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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귀환-137화 (137/316)

137화 슬슬 가 볼까

“보아하니 제갈세가 출신인 것 같은데.”

제갈창해는 대번에 그녀의 출신을 알아챘다. 물론,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지는 않았다. 제갈창해가 제갈세가를 떠났던 시절 그녀는 갓난아기에 불과했으니까. 애초에 가문에 관심도 없었던 게 제갈창해였다.

거기다 그는 제갈세가에 딱히 좋은 감정을 품고 있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제갈세가 출신에 기분이 언짢았다.

“날 불러 놓고 제갈세가에게도 도움을 청한 거냐?”

아무리 뇌불의 부탁이라 해도 이건 경우가 달랐다. 자신의 능력을 의심한다는 것 아닌가? 제갈창해가 해명을 요구하듯 황극린을 빤히 바라본다.

“숙부님, 제가 부탁한 것이랍니다.”

“뭐? 숙부님?”

제갈창해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한다.

이미 그는 제갈세가의 호적에서 제외된 지 오래였다. 그런데 숙부라고? 지금 와서 가족애를 들먹인다고 해도 어울려 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난 너 같은 조카를 둔 적이 없는데?”

녹림의 총채주.

그는 산전수전을 겪어 가며 그 자리에 올랐다. 죽을 뻔한 경험도 많았고, 되레 그의 손에 황천길을 건너간 무인들도 셀 수 없이 많다. 그런 사내의 강렬한 시선에 보통의 여인이었다면 주눅이 들고 말았겠지만, 제갈소희도 보통은 아니었다.

“전 숙부님께 많이 배우고 싶어요.”

“나한테 배우다니? 뭘?”

“모든 것이요. 저도 제갈세가의 그늘을 탈출하고 싶거든요. 아니… 가능하다면 장남을 제치고 제가 가주가 되고 싶답니다.”

“뭐……?”

제갈창해가 황당한 얼굴을 한다.

여인이 가주라고? 사파 문파 중에서는 여인이 우두머리가 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하지만 정파의 문파에선 흔치 않은 일이다. 오랜 세월 굳어지다시피 한 장남 사랑은 어느 문파나 가문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여인이었다. 제갈세가에선 차남도 취급을 해 주지 않을진대 여인이 가주 자리를 넘본다고? 원로원에서 가만히 있을까?

“진심이냐?”

“예, 그렇기에 이 자리에 찾아온 것이지요.”

“허 참…….”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한다.

제갈창해는 온갖 인간 군상을 상대했다. 아부를 떨어 대며 이익만 챙기려는 자들도 있었으며, 진심으로 그를 수행하는 수하들도 있었다. 또, 그 누구도 믿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펼치는 인재들도 있었다.

‘확실히 눈빛이 다르긴 하군.’

무공의 수준이야 딱 봐도 형편없었다.

믿을 구석이라곤 아까 말했듯 진법의 재능뿐일 것이다. 배교의 진법을 개조하는 데 한 달이면 된다고 했던가?

“배교의 진법은 제갈세가의 것과는 궤를 달리한다.”

“예, 정석과는 다르게 설계되었더군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그 강점을 더 살리는 방식으로 가려고 했답니다.”

“배교의 방식을 살린다?”

“네. 만약 정석적인 진법으로 개조하려면 두 달 이상이 걸릴 수도 있겠지요. 하나, 배교의 방식을 차용하여 진을 바꾼다면 시간은 단축될 것이며 더 완벽한 진을 만들 수도 있겠지요.”

“배교의 방식을 따른다?”

“예, 숙부님께서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계시지요?”

맞았다.

하지만 제갈창해는 안정적으로 진을 개조하려 했다. 그 이유는 뇌불의 부탁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진법이 잘못되면 그 미친 노인네가 언제 찾아와서 그를 폭행할지 모른다. 과거 그의 미친 짓을 하도 많이 봐 왔으니 적당히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네가 실력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제갈세가의 진법가들은 이론이 빠삭하다.

하지만 진법은, 학문의 영역이기도 했지만 감각의 영역이기도 하다. 감이 없다면 아무리 이론이 빠삭해도 현실에 적용할 수가 없다.

“한번 확인해 보시지요. 제 실력이 숙부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절 죽이셔도 된답니다.”

참으로 태연한 목소리였다.

제갈창해는 진법의 재능은 모르겠지만 그녀의 배포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 있었다.

“좋다. 어디 네 실력을 최대한 드러내 봐라. 뒈지고 싶지 않으면 말이지. 크크.”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일단락되었을 때, 지켜보던 황극린이 입을 연다.

“아, 두 사람에게 할 말이 있소.”

“뭔데?”

“칠 주야에 한 번은 내가 진을 살펴볼 것이오.”

