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제물 도착
늦은 밤.
이중산이 잠에서 깨어났다. 왜인지 몸에 땀이 흥건하다. 더워서 그런 것일까? 몸을 일으킨 그는 주전자를 들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래도 더위는 해소되지 않았다. 찬바람을 쐬기 위해서 창문을 열고,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흐으으음……!”
그때였다.
미묘한 비린내가 이중산의 코를 자극한 것은 말이다. 이 냄새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중원에서 수많은 전투를 경험했으며, 그 또한 상대의 검에 베인 적이 참으로 많았다. 비릿하면서도 그 속에 금속 냄새가 섞여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인간의 피 냄새였다.
‘여기까지 냄새가 날 정도면…….’
스쳐 가는 불안.
용살단주 이중산이 방을 박차고, 계단을 내려간다. 수하들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누구… 으음, 다, 단주님!”
“무, 무슨 일이십니까……!”
단원들이 잠에서 덜 깬 모습으로 허우적댄다. 이곳엔 죽은 사람이 없었다.
“피 냄새가 난다.”
“피 냄새요?”
“객잔 앞의 공터로 모두 모이라 일러라.”
이중산의 진중한 목소리에 수하들도 제 뺨을 후려치며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다. 그리고 곧장 단원들을 깨우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그리고 객잔의 문이 하나씩 열릴 때마다 묘한 피 냄새가 진해지고 있었다.
‘제기랄.’
환영신창 이중산은 단원들 몇몇이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살수인가? 만뇌문이 살수를 동원하여 단원들을 공격한 건가? 아니다. 만뇌문은 살수를 고용할 능력이 안 된다. 어쩌면 다른 상단에서 살수를 고용했을 수도 있다. 여러 가정이 이중산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고민하고 있을 때, 용살단원들이 집합했다.
그곳에는 총 80명의 수하가 있었다. 분명히 어제까지만 해도 90명이었던 용살단이다.
목룡대의 대주 전대용이 흙빛이 된 얼굴로 이중산에게 보고 한다.
“단주님, 목룡대의 기병대가 모두 당했습니다. 심장이 꿰뚫린 채 모두 죽어 있었습니다.”
해가 뜨려면 최소한 두 시진 이상은 기다려야 한다.
짧은 시간에 열 명의 목룡대원을 암살했다. 거기다 기병대만 노리고 죽였다. 대단한 실력의 살수가 붙었다. 물론, 이중산은 자신이 당할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아무리 살수라도 완벽히 기척을 지우는 건 불가능하다.
초고수의 반열에 든 이중산은 자면서도 예민한 감각을 유지한다.
그가 긴장하며 땀을 흘리고 깨어난 것은 은은하게 코를 자극하는 피 냄새 때문이었으리라.
“살수가 붙었다. 최소한 셋 이상이다.”
“……!”
모두가 살수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 무림인들은 살수를 몹시 두려워하면서 경계한다. 정면 대결로는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대였지만, 상대가 취약할 때를 파고드는 얍삽하고 비열한 족속들이었다.
이중산이 셋이라 말했으면 그런 거다. 틀렸을 리가 없었다.
“오늘부터 특급 경계 태세로 이동한다.”
“예, 단주님.”
살수들의 약점은 경계를 서고 있다면 활약하기 무척이나 어렵다는 점이다. 살수들은 기척을 숨기는 것에 능하고, 정면 대결에선 몹시 약하다. 묵룡대의 기병들을 모두 죽인 살수였지만, 막상 실제로 마주하면 금방 제압할 수 있으리라.
‘배후가 누군지 알아내겠다. 나 이중산을 건드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똑똑히 보여 주마.’
조용한 분노.
그의 살기에 용살단원들이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훈련 중에도 그가 살기를 내뿜는 적을 본 적이 있었지만, 오늘 그의 분노는 차원을 달리하고 있었다. 감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모두 눈을 내리깐 채로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을 들어라!”
“……!”
“복수해야 하지 않겠느냐?”
복수라는 말에 용살단원들이 주먹을 꽉 쥔다.
그들의 곁에는 같이 지옥도를 경험한 전우들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라면, 단주가 있다면 중원의 그 누구도 두렵지 않았다. 감히 용살단을 노린 살수에게 보여 줘야 한다.
용살단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이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붉은 광채를 내뿜는 눈동자가 복수심에 불타는 용살단원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 * *
용살단은 거침없이 전진했다.
객잔에 머물지 않았다. 마구간이 있는 객잔은 큰 규모의 마을에서도 보기 드물다. 아마 살수가 그들의 이동 경로를 예상했다면 객잔에 손을 써 두었을 가능성이 컸다. 차라리 한데 모여 노숙하는 게 살수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길이었다.
대규모의 전쟁에서 살수들이 활약하는 경우는 잘 없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뜬 무인들이 사방을 경계하고 있는데, 정신이 나간 살수가 아니고서야 가까이 다가오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용살단을 노리는 살수는 달랐다.
쿠르으응!
