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장로 귀환
무공을 수련하는 건 뼈를 깎는 고통을 수반한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듯, 고통 뒤에는 낙이 오기 마련이다. 보통 무공을 익히는 이들에게 ‘낙’이란 성장이었다. 처음엔 검을 백 번 휘두르는 것에도 녹초가 되기 마련이지만,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천 번을 휘둘러도 지치지 않는 육신을 가질 수 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며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무림인 대부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황홀함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만뇌문의 문도들도 마찬가지였다.
백씨 형제와 비청하. 그들은 무공을 수련하며 성장하는 재미를 깨달았다. 처음엔 과연 자신이 이것을 익힐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노력은 그들을 배신하지 않았다. 당연히 노력만의 결과는 아니다. 재능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빠르게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성장의 기쁨보다 더 우선시되는 게 존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에게 성장은 목표로 향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만뇌문도들의 목표가 무엇일까?
고수가 되어 강호를 주름잡는 무림인이 되는 것?
자신만의 협의를 펼쳐 명성을 떨치는 것?
그것도 아니라면 금은보화를 거머쥐는 것?
물론, 그러한 욕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라면 물질적인 것에 완전히 초탈하기는 힘들었으니까. 다만, 그들에겐 세속적인 욕망을 잊을 만큼 강렬한 욕망이 존재했다.
바로 은인에게 은혜를 갚는 것이었다.
백씨 형제는 용살문에 팔려 갈 뻔했다.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금 살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운이 좋아서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두 형제는 다시는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비청하는 절맥증을 앓다가 조부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평생 자식을 위해 헌신하던 비 노인은 손자가 죽은 후에 그 자신도 목숨을 끊었으리라.
세상에는 은혜를 잊는 사람이 많다.
변소를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듯이,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들은 다르다.
은혜를 갚는 것.
그것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다.
황극린이 서신을 보내와서 흑사회나 흑살문에 공격당할 수도 있다고 했을 때, 그들은 겁을 집어먹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분노했다.
감히 첫째로 은공을 공격하려는 놈들에게 광분했으며, 둘째로 은공께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힘없는 정의는 무능이라는 말처럼, 아직 그들은 분노할 정도로 힘을 가지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성장하려 했다.
은공께 자그마한 보탬이라도 될 수 있도록, 죽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현재 그들은 한 사람분의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자만 따위는 아니었다. 구자광이나 뇌불도 그들의 노력과 성장을 인정해 줄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성장한 백씨 형제와 비청하의 앞에 그가 나타났다.
“이제까지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황극린 또한 그들을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분명 용봉지회를 위해 만뇌문을 떠날 때만 하더라도, 많이 미숙했던 문도들이었다. 하지만 수련하는 것을 잠시 지켜본 것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저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말이다.
“성장했구나.”
백씨 형제와 비청하의 어깨가 부르르 떨린다.
그들이 성장한 이유는 앞서 말했듯 황극린에게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돌아오자마자 그들의 노력을 인정하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가, 감사합니다……!”
당장이라도 그의 앞에서 초식을 펼쳐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참아 낸다. 오랜만에 돌아온 황극린이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여기서 무공을 보여 주겠다고 떼를 쓰는 것 자체가 황 장로를 배려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 마음을 황극린이 눈치채기라도 한 것일까?
“나중에 무공을 봐주도록 하겠다.”
“예, 장로님!”
“넵! 기다리고 있을게요!”
“확실히 준비해 놓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이 들려온다.
참으로 훈훈한 장면이었지만, 그걸 지켜보는 제갈수는 기시감을 느껴야 했다.
마치 또 다른 자신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만뇌문의 문도들은 모두 황극린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는 듯하다. 잠깐 본 것만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경쟁심이 솟구친다. 누군가를 주공으로 모시는 이들이 다 그러하듯, 최고의 수하가 자신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존재했으니까. 그와 별개로 만뇌문도들과 잘 지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한 식구가 될 것이니까.
“내 옆에 있는 이는 제갈세가의 제갈수라고 한다. 이번에 연이 닿아 만뇌문에서 함께하게 되었다.”
때마침 황극린이 제갈수를 소개한다.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던, 정확히 말하면 강아지들처럼 황극린만 바라보던 문도들이 쪼르르 시선을 옮긴다. 갑자기 시선이 집중되자 제갈수가 움찔한다.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특히…….
‘저 사람은 왜 날 노려보는 거지?’
광견살검 구자광.
이미 제갈수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어떤 포악한 성격을 가지고, 무림에서 악명을 떨쳤는지도 말이다.
“제갈수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백건악입니다.”
