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130화 (130/316)

130화 한 걸음

의뢰를 받았다.

흑살문이 의뢰를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중원에서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덧없이 생명을 잃는다. 살아남은 자들은 원한을 가진 상대가 죽기를 원할 것이다. 대부분 자신의 실력을 키워 복수코자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다고 판단하면 다른 방식으로 눈을 돌린다.

바로 다른 문파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흑살문은 중원 제일의 살수 문파라 불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의뢰를 맡기려면 명문가라도 쉬이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 소모되지만, 돈으로 무력을 구매할 수 있는 수단 중에 흑살문이 가장 깔끔하고 강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흑살문은 사흑련에 속해 있었다.

그렇지만 정파 출신의 무인들도 그들에게 종종 의뢰를 맡기곤 했다.

- 살행 의뢰서.

사내는 누군가의 의뢰서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13호. 흑살문의 특급 살수 중 하나인 암귀의 직속 수하였다. 당장 특급 살수에 올라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는 평을 받고 있었지만, 그는 최상급이라는 직위에 머무르며 암귀의 명령에만 복종했다.

‘황극린의 뒤에 누가 있는지 정말 궁금해지는군.’

13호는 조사 대상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생을 역추적하여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아보았다. 그가 나고 자란 황씨 가문에도 찾아갔었으며, 그가 예전에 살았다고 알려진 마을도 방문해 보았었다.

황극린은 어릴 때 부모를 잃고 홀로 자라왔다.

마을 지주의 농사를 돕기도 하며, 객잔에서 점소이로 살아간 적도 있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가 죽고 난 후, 황씨 가문으로 찾아와서 식객의 삶을 살아왔다. 그 과정에서 황씨 가문으로부터 배척을 받았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그는 무당의 속가제자였던 황씨 가문의 장남을 꺾을 만큼 강한 무공을 익혔지만, 그것을 오랫동안 숨겨 왔다. 황씨 가문의 장남 황보휘는 10년 이상 무공을 익힌 몸. 그리 재능이 부족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황극린이 황룡무관에서 무공을 배운 고작 몇 달 사이에 그를 압도할 실력을 가지게 된다?

당연히 거짓이라 판단했다.

더군다나 미래의 정보까지 활용하면 황극린의 과거가 의도적으로 조작됐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용봉지회에서 소림사의 천덕을 꺾을 만큼 절세의 무공을 선보였다.

그는 아마 더 어릴 적 무공을 접했을 것이다.

중소문파에서도 흔히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아니라, 천하제일을 논할 정도로 뛰어난 무공을 말이다. 권룡이라 불리며 중원에서 명성을 쌓아 나가는 황극린. 그의 뒤에는 분명히 비밀스럽고 거대한 세력이 있었다.

하지만 당최 어떤 세력인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흑살문의 정보력으로도 말이다.

‘그는 최근 북해에 들렀었지. 설마 북해빙궁과 관련이 있는 건가?’

암귀는 고개를 저었다.

흑살문이 가장 오랫동안 조사했던 문파 중 하나가 북해빙궁이다. 그들이 사내를 키웠을 리가 없었다.

그러면 대체 누굴까?

당연하게도 흑살문의 정보력으로도 황극린의 배후가 대체 누군지 알아낼 수 없었다.

사실 황극린을 키운 세력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고수나 다름없었다. 미래의 지식을 가지고 과거로 귀환했으니 상식으로는 그가 누군지 파악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그걸 예상할 수 있다면 흑살문은 중원 제일의 정보 문파… 아니, 고금제일의 정보 문파라 불렸을 것이다.

- 목표: 천흉.

황극린은 흑살문에게 의뢰를 했다.

사실 그가 직접 천흉을 죽이러 돌아다녔지만, 자취를 감춘 그녀를 찾지 못하고 만뇌문으로 되돌아왔다.

그가 의뢰를 맡긴 이유는 간단했다.

흑살문이 천흉을 찾아내서 죽인다면 번거로움을 줄여서 좋으며, 흑살문이 자신의 뒤를 캐고 있을 것이 분명하기에 그들의 시선을 돌리고자 했다. 최소한 흑살문은 의뢰인의 뒤통수를 치진 않는다. 그들은 사파였지만 흑도는 아니었다.

“상부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

13호가 서신을 읽는다.

황극린의 의뢰를 받아들이겠다는 게 상부의 판단이었다.

‘아무래도 좋지.’

황극린에 대한 정보는 계속 수집할 것이다. 그가 정말 사천성에서 천기피독신주를 강탈한 ‘혈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언젠가 그와 관련된 배후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만약 천기피독신주를 강탈한 것이 황극린이라면, 흑살문은 합당한 판단을 내리리라.

