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고금제일
- 제갈 소저가 원하는 게 무엇이오?
- 황 공자님께서 원하는 건요?
원하는 것.
서로에게 도움이 될 때, 협력한다. 황극린은 제갈소희의 진법과 주술적인 재능을 원했다. 처음엔 녹림의 총채주가 된 제갈창해에게 도움을 청할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제갈수가 황극린의 수하가 되었으며, 제갈창해가 황극린에게 협력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기에 황극린은 제갈소희에게 제안했다.
언젠가 제갈소희가 녹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이다.
당연히 지금 당장은 아니다.
녹림은 이제 막 무림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고작해야 지금은 원로들의 골치가 조금 아픈 정도였다. 제갈세가 출신이 흑도 방파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평판이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아직 녹림은 본격적으로 무림맹이나 제갈세가에 발톱을 드러내진 않고 있었다.
제갈소희가 제갈세가에서 확실하게 입지를 쌓기 위해서는 녹림의 규모가 더 커져야 하고, 그들의 위험이 중원 무림에 확실히 알려질 때 움직여야 했다.
“마치 날 아는 듯했지.”
황극린과의 대화를 마친 제갈소희가 작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이제까지 누구도 그녀에게 그런 제안을 한 적은 없었다. 어차피 제갈세가의 소가주는 제갈현이다.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돌아오는 건 없었다. 모두 제갈현에게 잘 보이려 했으며, 그녀는 단지 제갈현의 곁에 들러리처럼 선 머리 좋은 일꾼일 뿐이었다.
하지만 황극린은 달랐다.
그는 제갈소희에게 제갈세가를 집어삼키라는 듯이 은근히 손짓했다. 그녀의 깊숙한 심연에 박힌 욕망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나쁜 기분은 아니다. 오히려 인정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배교가 만든 진법의 개조라…….”
제갈소희는 먼저 황극린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그녀가 일 처리를 깔끔하게 하면 할수록 돌아오는 보답은 클 것이다. 말뿐인 약속은 믿지 않는다. 계약서에 명시된 것만 믿는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감을 믿어 보기로 했다.
“돌아가야겠네.”
이번 회담에선 그녀가 원하는 상황은 만들지 못했다.
사천당문이나 만독문과의 인연도 제대로 쌓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회담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황극린과의 거래는 언젠가 그녀에게 커다란 힘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제갈소희가 문 쪽을 바라본다.
‘그런데 두야랑은 황 공자님과 안면이 있었던 것 같았단 말이지…….’
황극린 수준의 무인이라면 강호행을 하다 만독문의 공녀와 인연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긴 했다. 뭐, 당장 중요한 일은 아니다. 이런 정보는 굳이 캐내지 않고 품고 있는 것이 득이 될 때가 많았다. 황극린과 기 싸움을 하는 건 좋지 않았다.
‘상관없지.’
제갈소희는 가문으로 돌아가서 다시금 미래를 준비하기로 했다.
* * *
황극린과 두야랑은 야밤에 만나 대련을 했다.
당연히 두야랑은 처참하게 패배했다. 그녀의 암기는 황극린에게 통하지 않았으며, 그녀의 독공은 황극린의 내성을 뚫지 못했다. 그는 북해에 다녀온 이후로 한 차원 더 성장했다. 따라잡을 수 없다고 느껴졌지만, 그렇기에 다행이라 여겼다.
오히려 작은 차이였다면 두야랑의 승부욕을 자극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녀는 확신했다.
‘극린이한테 독공이 통한다면… 아버지한테도 인정받을 수 있을 거야.’
그녀는 가끔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의 큰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제갈소희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다음에 보면 오늘처럼 패배하진 않을 거야.’
두야랑의 품에 있는 천기피독신주가 빛을 발하고 있다.
신병이기라 불리는 기물. 본래 흑살문의 물건이었지만, 지금은 두야랑이 가지고 있었다. 흑살문이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하는 이유는 그녀가 천기피독신주의 존재를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버지에게도 말이다.
두야랑 또한 경쾌한 발걸음으로 사천성 성도를 떠나갔다.
* * *
“주공, 식사 준비 완료했습니다!”
제갈수는 사실 요리에 재능이 없었다. 하지만 만들어진 육포를 굽는다거나 고기를 굽는 것은 요리의 재능이 없더라도 금방 적응할 수 있는 문제였다. 처음엔 고기를 태우는 경우도 많았지만, 지금은 꽤 먹음직스럽게 익혀 황극린에게 대령했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고생이랄 게 있나요? 사냥은 다 흑주가 해 오는데요, 뭘. 하하!”
제갈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실이 그러했다.
사냥 실력은 제갈수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흑주를 따라갈 수 없었다. 어찌나 재빠른지 지금 일대일로 흑주랑 싸워도 이길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역시 주공은 차원이 다르다.’
처음에 흑주를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융중산에서 커다란 인면지주에게 죽을 뻔한 제갈수였기에, 저런 영물들이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지 잘 알고 있다. 인간의 손에선 절대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말이다.
그런데 주공께서는 그런 영물을 길들였다.
이 얼마나 대단한가? 그러고 보니 선조 중 한 분께서도 영물을 길들여 애완동물처럼 길렀다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주공께서는 강호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실 분이다. 어쩌면 고금제일인이 되실 수도 있겠지.’
