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발전하다
소림사는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라 불리고 있다. 그들은 천 년이 넘는 세월의 풍파를 견딘 정파 무림의 최고 문파라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림사는 중원 전체에서 무공다운 무공을 가장 처음 창안한 문파라고도 알려져 있다.
물론 사파에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았지만, 정파에서는 소림이 무공의 시초라 인정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원론적으로 따져도 소림사는 혈풍뇌전신공의 소유권을 당당히 주장할 수 있었다. 소림사에선 감히 만뇌문 따위가 그들의 요구를 거절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이번에 회수 명령을 내린 해월대사는 나한전(羅漢殿)의 전주였다.
방주 바로 아래의 직위로 소림사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권력자였다.
그렇다 보니 무림 전체로 따져도 그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설사 무림맹주라 할지라도 해월대사의 발언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해월대사는 딱히 걱정도 하지 않고 만뇌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 만뇌문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원본이 아닌 복제본을 반납하겠다고 떼를 쓰는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급하게 나갈 필요는 없었다. 중원 무림은 소림사의 편이었으며, 만뇌문은 이제 막 무림에 명성을 떨치는 중소문파에 불과했으니까.
“아미타불.”
금강불괴체신공(金剛不壞體神功)을 더 완벽하게 하려면 뇌불의 무공이 필요하다. 뇌불이 파계승이긴 하지만, 무공에 대한 재능은 진짜였다. 대반야금강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한 시기라 생각했다.
그것만 얻는다면 제자 천덕도 새로운 경지에 접어들 수 있으리라.
“나한전주님, 만뇌문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들어오시게.”
해월대사는 급하지 않게 서신을 받아 들었다.
모든 일은 그의 예상대로 흘러갈 것이다.
“아미타불…….”
하지만 만뇌문의 대답은 해월대사의 예상을 깨부쉈다.
그들은 원본뿐 아니라 복제본까지 반납을 거부했다. 혈풍뇌전신공이 만뇌문의 자산이라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해월대사의 표정은 변화하지 않았다.
부동심(不動心)을 수련하여 웬만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는다.
‘어리석은지고…….’
해월대사가 평정심을 잃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어차피 당장 만뇌문이 강하게 나온다고 할지라도 결국 소림의 뜻대로 흘러갈 것이다. 중원에서 천 년 이상의 권세를 누려 온 소림사다. 물론, 그 권세를 사욕을 채우는 데 이용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무림의 평화라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행동한다.
지금 혈풍뇌전신공을 회수하려는 것도 중원을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마공(魔功)을 익히는 것이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부를 것임을 정녕 모르는 것인가?’
그렇다면 가르침을 내려 줄 수밖에 없었다.
해월대사는 혈풍뇌전신공이 어떤 무공인지 자세히 알려 주기로 했다. 그 무공을 익히면 인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어떤 부작용을 낳는지를 알아야 한다. 무림인들은 눈앞의 욕심으로 미래를 잃곤 한다.
- 소림에서 만뇌문을 돕겠습니다. 뇌불 또한 혈풍뇌전신공을 익혀 부작용을 이겨 내지 못했습니다. 혈풍뇌전신공이라는 마공을 익힌 뇌불은 종국에 주화입마에 걸려 파멸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소림을 믿고 맡겨 주십시오.
당장 만뇌문에게 그것을 빼앗겠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소림사가 고작해야 작은 문파를 협박해서 얻는 게 무엇이겠는가? 그들은 중원 전체의 대의명분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 해월대사는 혈풍뇌전신공을 익히면 안 되는 이유를 서신에 나열했다.
이래도 말을 듣지 않는다면…….
‘조금 과격한 방법을 사용해야 할 수도 있겠군.’
해월대사가 서신을 다 작성했을 무렵이었다.
“나한전주님, 아미파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가져오시게.”
서신을 읽어 나가던 해월대사의 눈썹이 꿈틀한다.
‘이게 무슨……?’
아미파의 서신엔 분노가 담겨 있었다.
왜 소림사가 불혼패엽공을 가지고 있냐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불혼패엽공을 반환하라? 아미에서 이 사실을 대체 어떻게?’
해월대사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 무공의 주인이 과연 누구인지를 말이다. 아미파는 결국 소림사에서 뻗어 나간 곁가지일 뿐이다. 물론 아미파를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들이 불혼패엽공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공교롭군.’
해월대사는 자신이 작성한 서신과 아미파에서 온 서신을 펼쳐 놓았다.
소림사가 혈풍뇌전신공을 반납하라는 요구를 하는 와중에 아미파에서 무공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어떻게 불혼패엽공의 존재를 알아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설마?’
의심.
