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131화 (131/316)

131화 벌레가 꼬이기 마련이다

죽립을 쓴 사내가 관도를 거닐고 있었다.

그는 관광하듯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는데, 그러면서도 걸음이 몹시 빨랐다.

‘확실히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구나. 강호도 많이 변했군.’

어두운 동굴 속에서 목 아래가 마비되어 이끼 가득한 벽면만 보았을 때도 있었다. 당시에는 몸만 회복되어도 소원이 없었건만, 지금은 머릿속을 복잡하게 헤집어 놓는 일들이 많았다.

‘무림이라…….’

과거에는 무림에서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았었다.

무림공적으로 지정되어 척살령이 떨어졌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한 자신감의 이유로는 지켜야 할 것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림에서는 대부분 무인이 소속을 가지고 살아간다. 한 명이 실수하면 그와 연을 맺은 이들이 업보를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뇌불은 그렇지 않았다.

소림사와의 연은 과거에 청산했으며, 뇌불이 무림에서 사고를 치더라도 본인에게만 죄를 물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뇌불은 무림에서 마음대로 살아왔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는 지켜야 할 것이 생겼다.

만뇌문.

사실 지금의 뇌불은 과거 무림을 헤집어 놓던 대마두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제껏 그는 제자 따위는 키우지 않았다. 몇 수 가르쳐 준 놈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에게 인간적인 정을 기대하지도 않았었다.

만뇌문의 제자들은 왜인지 마음이 쓰인다.

그들이 무림에서 떵떵거리며 잘 살아갔으면 한다. 특히 애늙은이 같은 황극린이 유독 눈에 밟힌다. 그가 비동에서 죽다 살아나서 사람이 바뀐 걸까?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대마두라 불렸던 뇌불과 지금의 뇌불은 다르다.

‘얼른 과거의 무위를 회복해야 한다.’

뇌불이 생각이 많아진 이유 중 하나는 과거보다 약해졌기 때문이다. 과거였다면 어떤 문파의 정예가 포위하더라도 빠져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포위망을 뚫고, 언제든 그들에게 복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과거의 뇌불을 만들었다.

지금은 그때만큼의 자신감이 없었다.

비동을 나온 직후 뇌불은 빠르게 몸을 회복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꽉 막힌 듯 발전이 없었다.

과연 이유가 무엇일까?

뇌불은 마지막까지 돌아오지 않는 기억에 있다고 판단했다. 왜 뇌불이 비동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그것을 떠올린다면 과거의 무위를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무림에 나선 뇌불이 해야 할 것은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는 제갈창해 놈에게 과거의 빚을 청산받아 만뇌문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

둘째로는 황극린과 만뇌문에 도움이 될 인연을 다시 만나는 것.

마지막으로는 기억을 되찾아 과거의 무위를 회복하는 것.

물론 기억을 되찾는 것은 마음대로 되지 않겠지만, 왜인지 느낌이 좋았다.

뇌불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처음으로 그가 향하는 곳은 대별산(大別山)이었다.

그곳에는 제갈세가의 사고뭉치이자 녹림의 새로운 총채주가 된 제갈창해가 있었다.

* * *

“오늘은 약방을 도울 것이다. 모두 농땡이 피우지 말고 열심히 하도록 해라!”

“예! 스승님!”

구릿빛 피부의 장정들이 거칠게 포효한다. 그 기세가 웬만한 무림인 못지않았다. 비 노인이 그것을 보며 감탄했다.

“허허, 초 장인 덕에 한시름 놓았소. 정말 고맙소이다.”

“같은 식구 아닙니까? 이런 일이 있으면 도와야지요.”

초우와 비 노인이 눈을 마주치고 미소 짓는다.

만뇌약방의 일에 초우와 그의 도제들이 돕는 이유는 간단했다. 중원 전역에서 혈금유를 사려고 하는 이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금창약이 금자 한 냥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땐 이게 팔리려나 싶었는데… 이렇게 찾는 사람이 많으니 놀랍습니다.”

초우가 말했다.

“신의께서 만드신 혈금유는 내가 평생 보아 왔던 외상약 중에서 으뜸이라 자부할 수 있소.”

“그 정도입니까?”

“그렇소. 황 장로님께서 대장간에도 혈금유를 주었을 텐데, 아직 사용하지 않은 모양이구려?”

비 노인이 말하자 초우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인다.

대장간에선 호랑이처럼 도제들을 휘어잡는 그였지만 비 노인이나 만뇌문의 어르신들 앞에서는 아직 어린(?) 총각일 뿐이었다.

“허허허, 금자 한 냥이라고 하니 너무 아까워서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초우는 만뇌문에 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도제들은 소위 말해 ‘숨 쉬는 법’을 배우며 작업의 능률을 높여 가고 있었다. 도제들의 성장은 초우의 성장이나 다름없었다. 고작해야 대장장이들을 위해 내공심법을 베풀어 준 만뇌문에게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비싼 단약을 마구 써 버릴 순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래도 한번 써 보시오. 황 장로님께선 만뇌문의 식솔들에게 최우선으로 혈금유를 보급하라 말씀하셨소. 식솔들이 다쳐 작업의 능률이 떨어지는 것보다 빨리 회복하여 복귀하는 게 낫지 않소?”

