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완료
황극린이 꺼낸 것은 혈금유와 새로이 만뇌약방에서 개발한 ‘내상약’이었다. 내상이라는 건 외상보다 훨씬 치유하기 어렵다. 한번 내상을 입으면 자연적으로 치료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정석이라 할 만큼 까다로운 부분이었다.
중원 무림에는 내상약이 존재하긴 하지만, 만들기도 까다로울뿐더러 들어가는 재료도 만만치 않았다. 과장해서 말하면 내상약은 영약에 준하는 단약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평범한 무인은 내상을 입더라도 가만히 기다리는 게 상책이었다.
“그건……?”
“혈금유와 만뇌약방에서 개발한 내상약입니다. 아직 유통하지 않는 상품이지요.”
“그걸 준다는 말이오?”
“청성파에는 이윤을 거의 남기지 않고 제공하겠습니다.”
“…….”
그냥 준다고 해도 고민했을 텐데, 돈을 받겠다고?
도가 계열의 문파라고 해도 돈 욕심이 없는 건 아니다. 특히나 장문인은 수많은 제자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었다. 당연히 돈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만뇌약방은 대규모로 단약을 유통할 생각이 없습니다.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가치가 높아질 겁니다. 청성파에서도 연단을 하고 있을 테지만… 내상약이나 외상약을 만들 정도로 여유가 있진 않겠지요.”
혈금유는 청성파도 이미 한번 구해서 써 보았다.
효과는 대단했다. 소림의 옥령산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최근 청성산에서도 시중에 풀리는 혈금유를 비축하고 있는 중이었다.
“청성파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제공하겠습니다. 물론, 청성산이 약을 납품 받고 다른 곳에 팔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말입니다.”
“당연히 그럴 일은 없을 것이… 크음, 하지만 만뇌문이 청성산에 머무는 것을 허락한다면 강호인들이 청성을 비웃을 것이오.”
장문인의 말이 맞았다.
만약 소림의 숭산에 다른 문파가 터를 잡는다? 청성파는 소림의 위세가 예전 같지 않다며 한마디 거들었을 것이다. 이건 문파의 자존심이 달린 문제였다.
“강호인들이 비웃는다고 해도 전 청성이 흔들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청성파만 당당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것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긴 했지만…….
“만뇌문은 계속 성장할 겁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약조드립니다. 만약 청성파에서 만뇌문과 교류하겠다고 하신다면, 만뇌문은 청성산의 다른 곳을 점거할 생각이 없습니다. 저흰 지금 공간이면 충분합니다.”
황극린이 고개를 돌린다.
“검을 가져와도 되겠습니까?”
“검 말이오?”
장문인실에선 병기를 소지할 수 없었다.
“예.”
“그러시오.”
어차피 황극린은 검이 아니라 권을 사용한다. 딱히 문제될 것은 없었다. 황극린이 장문인실을 지키는 무인에게 맡겨 두었던 검을 가져온다. 그리고 장문인에게 건네주었다.
“어떻습니까?”
“확실히 좋은 검이오.”
청성파의 장문인은 검으로 경지를 이룬 무인이다. 무엇이 좋은 검인지 눈으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손으로 잡아 보니 무게도 적절하고,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금자 다섯 냥입니다.”
“이게……?”
“만뇌문은 대장간도 운영할 겁니다. 물론, 이것도 소량으로만 물량을 유통할 생각입니다. 청성산엔 이 정도 수준의 검을 한 달에 다섯 자루 이상은 납품할 수 있을 겁니다. 만뇌문과 청성파의 우정이 영원하다면… 더 좋은 상품을 받아 보실 수 있겠지요.”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말은 무림인에게 통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경지가 높아질수록 더 좋은 병기를 찾는다.
고수가 된다는 말은 더 많은 내력을 다룬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충 두들긴 철은 내력을 주입해 보면 티가 난다. 금세 검날이 무뎌지고, 부서지기도 한다.
“만뇌문이 다른 문파와 이러한 연을 맺길 원하십니까?”
“흐음…….”
구미가 당긴다.
솔직히 말해서 만뇌문이 점거한 곳은 청성산의 북쪽 절벽 부근이다. 청성파의 제자들은 그곳으로 이동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는 절벽에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런 장소를 내어 주고, 만뇌문이 판매하는 상품을 저렴하게 구매할 권리를 얻는 거다.
거기다…….
‘한령심법이라…….’
그것을 연구하면 청성의 내공심법은 또 어떻게 발전할까?
한령심법이 다른 구파일련의 손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최근 소림사와 아미파가 싸우는 것도 ‘불혼패엽공’이라는 내공심법 하나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 무공은 아미파나 소림사에서도 최고의 무공이라 말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두 문파는 자존심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왜 굳이 청성산을 선택한 것이오?”
