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선공
“걱정하던 일이 벌어졌구나.”
뇌불은 황극린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만뇌문은 비교적 잘 성장하고 있었다. 문도들의 실력은 꾸준하게 상승하고 있었으며, 강호 무림에서 만뇌문은 인정을 받아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위험부담은 계속 커져만 가고 있었다.
뇌불은 정파 무림에서 무림공적에 올랐었다.
뇌불은 죽은 적이 없으니 당연히 무림공적에서 해제되지 않았다. 뇌불이 만뇌문에 있는 이상은 이러한 위험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과거의 뇌불이었다면, 무림공적에 오른 것에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뇌불에겐 지켜야 할 것이 생겨났다.
만뇌문도들을 제자로 삼았으며, 황극린 또한 따지고 보면 그의 제자라 할 수 있었다. 그의 존재로 인해 만뇌문이 위험에 처할 수가 있었다.
“당분간 내가 만뇌문을 떠나 있는 게 좋을 것 같다.”
뇌불은 소림사의 서신을 받고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떠나기로 말이다. 자신이 만뇌문에 머물지 않는다면 문도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듣고 있던 제갈수가 약간 당황한다.
대마두 뇌불. 자신이 알던 뇌불이라면 현 상황에서 이러한 판단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무림공적에 오른 이들은 정상이 없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았기에 무림공적으로 지정되니까. 그런데 뇌불은 만뇌문도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기 위해서 떠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해괴한 소문들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건가? 아니, 당연한 일이겠군.’
주공이 그런 미친 마두와 함께 문파를 개파할 리가 없지 않은가?
아주 잠깐이지만 주공과 문주님을 의심한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렇다고 해도 문제는 문제로군.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건지…….’
제갈수와 뇌불의 시선이 황극린에게로 향했다.
그의 결정에 모든 게 달려 있다.
“소림사는 아직 문주의 존재를 파악한 게 아니오. 내가 혈풍뇌전신공을 익혔다는 것만 알고 있지.”
“시간문제 아니겠느냐? 내 존재를 파고든다면 언젠간 드러날 일이다.”
황극린은 뇌불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제갈수를 바라보았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지?”
“예?”
갑자기 황극린이 자신에게 묻자 제갈수가 당황한다.
“처음에 말했었지. 나와 함께한다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했었다. 마지막 기회를 주마.”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떠날 기회를 주겠다는 말이다.”
제갈수가 두 주먹을 꽉 쥔다.
이미 각오를 했다. 문주가 뇌불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었다. 제갈수의 충심은 진심이었다.
“당연히 전 떠나지 않겠습니다. 전 주공을 모시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문주님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고 해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제갈수의 결연한 목소리에 뇌불이 의외라는 듯한 얼굴을 했다.
사실 겉으로 보기엔 겁이 많아 보였는데, 제법 사내다운 말을 하다니 말이다.
“그럼 됐군. 소림사엔 거절하겠다고 서신을 보내겠소.”
“극린아.”
“소림사에선 혈풍뇌전신공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소. 당신이 떠난다고 해도 그들은 신경 쓰지 않고 원본을 요구하겠지.”
“만뇌문이 무림공적으로 지정될 수도 있다.”
“그래서 힘을 키운 것이지 않소?”
“너는… 무림의 무서움을 잘 모른다.”
“아니, 잘 알고 있소.”
“…….”
뇌불과 황극린의 시선이 마주한다.
사실 뇌불로선 감동이긴 했다. 과거의 황극린이었다면 그냥 매정하게 떠나라고 했을 것이다. 비동에서 보았던 황극린은 그런 성격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는 뇌불이 보기에 미련한 것처럼 보였다. 일단 자신이 떠나면 확실한 위험에선 벗어날 수 있는데 말이다.
“당분간 내가 떠나 있어야…….”
“언제까지 떠나 있을 생각이오?”
“그건…….”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소. 내가 용봉지회에 참가하고부터 이미 혈풍뇌전신공을 익혔다는 걸 알아챈 자들이 있소. 아마 내가 무림에서 명성을 떨칠수록 아는 자들이 늘어났을 테지. 그렇다고 해서 무림 밖으로 도망칠 생각은 없소. 한 번 도망치게 되면 계속 도망쳐야 하오.”
“그래도 내가 떠나면 시간은 벌 수 있지 않겠느냐?”
“과거의 뇌불이었다면, 혼자서 무림 전체와 싸우겠다고 했을 것이오.”
황극린의 말에 뇌불이 찔끔한다.
그의 말이 맞았다. 사실 책임질 것이 없었다면, 뇌불은 소림사가 뭔 개소리를 지껄이든 무시했을 것이다. 그것이 대마두라 불리던 뇌불이었다.