‘그나저나 천흉이라…….’

최상급 살수 다섯이 파견되어 조사를 시작한다.

의뢰비는 자그마치 25만 냥.

천흉이라는 존재가 명확하게 드러난 인물이 아니었기에 수색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최소한 2년 이상은 걸리는 의뢰였다. 흑살문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확실하게 의뢰를 처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의뢰를 잘 받아들이지도 않지만, 의뢰를 받는다면 확실하게 마무리를 하기에 흑살문은 중원 최고의 살수 문파가 되었다.

‘이것도 흥미로운 표적이긴 하군.’

황극린은 흑살문에 의뢰하여 시간을 버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만약 흑살문이 천흉을 제거한다면, 과거의 은원도 깔끔하게 갚을 수 있으리라. 굳이 천흉을 직접 죽여야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 * *

오랜만에 황극린은 돈을 벌기 위해서 직접 움직였다.

사실 만뇌문 정도의 작은 문파를 운영하는 데는 그리 많은 자금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뇌문은 지금도 시시각각 진귀한 약재들을 중원 전역에서 매입하고 있었다. 또한, 좋은 강철과 목재 등도 꾸준히 매입하고 있었기에 전장에 맡겨 둔 돈은 계속 소모되고 있었다.

용비문과 흑사회에서 얻은 돈도 있었지만, 자신에게 걸린 흑살문의 살행을 취소하고 천흉의 살행 의뢰를 하는 데 황극린으로서도 상당한 지출을 했다. 이대로 대책 없이 돈을 펑펑 써 대다간 만뇌문은 파산할 수도 있었다.

만뇌문은 그렇기에 사업을 크게 일으켰다.

옥보단의 생산을 늘려 더 많이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혈금유 또한 조금씩이나마 판매하고 있었다.

혈금유의 효능은 확실했다.

황극린뿐 아니라 만뇌문도들과 대장간의 도제들에게도 실험을 해 보았는데, 외상에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홍보만 된다면 혈금유는 옥보단 수준으로 만뇌문에 큰 이익을 안겨 줄 것이다.

당장 돈이 필요하다면 두 약재의 제조법 자체를 팔아도 되겠지만,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정도로 돈이 부족한 건 아니다.

황극린은 직접 혈금유의 제조법을 홍보하기 위해 개방을 찾아갔다.

개방의 남창분타주 능시걸은 오랜만에 본 황극린을 보자마자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고 말았다. 처음 보았을 때, 황극린의 외관은 ‘허약한 소년’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엿한 무림인이 되었다.

아니, 어엿한 무림인은 황극린을 무시하는 수준의 발언이었다.

그는 정파 무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비무대회인 용봉지회에서 우승했으며, 권룡이라는 별호로 무림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또한, 절강성에서 동려대협으로 협의를 떨쳤던 것이 황극린이라는 게 알려져 무림에서는 그에 대한 평이 믿지 못할 정도로 좋았다.

개방은 그러한 이들을 좋아한다.

그들은 거지로 살아가며 자신의 이익보다는 백성들을 평안을 위해 뛴다. 과거 구파일방(九派一幇)이 구파일련(九派一聯)으로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개방은 자신들만의 목표를 가지고 협(俠)을 행한다.

특히 능시걸은 처음부터 황극린의 진가를 알아보았다.

삼결제자 호평은 분타주에게 왜 저 소년을 높게 평가하는지 물어보았었다. 당시 능시걸은 ‘감’으로 황극린에게 개방의 동패(銅牌)를 선물했었다. 개방의 동패를 악용한다면 분타주의 자리가 위험할 수도 있었지만, 능시걸은 자신의 감을 믿었다.

그리고 황극린은 이렇게 멋지게 성장하여 다시금 개방의 남창분타를 찾아왔다.

“어이고,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황 장로님.”

과거 능시걸은 황극린에게 말을 놓았었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일문의 장로였다.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야 한다.

“오랜만이오.”

분타주 능시걸은 마치 자랑하듯 삼결제자 호평에게 눈을 찡긋한다.

이미 황극린이 무림에 명성을 떨치는 걸 보고 호평은 분타주의 안목에 감탄했었지만, 직접 성장한 황극린을 두 눈으로 보니 감탄이 아닌 경탄의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호평의 눈빛을 본 능시걸이 만족한 표정으로 황극린에게 말한다.

“그래, 어쩐 일로 직접 발걸음을 다 해 주셨습니까?”

“분타주께 선물할 게 있소.”

“선물이요?”