장문인의 의문은 당연했다.
왜 많은 산 중에서 청성산이란 말인가?
황극린은 굳이 속일 생각이 없었다.
“사실 저희가 머무는 곳은 흑사회가 본거지로 사용했던 장소입니다. 제가 흑사회를 처리하던 도중 발견했습…….”
“뭐, 뭐라!”
장문인이 발작하듯 자리에서 일어선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린가? 흑사회? 흑사회가 청성산에 터를 잡고 있었단 말인가?
흑사회가 어딘가? 온갖 잔혹한 짓을 저지르며 흑도에서도 악독함이 도를 지나치다는 원성을 듣던 문파였다. 거기다 어찌나 잘 숨어 있었는지, 무림맹에서 토벌을 하려 했지만 결국 본거지는 찾아내지 못했었다.
“흑사회? 지금 그게 사실…….”
“예, 사실 중원에 공표할까 하던 참에 대룡상단과 좋지 않은 일로 엮여 황급히 이곳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몇몇 분들의 도움을 받아 진법도 개조할 수 있었지요.”
“흑사회가 청성산에…….”
장문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지금 만뇌문이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흑사회가 청성산에 머물렀다는 소문이 중원에 퍼진다면? 청성파의 명성은 땅에 떨어지는 것도 모자라 지하로 내려갈 것이다.’
여기서 선택해야 한다.
만약 만뇌문을 몰아내려 한다면…….
꿀꺽.
“만약 청성이 허락하지 않으면 어쩔 생각이시오?”
당연히 황극린은 여러 가정을 했다.
솔직히 청성파가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리라 생각했다. 한령심법의 제공과 만뇌문이 개발한 상품을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조건을 붙였다. 솔직히 여기까진 청성의 기분 풀어 주기에 불과하고, 요점은 흑사회의 본거지가 청성산에 있었다는 점이다.
“청성과 우애를 계속 유지했으면 좋겠습니다.”
황극린은 가타부타 청성을 협박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황극린의 말이 청성 장문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수라공자… 역시 범상치 않은 사내로군.’
당연히 청성파가 작정하고 만뇌문을 처리할 수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청성엔 명분이 없었다. 만약 싸운다면 흑사회와 청성파가 엮여 있었다는 소문이 나돌 것이 분명하다.
선택지는 정해져 있었다.
사실 흑사회가 머물던 장소였다고 먼저 말을 했어도 장문인의 선택지는 하나였다. 이건 밝혀져서는 안 되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만뇌문은 청성파와 대립하는 것을 피하려고 여러 제안을 해 왔다.
황극린의 의도대로 청성의 장문인은 만뇌문을 나쁘게 보지 않았다.
오히려 좋게 보고 있었다.
“며칠만 시간을 주시오. 나 혼자 바로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 같소.”
그렇다고 해도 당장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원로들과 회의도 해야 했으며, 이제는 무림에서 은퇴하여 청성산에서 도를 닦으며 살아가고 있는 청성의 전대 장문인께도 말씀은 드려야 한다. 그래도 장문인 태을종객은 만뇌문을 받아들이자는 태도를 견지할 것이니 사실상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긴 했지만 말이다. 나머지는 절차에 불과했다.
“예, 기다리겠습니다.”
“그런데 만뇌문에 어떻게 말을 전하면 좋겠소?”
“북쪽 절벽에 사람을 보내십시오. 그럼 일각 내로 사람이 나갈 겁니다.”
“알겠소.”
그 이후에도 조금 더 대화를 나눈 두 사람.
황극린은 내상약과 혈금유 그리고 초우가 만든 검을 놔두고 청성산을 내려갔다. 장문인은 황극린이 남기고 간 물건들 중에서도 특히 내상약을 주목했다.
‘그건 그거고… 일단 효과를 볼까?’
청성파는 전쟁을 치르지 않았지만, 수련 중에도 내상을 입은 제자들이 많았다.
한번 악효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리고 효과가 증명된다면 장문인의 발언에 더 힘이 실릴 수 있었으니까.
장문인이 발걸음을 옮긴다.
내상과 외상을 입은 제자들이 병석에 누워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자, 장문인!”
“됐다. 인사는 나중에 받으마.”
“죄, 죄송합니다…….”
태을종객이 무언가를 꺼낸다.
붉은색의 단약이었다.
“이걸 취하거라.”
“이건…….”
“내상약이다.”
“가, 감사…….”
“괜찮으니 가부좌를 틀어라.”