두꺼운 나무 하나가 환영신창의 창질 한 번에 쓰러진다.
“세 명이 당했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용살단원들의 맹렬한 투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어둠 속에 자리 잡은 살수는 야금야금 용살단원들을 죽였다. 활동하는 시간도 일정하지 않았다. 어쩔 땐 모두가 잠이 든 새벽이었으며… 또 어쩔 땐 한낮에 수하들이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분명 객잔에서 복수심을 불태울 때만 하더라도 살수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보이면 베어 버리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살수의 행방은 묘연하다. 며칠 전부터는 대주들이 직접 경계 임무를 섰지만 피해자가 나왔다.
“흑살문이나 비요둔(秘妖屯)이 붙었다.”
이중산이 알기로 이 정도 실력의 살수를 키우는 단체는 두 곳뿐이다.
용살단은 중소문파 따위는 하루 만에 전멸시키는 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용살단을 괴롭히는 살수 단체라면 두 곳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흐, 흑살문…….”
“아마 흑살문보다는 비요둔의 가능성이 클 것이다. 흑살문은 이렇게 대규모의 의뢰를 받지 않으니까.”
흑살문은 유명한 만큼 의뢰를 가려 가면서 받는다.
중원에서 살수 집단으로는 세 손가락에 꼽히며, 피를 보면 환장한다는 악귀 같은 비요둔이 범인일 가능성이 컸다.
‘제기랄…….’
이중산은 너무 답답했다.
최대한 빠르게 만뇌문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강현으로 달려왔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벌써 용살단의 반절이 날아갔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틈이 보이면 단원들의 시체가 늘어났다.
‘이 미친 살수 놈……!’
상대의 틈만 찾아 공략하는 비열한 살수.
지금 당장이라도 놈 정면에 나선다면 일 초 만에 처죽여 버릴 자신이 있었다.
“단주님… 중강현에 왔으니 상단주님께 보고를…….”
“보고? 지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당했다는 걸 만천하에 알리란 말인가?”
“제가 부족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신경이 많이 날카로워진 이중산이다.
대룡상단의 명예를 널리 퍼트리고자,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중원에 알리고자 용살단을 이끌고 직접 출정했다. 그런데 제대로 된 전투도 벌이지 않았는데 벌써 용살단원의 반절이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진다면?
수치도 그런 수치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만뇌문은 무조건 멸문해야 한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찍어 누른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환영신창을 선보여 자신이 누군지 보여 줘야 한다.
“공터를 찾아라.”
“공터 말씀입니까?”
“그래, 살수 따위가 그림자에 숨을 수 없는 넓은 장소. 중강현의 백성들이 지켜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겁 없는 살수 놈이 나타나 준다면 목을 쳐 버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만뇌문의 권룡이 건방지게 나타난다면 마찬가지로 죽여 버린다.”
대주들은 단주의 계책이 적당하다 생각했다.
객잔 따위에서 휴식을 취하다간 또 살수에게 당할 것이다.
“모두 같이 움직인다.”
처음 출정할 땐 90명이 넘었지만, 지금은 고작해야 50명이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대규모의 인원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용살단원 모두가 살기를 마구 내뿜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무공에 무지한 백성들도 그들의 기세와 분노를 읽을 수준이었다.
‘비열한 놈들……. 나 이중산이 압도적인 무력이 무엇인지 보여 주마.’
* * *
공터 중심부엔 이미 노숙 준비를 끝내 놓고 대기하는 용살단이 있었다. 임시로 지어 놓은 막사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했지만, 막사 밖에서 경계를 서는 용살단원들은 늠름한 자세로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터의 주위를 둘러싼 인파.
백성들이 대다수였지만, 그 백성들 사이에 청색의 도포를 입은 무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청성의 제자들이었다. 이미 인사도 나누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살수들이 활약하기란 더 어려워졌다.
‘얼른 모습을 드러내라.’
이미 용살단은 중강현에서 선언했다.
만뇌문을 기다리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청성파는 용살단을 돕지 않겠다고도 했다.
그들의 목적은 만뇌문을 쓰러트리는 것도 있었지만, 용살단과 대룡상단의 명성을 드높이는 것도 있었다. 비록 반절 수준으로 줄어든 인원이었지만 여기 있는 모두가 용살단원이 살수에게 당한 것은 모른다. 굳이 그러한 수모를 당했다고 직접 밝힐 필요는 없었으니까.
처음엔 권룡이 바로 나타날 것이라 기대했다.
모용세가나 형산파에도 선공을 날렸던 놈들이니 용살단을 보고서도 나타날 것이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그렇게 칠 주야가 지났을 무렵.
용살단주 이중산은 점점 압박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만뇌문을 처부수고 살수들을 찾아내야 한다. 하지만 권룡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백성들은 만뇌문이 용살단의 위세에 두려움을 품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했다. 자연스럽게 용살단과 대룡상단의 명성이 회복되고 있었지만, 이중산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피를 보아야 했다.
