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147화 (147/316)

147화 기틀

만뇌문과 대룡상단의 사건은 꽤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무림맹이 중재를 서고, 대룡상단이 만뇌문의 평화협정을 받아들이면서 관심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애초에 중원은 넓고 무인은 황하의 모래알처럼 많았기에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지금도 소림사와 아미파가 대립을 이어 가고 있었으며, 호북성에선 새로운 대마두가 등장하여 악행을 벌이기 시작했다. 사천성에선 아직 만뇌문이나 수라공자를 언급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러한 관심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이다.

만뇌문에겐 기회의 시간이었다.

소림사는 아미파와의 대립이 해결되면 또다시 만뇌문에 무공의 반환을 요구할 것이다. 만뇌문이 대룡상단을 꺾었기에 소림사에서 몸을 사릴 수도 있다고 판단한다면 무림을 잘 모르는 것이다.

대룡상단이 분명 중원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은 맞다.

하지만 무림에서의 진정한 힘은 결국 돈이 아닌 무력이다.

돈으로 무력을 살 수 있다지만, 진정한 힘은 사지 못한다. 낭인 중에서도 분명히 실력이 출중한 이들이 존재했고, 돈으로 거대 문파에 도움을 청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룡상단이 용살단을 키우려고 했던 이유는 무림에서 진짜 목을 빳빳이 세우려면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만약 대룡상단이 만뇌문이 아니라 소림사와 다툼이 있었다면 태도가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처음부터 납작 엎으려 무력 싸움으로 번지지 않게 상황을 유도했을 것이다.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 소림사.

사대금강(四大金剛)과 십팔나한(十八羅漢)을 필두로 한 초고수들. 그 뒤로 기천을 헤아리는 제자들이 중원에 이름을 알리지도 않고 수련에만 매진한다. 심지어 사대금강이나 십팔나한 대부분이 강호에 나선 적이 없어 백대고수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중소문파에서 제자 중 한 명이라도 백대고수의 반열에 올려놓기 위해 평생을 바치는 것에 비하면 소림사의 전력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라 할 수 있었다.

중원 무림의 평화는 지속되고 있었다.

소림사뿐 아니라 다른 구파일련도 마찬가지로 전력의 손실 없이 재능있는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만뇌문이 비교적 빨리 성장하긴 했지만, 당연히 소림사와 비교한다면 한참 멀었다.

전면전으로 간다면 대룡상단이 만뇌문에게 당했던 것처럼 처참한 패배를 맛보게 될 것이다. 그나마 황극린이 있기에 소림사도 예상외의 피해를 꽤 입을 테지만…….

만뇌문의 문도 모두가 죽고 자신만 살아남는 것은 황극린에게 비극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과거의 삶과 무엇이 다를까? 결국 선택지를 강요받는 삶이다. 소림사가 무공을 내어 주라 해서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아남기 위해 무공을 내어 준다면… 솔직히 과거와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기에 황극린은 기회를 살리기로 했다.

최대한 분쟁은 뒤로 미룬다. 그 전까지 만뇌문의 힘을 키운다. 배교의 절진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진이 만뇌문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이걸… 만들라는 말씀입니까?”

“예.”

“허허허…….”

설계 도면을 본 초우가 혀를 내두른다. 대체 황극린의 한계는 어디란 말인가? 솔직히 초우에게 황극린은 손자뻘에 불과했지만, 평생 모루를 두들겨 온 초우가 한 번도 만든 적이 없는 병기(兵器)의 설계 도면을 가져오는 것을 보면…….

‘두 번째 인생이라도 사는 건가?’

그런 의심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당연히 진지한 의심은 아니었다. 초우는 황극린의 ‘재능’을 감탄하는 선에서 이미 납득을 해 버렸다.

“그런데 이런 병기를 만들었다간… 황실에서 뭐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황극린이 내놓은 건 쇠뇌의 설계 도면이다.

관군이 성을 방어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쇠뇌. 황실에서 무림의 일에 대부분 관여치 않는다곤 하지만 제약하는 게 있는데, 황극린이 만들려고 하는 쇠뇌와 같은 군사 병기를 제작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몰래 만들어서 사용하는 곳도 몇 있긴 했지만 말이다.

쇠뇌를 만드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무리 두 명의 천재가 달라붙었지만, 진만으로는 완벽한 방비를 해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물리적인 방비를 갖추기 위하여 쇠뇌를 만들려고 한다.

“이걸 쓸 상황이라면 황실을 걱정할 겨를은 없을 겁니다.”

“그건 그렇겠군요.”

하기야 땅에 탄탄히 고정하여 파괴력을 극대화하는 쇠뇌였다. 애초부터 이동성 따위는 고려하지 않은 방어용 살상 병기라 할 수 있었다. 흑살문의 본거지에도 이 쇠뇌들이 기관진식에서 중요 요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몇 개나 만들면 되겠습니까?”

