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돈의 힘
대룡상단의 장로 진우선이 제시한 두 번째 계약서.
의술의 연구와 약재 개발에 대한 무한한 지원을 약조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것이 끝이 아니다. 열 명의 호위무사, 중원에서 내로라하는 수준의 의원들을 수하로 부릴 수 있으며, 개발한 단약의 1할의 이익금을 제공해 준다고 약조했다. 대룡상단은 중원 전역으로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거대 규모의 상단이었다.
제대로 된 단약만 개발하면 성수신의는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다. 개발만 하면 대룡상단이 알아서 홍보는 물론이거니와 상품을 적절한 가격에 팔아 줄 것이다. 계약서에 인장만 찍는다면… 그는 만뇌문 같은 중소문파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성수신의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주겠다는 내용도 명시되어 있었다.
중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룡상단의 자신감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진우선은 새로운 계약서를 내밀고, 여유롭게 기다리고 있었다.
‘의원 따위가 생각할 수 없는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을진대, 과연 포기할 수 있을까?’
그는 인간이라는 동물을 잘 알고 있었다.
돈을 밝히지 않는 척 연기하는 이들의 결말은 모두 다 똑같았다. 조금씩 더 많은 돈을 제시하고 적당히 기분을 맞춰 주면 서서히 넘어오기 시작한다.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말이다.
‘인간들이 일하는 이유?’
돈을 벌기 위해서다.
간혹 정의나 협의라는 대의명분으로 살아가는 존재들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런 이들도 적당히 말로 구슬리면 넘어오게 된다. 의원이 최고의 단약을 개발하여 환자를 살리려 한다면, 대룡상단의 지원을 받으면 그들이 주장하는 정의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 중소문파에 불과한 만뇌문의 그늘에서 백 년을 노력해 봤자 대룡상단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조건이라면 어떠십니까?”
진우선의 물음에 성수신의가 한숨을 내쉰다.
그의 눈빛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대룡상단이 방문했다고 했을 때, 당연히 혈금유의 유통과 관련해서 제안하러 온 줄 알았다. 만뇌문이 아무리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고 해도 기존에 만들어진 유통망을 이용하는 게 훨씬 이익이라 판단했기에 성수신의는 대룡상단의 장로와의 만남을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건 성수신의였다.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군.”
차가운 성수신의의 목소리에 진우선이 알겠다는 듯이 탄성을 터트린다.
“그렇군요. 약방주께서 중소문파에 불과한 만뇌문에 머무시는 이유는… 돈이나 정의가 아니시군요?”
이런 수준의 의원이 중소문파에서 뛰어난 재능을 썩히고 있는 건, 은혜를 갚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이런 부류는 돈으로 회유하는 것이 역효과가 나기도 한다.
‘그래도 본 상단이 제시한 돈에 흔들리고 있긴 하겠지만 말이야.’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의 진우선이다.
그는 여유롭게 말을 이어 나간다.
“거룡(巨龍)이 거대한 육신을 뒤척인다면 무고한 백성들이 다치곤 하지요.”
성수신의가 깊은 한숨을 토해 낸다.
거룡은 대룡상단을 뜻하는 것일 테고, 무고한 백성은 만뇌문을 뜻하리라.
“협박하는 건가?”
“허허, 무슨 말을 그리 섭섭하게 하십니까? 협박이 아닙니다.”
진우선이 또 다른 무언가를 꺼냈다.
“조언이지요.”
성수신의가 만뇌문에 대한 은혜를 갚기 위해 이곳에 머물고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예상하고 찾아왔다.
“약방주께서 선택만 하신다면, 만뇌문이 대정회(大正會)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대정회는 성수신의도 알고 있는 단체였다. 하나의 문파가 아니다. 중원에는 무림맹이 있었지만, 그 아래에도 수많은 모임이 있다. 쉽게 말하면 무림맹 내에서도 구파일련이나 육대세가로 나뉘는 것처럼 중원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단체가 존재했다.
대정회는 그중에서도 상당한 명성을 가지고 있는 단체였다.
천하육대세가인 모용세가를 필두로 수많은 무림 방파가 소속되어 있었다.
무림은 문파 하나의 힘으로 생존하기는 어렵다.
어느 세력에도 소속되지 않은 문파가 성장하면 견제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것을 극복하려면 압도적인 무력을 갖추어야 하지만,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문파에선 그러한 무력을 갖추기가 쉽지 않았다.
