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거래
사마명이 만뇌문에 들어온 지 칠 주야가 지났을 무렵.
그는 참으로 희한한 것을 발견했다.
“도제들이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퀭한 눈빛으로 물어보는 사마명에게 대장장이 초우가 말한다. 최근 쇠뇌를 만드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의 예산이 들어가는지 확실하게 정리하고 있는 와중 알게 된 사실인데, 문도들도 아니고 가문에서 무구를 만드는 대장장이들이 무공을 익히고 있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내공심법을 익힐 기회를 주었으며, 여차하면 검법이나 보법 등도 알려 준다고 했다.
물론, 대장장이 일이 바쁜 와중에 다른 무공도 익히는 이는 한두 명에 불과하긴 했지만…….
사마명으로선 상당히 의외였다.
“예, 총관님. 모두 다 문주님과 장로님의 은덕이지요.”
“도제들이 무공을 익혀야 하는 사연이 있던 겁니까?”
“사연이랄 것도 없습니다. 도제들이 용광로에 고통받는 걸 보신 장로님께서 그에 맞는 내공심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작업 능률이 상당히 올라갔지요. 하하. 처음엔 반신반의한 것도 사실인데… 알고 보니 제가 익힌 내공심법보다 더 좋은 것 같았습니다.”
초우는 질투하지 않았다.
오히려 열심히 일하는 도제들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을 뿐이다.
사마명은 의아했다.
‘최상의 재료를 얻기 위해 돈을 흥청망청 쓰는 건 이해가 된다.’
사실이 그랬다.
만뇌문은 최고의 재료만을 엄선했다. 약재부터 병기를 제작하는 철과 목재까지 모두 다 최상급의 재료였다. 그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도제들이 용광로의 열기로 고생한다고 내공심법을… 알려 준다고?’
솔직히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특히나 사마세가의 방계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본가의 핍박을 직접 겪어 왔던 그였다. 무공이라는 건 제아무리 급이 낮다고 하더라도 지키려 하는 귀중한 보물이라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만뇌문은 다르다. 솔직히 무림에서 그리 대접이 좋다고 말할 수 없는 도제들까지 내공심법을 익히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절대 잡을 수 없는 기회이기에 도제들에게도 최대한 열심히 내공심법을 익히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엔 긴가민가하던 이들도 조금씩 몸이 달라지는 것을 확인하더니 하루에 한 시진 이상씩 꾸준히 투자하고 있지요. 그걸 보면 확실히 무공이라는 게 자기 자신을 갈고닦기 위해 만들어진 ‘기예’라는 걸 알 수 있겠더군요.”
오늘날 무림에서 무공은 단순히 무력을 강화하기 위한 용도로 활용되고 있었다. 물론, 도가 계열의 문파나 불가의 문파들은 정신적 수양을 위하여 무공을 익힌다고 하지만… 사마명이나 평범한 백성들이 보기엔 무림인들은 힘을 과시하기 위해 무공을 수련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
“확실히 무공이 자신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긴 하더군요.”
사마명 또한 무공을 익히고 있다.
비록 수준은 높지 않았지만, 무아지경으로 주먹을 휘두르고 있을 땐 무언가 간질간질한 것이 정신을 자극하곤 했다.
“일하시는 데 방해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아닙니다. 총관님 덕분에 조금 더 좋은 질의 상품을 더 싸게 매입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쌓여 있던 재고들도 정확히 파악하여 관리가 되고 있고요. 그 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제든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십시오.”
“예, 감사합니다.”
사마명이 초우의 대장간을 떠나간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갸웃한다. 초우의 마지막 말이 무언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실력이 있는 대장장이라고 하지만… 마치 문파의 주인과 같은 마음으로 날 대했다.’
총관이 문파에 도움이 되기에, 자신도 도울 게 있으면 돕겠다.
주인 의식.
도박장을 경영하고 있는 사마명은 알고 있었다. 사람의 관리가 얼마나 어려운지 말이다. 수하의 충성을 받는 것은 웬만한 계기로는 할 수가 없었다.
‘대장간뿐만이 아니었지.’
총관은 자질구레한 모든 일을 포장하고 요약하여 장로나 문주에게 보고한다.
칠 주야 동안 만나 본 만뇌문도들은 모두 저러했다. 모두가 만뇌문의 성장을 바라고 있었다. 갑자기 들어와 총관을 차지한 자신을 시기하기는커녕 도울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다.
물론, 광견살검 구자광처럼 조금 과격한 사내도 있었지만… 그 또한 다른 만뇌문도들의 진심과는 다르지 않았다.
사마명이 황극린이 거주하는 전각을 바라본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사마명의 어머니 표향도 그러했다. 진심으로 사람들을 따르게 했던 태산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따르고 싶은 사람이라…….’
세상을 비관적으로만 살아왔었다. 하지만 만뇌문에 있으니 왜인지 심장이 빠르게 뛰곤 한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곳은 그가 어릴 적 뛰어놀던 청상표국의 분위기와 많이 닮아 있었다.
“…….”
작게 한숨을 내쉰 사마명.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 만뇌문이 벌이는 사업이 워낙 많았기에 총관이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정말 많았다.