“예, 비 노야. 한번 사용해 보겠습니다.”

비 노인의 말이 맞았다.

도제들이 다쳐서 끙끙대는 것보다는 빨리 회복하여 작업에 복귀하는 게 만뇌문에 보답하는 길이었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이리도 빠르게 혈금유의 명성이 퍼져 나갈 수 있었습니까?”

초우는 그게 궁금했다.

혈금유를 만들고 약방에서 정식으로 판매한 지 고작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다. 중원에서 상품 하나가 알려지기까지는 최소한 1년 이상이 걸리며, 10년이 지나도 지지부진할 때도 많았다.

“아, 그것 말이오?”

비 노인 또한 오랫동안 금황상가에서 일하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 보았다.

왜 황씨 가문이 그토록 무림과 연을 맺으려 했는지 이번 일을 보고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개방 덕분이오.”

“개방이요?”

“그렇소. 중원 전역의 개방 분타에서 혈금유를 주문했소. 그러더니 다른 문파들도 혈금유를 주문하는 것 아니겠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주문이 더 많아질 것이오.”

“좋군요.”

초우는 진심으로 기뻤다.

만뇌문이 잘되어 명성을 떨치는 건 이제 그의 목표와도 같았다. 처음엔 자신만의 대장간을 꾸리고 만들고 싶은 병기를 마음껏 만들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만뇌문에 합류한 것이었지만… 어느샌가 그는 만뇌문의 문도가 되었다. 무공을 익히는 자들만 만뇌문의 문도가 되는 건 아니었다.

“후후, 맞소. 바쁜 건 좋은 거지. 나도 농땡이 그만 피우고 일하러 가야겠소.”

“예, 저도 돕겠습니다.”

그렇게 비 노인과 초우가 다른 식솔들과 마찬가지로 일을 시작한다. 관리자급이 되면 노동을 하지 않아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비 노인이나 초우나 그런 특권 의식 따위는 가지지 않았다.

그렇게 오전 시간이 지나고, 점심 무렵이 되었을 때.

성수신의를 찾는 손님이 방문했다.

“약방주님, 대룡상단(大龍商團)의 장로께서 만남을 청하고 있습니다.”

* * *

대룡상단.

황씨 가문이 운영하는 금황상가가 강서성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거대 규모의 상가였다면, 대룡상단은 중원 전체에 손을 뻗은 상단이었다. 성에서 꼽는 게 아니라 중원 전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그런 거대 상단의 장로가 만뇌문을 찾았다.

그리고 그들은 만뇌문주나 장로 황극린과의 만남을 청하지 않았다. 그들이 만남을 원하는 건 만뇌문이 운영하는 만뇌약방의 약방주 성수신의였다.

“약방주의 신상은 파악했나?”

“죄송합니다.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성수신의는 과거의 이름을 버린 상태였다. 과거 자신이 망쳐 버린 사람들에게 속죄하며 살아갔기에 성수신의라는 별호를 기억하는 이들도 드물었다. 만뇌약방의 약방주가 성수신의라는 사실은 대룡상단도 알지 못했다.

“기회가 없어 명성을 떨치지 못했거나 잘못이 있어 신분을 감추고 살아가는 의원일 가능성이 있겠군. 아무래도 상관없다. 상단주님께서 영입하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우리는 약방주를 데리고 북경으로 간다.”

대룡상단은 북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관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중원의 명문거파들과도 거래해 매년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약방주를 설득할 물건들은 확실히 준비해 두었습니다.”

대룡상단의 장로 진우선이 뒤를 돌아본다.

세 개의 사두마차. 그것에는 인간이라면 혹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들어 있었다. 막대한 재화와 희귀한 의술서. 그리고 대룡상단이 운영하는 기루에서 데려온 특급의 기녀들. 대룡상단은 혈금유와 옥보단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그들이 제조법을 가지게 된다면 중원의 제일 상단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물론, 걱정되는 게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만뇌문이라는 문파가 최근 명성을 떨치고 있긴 했으니까.

하지만 고작해야 중소문파일 뿐이다. 대룡상단이 연을 맺고 있는 가문들과 문파들은 만뇌문 따위와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그들이 입김만 살살 불어도 만뇌문은 풍비박산 날 것이다.

그리고 굳이 그들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대룡상단은 돈으로 만뇌문을 무너뜨릴 수 있다.

동려대협? 칠룡 중 하나인 권룡?

무림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리였다. 세상에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은 없었으며, 대룡상단은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막대한 부를 축적해 왔다. 황씨 가문에서 황룡무관을 만들어 무인들을 양성하려 했던 것처럼… 대룡상단은 이미 백 년도 전부터 무인들을 양성했다.

오십 명이 넘는 잘 훈련된 무인들이 사두마차를 지키고 있었다.

장로 진우선이 말한다.

“대룡상단의 장로 진우선일세. 약방주를 뵈러 왔네.”

만뇌문의 장원.

