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152화 (152/316)

152화 공론화

소림사.

무림의 태산북두라 불리며 강호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명문거파. 그들의 행보는 작은 발걸음이라도 천지를 진동시킨다고 한다. 당장은 천화련에 밀려 천하제일의 문파 자리를 내어 주긴 했지만, 강호인들은 믿고 있었다. 소림의 숨겨진 힘을 드러내면 다시금 그 자리를 되찾을 수 있다고 말이다.

최근 아미파와의 분쟁으로 조금 시끄럽긴 했지만, 두 문파는 결국 합의점을 도출하여 적정한 선에서 타협을 보았다. 아미파는 불혼패엽공을 되찾긴 했지만 결국 소림사의 사과는 듣지 못했다. 오히려 아미파는 소림사에 공식적으로 감사를 표했다. 아미파의 무공을 지켜 주었기에 감사하다고 했던가?

물론, 아미파가 진심으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무림인들의 관심 밖이었다.

소림사는 정파 무림의 자존심이나 다름없었으며, 그들의 명성이 흔들리는 걸 자신의 명예가 공격받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렇기에 소림사의 다음 행보가 중원의 주목을 받았다.

소림사는 그 전까지 비밀리에 만뇌문에 ‘혈풍뇌전신공’을 반환하라 요구했다. 사본이 아니라 진본을 요구했었다. 혈풍뇌전신공이 소림사의 절세무공 중 하나인 대반야금강공에 기초했다는 걸 알 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뇌불은 소림사의 출신이었고, 파계승이라 하더라도 무공의 뿌리가 본래 소림사에서 나왔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소림사는 명분도 가지고 있었다.

세 차례의 걸친 반환 요구에도 불구하고.

만뇌문은 그것을 무시했다.

그리고 아미파와의 대립이 끝나는 순간, 소림사는 공식적으로 만뇌문에 혈풍뇌전신공의 반환을 요구했다. 이미 소림사는 아미파의 불혼패엽공을 반환 받았다. 그들의 명분은 확고했다.

“만뇌문이 이번엔 어떻게 나올 것 같으십니까?”

무림맹 내성(內城) 비원각(祕苑閣).

맹의 간부들이 차를 마시며 여러 정보를 교환하는 장소였다. 비원각에서는 소림의 십팔나한(十八羅漢) 중 하나인 안평대사(安平大師)와 종남의 장로이자 철혈검대(鐵血劍隊)의 대주 청명쾌검(淸名快劒) 장서이가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아미타불… 만뇌문은 순리대로 행동할 것입니다.”

“정녕 그렇게 생각십니까?”

“그렇습니다. 만뇌문은 도리에 어긋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으음.”

안평대사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소림사는 무림맹을 통해 공식적으로 만뇌문에 무공의 반환을 요구했다. 실리적인 계산이었다. 소림사가 직접 중소문파를 압박하는 모습은 그리 좋지 않았다. 소림사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나마 평화적인 방법으로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굳이 자라나는 새싹을 밟아 버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당장 소림사에게 만뇌문은 대룡상단에게 이겼더라도 그 정도 수준일 뿐이었다.

“뭐, 안평대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대주께서는 다르게 생각하시는지요?”

“전 만뇌문이 반환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 그리 생각하시는지요?”

안평대사는 참으로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만뇌문의 이제까지의 행보로 보면 절대 호락호락하게 당할 문파는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소림사가 만뇌문에 밀릴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대룡상단의 환영신창을 죽여 버린 것에서부터 알 수 있지요.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사람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또한, 대룡상단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얻어 냈다고 하니…….”

“대주께서는 만뇌문이 소림에게도 만용을 부릴 거라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렇습니다.”

철혈검대의 대주 장서이는 만뇌문을 그리 좋게 보진 않았다.

무림에는 엄연히 배분이 있으며, 전통이 있었다. 만뇌문의 장로인 황극린이 재능을 믿고 너무 까부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장서이가 아니더라도 만뇌문의 행보를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도 많았다.

물론, 반대급부로 만뇌문을 응원하는 세력 또한 만만치 않게 많긴 하지만 장서이는 만뇌문의 만용이 도를 지나치다고 여기고 있었다. 무림의 평화는 각자 주제를 아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만뇌문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게 질투 따위의 세속적인 감정이 아니라 중원의 평화를 위한 감정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안평대사는 그의 부정적인 감정을 읽어 냈지만, 딱히 그를 탓하지는 않았다.

인간의 감정을 강요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면 흘러가는 대로 두면 된다. 오죽하면 이런 밤중에 자신에게 만남을 청했겠는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든 매듭은 순리대로 풀어질 것입니다.”

“예, 소림이 알아서 잘하겠지요. 하나, 소림을 돕고 싶은 마음은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소림을 돕고 싶다.