“전 백온후예요!”
“비청하입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황극린이 구자광을 바라본다.
“인사는 나중에 또 하는 것으로 하지. 문주는 안에 계시나?”
“예, 계십니다.”
“따라와라.”
“예!”
잔뜩 긴장한 제갈수가 황극린을 따라 만뇌문의 장원 중심부로 향한다.
과연 만뇌문의 문주는 어떤 사람일까? 아마 황극린을 저리 대단한 고수가 되게끔 가르침을 내려 주셨으니 명망 높은 무림 선배일 것이 분명하다.
‘잘 보여야지.’
황극린에게 잘하는 방법.
그의 주변인에게도 잘해야 한다. 문도들에게 경쟁심을 느끼긴 했지만, 자신은 굴러들어 온 돌이다. 그렇기에 모난 돌이 되지 않게끔 노력할 것이다. 모두 다 제갈소희가 해 준 조언이었다.
‘누이의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니까.’
그렇게 도착한 만뇌문주의 전각.
“이놈아,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다!”
“헙!”
제갈수가 깜짝 놀라며 뒤로 돌아섰다. 그곳에는 마치 도인(道人)처럼 정갈한 백색의 수염을 기른 노인이 서 있었다. 수련하고 왔는지, 의복이 군데군데 찢어져 있다. 아니, 찢어졌다고 하기보다는…….
‘탔어?’
역시 황극린의 사부님이 분명했다.
제갈수는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간 보지 않고 바로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제갈세가의 제갈수라고 합니다! 이번에 황 장로님의 수하가 되어 만뇌문도가 되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그런데 왜인지 조용했다.
기나긴 침묵 속, 제갈수의 침 넘어가는 소리만 들려오다가 뇌불이 대뜸 말한다.
“또?”
“예……?”
“요즘 것들은 말이야, 응? 예의가 없어. 문주보다 장로를 더 끔찍이 생각하니……. 에잉, 쯧쯧!”
“그, 그게…….”
제갈수는 자신이 실수한 언행이 있나 싶어 되돌아봤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떠올릴 수 없었다.
“됐다. 나도 제대로 된 수하 한 명을 데리고 와야겠군, 쯧!”
“예, 옙… 죄, 죄송합니다.”
“그건 그렇고, 어째 더 성장한 것 같은데?”
뇌불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황극린을 바라본다.
만나자마자 파악할 정도로 황극린의 기세가 달라졌다. 과거에는 강맹하고 직선적인 느낌이라 했다면… 지금은 온화해진 느낌이다. 뇌불 수준의 고수는 황극린의 기세만 보고도 성장을 판단할 수 있었다.
‘과거에는 심기체가 조금씩 균형이 맞지 않은 듯했는데… 이번에는 확실히 무언가 달라지긴 했군. 약쟁이 놈이 보면 좋아하겠어.’
뇌불은 황극린을 보며 뿌듯한 감정을 느꼈다.
말은 험하게 하지만 그의 성장에 누구보다 기뻐하고 있었다. 그가 중원에서 인연이 닿은 이들에게 한 수 알려 주긴 했었지만, 그의 독문무공인 혈풍뇌전신공을 익힌 이는 황극린뿐이었다.
어쩌면 황극린은 전성기의 자신보다 더 강해질지도 모른다.
아니, 그의 성장세로만 보면 분명히 그러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너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는데… 뭐 없냐?”
뇌불이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묻는다.
피식.
황극린은 기다렸다는 듯이 행낭에서 쇠꼬챙이에 꽂힌 최상급의 소고기를 꺼낸다.
콰지지짓-!
불에 굽는 것이 아니라 뇌전으로 굽는 고기! 흑주도 반한 뇌전 고기가 순식간에 알맞은 정도로 익어 갔다. 그것을 보며 뇌불이 감탄한다.
“허허허, 나도 그런 생각은 못 했는데!”
어쩌면 편견에 갇혀 있었을 수도 있다. 요리하는 데 무공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그러한 편견 말이다. 하지만 황극린은 그런 것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천하제일의 무공이라 불리는 혈풍뇌전신공의 기운을 요리에 사용했다.
꿀꺽.
뇌불이 침을 삼키며 고기를 노려보고 있다.
“흑주.”
작은 인면지주가 황극린의 명에 따라 여덟 개의 다리로 특제 양념장이 담긴 호리병을 꺼냈다.
“오오, 원조의 냄새로구나!”
“……!”
대체 뭘 하는 건지 옆에서 멍하니 지켜보던 제갈수 또한 침을 꿀꺽 삼킨다. 뇌전으로 노릇노릇하게 익힌 상태로 양념장이 발리니 머리가 어질어질할 만큼 황홀한 향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여깄소.”