남창에선 꽤 규모가 큰 장원이었지만, 중원 전체에서 놀던 진우선이 보기엔 흔하디흔한 규모의 장원에 불과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만뇌문의 문지기가 대룡상단의 이름을 듣고 황급히 안으로 들어간다.

중원에서 대룡상단의 이름을 모르는 자들은 없었다. 그들은 돈으로 날아가는 새를 떨어트린다고도 했다.

“약방주께서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금세 돌아온 문지기의 말에 진우선이 속으로 비웃음을 날린다.

‘잠시 시간을 내어 줘? 대룡상단의 이름을 듣고 허겁지겁 준비하는 꼴이 눈에 선한데, 후후.’

어딜 가나 대룡상단의 이름에 벌벌 떨기 마련이다.

아마 만뇌약방의 약방주도 고작해야 작은 중소문파에 불과한 만뇌문에 속해 있는 걸 불만으로 느낄 것이다. 그들이 만든 혈금유를 만약 대룡상단에서 유통했다면… 이미 만뇌약방주의 명성은 중원 전체를 관통했으리라.

장원 안으로 들어간 진우선은 만뇌문의 내부를 둘러보고 혀를 찼다.

‘쯔쯔, 고작 이 정도 인원으로 상품을 중원 전역으로 유통하겠다는 건가?’

내부 인원이 생각보다 너무 적었다.

깔끔한 백색 의복으로 복장을 통일한 것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중원 규모의 상단에서 평생 일해 왔던 진우선이 보기엔 소꿉장난으로 보일 뿐이다.

“이쪽이 약방인가?”

약재의 냄새를 맡은 진우선이 말했다.

“아닙니다. 객청으로 모시겠습니다.”

진우선이 한쪽 입꼬리를 올린다.

약방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살펴보려 했지만, 그래도 거기까지 보여 주진 않을 생각인가 보다. 억지로 볼 필요는 없다. 오늘 약방주는 대룡상단의 품에 들어올 테니 말이다.

객청으로 가니 콧수염을 곱게 기른 미중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대룡상단의 진우선을 보마자마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음?”

진우선은 약간 당황했다.

보통 한 분야의 장인들은 그래도 자존심이 강하다. 처음 본 자리이니만큼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을 줄 알았건만,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거기다 외모도 출중하니 인상이 참으로 좋았다. 추후에 대룡상단의 얼굴마담이 되기에도 충분해 보인다.

“허허, 이렇게 반겨 주실 줄은 몰랐소이다.”

“당연히 반겨 드려야지요.”

약방주는 아마 세 대의 마차가 만뇌문의 정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이야기가 잘 통할 것 같군. 다행이야.’

뻣뻣하게 나오면 진우선은 그를 설득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으리라. 만뇌문 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지만, 약방주는 영입 대상이었다. 협박은 단기간에는 강렬한 효과를 낼 수 있었지만,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살살 구슬려서 대룡상단의 품으로 데려와야 한다.

그런데 약방주가 이리 긍정적인 태도로 나오는 것을 보니 일이 술술 풀릴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의례적으로 인사한다.

혈금유나 옥보단 같은 만뇌약방이 제조하는 상품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수신의는 성실하게 진우선의 질문에 답하며 그를 만족시켰다.

“그럼 계약 이야기를 해 볼까요?”

성수신의는 혈금유의 효능과 장점에 대해 열성적으로 설명했고,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진우선이 종이 한 장을 꺼낸다.

“잘 읽어 보시오. 대룡상단은 장난질 따위는 하지 않소.”

흐뭇한 표정의 성수신의가 황급히 계약서를 들고 읽어 나간다.

그런데 왜인지 그의 얼굴이 굳기 시작한다.

‘계약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보기보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판단한 진우선이 미소를 머금으며 설명을 보탠다.

“원하는 게 있소? 대룡상단은 약방주께서 원하는 모든 것을 이뤄 줄 수 있소.”

그때였다.

성수신의가 갑자기 계약서를 들더니 반으로 찢어 버렸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오?”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군.”

귀한 손님을 대하는 듯하던 성수신의의 표정에 경멸이 담겨 있었다. 그가 열성적으로 혈금유에 대해 설명한 것은 대룡상단이 단약에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룡상단은 중원에서 알아주는 상단이었으니 제대로 거래만 뚫는다면 사소한 거래는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다.

만뇌문의 발전… 아니, 황극린의 체질을 완벽하게 만들려면 돈이 필요했기에 성수신의는 최선을 다해 대룡상단과 거래를 트려고 했다.

하지만 대룡상단이 찾아온 이유는 만뇌문과 거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을 영입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내민 계약서에는 성수신의를 어떻게 대우할 것인지만 빼곡히 적혀 있었다. 당연히 대단한 규모의 조건이었지만…….

“가시오. 더 할 이야기는 없소.”

성수신의의 엄포에도 진우선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상황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다. 최대한 살살 구슬리며 약방주를 영입할 것이다.

물론, 마지막까지 성수신의가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그땐 과격한 방법을 써야겠지.’

대룡상단의 장로 진우선이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