“이론이라도 배웠느냐?”

“배우지 않았소.”

“네가 봐도 알 수 있는 건 없을 거다. 그리 만만한 게 아니거든.”

그때 제갈소희가 나섰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황 공자님께서는 팔진도(八陣圖)를 반나절 만에 통과하셨답니다.”

“지금 뭐라 했느냐? 팔진도라고?”

“네, 선조께서 남기신 깨달음의 진이지요.”

“……!”

제갈창해가 황극린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꽤 괜찮은 후배 정도였다면, 지금은 무언가 이상한 것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그런데 내가 잘못 들은 거냐? 반나절이라고?”

“팔진도에 진입하는 데 일다경이 걸렸답니다.”

“잠시만, 이해가 안 되는데……. 일다경이라고?”

“네.”

“정말이냐?”

제갈창해가 황극린을 향해 물었다.

“그렇소.”

“거기서 뭘 보았나?”

제갈창해도 팔진도를 통과한 적이 있던가?

황극린은 과거를 떠올렸다. 팔진도에선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을 제시했다. 당시 내공의 부족에 시달려 혈풍뇌전신공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 팔진도에선 실제와 전혀 다르지 않은, 황극린의 감각마저 속이는 원로원주가 나타나서 황극린에게 이곳에서 수련하라 속삭였다.

사실 아직도 팔진도가 무엇을 위한 진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하나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환상 속에만 갇혀 있었다면 현재의 황극린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곳에서 시간을 허비했다면, 그가 이뤄 왔던 것 중 하나라도 어긋났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냥 환상만을 보았소.”

간결한 대답에 제갈창해가 작은 한숨을 내쉰다.

확실히 팔진도에 들어갔다 나온 것은 분명했다. 뭐, 거기서 어떤 깨달음을 얻는지는 각자 다르긴 하겠지만 말이다.

“재밌군. 칠 주야 뒤에 와 보아라.”

그는 직접 보지 않은 것은 인정하지 못한다.

자신이 직접 개조한 진법에서 그의 실력을 확인해 볼 것이다.

“알겠소.”

황극린이 떠나갔다.

자리에 남겨진 건 제갈소희와 제갈창해뿐이었다.

“숙부님, 어떠신가요?”

“뭘?”

“팔진도를 뛰어넘는 진을 만들고 싶지 않으신가요?”

당연히 그러고 싶었다.

진법에 대해서는 고금제일이라 불리는 게 팔진도를 만든 와룡이었다. 그를 뛰어넘고 싶은 욕망이 왜 없겠는가?

“저와 함께한다면 가능할 거랍니다.”

제갈창해가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자신감이 넘친다. 뭐, 그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실력 없이 자존감만 높다면 문제겠지만 말이다.

‘뭐, 지켜보면 알겠지.’

칠 주야가 지나면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 * *

이제 안심이었다.

남창에서는 언제나 위협을 받았다. 특히 살수라는 존재는 황극린의 감각이 아무리 뛰어나도 막을 수 없었다. 물론 만뇌문의 장원에서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흑주나 황극린이 있기에 살수를 막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장원에만 꼭꼭 숨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젠가 한번은 장원을 벗어날 텐데, 실력 좋은 살수라면 그때를 노릴 거다.

지금은 그럴 걱정이 없었다.

황극린이 마음 놓고 자리를 비워도 된다. 오랜 세월 중원에 들키지 않고 유지되어 온 흑사회의 본거지다. 거기다 진법에 대해서라면 최고의 실력을 가진 제갈창해와 제갈소희가 함께 진을 개조하고 있다.

‘그런데 뇌불은 바로 돌아오지 않는군.’

제갈창해가 뇌불의 말을 전해 주었다.

그는 당분간 무림에서 이룰 것이 있다고 조금 늦는다고 했다. 그 또한 오랜만에 강호에 나선 것이니 할 게 많으리라. 뭐, 지금 당장은 뇌불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제자들은 이제 홀로 수련하고 있었고, 식솔들은 진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물론 대룡상단과의 일이 마무리되지 않는 이상 식솔들이 함부로 강호로 나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황극린의 가장 큰 걱정 중 하나가 사라졌다는 게 중요했다.

‘내가 없을 때, 식솔들이 죽는다면.’

황극린이 문파를 만든 이유가 없어진다.

문파를 운영해 나가며 단 한 명도 희생되진 않으리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만뇌문의 장로였으니까.

‘이제 슬슬 가 볼까.’

황극린이 만뇌문의 성을 나선다.

입구에선 제갈창해와 제갈소희가 언성을 높이며 열띤 토론을 펼치고 있었다. 고작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진의 분위기는 확실히 바뀐 상태였다.