뇌불이 쇠꼬챙이를 빼앗듯이 가져가곤 바로 입에 고기를 물었다.
“아아……! 넌 어쩌면 무인이 아니라 숙수가 되어야 했을지도… 우물우물! 모르겠구나!”
“꿀꺽…….”
“너도 먹어라.”
어느새 제갈수의 것까지 준비한 황극린이 건네준다.
그가 두 손으로 공손히 쇠꼬챙이를 받고 작게 한입 베어 물었다.
자연스레 동공이 확장된다.
그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오른다.
‘뭐지……?’
사실 별다를 것 없는 요리다. 그냥 고기를 구워 양념장을 발랐을 뿐이다. 그런데 왜?
‘왜 맛있지?’
제갈세가의 내로라하는 숙수들이 했던 요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맛. 너무 맛있어서 건강을 해칠 것만 같은… 그러한 맛이다.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황극린의 말에 뇌불이 후다닥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씩 과거의 무위를 회복하고 있었던 뇌불이었기에, 과거의 기억도 어느 정도 되살아난 상태였다. 기억이란 인간의 성격이나 태도를 만들어 가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황극린의 특제 양념장이 발린 고기 앞에서 뇌불은 비동에서의 모습 그대로였다.
* * *
“우물우물… 으음, 그래서 흑사회의 본거지를 만뇌문의… 냠냠, 하자고?”
“고기는 이야기가 끝난 후에 구워 주겠소.”
“그런……!”
대화가 도통 진행되지 않는다.
뇌불이 나라를 잃은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평정심을 되찾는다. 아예 안 구워 주겠다고 한 게 아니었으니까. 조금만 참자.
“제갈수의 누이인 제갈소희, 그녀에게 부탁했소.”
“제갈소희? 처음 들어 보는데? 차라리 제갈여람 그놈에게 말하는 게 낫지 않으려나? 그놈이 최근에 원로원주가 되었다던데?”
뇌불의 시선에 제갈수가 당황한다.
원로원주 제갈여람이 원로원주가 된 지도 거의 20년이 다 되었다. 최근이라고 하기엔 긴 세월이었다.
“제갈 소저면 충분할 것이오.”
“참, 창해 그놈도 있는데? 만나 봤느냐?”
창해?
제갈창해를 말하는 건가? 제갈수의 먼 친척이자 제갈세가의 수치라 불렸던 망나니였다. 지금은 녹림의 총채주가 되어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만나지 못했소.”
“으음, 네가 하는 일이니 맞는 길이겠지. 그래서, 내가 해 줄 게 무어냐?”
“제갈 소저와 거래를 했소. 언젠간 녹림의 총채주인 제갈창해를 막아 주기로 말이오.”
진법의 개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황극린이 제갈창해가 뇌불의 비동을 구축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제갈소희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실력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문주께서 나서 주시오. 제갈창해에게 받을 빚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소?”
뇌불이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상당히 기쁜 목소리로 답한다.
“그렇지. 고놈은 나한테 목숨 빚이 있지. 뭐, 꽉 막힌 놈도 아니니까 몇 번 어루만져 주면 내 말에 고분고분 따를 것이다.”
문주.
사실 처음에는 부담되고 귀찮기만 한 자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문주의 직을 맡아 보니 꽤 재미도 있었고 보람차기도 했다. 특히 황극린의 입에서 문주라 불리는 게 참 기분 좋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가 깊어진다.
오랜만에 만나다 보니 할 이야기가 많았다. 서신으로 전한 이야기도 많았지만,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황극린이 제갈수를 이 자리에 두는 것은 만뇌문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를 하는 바람이 있어서였다. 갑자기 문파에 합류했다고 몰라도 된다는 식으로 취급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 제갈수는 명문가인 제갈세가 출신이었으니 현 무림의 정세에서 황극린과 뇌불이 모르는 부분을 알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대화가 깊어지는 와중, 제갈수의 머릿속엔 강렬한 의문이 떠올랐다.
‘대체 문주님은 누구시지?’
만뇌문의 문주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분의 대화를 경청하다 보면 현 무림에서 내로라하는 명망 높은 고수들의 이름이 막 언급된다. 제갈수가 궁금한 부분은 그가 만뇌문의 문주이기 전 대체 무엇을 했는지다.
‘모르긴 몰라도 강호에서 대단한 업적과 명성을 쌓으셨던 건 분명해!’
기대감에 가슴이 뛰는 제갈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