지금은 감상에 빠질 여유는 없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자신은 목적을 가지고 만뇌문에 들어왔지 않은가?
저들처럼은 될 수 없었다.
그래서도 아니 된다.
사마명이 두툼한 서류 뭉치를 들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 * *
요즘 청성산에선 기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마차들이 들어오는데 초입에서 다시 돌아간다?”
“예, 장로님.”
청성파의 장로 섬전검객(閃電劍客) 명재옥이 턱을 쓰다듬는다. 청성파가 터를 잡은 청성파는 몹시 넓었다. 모든 청성의 문도들이 경계를 서더라도 모든 구역을 감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온갖 광물이나 목재를 실은 마차들이 이동하는 걸 놓칠 만큼 수준이 낮지는 않았다.
과거 흑사회가 청성산에 숨어 있던 시절에는 당연히 소수의 인원만 극도로 조심한 채로 숨겨진 진을 통과하여 흑사의 은거지로 진입했었다. 매번 이동 경로도 변경했기에 오랜 세월 들키지 않았었다.
하지만 만뇌문은 떡하니 비슷한 경로를 이용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청성산에 누군가 똬리를 틀었다?’
섬전검객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떠오른다.
당연한 추론이었다.
“만뇌문이 청성산에 자리를 잡았단 말인가?”
“모르겠습니다. 제자들을 동원하여 수색했지만…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지나간 흔적은 발견했으나 어느 순간 뚝 끊어졌습니다. 마치 하늘로 솟아오른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하늘로 솟아올랐다는 걸 믿을 바에야…….
“진법으로 본거지를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크겠군. 내 직접 나서겠다.”
장로 섬전검객은 이미 초절정에 올라 있었다. 또한, 진에도 일가견이 있는 고수였다.
“예, 장로님.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청성파는 문도 여럿을 이끌고 의심되는 지역으로 이동했다. 마차가 지나간 흔적과 인간의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서 멈췄군.”
“예.”
바퀴 자국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수색해야 한다. 섬전검객은 눈을 감았다. 다른 청각과 후각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시각을 제한한다. 진을 수색하는 데 있어서 눈은 믿을 것이 못 된다. 기묘한 공간의 비틀림을 찾아내야 한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러한 흐름을 말이다.
그렇게 눈을 감고 꽤 오랫동안 이동하던 섬전검객이 한 장소에서 멈춰 선다.
“여기다.”
거대한 바위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바위에 손을 댄 섬전검객이 검을 뽑는다.
청성의 제자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감탄한다.
‘역시 장로님……! 단번에 진의 입구를 찾아내다니!’
‘대단하다!’
섬전검객의 일섬이 공간을 가른다. 번쩍함과 동시에 바위가 움푹 파인다. 검강을 이용하여 바위를 베어 낸다. 이 거대한 바위는 진을 구성하는 매개체가 분명하다. 그렇기에 바위를 건드리면 진의 입구도 드러나리라.
“…….”
하지만.
“응?”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섬전검객이 입술을 깨물었다. 호기롭게 검을 뽑아 위치를 찾아냈다고 공언했다. 거기다 수많은 제자가 감탄하며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그냥 바위잖아?’
장로로서 체면이 있었기에 최대한 티를 내지 않는다.
그의 검에선 검강의 찬란한 기운이 더욱 강렬한 빛을 발산한다.
“하아아아압!”
“오오오오-!”
“으하아아압!”
“오오……!”
그렇게 일각이 지난 후.
“…끄응, 여기가 아닌 듯하구나.”
섬전검객이 사실을 고백하고야 말았다. 그 또한 여러 진법을 겪어 보았다. 무림맹의 전투대에 소속되어 있던 시절에는 맹주전이나 천무서고(天武書庫)의 진법을 마주한 적이 있다. 진이라는 것은 보통 이질감이 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마차의 흐름이 뚝 끊긴 이곳에서 이질감이 느껴지는 장소는 없었다.
처음엔 커다란 바위가 의심되었지만, 지금은 전혀 이상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진법이 있긴 한 건가……?’
당연히 이곳까지 마차를 끌고 온 마부 또한 수소문했었지만, 알아보니 마부는 고용하지 않고 마차만 빌렸다고 했었다. 죽립을 깊게 써 제대로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계속 수색해라. 이상한 점이 있으면 보고하도록.”
섬전검객 장로의 명에 제자들이 부리나케 움직인다. 당연히 장로가 실패했다고 하여 비웃는 이들은 없었다. 감히 여기서 웃었다가는 사형제들에게 가르침을 빙자한 지독한 괴롭힘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일단 계속 수색해야 한다. 장문인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고 보고할 수는 없지…….’
청성파가 산 하부에 자리를 잡은 의문의 세력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 * *
청성파가 진을 수색한 지 한 달.
분명히 무언가 있는 것은 확실했지만… 진의 입구는 전혀 찾지 못했다. 과거처럼 마차가 입구까지 온다면 모르겠지만, 요즘은 마차도 보이지 않았다.