하지만 문도들과 정이 쌓이며 뇌불은 나약한 마음을 먹게 되었다.
자신만 없으면 문도들이 위험에 처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전에도 황극린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지만, 막상 소림사에서 서신이 도착하니 불안감이 커졌다.
뇌불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황극린의 말이 맞았다. 한 번 도망치면 계속 도망쳐야 한다. 끝까지 도망칠 자신이 있는가? 아마 후회할 것이다. 애초에 도망치는 것은 그의 성격과는 맞지 않았다.
“끌끌, 내가 약한 소리를 했구나. 소림사가 무서워서 도망칠 수는 없지. 혼자서도 싸웠던 것이 소림사였는데 말이야.”
“좋은 마음가짐이오.”
“하지만 방책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제갈수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연다.
“제갈세가는 육대세가는 아니지만 무림맹 내에서 상당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로원주님의 명이라면… 무림맹의 군사부에서도 소림사의 요구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겁니다.”
“소림은 네 생각보다 훨씬 집착이 강하다. 제갈세가가 전폭적으로 지원해 준다고 하더라도 의지를 꺾긴 힘들 것이야.”
뇌불은 소림사를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무림을 잘 알고 있었다.
대개 정파 무림은 선량하고 정의로운 집단이라 생각하기 일쑤지만, 뇌불은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이익을 원하는 극한의 이익집단이다. 애초에 무(武)를 수련한다면서 구파일련이라는 세력을 만든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거기다 원로원주가 소림사와 척을 져 가면서 우릴 전폭적으로 도와주겠느냐?”
“죄송합니다. 그건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제갈수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자신이 최소한 제갈세가의 소가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게 상황을 유도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것이 아쉬웠다. 주공께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능력이 부족하여 제대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제갈세가에 빚을 질 수는 없지.”
황극린이 입을 열었다.
천덕이 뇌불의 무공을 알아본 순간부터 황극린은 미래를 대비하고 있었다. 천덕이 비밀로 하겠다고 했었지만, 애초에 그러한 약조는 지켜질 수 없었다.
“차라리 내가 언가주 놈을 협박하여…….”
뇌불에겐 과거 무림에서 쌓아 놓은 인연이 있었다. 그들을 이용하면 소림사를 견제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황극린은 고개를 저었다. 언가와의 인연은 협박으로 사용되어서는 아니 된다.
“언가는 나중에 써먹기로 합시다.”
“나중에 써먹자고?”
“가용 수단은 많이 남겨 둘수록 좋지 않겠소?”
“어디 도움을 청할 문파라도 있다는 말이냐?”
그때 제갈수가 아, 하며 탄성을 쏟아 낸다.
“아! 혹시 단목세가를 염두에 두신 겁니까?”
제갈수는 어머니인 단목화를 떠올렸다.
이전에 황극린은 인면지주에게서 제갈수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아직 단목화는 그에게 목숨값을 갚지 못했다. 단목화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단목세가의 가주에게 손을 뻗을 수도 있었다. 주공께서 거기까지 생각하신 건가?
“아니.”
“설마 남궁세가입니까!?”
이번에도 틀렸다.
황극린은 고개를 젓는다.
단목세가도 남궁세가도 해답은 아니다. 소림사를 꽁꽁 묶어 둘 세력이 필요하다. 당분간 혈풍뇌전신공에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말이다.
“아미파에 서신을 보낼 것이다.”
“아미파에 말입니까……?”
“소림과 아미가 그리 사이가 좋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아미파가 만뇌문의 편을 들어 줄 리도 없지 않겠느냐?”
“굳이 우리 편을 들지 않아도 되오. 우린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을 것이오.”
“그럼……?”
황극린은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아미파와 무슨 연이라도 만들어 둔 것일까?
“불혼패엽공(佛魂貝葉功).”
제갈수가 고개를 갸웃한다. 처음 들어 본 무공 이름이었다. 하지만 뇌불은 그 이름을 듣자마자 얼빠진 얼굴로 변했다.
“잠시만, 불혼패엽공?”
“그렇소.”
“그건 혈마교에 아미파가 빼앗긴 무공이 아니더냐?”
“소림사가 원본을 가지고 있소.”
“뭐라? 그걸 소림이 가지고 있다고?”
뇌불도 모르던 사실이었다.
아니, 정말 소림사가 불혼패엽공의 원본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치더라도… 대체 어떻게 황극린이 그걸 알고 있다는 말인가?
당연히 여기서 황극린이 미래의 일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순 없었다.
뇌불은 황극린의 말이 거짓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그의 말이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존재한다.
“그런데 소림이 아미파에 불혼패엽공을 반납한다면 네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을 텐데?”
“그럴 일은 없을 것이오.”
황극린은 미래를 알고 있었다.
