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133화 (133/316)

133화 전쟁 선포

대룡상단.

중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말은 허명이 아니다. 만뇌문에 수작질을 부렸던 것처럼 중원 각지에서 온갖 사업을 인수하여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한 대룡상단은 돈을 갈퀴로 쓸어 모으는 상단 중 하나였다.

돈이라는 것은 중원에서 가장 휘두르기 쉬운 무기였다.

그들의 곳간에 돈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들은 더욱 대범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대룡상단의 첫 시작은 품질 좋은 상품을 적절한 가격에 판매하고자 했던 상단이었을진 몰라도, 지금은 한 마리의 고래처럼 주변의 작은 물고기들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있었다.

표국, 상단, 기루, 객잔, 약방, 무관 등.

상단치고는 참으로 많은 분야에 문어발처럼 발을 뻗고 있었다. 그들에게 만뇌문이란 쉽게 집어삼킬 수 있으면서 뒤탈도 크게 없는 물고기에 불과하다. 물론, 제 딴에는 몸을 보호하고자 독을 품고 있긴 했지만… 대룡상단의 입장에선 하품이 나올 정도로 가소로울 뿐이다.

“동려대협이니 권룡이니 치켜세워 줘도 중소문파에 속했으면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야겠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대룡상단의 장로 진우선.

그는 사업체의 인수를 전문적으로 하는 장로로서 이 분야의 장인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꿀꺽 삼켜 버린 사업체만 해도 백 단위를 넘어간다. 처음엔 자신이 하는 행동이 무섭기도 했었다. 뒤탈이 생기면 그가 온전히 책임져야 했으니, 최대한 주의하여 경쟁 사업체를 야금야금 집어삼켰었다.

하지만 연륜이 생기고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깨달은 진우선에게 무서울 것은 없었다.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업체를 삼켜 버리면, 본래 주인이었던 자들은 진우선에 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다.

감히 검을 뽑아 드는 이들이 있으면 대룡상단의 무인들과 대정회의 회원들이 앞장서서 그들을 비호했다. 돈과 무력. 대룡상단을 등에 업고 있는 한 진우선은 두려울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도 진우선은 만뇌문이라는 중소문파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으면서도,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만뇌문에서의 반응은?”

“당황한 듯 보였습니다. 그들과 거래하던 약방이나 문파에서 일방적으로 거래를 끊어 버리니 애가 타겠지요.”

“클클, 아직 멀었다. 놈들도 머리가 있으면 배후에 누가 있는지 깨닫게 될 테지.”

그들은 악착같이 살아남으려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절망 속에서 팔딱이다 제 풀에 지쳐 쓰러지고 말리라. 그때, 대룡상단이 나서면 된다.

만뇌문의 막힌 돈줄을 풀어 주고 그들에게 은혜를 입히면 된다.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던 만뇌약방주는 진우선 앞에서 절을 하게 될 것이다.

“근데 권룡이 직접 나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용봉지회의 우승자이니 무공 실력은 얕잡아 볼 수 없습니다.”

“괜찮다. 오히려 그렇게 나오면 우리에게 좋지. 고작해야 무인 한 명뿐. 아, 광견살검도 있군. 그런 고수라면 중원에 널리고 널렸다. 만약 권룡이 직접 나선다면 우리는 그걸 빌미로 만뇌문을 그냥 집어삼킬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남창과 가까운 대정회의 문파들에 언질을 해 두었지.”

진우선의 말에 인수당(引受黨)의 부당주 사악평이 입을 씰룩인다.

“권룡이 무력을 쓴다면, 바로 선전포고를 하겠군요.”

“그래,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서는 것이지. 무림의 생리를 알고 있다면 결코 행동으로 옮기진 못할 것이다.”

“예, 상식이 있다면 그리 행동하지 못하겠지요.”

대룡상회에서 만뇌문의 돈줄을 막아 버린 지 한 달이 지났다.

모르긴 몰라도 약재를 개발하고, 거래처를 만들고, 사람을 부리는 데 꽤 많은 돈을 소비했을 것이다. 조금만 있으면 식솔들에게 제대로 된 삯을 줄 수도 없으리라.

진우선은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지금 나서서 만뇌문을 조롱하는 건 하책이다. 사업체를 집어삼킬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지켜보는 거다. 서서히 몰락하게 놔두는 게 부작용이 가장 적었다.

“만뇌문의 동태를 살피고 보고하도록 해라.”

“예.”

사악평이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장로님, 포양지부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포양지부?”

포양호에 자리를 잡은 대룡상단의 지부 중 하나. 지부 중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히며, 현재 만뇌문에 가장 많은 압박을 가하고 있는 지부였다.

“들어와라.”