“열 개 정도만 만들면 될 것 같군요.”

“허허, 최대한 빨리 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초우는 당연히 이런 형태의 쇠뇌를 만들어 보지 못했지만, 금방 만들어 낼 자신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감사는요. 만뇌문의 식솔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어느 정도 틀이 갖춰졌을 때,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예, 부탁드립니다.”

초우가 떠나가고 다음으로 성수신의가 방문했다.

“장로님, 연단실이 거의 완성됐습니다.”

그가 목표로 하는 건 황극린이 완벽한 육신을 가지도록 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최고의 연단실이 필요했다. 그는 황극린이 대룡상단과 싸우고 있을 때 연단실을 만들고 있었다. 힘 좋은 초우의 도제들이 도왔기에 연단실도 금방 완성되었다.

“이제 연단을 제대로 시작할 수 있겠군요.”

“예, 연단의 재료들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영약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성수신의는 만뇌문에 온 시점부터 만뇌문만의 영약을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사실 그 짧은 시간 동안 연단술을 익히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성수신의는 과거 사람의 근본적인 체질을 바꾸기 위해 연단술의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영초가 필요한 겁니까?”

“기(氣)가 깃들기 시작한 모든 영초가 필요합니다. 어정쩡한 하수오의 뿌리라도 구매해서 금화종을 계속 흔들게 한다면 청성산의 영험한 기를 빠르게 흡수하여 적정한 수준으로 자라게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즉, 덜 자란 영초도 구매해서 이곳에서 키우면 된다.

성수신의는 꽤 먼 미래까지 바라보았다. 단순히 영초의 약효를 뽑아내서 단약을 만드는 연단실만이 아니라, 실제로 영초를 재배하는 시설도 만들어 놓았다.

당연히 영초를 키우는 건 어려운 일이고, 며칠 사이에 쑥쑥 자라는 것도 아니었지만…….

만뇌문의 미래를 위한 투자라 할 수 있었다.

“확실히 여기가 터가 괜찮더군요.”

도교의 발원지라 불리는 청성산이다.

영험하고 풍부한 지맥(地脈)의 기운이 넘쳐 흐르고 있다. 거기다 청성산을 뚫어 놓은 형태로 자리를 잡았기에 단순히 땅 위에 있는 것보다 훨씬 기운이 강맹하다.

“예, 거기다 금화종이 있는 게 다행입니다.”

금화종은 초우도 처음 보는 광석으로 만든 종(鐘)이었다. 어쩌면 운철(隕鐵)일 가능성이 크다고 초우는 말했다. 운철은 중원 전체에서도 찾아보기 힘은 귀물로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에서 추출한 광물이었다. 황극린이 칠성방에게 빼앗은 묵철보다 수십 배는 더 귀하다.

그렇기에 금화종은 신기한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금화종의 종소리는 생명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운철 자체에 그러한 힘이 담긴 것인지 금화종이 그렇게 만들어졌기에 그런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여러 실험 끝에 황극린은 금화종이 식물을 키우는 데 가장 효능이 좋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바로 하수오를 비롯한 영초들을 매입하라 하겠습니다. 만약 중강현에 나가실 일이 있다면 구자광을 데리고 가십시오.”

“구 대협께서 호위로 나서 주신다면 정말 든든하겠군요.”

황극린은 대룡상단의 유통망을 이용할 수 있었다. 물론, 물건의 확인이나 거래는 중강현에서 할 예정이기에 호위는 필수였다.

성수신의가 열망이 가득한 눈빛을 한 채 말을 이어 나간다.

“그럼 일단 먼저 매입해 둔 영초들을 이용해서 연단을 시작하겠습니다. 혈고독의 번식도 진전이 있으니… 석 달 내로 장로님만을 위한 영약도 대령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외상약인 혈금유의 약효가 황극린에겐 배가되는 것을 보고 성수신의는 그만을 위한 영약을 만들려고 연구하고 있었다. 남창에서는 몇 번의 실패를 거쳤으나 이제는 연단실도 갖추어졌으니 실패를 토대로 성공작을 만들 수 있으리라.

“그럼 얼른 가서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예, 고생하십시오.”

다음으로는 구자광이 찾아왔다.

그는 제자들의 수련을 보고한 후, 황극린에게 다음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최근 교특범이 찾아오고 난 뒤로 왜인지 더욱 열성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기에 무슨 일이든 맡기면 최선을 다했다.

‘이제 기반이 완벽히 갖춰졌군.’

옥보단과 혈금유의 판매도 재개했다.

대룡상단에게 받아 낸 금자는 정말 평범한 문파가 대를 잇더라도 그 부가 사라지지 않을 수준이었지만, 연단을 하는 데 충족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꾸준히 돈이 들어올 구멍을 마련해 놓아야 한다.