청성파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만뇌문을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인 걸 의심하면 무엇 하겠는가? 당최 입구를 찾을 수도 없었다. 차라리 만뇌문의 약방주나 광견살검이 중강현에 등장할 때를 기다리고 잠복하는 게 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었고, 사실 이미 청성파의 문도들은 이미 중강현에 파견되어 있었다.
보다 못한 청성파의 장문인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생각할 때쯤이었다.
청성산의 산문에 한 사내가 등장했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에 흰색 무복을 입은 사내.
“만뇌문의 황극린이오.”
“수, 수라공자……! 아! 죄, 죄송합니다.”
수라공자라는 별호는 당연히 듣기 싫을 것이다. 제자 금우비는 황급히 정정하여 권룡이라 칭했지만, 황극린은 딱히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장문인을 뵈러 왔습니다.”
만뇌문도 청성파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열심히 진의 입구를 찾는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는 슬슬 청성파와 대화를 할 시기였다. 엄밀히 따지면 청성산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도가를 표방하는 청성파가 산 자체가 자신의 것이라고 감히 주장하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무림에서 청성산은 곧 청성파나 다름이 없었다.
만뇌문이 이곳에 터를 잡으려면 청성파와 합의를 보아야 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청성의 장문인 태을종객(太乙從客)에게 황극린의 등장 소식이 전해졌다. 당연히 황극린과의 만남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 또한 요즘 청성산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불쾌하기도 했지만, 궁금하기도 했다. 환영신창을 꺾은 황극린이 어떤 인물인지 말이다.
중원에 무수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지만, 태을종객은 소문으로만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직접 보아야지만 상대의 진심을 알 수 있으리라.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청성산에 다른 문파가 자리를 잡는 걸 쉽게 허락할 수는 없었다.
제아무리 만뇌문이 급격한 성장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구파일련에 속한 청성파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만뇌문이 대룡상단을 꺾었다고 하지만, 상단과 명문거파는 엄연히 다르다.
황극린이 장문인실에 들어선다. 태을종객이 흥미로운 눈으로 황극린을 바라본다. 보이지 않은 기운이 황극린의 주변을 장악한다. 장문인은 마음만 먹으면 기세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 압도적인 내공으로 할 수 있는 간단한 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런 장문인의 시험 따위는 현재의 황극린에게 산들바람에 불과했다.
태을종객의 압박을 손쉽게 흘려 내고, 가까이 다가간다.
“호오… 환영신창을 꺾었다는 소문이 헛된 것이 아니었나 보구려. 미안하오.”
“아닙니다.”
태을종객은 기운을 거둬들였다.
아무리 배분상으로 까마득한 후배라고 하지만, 그는 일문의 장로였다. 제아무리 장문인이라 해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태을종객은 그나마 구파일련의 장문인 중에서는 합리적인 편이었다. 바로 사과를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 날 찾아온 이유는 무엇이오?”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만뇌문은 청성산 북쪽의 절벽에 터를 잡고 있습니다.”
“북쪽이라……. 장로들과 제자들이 한 달 동안 수색했는데 찾을 수가 없었지. 청성이 자랑하는 비동도 그런 수준의 진을 갖추고 있지 않소.”
장문인은 그게 궁금했다.
아무리 진법이 뛰어나다고 해도 장로들의 실력이라면 입구 정도는 찾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대체 누가 그러한 진법을 만들었단 말인가?
“제갈세가의 도움을 받은 것이오?”
“제갈세가의 도움은 받지 않았습니다.”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니다.
분명 진법을 개조한 건 제갈창해와 제갈소희였지만, 그들은 제갈세가의 이름으로 만뇌문의 진법을 개조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군.”
태을종객의 표정이 더욱 진중해졌다.
몇몇 이들은 만뇌문이 개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 문파에 불과하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만뇌문의 뒤에는 알 수 없는 세력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 이 장문인에게 무슨 말이 하고 싶어 찾아온 것이오?”
장문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묻는다.
그는 솔직히 말해서 만뇌문이 청성산에 머무는 걸 허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무리 만뇌문에 의문의 세력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명문거파가 지레 겁먹고 허리를 숙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청성과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거래……?”
황극린의 입에서 거래라는 말이 튀어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예.”
황극린이 낡은 서책 하나를 꺼낸다.
그것은…….
“그건… 한령심법(瀚靈心法)!”
“예.”
“대체 그걸 어찌… 어떻게 황 장로가 가지고 있단 말이오?”
멸문한 천산파의 내공심법이다. 청성파는 분명 한령심법보다 뛰어난 내공심법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한령심법이 크게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천산파의 무공은 도가(道家)의 정수라 불리며 과거 마교의 1순위 표적이었다.
삼재심법(三才心法)이 삼류나 익히는 무공으로 알려진 적도 있었으나, 그 간단한 심법에 오묘한 이치가 담겨 있다고 중원이 한바탕 난리가 난 것이 20년 전이다. 하물며 한령심법은 어떠하리?
“그걸 대가로 만뇌문이 청성산에 머무는 걸 허락하라는 말이오?”
“아닙니다.”
아니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만뇌문은 청성과 거래를 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황극린이 미소를 머금은 채 행낭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