30대 사내가 들어와 장로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서신을 건네준다. 왜인지 사내의 얼굴에 불안함이 담겨 있어 진우선은 찝찝함을 느꼈지만, 일단 서신을 펼쳐 보는 게 먼저였다.

“…….”

서신을 읽어 나가던 진우선의 표정이 아주 조금씩 굳고 있었다.

“이런, 미친…….”

마지막 줄을 읽은 진우선의 입에서 상스러운 소리가 튀어나왔다. 평소 여유만만하며 어떤 일에도 화를 내지 않던 진우선이었기에 사악평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무슨 서신이길래?

“장로님, 대체 무슨 일이…….”

“창고에 불이 났다는군.”

“예?”

불이 났다고?

대룡상단은 규모가 큰 만큼 창고에 불이 났던 적이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왜 진우선의 얼굴에 저리 흙빛이 가득할까? 사악평 또한 인수당에서 오래 굴러먹었기에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다. 거기다 조금 전까지 만뇌문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가?

“호급 금창약이 죄다 불에 타 버렸다는군.”

“예……?”

“포양지부장은 그걸 만뇌문으로 의심하고 있는 것 같다.”

당연했다.

사악평 또한 금창약을 보관한 창고가 불타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권룡을 떠올렸다. 하지만 쉽게 납득이 가질 않는다.

“피해액이 자그마치 금자 삼만 냥이다.”

대룡상단이 아무리 막대한 돈을 굴리고 있다고 해도, 그들은 상인들이다. 손해에 몹시 민감하다. 큰 이익을 챙기기 위한 지출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겠지만… 이득이 없는 곳에서 발생하는 손해는 엄중히 책임을 묻는다.

호급 금창약의 물량을 포양지부로 모은 것은 진우선의 명 때문이었다.

일단 강서성의 금창약 시장부터 장악하려 했다. 가격과 물량으로 밀어붙이면 만뇌문의 혈금유는 세인들에게서 자연스레 잊힐 것이 분명하기에.

“동려대협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부끄럽지도 않은 것인가! 역시 강호의 명성은 믿을 것이 못 되는군.”

먼저 수작을 부린 것은 대룡상단이었지만, 가해자가 늘 그렇듯 자신들의 행동은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거기다 불을 지른 것은 무력을 행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말 권룡이 그랬을까요?”

진우선의 굳어 있던 얼굴이 풀어진다. 그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맺혔다.

마침 그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만뇌문의 소행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다.”

“예?”

“만뇌문에 다녀와라.”

“아……!”

사악평 또한 진우선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위기를 기회로 살리는 것이 상인의 능력 중 하나다. 만뇌문은 이번 일로 또 한 번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다녀오겠습니다.”

* * *

“대룡상단에서 무슨 일로 만뇌문을 찾아오셨소?”

만뇌문의 장로이자 권룡과 동려대협이라는 별호를 가진 사내. 황극린이 무심하게 서책을 넘기며 묻는다. 사악평은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대룡상단의 포양지부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만뇌문의 범행이라는 증거가 나왔습니다.”

“호오.”

황극린이 이제야 얼굴을 들었다. 치렁치렁한 머리로 눈을 가렸기에 제대로 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소문으로는 사내답지 않게 선이 고운 얼굴이라 했다. 한 번 보면 헤어날 수 없는 마성의 얼굴이라나? 당연히 사악평은 그런 소문을 믿지 않았다.

‘얼굴에 자신이 있었으면 드러내고 다녔어야지.’

외모는 중원에서 무기나 다름없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외모는 큰 이익이 된다. 상인들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능력을 펼친다. 정말 황극린의 외모가 출중했다면 덥수룩한 머리로 가리고 다닌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은가? 드러내고 다녔어야 정상이지.

마음속으로 황극린을 씹어 댄 사악평이 무언가를 꺼냈다.

“만뇌문도들이 입고 다니는 의복과 똑같은 재질의 조각이 창고에서 발견됐습니다.”

“오, 그렇소?”

끄트머리가 불에 타서 그을려 있었으며,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것이 외관만 보면 만뇌문도들이 입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재질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으음.”

소매 조각을 살펴본 황극린이 침음성을 내뱉자 사악평이 득의양양하게 말한다.

“불을 지르다 소매가 타 버렸겠지요. 실수하셨습니다.”

“실수는 대룡상단이 한 것 같소.”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는 건 잘못된… 뭐, 뭣 하는 겁니까!”

사악평이 벌떡 일어선다.

문밖에는 대룡상단의 호위무사들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그는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았다. 황극린은 권룡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는 만큼 상당한 무위를 자랑했다. 그가 다짜고짜 검을 뽑아 드니 당황하는 게 당연하다.

“만약 날 공격한다면 만뇌문은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 응?”