어쩌면 만뇌문에서 수작을 부린 게 아닐까? 그런 의심이 생겨났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만뇌문에서 그걸 어떻게 알고 수작을 부린단 말인가?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니로군.’
아미파는 불가 계열의 문파 중에서는 소림 다음으로 언급되는 문파다.
만뇌문과 같은 중소문파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서신 몇 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마 불혼패엽공의 진짜 주인을 밝히기 위한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질 것이다.
물론 마지막엔 아미파가 불혼패엽공을 소유하고 있던 게 맞았지만… 그 무공이 창안된 곳은 소림의 참회동이라는 걸 해월대사는 알고 있었다.
‘욕심을 버려야 하건만.’
물론, 그건 소림도 마찬가지다.
욕심은 버려야 하는 감정이다. 비우면 비울수록 더 큰 것을 담아낼 수 있다. 하지만 해월대사는 그러면 안 된다. 그는 소림의 발전을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할 줄도 알아야 했다. 나한전주의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희생으로 금강불괴체신공이 지금과 같은 완성도를 갖출 수 있었다.
그렇기에 불혼패엽공이라는 선조들의 피와 땀이 깃든 무공을 아미에 반환할 생각은 없었다. 조금 전만 해도 만뇌문으로부터 무공을 받아 내려 했던 나한전주였지만, 같은 상황에선 다르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는 이게 정의로운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뇌문에는…….’
반환 요구를 잠시 멈출까 했던 해월대사.
고민 후에 고개를 젓는다.
‘아니지. 최소한 이 서신은 보내 놔야겠지.’
혈풍뇌전신공을 익히면 마공을 익힌 것과 같다고 경고하는 서신. 만뇌문이 이 서신까지 읽도록 해야 완벽히 명분까지 챙길 수 있다. 아니, 사실 챙길 명분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해월대사는 그것이 사실이라 생각하고 있다. 몸에 뇌전을 담는 혈풍뇌전신공은 언젠간 부작용을 겪는 무공이었다.
해월대사는 두 개의 서신을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이 미친 새끼가?”
서신을 받은 뇌불이 서신을 구겨 버렸다. 그리고 아직 황극린이 읽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그에게 주섬주섬 건네준다.
“혈풍뇌전신공을 마공 취급 하고 있군. 머리를 좀 썼군.”
황극린의 말에 뇌불이 고개를 젓는다.
이건 머리를 쓴 게 아니다. 그들은 혈풍뇌전신공을 진짜 마공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오만의 극치. 자신들이 만든 것이 아니면 마공 취급을 해 버린다. 뇌불이 처음 혈풍뇌전신공을 이용하여 소림사의 땡중 놈들을 처죽일 때, 사술을 사용한다며 비아냥까지 들었었다.
“이놈들의 오만함은 하늘을 찌르지. 머리를 쓴 게 아니다. 당연하게 생각하는 거지.”
뇌불은 소림사가 무서워 도망치려 했던 과거가 떠올라 혀를 찼다.
소림의 땡중 전체가 위선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일부가 문제다. 이번에 만뇌문에 서신을 보냈던 나한전주 해월대사 같은 놈들이 말이다. 소림사에 있던 시절부터 해월대사는 뇌불에게 많이 까불었었다.
“해월 그 어린놈이 참 싸가지가 없었지. 그래서 많이 패 주긴 했었지만.”
“그런데 이상한 부분이 있소.”
“뭐가?”
“해월대사는 어떻게 문주가 주화입마에 걸렸던 것을 알고 있는 것이오?”
“어?”
뇌불이 다시금 서신을 살펴본다.
서신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혈풍뇌전신공을 익힌 뇌불이 주화입마에 걸렸다고 말이다.
“느낌이 묘하긴 하군.”
뇌불 황악의 표정이 굳는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누른다. 아직 완벽히 그는 주화입마를 극복한 것이 아니다. 아직 회복하는 중이다. 그의 기억 또한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이건 나중에 직접 해월대사에게 물어보시오.”
“직접?”
“언젠간 소림사와도 대화할 기회가 생길 것이오.”
“그거 기대되는군.”
아직은 소림사와 싸울 전력이 마련되지 않았다. 최소한 문도들의 실력이 더 오르고, 뇌불이 과거의 무위를 되찾으며, 황극린이 경지의 벽을 뚫어야만 한다.
“그건 그렇고, 발전은 있느냐?”
“별다른 건 없소.”
“그래? 매일 약쟁이 놈과 뭘 하는 것 같더니.”
뇌불의 은근한 시선이 황극린을 향한다.
밤마다 성수신의는 황극린의 방으로 찾아가는 듯했다.