황극린이 흑살문의 살수 207호로서 남궁세가에 잠입했을 무렵, 아미파는 소림사가 불혼패엽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림사에선 당연히 불가의 원류가 자신들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아미파에 원본의 반납을 거절한다.
아미파는 당연히 전쟁을 불사할 각오로 소림사에 거칠게 항의하고, 두 문파는 살벌하게 기 싸움을 시작한다. 그거면 된다.
“그리고 아미파뿐 아니라 소림이 혈풍뇌전신공에 잠시 시선을 거둘 만한 일은 더 있소. 굳이 다른 문파에 손을 뻗을 필요는 없소.”
사실 지금 황극린이 도와 달라고 하면 제갈세가나 단목세가 그리고 남궁세가까지 도움을 줄 것이었다. 하지만 소림사가 무공을 반납하라고 요구한 것에 거대 문파에 손을 뻗는다면, 만뇌문은 흑살문과 싸워 보지도 못하리라.
제갈수와 뇌불은 어이가 없었다.
대체 황극린은 이러한 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북해에서 인연이라도 만든 걸까?
“제갈수, 하오문을 통해 이 서신을 아미파에 전달하도록.”
“예, 주공!”
황극린은 소림사가 반환 요구를 할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미리 서신을 적어 두었다. 뇌불이 깜짝 놀란다.
“뭐냐? 대체 언제 다 준비해 놓은 거냐?”
“북해에서 돌아왔을 때부터.”
“허허허, 진짜 네놈은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그리고 문주는 잠시 다녀올 곳이 있소.”
“다녀올 곳?”
“그렇소.”
황극린이 뇌불에게 종이를 건넨다.
그것을 펼쳐 본 뇌불이 깜짝 놀란다.
“무림맹 입맹 신청서?”
“만뇌문은 정식으로 무림맹에 입맹할 것이오. 그리고 무림맹을 통해 혈풍뇌전신공의 존재를 알릴 것이오.”
“선수를 친다고?”
“그렇소. 혈풍뇌전신공의 존재를 숨기기만 한다면 오히려 의심을 살 것이오. 차라리 만뇌문이 혈풍뇌전신공의 정당한 전승 문파라는 걸 무림맹에 인정을 받는다면, 소림사가 반환 요구를 하더라도 무림맹의 중재를 받을 수 있을 것이오.”
“허허허…….”
뇌불은 씁쓸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황극린은 마치 미래를 읽기라도 하듯 모든 것을 준비해 놓았다. 그런데 자신은 고작해야 떠나겠다는 소리만 하고 있었으니…….
“이제 만뇌문 또한 무림맹에 소속되는 것이니 새 이름을 생각해 두시오. 뇌불으로 살아갈 건 아니지 않소?”
뇌불이 고개를 끄덕인다.
소림사에서 받은 이름이나 과거의 이름을 사용할 수 없었다. 이제는 새 삶에 맞게 새로운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
무엇이 좋을까?
‘만뇌문이니까 만뇌……? 뇌만……? 만불……? 아니다. 너무 촌스럽다!’
뇌불의 시선이 문득 황극린을 향했다.
그의 머릿속에 벼락이 쳤다.
“좋다! 내 이름은 이제 황악이다.”
“황악?”
“그래, 설마 너랑 같은 성을 써서 불만인 것은 아니겠지?”
뇌불이 조금은 뾰족한 말투로 말한다. 황극린이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의 상처를 입을 것만 같아 미리 선수를 치는 것이다. 가끔 보면 뇌불은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었다.
“뭐, 좋은 이름이오.”
황극린의 칭찬에 뇌불의 한쪽 입꼬리가 씰룩인다.
웃음을 겨우 참아 내고 있었다.
“후흐, 그렇지? 좋다! 당장 지부로 가서 무림맹 입맹 신청을 하고 돌아오마! 그리고 더 시킬 일은 없냐?”
뇌불은 뭐든지 하겠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일단 다녀오시오. 다음에 뭘 해야 하는지는 그때 알려 주겠소.”
“알겠다!”
“그럼 저도 다녀오겠습니다!”
제갈수와 뇌불이 떠나간다.
그리고 황극린은 또 무언가를 꺼냈다.
‘흑살문, 놈들은 아마 나와 만뇌문의 뒷조사를 하고 있겠지.’
황극린은 흑살문에 방문했을 때부터 그것을 예상했다.
아마 지금쯤 황씨 가문에 들려서 자신의 과거를 털어 대고, 그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을 것이다. 흑사회의 멸문에 자신이 연관되어 있다는 정보는 이미 알고 있으리라.
흑살문의 의심을 완전히 지우는 건 힘들더라도 잠시 시선을 끌 수는 있을 것이다.
황극린이 붓을 움직여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