사악평이 당황한다.

황극린의 검이 향한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검으로 자신의 소매를 찔렀다. 그런데 의복은 예리한 묵색 검 끝에 찔렸음에도 뚫리지 않았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콰지지지지직-!

“으헉-!”

검에서 뇌전이 일자 사악평이 엉덩방아를 찍는다. 자연의 힘을 다룬다는 무림인들의 기예가 대단하다고 말만 들어 보았지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다. 검에서 벼락이 뿜어지고 있다.

화르르륵, 그리고 벼락은 화염으로 변화하여 소매를 태우기 시작했다.

황극린은 뜨겁지도 않은 듯 가만히 있을 뿐이다.

“지, 지금 시위하는 것입니까? 자해라도 하면 대룡상단이 용서해 줄 줄 아나 본데, 그럴 일은 절대 없습…….”

“잘 보시오.”

“뭘 보라는 말입니까?”

“의복이 타고 있소?”

“어……?”

“문도들이 입고 있는 의복은 내 것과 같은 재질이오. 쉬이 잘리지도 않고, 불에 잘 타지 않소.”

순간 사악평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다. 적당히 만뇌문도들이 입은 옷과 비슷한 재질의 천을 가져와 트집을 잡아 만뇌문을 압박하려 했었는데… 만뇌문도들이 입은 옷이 불에 타지 않는다고?

“백건악, 들어와라.”

“예, 장로님.”

건장한 청년이 들어온다. 분명히 어려 보였지만, 그 눈빛이 산전수전 다 겪은 낭인의 그것과 비슷했다.

‘무슨 눈빛이…….’

황극린이 백건악에게 명령한다.

“옷을 벗어라.”

상의를 벗어 황극린에게 두 손으로 대령하는 백건악.

황극린은 그의 옷에도 똑같이 불을 질러 버렸다. 당연하게도 결과는 같았다.

“유감이오. 대룡상단이 만뇌문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몰랐는데 말이오. 트집을 잡으려고 이런 함정을 파다니…….”

애석하다는 듯 말하는 황극린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대룡상단 때문에 본문의 명성은 땅에 떨어졌소이다. 만뇌문은 걸어오는 시비에 피할 생각이 없다는 걸 먼저 밝혀 두겠소.”

마치 준비한 듯이 말을 내뱉는 황극린.

그가 말한다.

“만뇌문은 대룡상단에 전쟁을 선포하오.”

“에……?”

지금 뭐라고 하는 건가?

전쟁? 선전포고를 한다는 건가? 사악평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애초에 만뇌문 따위가 어찌 대룡상단에 선전포고 한다는 말인가? 만뇌문은 고래가 한번 입을 벌리면 휩쓸려 고래의 배 속으로 삼켜질 작은 물고기에 불과하다.

애초에 사악평이 황극린을 찾아온 것도 만뇌문에게 트집을 잡기 위해서였기에, 솔직히 지금 상황은 대룡상단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해도 무방했지만… 문제는 그것을 주도하는 게 만뇌문이라는 거다.

이것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대룡상단에 선전포고를 한단 말인가?

씨익.

황극린이 미소를 머금는다.

눈동자는 보이지 않아 하관만 보였음에도 왜인지 잘생겨 보인다. 난데없는 상황에 미쳐 버린 걸까?

“상단주에게 전하시오, 만뇌문을 건드린 대가는 크게 치를 것이라고.”

사악평이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감히! 제까짓 놈들이 뭐라고 선전포고를 해?’

일종의 선민의식이다.

대룡상단은 중원에서 온갖 특권을 가진 집단이었다. 고작해야 만뇌문 따위가 상황을 쥐고 흔드는 척하는 걸 보고 있자니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그는 한마디를 덧붙이기로 했다. 어차피 만뇌문이 선전포고 한 마당에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앞에서 벼락과 화염을 마구 뿜어낸 것도 자신을 협박하기 위해서 거들먹거린 것 같았다.

“당신은 후회하게 될 것이오! 대룡상단의 무서움을 알게 될 것이오. 당신의 그 알량한 무공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내 한번 지켜보겠소이다. 문도들은 피를 토하며 죽어 나갈 것이고, 식솔들은 당신을 저주하며 만뇌문에서 떠나갈 것이오, 흥!”

그렇게 사악평이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잠시만.”

“……?”

스걱.

“……!”

사악평이 멍하니 잘려 나간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저건 대체 뭐지……?

갑작스레 어깻죽지에 인두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한다.

“으아아아아아악! 내, 내 팔……!? 내파아아아알!!”

사악평이 비명을 질러 대자 바깥에서 대기하던 대룡상단의 무인들이 몰려온다.

황극린이 백건악에게 말한다.

“정리해라.”

“예! 장로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