능시걸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진다. 재능을 알아보고 동패를 선물한 대가가 이렇게도 크다. 중원에서 명성을 떨치는 권룡이 직접 방문하여 선물한다고? 이 소문이 퍼지면 개방에서도 능시걸의 평이 달라질 것이다.

그는 분타주보다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갈 수도 있으리라.

물론, 그것은 황극린과 연을 쌓았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황극린에게 거리낌 없이 분타주의 동패를 선물했던 것처럼 그는 황극린 외에도 많은 인연을 만들었다.

“예, 이겁니다.”

황극린은 고풍스러운 재질의 목함을 꺼냈다.

그것에는 열 개의 혈금유가 들어 있었다. 자그마치 금자 열 냥에 달하는 물건이었지만, 능시걸은 아직 혈금유라는 상품의 가치를 모르고 있었다.

“이건 뭡니까?”

“만뇌약방에서 새로이 만든 금창약입니다.”

“오호.”

“이제 막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분타주가 미소를 머금는다.

황극린의 선물이 고맙기도 했지만, 그의 의도를 파악했다. 개방의 분타주 정도 되는 인물은 눈치가 상당하다.

“본 방을 통하여 상품을 알리려는 것이군요.”

“예.”

황극린은 부정하지 않았다.

“또한, 개방의 남창분타에는 판매가보다 더 저렴하게 제공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판매가는 얼맙니까?”

“한 통에 금자 한 냥입니다.”

“……!”

평소 당황하지 않는 능시걸이 깜짝 놀란다.

품질이 좋은 금창약은 확실히 비싸다. 하지만 혈금유는 그것보다 훨씬 비쌌다. 통 하나에 든 양만 봐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몇 번 상처에 바르면 다 쓸 정도의 양이었다. 그런데 금자 한 냥이라고?

하지만 능시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는 이미 만뇌문에 대해 가장 많이 파악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들이 판매하는 옥보단이 중원에서 얼마나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좋습니다. 남창분타가 책임지고 혈금유를 중원에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황극린은 여차하면 동패까지 사용할 생각으로 개방을 찾았다. 하지만 능시걸은 혈금유의 효능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그것을 중원에 홍보하겠다고 약조했다. 과거에도 그러했지만, 분타주로서 한 발언은 무게가 다르다.

“하나 말씀드리자면, 옥령산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수준입니다.”

“오, 옥령산? 설마 소림의 옥령산……?”

“예.”

옥령산은 연단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소림사에서 만드는 금창약이었다.

그들이 만드는 절세의 영약 대환단(大還丹)만 보더라도 그들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소림사의 대환단은 중원 정사를 막론하고 최고의 영약으로 손꼽힌다.

그런데 만뇌문에서 만든 금창약이 소림사가 자랑하는 옥령산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남창분타엔 판매가보다 저렴하게 제공한다고 했지.’

쉽게 말하면 능시걸을 통해 개방과 만뇌문이 긴밀한 관계를 맺겠다는 것이었다.

만약 황극린의 말대로 혈금유의 약효가 옥령산과 비슷하다면…….

‘정말일까?’

아무리 황극린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본 능시걸이라도 쉬이 믿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약을 제조하는 건 쉬운 분야가 아니었다.

‘대체 만뇌문에 어떤 의원이 있기에…….’

능시걸의 머릿속에 온갖 의문이 떠올랐지만,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남창분타에서 백 통을 추가로 구매하겠습니다.”

“백 통이요?”

“예, 고작해야 열 통으로 알려 보았자 무얼 하겠습니까? 백 통 정도는 사용해야 중원에서도 약효가 어느 정도인지 알릴 수 있겠지요.”

금자 백 냥.

개방은 그리 넉넉한 문파가 아니었다. 중원 전역에서 정보를 판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었지만, 그들은 돈을 쌓아 놓지 않는다. 대부분 돈을 백성을 구휼하는 데 사용한다. 가장 정파다운 문파는 개방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황극린은 직접 개방에 찾아온 게 좋은 선택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그는 소매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건……?”

동패.

그것에는 벼락을 내뿜는 용이 양각되어 있었다. 어떤 장인이 패에 양각한 것인지 마치 당장이라도 입에서 화염을 토해 낼 것같이 생생했다.

“만뇌문의 동패입니다.”

“허허허…….”

과거 능시걸은 황극린의 재능을 알아보고 동패를 주어 그와의 인연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오늘은 반대의 상황이 되었다. 황극린이 능시걸과 인연을 돈독히 하고자 동패를 선물한다.

“고맙게 받겠소.”

개방의 남창분타주 능시걸은 만뇌문의 첫 동패를 받은 인물이었다.

만뇌문은 문파로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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