그는 조용히 입구를 빠져나갔다.

자연의 기운이 충만한 청성산. 흑사회의 진법은 청성산의 대지에 깔린 막대한 기운을 이용하여 진을 유지하고 있었다.

언젠간 청성파와도 부딪힐 수 있다.

만뇌문은 흑사회처럼 본거지의 위치를 언제까지고 숨길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건 나중에 생각하도록 하고.’

먼저 처리해야 할 건 대룡상단이다.

지금 사천성에는 대룡상단의 무인들과 대정회에 속한 문파들이 잔뜩 깔려 있었다. 만뇌문 하나를 잡겠다고 참으로 많이 몰려왔다.

유격전(遊擊戰).

살수가 가장 애용하는 전투 방식이었다.

* * *

천리순풍(千里順風) 위도량.

형산파의 장로 중 하나로 스무 명이 넘는 제자를 이끌고 만뇌문과의 전쟁에 참가했다. 당연히 그들이 형산파의 최정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장로급의 인물이 나선 만큼 대룡상단에 꽤 성의를 표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 평중아. 무슨 일이더냐?”

양평중.

과거 형동현에서 황극린에게 쥐어 터진 적이 있는 사내였다.

“저… 아무리 생각해도 형산파는 이번 일에서 빠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또 그 이야기더냐?”

양평중은 대정회에서 요청이 온 후부터 자신의 사부인 위도량을 쫓아다니며 만뇌문과는 싸우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과거 객잔에서 얻어터진 경험이 있었다. 사제였던 곽시우가 황극린에게 맞고 왔기에 제자들을 이끌고 그를 참교육하러 갔던 적이 있었지만…….

되레 자신이 호되게 당했었다.

당시 황극린은 별호조차 없는 무명의 무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는 괴물이야.’

지금 떠올려 보아도 그가 손가락을 튕겨 자신을 제압했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는 더 성장했으리라. 양평중은 그가 무서웠다. 중소문파 출신으로 용봉지회에 우승하고, 대룡상단과 대정회 문파의 공격을 몇 번이나 홀로 막아 냈다고 한다.

형산의 미래를 위해서는 그와 척을 지지 않는 게 중요하다.

물론, 형산 전체가 달려들면 그 하나를 잡지 못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왜인지 자꾸만 불안해지고 있었다.

“대정회에 속해 있다면 대룡상단의 청을 들어줘야 한단다. 약조라는 건 한번 어기기 시작하면 신의가 땅에 박히는 것이지. 그리고 만뇌문 같은 중소문파를 왜 그리 무서워하는 것이더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제가 권룡과 비무한 적이…….”

천리순풍 위도량이 한숨을 내쉰다.

“평중아.”

“예…….”

“너는 내가 권룡에게 패배할 것이라 생각하느냐?”

“그건…….”

“광견살검과 권룡이 날 합공한다면 이 사부라도 위험할 수도 있지. 하나, 내게는 너희가 있지 않느냐?”

“…사부님.”

사부님의 말도 맞았다.

이곳에는 18대 제자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이들만 모였다. 거기에 갓 폐관을 마친 형산파의 대제자도 함께였다. 위도량과 대제자. 그리고 스무 명이 넘는 형산의 제자들. 확실히 든든한 전력이다. 그리고 하루 정도 거리에 모용세가나 대정회의 다른 문파들이 깔려 있었다.

“예민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패배의 경험은 오래 기억되는 법이지. 하나, 그것을 극복하면 넌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만뇌문과의 싸움이 네 성장의 기회라 생각하거라.”

겨우 마음을 추스른 양평중이 사부님께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을 했습니다.”

“껄껄, 아니란다. 난 네가 그렇게 매번 용기를 내서 이 사부에게 뭐든 말해 줬으면 하는구나.”

“저, 그럼 하나만 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무엇이냐?”

“저희는 만뇌문도를 만나면 죽여야 합니까?”

위도량이 고개를 젓는다.

“아무리 대룡상단의 청이 있었다고 한들, 사람을 함부로 해하면 쓰겠느냐? 정파끼리는 싸우더라도 피를 흘리면 안 돼. 제압하는 방향으로 생각하자꾸나.”

“예… 사부님.”

그런데 이상하다.

죽이는 것보다 제압이 훨씬 힘들다. 그런데 과연 만뇌문을 제압할 수 있을까?

‘애초에 만뇌문은 꼭꼭 숨어 버렸지. 그래, 이대로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것이 좋을지도… 응?’

이제 막 마음을 추스르려는 양평중.

“으하아아악-!”

그의 앞에 괴물이 나타났다.

그 괴물의 이름은…….

“화, 화, 화, 황극린……!”

양평중의 비명을 들은 형산파의 제자들과 장로 위도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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