현재 천하제일의 문파라 불리는 천화련조차도 초창기에는 온갖 수난을 겪었으니 무림에서의 생존은 정말 쉽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새로이 개파한 문파들은 살아남기 위해 기존에 만들어진 세력에 편승하고자 한다. 대정회는 가입하고 싶다고 들어갈 수 있는 단체는 아니었다.
기존에 대정회에 속한 문파 중 열 명의 장문인의 추천이 필요하며, 문파의 무력을 대정회에서 정한 수준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거기다 가입할 때 기본적으로 발전 기금이라는 명목으로 금자 천 냥 이상을 납부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문파에서 한 번에 금자 천 냥이라는 거금을 내기란 상당히 어렵다.
지금 대룡상단은 만뇌문에게 대정회의 가입을 제안하고 있었다.
“대정회의 비호 아래서 만뇌문은 그 누구의 방해 없이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만뇌문은 강서성 제일의 문파가 될 수도 있겠지요. 약방주님의 선택으로 만뇌문이 날개를 펼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진우선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대정회에 가입하게 된다면 만뇌문은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제 조건이 어떠십니까?”
성수신의가 침묵한다.
진우선은 그것을 긍정이라 받아들였다.
“만뇌문에 어떤 은혜를 입었는진 알 수 없지만, 대정회에 가입할 수 있게 된다면 만뇌문에 대한 보답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이제껏 고생하셨으니 이제 약방주님께서도 새로운 인생을 사셔야…….”
“멍청한 상인만큼 대화하기 피곤한 사람은 없군.”
“지금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겠지요?”
“잘 들었다. 돈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줄 아나 본데, 잘못 알았다. 내가 만뇌문에 들어온 건 누군가에게 보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애초에 내가 원하지도 않는 조건을 줄줄 나열하는 것을 보니 대룡상단의 수준을 알 만하군. 정보력이 수준 이하야.”
진우선의 미소가 사라진다.
“허허, 이거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인데… 조건이 부족해서 그런 것입니까?”
“네놈들은 내가 원하는 조건을 절대 충족하지 못할 거다.”
성수신의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황극린만이 이루어 줄 수 있었다.
“가시오. 오늘 제안은 듣지 못한 것으로 하겠소.”
작게 고개를 끄덕인 진우선.
그 또한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지만, 왜인지 눈동자에선 분노가 엿보였다.
“자만과 오만은… 인간에겐 위험한 감정이지요. 부디 늦지 않게 옳은 선택을 하시길 바랍니다.”
진우선이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더니 떠나갔다.
성수신의가 한숨을 내쉰다.
‘대룡상단과 대정회.’
혈금유의 판매만 생각했다.
하지만 무림에는 만뇌문이 성장하는 걸 아니꼽게 바라보는 이들이 많으리라. 아마 대룡상단뿐 아니라 여러 세력이 만뇌문에게 수작을 부려 올 것이다.
‘일단 황 장로님께 보고드려야겠군.’
* * *
“죄송합니다. 제가 흥분하여 대룡상단의 장로에게 과한 반응을 한 것이 아닌지…….”
성수신의는 스스로 반성하며 황극린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황극린은 그 이야기를 모두 듣더니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잘하셨습니다.”
“대룡상단과 대정회는 무림에서 상당한 입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잘 대처하지 못하면…….”
“예, 만뇌문은 다른 문파들에게 시달리겠지요.”
성수신의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우선이 떠나고 생각해 보니 대룡상단은 만만치 않은 상대다. 특히 대정회가 작정하고 만뇌문에게 수작질을 건다면 만뇌문으로선 여간 난감한 게 아니었다. 전면전이 된다면 만뇌문의 패배는 기정사실이었다.
“제가 과거 연을 맺은 문파에 방문해 보겠습니다.”
성수신의는 사람의 체질을 바꾼다며 여러 문파의 후계자들과 접촉했다. 대부분 실패했지만, 그가 실험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던 경우도 있다. 그들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오히려 기회입니다.”
“예?”
“만뇌문의 사람을 건들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줄 필요가 있겠지요.”
“방책이 있으십니까?”
“저들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이미 황극린은 여러 방도를 떠올렸다.
만뇌문과 연이 닿은 문파에 도움을 청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보통 정파 문파끼리의 분쟁이 전면전으로 치닫는 경우는 드물었다. 보통은 그들이 속한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로 판가름 나고, 약한 이들이 손해를 보고 물러선다.
하지만 황극린은 그런 방법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받은 그대로.
아니, 배로 돌려주어야 한다.
만뇌문의 사업을 방해한다면 그들의 기반을 무너뜨릴 것이며.
만뇌문을 공격한다면…….