그게 장서이가 안평대사를 찾은 이유였다.

소림사는 무림맹을 통해 공식적으로 만뇌문에 의사를 전달했다.

무림맹은 중재자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한다. 만뇌문이 있는 사천성에 맹의 정예가 파견될 것이라는 소리였다. 철혈검대가 나서서 만뇌문의 고얀 버릇을 고쳐 주고 싶었다.

“소림은 일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만뇌문에서 주제를 알고 진본을 반환한다면… 저 또한 예를 가지고 그들을 대할 겁니다. 하지만 만약의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대룡상단에게 했던 것처럼 대뜸 선전포고 한다면…….”

“아미타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렇겠지요.”

차마 만뇌문이 굴욕적으로 진본을 반환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안평대사는 작게 한숨을 내쉰다.

“대주께서 원하신다면 원로분들께 대주님의 뜻을 전달토록 하겠습니다.”

“오오, 그게 정말이십니까?”

“예, 하나 미리 말씀드렸듯이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굳이 분란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당연하지요. 제가 무림맹에서만 30년 넘게 있었습니다. 앞뒤 분간도 하지 못하고 나서지는 않을 겁니다.”

안평대사가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미타불, 그럼 빈승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예, 시간이 너무 늦었군요.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

안평대사가 물러간다.

소림사의 고승들은 규칙적인 생활을 고집한다. 무림맹의 밤은 이제 시작이었지만, 안평대사는 잠을 청하러 갔다.

철혈검대의 대주 장서이가 창밖에 뜬 만월을 보며, 차를 머금었다.

왜인지 술처럼 달게 느껴진다.

“그 잘난 낯짝을 볼 수 있겠군.”

장서이는 누군가가 추락하는 모습을 볼 때가 가장 좋았다.

그는 잘난 것 없는 출신에서 종남의 속가제자로 시작했다. 그런데도 장로의 자리까지 오른 것은 오롯이 그의 재능과 노력 덕분이다. 당연히 그 자신은 무림의 누구보다 노력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는 재능과 출신 배경만을 믿고 나서는 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 장서이가 보기에 황극린은 너무 주목받고 있었다. 주제에 비해 과한 관심이었다.

“백의신룡(白衣神龍)과 무천신룡(武天新龍)의 마지막도 볼만했었지.”

두 사람은 마두 몇 명의 목을 꺾으며 과거 무림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칠룡에 올라야 한다느니, 언젠가 미래에 천하칠대고수가 될 것이라 말하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장서이가 보기에 두 사람은 쥐뿔도 없는 실력으로 운이 좋아서 주목을 받았을 뿐이었다. 과한 관심은 그들에게 자만심을 심어 주었고, 넘봐선 안 되는 것을 가지려 했다.

‘화경의 경지에 올랐다는 그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만천하가 알게 될 것이다. 차라리 만뇌문이 무공의 반환을 거절했으면 좋겠구나. 클클.’

그럼 명분이 생긴 철혈검대는 만뇌문에 무림의 무서움을 알려 줄 수 있으리라.

‘남궁세가 놈들이 이것도 옹호할 수는 없을 거다.’

그가 또 짜증 났던 것은 만뇌문의 잘못을 옹호하던 세력 중에 남궁세가가 있다는 것이었다. 무림에서 오랫동안 육대세가로 군림했던 가문이다. 그런 가문이 만뇌문을 옹호하고 있으니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이번 사안은 무조건 만뇌문의 잘못으로 몰고 갈 수 있다.

무림공적이었던 뇌불의 무공을 운이 좋게 얻어 강호에서 유명세를 떨치는 황극린. 그에게 자신의 주제가 어떠한지 알려 줄 수 있으리라.

* * *

황극린은 오랜만에 청성산에 올랐다.

장문인이 대화를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장문인이 만뇌문에 들러도 되겠지만, 아직 황극린은 외부인에게 문파 내부를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청성파와 협약 관계라고 해도 완전한 신뢰를 구축한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오랜만이군. 앉으시오.”

“예, 장문인.”

“으음… 요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계시오?”

“예, 알고 있습니다.”

무림맹을 통해 공론화를 했다.

만뇌문이 뇌불의 무공을 이어받아 익히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만뇌문의 황극린이 강한 것이다. 그가 ‘수라공자’라는 별호를 얻은 이유는 뇌불의 사특한 마공을 익혔기 때문이다. 얼른 무공을 회수해야 한다.

심지어 극단적인 의견 중에서는 황극린의 무공을 폐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언젠간 그도 뇌불처럼 무림에 피바람을 몰고 올 것이라나?

황극린도 귀를 닫고 있지 않았으니 소문은 들었다.