하루라도 빨리 수하들을 잃은 분노를 창끝에 표출하고 싶었다.
“저리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권룡이 오겠어?”
“그러게 말이야. 나 같아도 안 오겠다.”
멀찍이 서서 막사를 바라보는 백성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중산도 슬슬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권룡이 찾아올까? 비열한 살수들 때문에 계획에도 없던 임시 막사까지 만들어 가며 대기하고 있었다.
영원히 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룡상단주에게 큰소리를 뻥뻥 치고 출정했는데, 만뇌문은 처리하지도 못하고 수하의 반절을 잃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어야 하나?
조바심이 인다.
어떻게든 실수를 만회하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여기서 더 머물 수는 없다. 청성의 제자들도 있으니 살수들이 함부로 활동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우리가 나서서 만뇌문을 수색한다.’
결국, 움직이기로 결단한 이중산이 막사 밖으로 나가는 순간이었다.
“궈, 권룡이다.”
“저 사람이 권룡이 맞아?”
“맞아! 용봉지회에서 본 적이 있어!”
권룡의 등장.
형산파와 모용세가도 그의 활약에 쫓겨났다는 게 이미 사천성에 알려졌다.
“이노오오옴-!”
이중산이 창을 들고 공중에 뛰어올랐다.
쿵-!
황극린의 앞에 착지한 이중산이 목소리에 내공을 품은 채로 말한다.
“만뇌문의 권룡 황극린, 맞나?”
“그렇소.”
이중산이 슬쩍 청성파의 제자나 백성들을 바라본 후에 말한다.
“비열하게 사파의 살수에게 손을 뻗어 용살단을 공격하고 이리 직접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군.”
“살수를 고용해?”
“만뇌문이 살수를……?”
사실 살수 문파에 손을 뻗는다는 건 정파 문파에게 치욕이나 다름없었다.
복수라는 것은 스스로 달성해야 한다. 남의 손을 빌릴 수도 있겠지만, 살수를 이용한다는 건 영혼을 파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살수 단체에 의뢰를 맡기려 한다면 최대한 비밀을 지켜야 한다.
“설마 형산파나 모용세가를 몰아낸 것도 살수 덕분인가?”
“그럴 수도……. 저 환영신창이 거짓을 말할 리도 없잖아?”
“저기 봐 봐, 권룡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황극린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늘어나고 있을 때였다.
그가 드디어 입을 연다.
“내가 죽였소.”
“……?”
이중산의 눈이 가늘어진다.
지금 이놈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단 말인가? 정파 문파가 사파에 속한 살수 단체에 손을 뻗었다고 시인하는…….
“내가 용살단원 43명을 죽였소.”
“네가 감히……! 살수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더냐-!”
환영신창의 창끝에 짙은 광채가 모이고 있었다. 거대한 기운이 집약되고 있다. 당장이라도 황극린의 목을 뎅겅 베어 버릴 듯하다.
“살수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냥 틈이 보여 죽였을 뿐이오.”
“이놈이……!”
황극린의 말에 백성들이 술렁인다.
살수의 힘을 빌린 게 아니라 황극린이 직접 용살단의 단원들을 암살했다? 이건 또 의미가 다르긴 하다. 물론 동려대협이라 추앙받던 황극린의 의협심이 의심받긴 하겠지만… 만약 환영신창 앞에서 황극린이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또 다른 평가를 들을 수 있으리라.
용살단원이 일어서서 황극린을 포위한다.
당장이라도 동료를 죽인 황극린에게 복수하려는 굳센 의지가 엿보인다. 수십 명의 무인이 같은 마음으로 뿜어내는 기세는 확실히 매서웠다.
그리고 이중산은 손을 휘저어 그들을 물린다.
“네 말이 사실인지는 나 환영신창이 확인해 주도록 하마.”
백성들이 술렁인다.
용봉지회의 우승자인 권룡과 환영신창의 대결이다.
환영신창 이중산은 화경의 경지에 거의 도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고수의 실력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기연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귀중한 경험이다. 청성의 제자들 또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황극린의 반응이 가관이었다.
“혼자서 말이오?”
“뭐라……?”
“당신도 밤에 죽일 수 있었소.”
“……!”
“당신을 포함하여 47명의 용살단원은 정면으로 맞붙더라도 어려움이 없기에 굳이 더 죽이지 않은 것이오. 그러니 합공하여도…….”
이중산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창을 휘두른다.
사방으로 창이 만들어 낸 풍압이 폭발하듯 휘몰아친다.
쉬이이이잇-!
“닥쳐라! 네놈의 사지를 끊어 주마. 이젠 살려 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없다.”
이중산의 목소리는 도리어 작아졌다.
하지만 똑똑히 황극린의 귀에 박히고 있었다.
씨익.
그런 이중산을 바라보는 황극린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사실 살수로서 이들을 모두 처리할 수도 있었다. 그게 황극린의 능력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살행을 옮기던 도중 생각을 바꾸었다. 만뇌문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보여 줘야 한다.
환영신창은 그에 알맞은 제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