그렇게 만뇌문의 대소사를 모두 처리한 황극린의 뇌리에 한 사람이 스쳐 지나간다.

‘어디에 있는 거지?’

황극린이 떠올린 사람은 뇌불이다.

제갈창해의 말에 따르면 당분간 만뇌문에 돌아올 수 없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궁금했다. 잃어버린 기억은 완전히 되찾으려 하는 건가?

뇌불이 어디 가서 객사할 사람은 아니니 딱히 걱정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가 있으면 좋았다. 황극린의 비무 상대로서 뇌불만큼 수준 높은 이가 없었으니까.

‘상관없지.’

뇌불의 기억이 완전해진다면 더 강해질 것이다. 그때 싸우는 것도 도움이 되리라. 훗날 그를 꺾기 위해서는 수련이 더 필요하다. 화경에 접어든 이후로는, 황극린조차 처음 겪어 보는 경지였기에 발전이 과거처럼 빠르진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최근 금화종의 성능을 실험하면서 몇 가지 느낀 바가 있었다.

그걸 토대로 수련하면 된다.

황극린이 자리에서 일어서 연공실로 향했다.

* * *

음울한 분위기가 감도는 장원.

전혀 관리가 되지 않는지 잡초들이 무성하게 뻗어 있었고, 넓은 장원에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이 살고 있다고 했다. 장원의 문을 열고 들어선 노인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것을 보았을 때의 심정이랄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장원 내부로 발을 디딘다.

노인의 감각에 장원 내에 사람이 있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쉬잇! 쉭쉭!

한 청년이 넓은 연무장에서 홀로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 간결한 동작이었지만 주먹엔 제법 힘이 실려 있었다.

‘쯧, 형편없군.’

하지만 노인은 혀를 찰 뿐이었다. 무공을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야 강맹한 권격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그가 보기엔 하찮은 주먹질일 뿐이었다. 잘 쳐도 이류 수준이었다.

혹시 몰라 조금 더 지켜보던 노인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더럽게 재능이 없구나.”

“……?”

노인의 비난에도 청년의 얼굴엔 딱히 분노 따위가 깃들어 있진 않았다. 그의 얼굴엔 음울함만이 가득했다. 장원이 관리되지 않은 것은 그의 성향을 말해 주는 듯하다.

“본가에서 오셨소? 내 이미 말했지만 내어 줄 것은 남아 있지 않소.”

“천재 소리를 듣던 표향이 죽으니 여기도 싹 망해 버렸군.”

노인은 음울한 얼굴의 청년에게 대답하지 않고, 이상한 소리를 했다. 그러자 청년의 표정이 마치 귀신같이 변해 간다. 다 죽어 가던 눈동자에 활기가 띤다.

“더러운 입으로 어머니의 이름을 언급하지…….”

“더러운 입? 이놈 보게, 어릴 땐 참 예의가 발랐는데 크고 보니 망나니가 되었구나.”

“……?”

분노로 변해 가던 청년의 얼굴이 다시 무표정하게 바뀐다.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노인의 얼굴을 훑는다. 과거와는 확실히 달랐지만, 분명 본 기억이 있었다. 그렇기에 가문의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청년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이름이 스쳐 갔다.

“뇌불 어르신……?”

“신동 소리를 듣던 기억력은 어디 가지 않았나 보구나.”

뇌불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장원의 상태를 보고 그냥 떠날까도 생각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안으로 들어왔다. 음울함이 가득 담긴 권격을 보고 있자니 당장 놈의 팔을 꺾어 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어머니를 찾아오신 것이라면…….”

“이미 들었다. 18년 전에 죽었다고.”

“예.”

위로하러 온 것인가?

아니다. 뇌불이라는 인물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어머니도 항상 말씀하셨지 않은가? 그에게 인간적인 정을 기대하면 안 된다고 말이다.

“쯔쯧, 머리를 굴리는 게 얼굴에 다 보이는구나.”

“이곳을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청년이 더 고민하지 않고 묻는다.

뇌불이 간단하게 답한다.

“네 재능이 필요하다.”

“저의 재능 말입니까?”

사마명.

그는 수 계산과 기억력에 있어 천재적인 수준이라 불리며 유명했었다. 물론, 그 재능을 만개하기도 전에 세상의 벽에 부딪혀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쓸데없이 넓은 장원 하나뿐이었다.

“수 계산 할 사람이 필요하거든.”

“…….”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수 계산이 필요하다고? 뇌불이 사업이라도 벌일 참인가? 무림공적인 그가?

“근데 지금 네 꼬락서니를 보니 그냥 데려갈 순 없겠다. 능력이 없으면 못 받아 준다. 시험을 해 보겠다. 능력이 없으면 탈락이다.”

사마명은 갑자기 찾아온 뇌불의 말에 참으로 오랜만에 황당함을 느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