혹시 모르니 장문인은 직접 곁에서 제자의 진기가 어떻게 흐르는지 맥을 짚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내상으로 고통을 호소하던 제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내상약을 취했다. 장문인은 잔뜩 긴장하며 그의 맥을 짚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허어.”
장문인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온다.
‘외상약의 약효도 대단했지만… 이건…….’
연단술로는 무당파나 소림이 제일이었다.
그들이 만든 약들은 돈을 줘도 구하지 못하는 물건이 대다수였다.
그런데…….
‘대체 만뇌문의 의원이 누구길래 이런 단약들을 만들 수 있는 거지?’
만뇌문이 가져온 내상약은 연단의 명문이라 불리는 소림과 무당과도 쌍벽을 이룰 수준이었다. 조만간 가격을 올린다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청성파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내상약과 외상약을 매입할 수 있다. 만뇌문이 청성산에 자리를 잡는 것을 허락하면 말이다.
결정적인 계기는 역시 흑사회였다.
하지만 지금 장문인의 머릿속에는 그것보다 만뇌문과 연을 맺으면 얻을 이익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천화련.’
또한 그 이름이 떠오른다.
구파일방이라 불리던 무림의 체제를 단번에 부숴 버린 문파.
이제는 소림과 무당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할 수 없게 된 초거대 문파다. 솔직히 인정하기 싫었지만, 태을종객은 천화련이 정파 최고의 문파라는 걸 인정하고 있었다. 만뇌문을 떠올리면 천화련이 떠오른다.
언젠간 만뇌문도 천화련과 같은 수준의 문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들과 처음 연을 맺은 자신의 이름은 후대에 어떻게 기억될까?
제자의 안색이 훨씬 좋아진 것을 확인한 태을종객.
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원로들을 소집했다.
당연히 반대가 많을 테지만, 그가 작정하고 원로들을 설득할 것이다.
만뇌문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깨달았으니 말이다.
* * *
“혹여나 청성파와도 대립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역시 장로님이십니다!”
구자광이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구파일련은 자존심이 매우 강하다. 그들의 텃밭이라 할 수 있는 청성산에서 문파를 꾸려 나갈 수 있게 허락해 준 일은 사실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황극린은 그것을 해내고야 말았다.
“적을 많이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예, 장로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굳이 청성과 싸울 필요는 없지요! 하하하!”
사실 구자광은 솔직히 황극린이 나서면 청성파도 대룡상단처럼 무릎 꿇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만뇌문에는 뇌불 어르신까지 있지 않은가? 진법도 거의 개조가 완료되었다. 청성파의 장로들도 입구를 찾지 못했으니 만뇌문의 방어는 중원제일이지 않을까?
“하지만 진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시작이요?”
“그래.”
황극린은 개방을 통해 중원의 소식을 듣고 있었다. 최근 들어 아미파와 소림사의 회담이 잦아지고 있다고 했다. 타협에 조금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어쩌면 싱겁게 상황이 끝날 수도 있으리라.
만약 소림이 여유를 찾는다면 어떻게 나올 것인가?
더 큰 문제는 소림이 중원 무림에 만뇌문이 뇌불의 무공을 익혔다는 걸 공론화하는 것이다. 당연히 소림사의 편을 드는 문파가 대다수일 게 분명하다.
그런 상황이니만큼 황극린은 청성파와의 싸움을 최대한 지양했다.
다행히 청성의 장문인 태을종객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소림은 청성처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다.”
“소림과의 전쟁을 준비해야겠군요!”
구자광은 딱히 긴장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단지 열의를 잔뜩 내보일 뿐이었다.
“청성산에 온 뒤로 제자들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온후랑 청하는 벌써 뇌정신공의 6성의 경지에 올라섰습니다.”
“백건악은?”
“심법의 경지로는 5성이지만… 비무를 한다면 승률이 가장 높습니다.”
“그렇군.”
백건악의 재능은 흑살문에서 알아보았다.
그는 근성과 끈기로는 당시에도 교육생 시절의 황극린보다 더 뛰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가 죽지 않았다면…….
‘아마 백건악도 특급 살수를 노릴 정도로 성장했겠지.’
제자들의 성장을 가속하는 방법.
황극린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들의 발전은 결코 느리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황극린의 기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제자들을 연무장에 집합시키도록.”
“예, 장로님!”
구자광이 떠나가고 황극린이 목함을 챙긴다.
드디어 만뇌문만의 영약이 완성되었다. 이것을 만드는 데 상당한 지출이 있었지만, 제자들이 영약을 취해 성장한다고 생각하니 전혀 돈이 아깝지 않았다.
‘기왕 문파를 만들었으니.’
최고를 노리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