이놈들의 목숨은 내 것이 되는 것이오!”
“우오오오오-!”
그로써 내기가 성립되었다.
심지어 철혈검대의 대원들도 이곳을 주목하고 있다. 두 낭인은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여기서 물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청명쾌검이 이기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 * *
‘머저리 같은 놈들이 꼬였군.’
청명쾌검은 광세웅과 좌혼지를 알고 있었다. 낭인으로선 제법 실력이 있는 자들이다. 만약 무림맹에 입맹했더라도 꽤 높은 자리까지 올랐을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자유분방하게 낭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광견살검도 당연히 알고 있다.
과거 몇 차례 부딪친 적이 있었지만, 광견살검은 최소한 한 수 이상은 청명쾌검의 아래였다.
‘상관없다. 저깟 놈들을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청명쾌검 장서이가 비무장 위로 오른다.
황극린 또한 잘난 얼굴을 드러낸 채로 중앙으로 왔다. 두 사람이 예의상 포권지례를 하여 인사했다.
“황 소협, 비무에서 지면 수하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겠소?”
저리 큰 소리로 내기한다고 떵떵 소리쳤으니 황극린도 당연히 그 내용을 들었다.
“당신이 걱정할 필요는 없소. 당신이 지금 걱정해야 할 건…….”
황극린의 시선이 두 손을 모으고 비무장을 바라보는 비종문주에게로 향했다.
그가 비무에서 이기면 비종문주와의 거래가 모두 탄로 날 것이다.
“그럴 일은 없다, 애송아.”
속삭이듯 말하는 청명쾌검.
그가 검을 뽑았다.
그러고는 호기롭게 소리친다.
“다섯 수!”
관중석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선배 된 도리로 후배와 비무하며 전력으로 싸울 수는 없는 법! 다섯 수를 양보해 주도록 하겠소이다!”
“오오오오-!”
참된 선배의 자세가 아니던가?
관중은 대협을 추앙한다. 지금 비무장 위에서 보여 주는 청명쾌검의 자세가 바로 대협의 풍모였다.
다섯 수나 양보해 주다니?
거기서 황극린이 패배한다면?
그가 기껏 환영신창을 이기고 얻은 명성이 무너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멋지다! 청명쾌검!”
“최강 철혈검대!”
청명쾌검의 선언에 이미 관중석의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모두가 그의 승리를 기원하는 듯했다. 물론 직접 황극린의 비무를 본 이들 중에서는 그건 좀 무리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런 말을 내뱉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황극린이 입을 열었다.
“선배의 배려에 감사드리오.”
“당연한 배려일 뿐!”
비무의 심판으로 참석한 청성의 장로가 한 손을 치켜들었다.
“그럼 비무를 시작하겠소이다!”
모두가 황극린을 주목한다.
그는 어떤 모습을 보여 줄까? 정말 북경에서 온 낭인들의 말대로 황극린과 환영신창의 명성이 과장된 것일까?
황극린의 손에서 뇌광이 번뜩인다.
쿠르응-!
콰지직, 콰지지직-!
딱 봐도 위협적인 광채에 모두가 경탄한다. 황극린의 무공은 예술과도 같은 검법보다 확연히 다른 면이 있었다. 저것이 그 유명한 뇌불의 무공이라는 사실 또한 관중을 흥분케 했다. 종남의 장로는 황극린의 뇌전을 어떻게 막아 낼 것인가?
그렇게 모두가 흥분한 가운데.
몇몇 이들은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뭐야, 저건……?’
청명쾌검이 기겁하며 검강을 발현한다. 다섯 수를 내어 준다고 하여 내공을 사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방어는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아니, 저 찬란한 뇌광을 보면서 내공을 이용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잠시만, 이건…….’
황극린의 손에 맺힌 광채가 급속도로 강해진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선다. 특별한 속성이 깃든 내공들의 무서움은 그 파괴력에 있었다.
‘환(環)!’
거기다 더 큰 문제는.
그의 권강이 환의 묘리를 담고 있다는 걸 청명쾌검은 단번에 깨달았다. 검강 하나를 발현하여 유형화하는 것도 어렵다. 하지만 여러 겹의 고리로 활용하는 건… 정말 화경의 경지만이 펼칠 수 있는 기예다.
찰나의 순간.
그의 머릿속엔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막을 수 있을까?
정말 저게 권강인가?
황극린이 정말 화경의 경지에 오른 건가?
다섯 수를 괜히 양보…….
찰나의 순간일 뿐이다.
황극린이 앞으로 나아갔다.
“……!”
청명쾌검은 저도 모르게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초식을 펼쳐 낸다.
비룡십팔쾌검(飛龍十八快劍) 제18초 쾌류무영선(快流無影線).
이것이 아니라면 저 뇌전을…….
‘절대 못 막는다!’
콰릉-!
황극린은 지체하지 않고, 주먹을 뻗었다.
그의 손에는 단순한 뇌격이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뇌룡이 입을 벌리고 먹잇감을 삼키는 듯이…….
“으아아아악-!”
다섯 수를 양보해 주겠다는 그의 약조는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뇌룡과 종남의 쾌류무영선이 부딪쳤다.
* * *
“…….”
“…….”
비무가 끝이 났다.
모두가 저마다의 기대를 안고 있던 비무는 허탈할 정도로 쉽게 승부가 결정되었다.
“어이.”
광견살검이 두 낭인을 바라보며, 사악한 미소를 머금었다.
“각오는 했지?”
광세웅과 좌혼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