당연히 그러한 의견에 분노한다거나 하진 않았다. 반대로 만뇌문을 옹호하는 목소리도 분명 있었으며, 솔직히 뇌불이 무림공적이었던 건 사실이지 않은가? 사실 비동에 갇혀 있으면서 성격이 많이 죽은 편이지, 과거의 뇌불은 확실히 대마두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황극린은 저들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힘을 기르고 있었다.

만약 소림의 힘이 약했다면 어땠을까?

아미파의 불혼패엽공이 소림사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중원 무림은 소림을 지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림이 쌓아 온 업적과 힘은 그들에게 비난을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든다.

소림의 적이 되는 것도 무서웠고, 소림이라면 무언가 다르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격언 중에서 공든 탑이 무너지기는 쉽다고 했지만, 그건 어떤 재료로 어떻게 쌓아 왔느냐가 관건이었다. 소림이 쌓아 올린 명성은 절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어쩔 생각이오?”

청성의 장문인은 난감한 상황이었다.

만뇌문의 미래를 보고 함께 가기로 했다. 하지만 석 달 만에 이런 사건이 터졌다. 만뇌문의 무공이 뇌불의 것이라니?

뇌불이 누구던가?

무림맹주든 뭐든 들이박고 보는 성격이었고, 결국 온갖 사건 사고를 일으켜 파계승이 되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이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양 볼이 얼얼하군.’

천하에 청성파 장문인의 뺨을 때릴 사람이 누가 있으랴?

하지만 과거 태을종객은 장문인이 아니었다. 그도 평범한 후기지수 시절이 있었고, 뇌불에게 제대로 얻어맞은 경험이 있었다. 당시 뇌불의 뒤에는 소림이 있었고, 뇌불도 그 사건으로 소림에서 면벽 수련이라는 벌을 받기도 했지만…….

“그건 그렇고 정말 만뇌문이 뇌불… 그의 무공을 이어받은 것이오?”

“예, 제가 뇌불의 비동을 발견하고 그의 심득을 이어받았습니다.”

“허허허, 뇌불이 익힌 무공은 익히면 심성을 제어할 수 없는 마공이라 들었거늘…….”

“장문인께선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태을종객이 진중한 눈으로 황극린을 마주한다.

그에게선 악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사파의 무공을 익힌 이들은 가만히 있어도 태가 난다. 눈빛도 바뀌고, 행동거지도 괴팍해진다.

하지만 그가 만나 본 황극린은…….

“아니오, 솔직히 뇌불의 무공의 기원이 소림의 것이지 않소? 그걸 개조한 무공이 뇌불의 무공이니 솔직히 마공일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하오. 특히 황 장로를 직접 마주한 내 입장은 그렇소이다.”

태을종객의 진심이었다.

그가 만뇌문을 허락한 이유는 만뇌문이 청성파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이기도 했지만, 황극린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최소한 악인과 범인은 구분할 수 있다고 여겼다.

황극린이 협의지사는 아닐지는 몰라도, 악인은 더더욱 아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후우, 청성은 분명 만뇌문을 도울 것이오. 약조는 약조니까. 하나, 청성이 만뇌문을 위해서 소림과 전면으로 싸울 수는 없소. 따지고 보면 구파일련끼리의 약조가 만뇌문보다 먼저니까 말이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막상 황극린에게 그리 말하고 보니 태을종객은 그에게 약간 미안하긴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작정이오? 진본을 내어 주고 끝날 수 있다면 솔직히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오. 소림사는 강호의 도리를 알고 있소.”

“그건 평화가 아니지요. 일방적으로 뺏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황 장로도 알고 있어야 할 것이오, 소림과 대룡상단은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소림은 거기서 끝내지 않을 겁니다. 아마 무공을 내어 주면 만뇌문을 관리하려 들겠지요.”

태을종객의 한숨이 깊어진다.

실상 무공서만 내준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긴 했다.

“무림맹에서도 철혈검대를 파견하기로 했다오.”

“철혈검대 말입니까?”

“그렇소. 종남의 장로인 청명쾌검 장 대협이 대주로 있는 전투대라오. 아마 중재자로 올 테지만… 주의해야 할 것이오. 내가 본 장 대협은 그리 만만한 사람은 아니오. 성격도 솔직한 말로 그리 좋지 않고.”

“호오.”

황극린이 관심을 보인다.

태을종객은 그가 무엇에 관심을 보였는지 생각해 본다.

“청명쾌검 대협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잠시만, 설마?”

“명분은 만들면 되지요.”

논점을 흐리고, 명분을 만든다.

중원에선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사악한 대마두 뇌불이 익혔던 마공이라는 쟁점을 바꿔야 한다. 대룡상단에게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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