“성수신의가 만든 약재를 실험해 보고 있었소. 영약 제조가 시작된 것은 알고 있지 않소?”
“그래, 나한테도 먹어 보라고 하더군.”
“문도들이 복용할 영약도 만들고 있소. 그리고… 이걸 받으시오.”
“으응? 이게 무엇이냐?”
“문주 전용 의복이오.”
뇌불이 옷을 만져 보다가 깜짝 놀란다. 평범한 비단과는 다르다. 촉감부터가 무언가 묘했다. 마치… 내공이 잘 통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공을 담을 수 있는 의복이오.”
“뭐라?”
“흑주의 뇌섬사는 뇌기를 담을 수 있소. 의복에 뇌기를 담으면 빳빳해지며 예리한 철검 또한 막아 낼 수 있게 되오. 물론, 기를 담지 않더라도 예리한 것을 어느 정도는 막아 낼 수 있소. 이걸 다섯 벌 더 만들어 주겠소.”
사실 뇌불은 좋은 장비 따위를 착용해 본 적이 없었다.
무림에서 한창 악명을 떨칠 때만 하더라도 거적때기 수준의 의복만 걸치고 다녔었다. 의복의 뒤에는 만뇌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나 말고 문도들이 입을 것도 필요하지 않겠느냐?”
“문도들 것도 이미 만들고 있소.”
황극린은 ‘순수한 실력’이라는 것에 환상을 품지 않았다. 순수한 실력만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한 행동이다. 그는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많았다. 특히 흑주에게서 뽑아낸 실은 소위 말해 신병이기에 준하는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흑주의 실을 가공할 수 있는 수준의 대장장이 초우가 있었으며 그리고 흑주가 뱉어 낸 독액을 이용할 수 있는 성수신의가 있었다.
특급 수준의 장비를 보급하여 문도들의 무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소수 정예이니만큼 영약도 주기적으로 보급할 생각이다.
“그리고 이건 독으로 만든 영약이오.”
“영약?”
“성수신의가 흑주의 독액으로 만든 것이지. 과하게 복용하면 중독될 수도 있소. 하지만… 적당한 양으로 매일 복용하면 내력도 증진될 것이오.”
“허허, 그런 것도 만들었단 말이냐?”
“그렇소. 그리고 약재방의 수입으로 중원 곳곳에서 영약을 매입하고 있소. 영단실 또한 구색을 갖췄으니 조만간 문주의 내상을 완벽히 치료할 수 있을 수준의 영약을 만들 수 있을 것이오.”
“크음… 영약은 네가 취하는 게 좋지 않으냐?”
“당장은 필요 없소.”
황극린은 음양의 조화를 맞추고 육체의 진화를 이루어 냈다.
사실 지금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여기서 육체가 더 변화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제 내공만이 늘어나게 될 것인가?
다른 속성의 영약이나 내단을 취해 보아야지만 확실한 결과를 알 수 있었다.
그건 성수신의와 함께 고민해 보기로 했으며, 지금은 변화한 육체에 적응하는 게 먼저라고 판단했다. 지금도 성수신의는 하루에 두 시진도 채 자지 않으며 황극린을 위한 ‘영약’을 제조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흑주 그놈은 인면지주 중에서도 꽤 특별한 것 같구나. 이 정도 수준의 실을 뽑아내려면 놈도 내력을 소모해야 할 것인데 말이야.”
“그래서 흑주가 하루에 소 한 마리씩 잡아먹고 있소.”
“허허헛, 그 작은 놈이 먹성이 제법이로구나.”
뇌불은 자신의 전용 의복을 입어 보고, 내력을 주입해 본다.
황극린이 묵철 비수로 의복을 찔렀지만 전혀 흠집이 나지 않았다. 물론, 황극린도 묵철 비수에 내력을 주입하면 상황이 달라지긴 할 것이다.
“튼튼하군. 문도들에게 큰 도움이 되겠어.”
다른 문파에선 문주급이나 되어야 겨우 속곳 수준으로 착용할 수 있는 보물을, 만뇌문에선 문도들이 다 착용하고 있었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비약적으로 생존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이제 문주께서 해결해 줘야 할 일이 있소.”
뇌불이 미소를 짓는다.
오랜만에 과거의 인연을 만나러 가는 일이었다. 최근 황극린의 도움만 받는다고 생각했기에 영 찜찜했던 참이다.
“그래, 놈은 걱정하지 말아라. 금방 다녀오도록 하마.”
이제는 녹림의 총채주가 된 제갈창해.
그놈을 만나러 간다. 그리고 가는 김에…….
‘극린이 놈에게 더 도움을 줘야 한다.’
뇌불은 또 다른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