“전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신의께서는 이제까지 해 왔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
성수신의도 무공을 익히긴 했지만, 그리 수준이 높은 것은 아니다. 무공을 수련할 시간에 연단술을 연구했었으니까. 그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하면 된다.
“전 장로님의 체질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할 수 있게 연구에 매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하여 혈금유를 비축하고, 내상을 치유하는 단약도 연단하겠습니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성수신의가 결의 가득한 얼굴로 밖으로 나섰고, 황극린도 자리에서 일어선다.
“흑주.”
- 끼이이이……!
구석에서 거미줄에 올라타 몸을 웅크리고 있던 흑주가 황극린의 부름에 퍼뜩 모습을 드러냈다.
“성수신의를 지켜 다오.”
황극린이 양념이 발린 고기를 던져 준다.
흑주가 거미줄을 날려 그것을 날름 입으로 받아먹었다. 의욕이 충만해진 흑주가 거칠게 포효한다.
- 끼에!
흑주를 성수신의에게 보낸 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다.
대룡상단이 그렇게까지 저열하게 나오지 않기를 바랐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받은 대로 돌려줘야겠지.’
* * *
대룡상단은 살수를 고용하여 만뇌문과 성수신의를 공격하거나 하진 않았다.
언젠가 성수신의를 영입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지금은 적당하게 만뇌문을 압박할 생각이었다.
‘상단과 문파의 싸움은 다르지.’
물론, 대룡상단쯤 되면 무력 또한 웬만한 문파 이상이다. 대룡상단의 돈을 먹은 문파들도 중원에 무수히 많았다. 그들을 동원한다면 만뇌문을 확실하게 굴복시킬 수 있을 테지만, 대룡상단은 평판도 생각해야 한다.
백성들은 알지 못하게.
은근한 압박을 가하여 만뇌문을 공격한다.
“본 상단에서 유통하는 호(虎)급의 금창약 가격을 낮출 거다.”
“예, 장로님.”
진우선은 이미 대룡상단주의 허락을 받았다.
대룡상단은 적대적 인수를 통해 막대한 이윤을 취해 왔다. 이번 혈금유의 제작자 만뇌약방주의 영입도 분명히 가치가 있는 일이다.
호급의 금창약은 대룡상단이 유통하는 금창약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물건이다. 물론, 약효로 비교하면 혈금유가 훨씬 뛰어났지만… 무림인 대부분에게 금창약에 그 정도 돈을 쏟아붓기란 부담스럽다. 거기다 호급의 금창약이라면 이미 무림인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하다.
반절 정도로 가격을 낮춘다면…….
만뇌문에서 최소한 10년 이상은 준비했을 것이 분명한 혈금유의 판매도 뚝 떨어질 것이다.
“옥보단이라고 했나?”
“예, 하나 본 상단에는 옥보단 수준의 단약과 경쟁할 만한 상품은 없습니다.”
“경쟁할 상품이 없으면… 옥보단의 상품성을 훼손하면 그만이다.”
“아!”
진우선의 말에 사내가 감탄한다.
“약에 심각한 부작용이 생긴다면… 그 누구도 옥보단을 사지 않겠지.”
“탁월한 방책입니다. 옥보단을 유통하는 약방들을 섭외하겠습니다.”
“그리고 하오문을 통해 소문을 퍼트려라. 그쪽 관련한 소문을 퍼트리는 건 하오문이 제일이지.”
“예, 장로님.”
진우선의 명에 상단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종이에 글을 적어 나간다.
그의 명령은 각 지부로 하달되어 실행될 것이다.
“후후, 자신이 만든 작품이 훼손되는 걸 보고 있으면… 참지 못할 것이다.”
만뇌약방의 약방주는 좌절할 것이며, 만뇌문은 돈줄이 막혀 전전긍긍할 것이다.
주변에 도움의 손길을 뻗는다고 하더라도… 남창의 어떤 문파도 만뇌문을 돕지 않을 것이다. 무림이라는 곳은 약육강식이다. 약하면 잡아먹히는 수밖에 없다.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한 게 독이 될 것이다. 사업을 모르면 사업을 시작했으면 안 되었거늘, 쯧쯧.”
먼저 상품을 판매하려 했다면, 최소한 중원 전체에 유통망을 가진 상단이나 상회와 접촉했어야 했다. 남창의 작은 문파 따위가 제작과 유통을 모두 하려고 하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한 달 뒤가 기대되는군.”
만뇌문은 어떻게 추락할까?
성수신의는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찾아올까?
무릎을 꿇고 대룡상단에 자비를 갈구하리라.
“크크크.”
진우선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중원에선 명분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것을.
그리고 황극린이 명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