고금제일(古今第一).
몇몇 후보군은 있다.
전대 혈마교의 교주.
전대 천화련주.
소림사의 파계승이라 불렸으며 무림공적이 되었던 뇌불.
머리를 굴리면 더 많은 이들이 떠오른다. 오악검파 중 최고로 꼽히는 화산의 장문인도 후보군에 들어갈 것이며, 북해빙궁의 마후 또한 무적의 무공을 익혔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육대세가의 태상가주들도 절대 빼놓을 수 없다.
수많은 무인이 후보군으로 떠오르는 이유는 당연하다 볼 수 있었다.
이제껏 무림에서 독보적으로 고금제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법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물론, 제갈수가 아는 것과 현실은 괴리가 있을 테지만… 현재 강호에서의 평가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제갈수는 고금제일이 되실 수도 있는 주공께 부끄럽지 않도록 수련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품위 있게 식사하시는 주공에게 시선을 돌린다.
“주공,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뭐지?”
“주공께서는 누가 고금제일이라 생각하십니까?”
“고금제일?”
“예, 천하제일이라 불렸던 이들은 중원에 많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고금제일은 천하제일이라 불렸던 무인들을 모두 함께 평가하는 것이니까요. 주공께서 고금제일인을 누구로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황극린이 사슴 뒷다리를 내려놓는다.
딱히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제갈수가 물어보니 머릿속에 몇몇 무인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역시…….
“천화련주겠지.”
“아, 역시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제갈수가 아, 하고 탄성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다가 문득 의문이 생긴다. 황극린은 ‘전대’ 천화련주라고 말하지 않았다. 천화련주 중에서도 무적의 무위를 자랑했으며, 무림맹주를 30년 동안 역임한 전대 천화련주 계당. 그를 말하는 게 아닌가?
“전대 천화련주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당대의 천화련주다.”
“아……!”
당대의 천화련주?
사실 제갈수와 황극린의 정보 격차는 상당하다. 황극린은 미래를 경험하고 과거로 귀환했다. 그렇기에 현재 벌어지지 않은 사건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황극린은 당대의 천화련주와 만나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궤를 달리할 정도로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는 사대마제 중 하나인 만독문주를 압도적인 실력으로 제압했으며, 천하칠대고수에 오른 무당의 천룡대제나 하북팽가의 만천무제와의 비무에서도 승리한다. 친선비무가 아닌 문파끼리의 다툼을 비무로 해결하는 자리였으니 모두 실력을 숨기지 않았을 것이다.
천도옥황(天道玉皇)과 화염신황(火炎神皇).
두 사람 중 한 명이 고금제일이지 않을까? 그리고 천도옥황이 지금 고금제일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황극린은 생각했다.
물론, 이것은 현재의 생각일 뿐이다.
‘만약 북해에서 천도옥황과 빙궁주가 싸우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
북해빙궁주는 황극린이 무림맹에 추격당할 당시에도 북해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또한, 그건 혈마교주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힘이 강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증명되지도 않은 걸 믿을 필요는 없었다.
“뇌불은요?”
“뇌불?”
“예, 어릴 적에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인간의 영혼을 먹어 단전의 내공을 취하는 괴물이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면 최소 백 명이 죽었다고 하던데… 그런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면 고금제일에 들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지금은 죽었겠지만 말입니다.”
황극린이 대뜸 말한다.
“뇌불은 살아 있다.”
“예?”
“너도 언젠간 보게 될 거다.”
“제, 제가요……?”
이게 무슨 말이지? 설마 곧 죽게 된다는 말인가? 수련을 게을리한 수하에게 하는 경고인가? 제갈수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간다.
그런 제갈수에게 황극린은 더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어차피 곧 만나게 될 것이다. 굳이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만나 대화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주공! 전 빨리 먹고 수련하도록 하겠습니다!”
황극린의 말을 착각한 제갈수가 황급히 식사를 시작한다.
그런 제갈수를 보며 황극린은 의문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뇌불을 주화입마에 빠트린 고수가 있다고 했었지.’
뇌불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유령을 언급했었다. 유령은 정말 실존하는 것일까?
‘무영심결(無影心訣)을 만든 유령.’
황극린이 익힌 무영심결.
그의 체질이 변화게 된 이유 중 하나로 추측되는 무공이다. 세맥을 갈고닦아 무공을 익히기 위한 최적의 신체로 만드는 심결이었다. 이런 수준의 무공을 창안할 수준의 고수라면… 고금제일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긴 하다.
‘고금제일이라…….’
황극린은 이제껏 정상을 바라보며 나아가진 않았다.
하지만 무공을 익히다 보니 아주 조금 정상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아득히 먼 곳이었지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재밌겠군.’
황극린은 뇌불과의 만남이 기다려졌다.
이제 곧 만뇌문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 * *
“앞으로 백 번!”
“으아아아-!”
“이야야아아아!”
“하아압-!”
광견살검.
아니, 이제는 명견살검(名犬殺劍)이라는 별호로 불리게 된 구자광이 심각한 표정으로 문도들의 수련을 봐주고 있었다.
- 아이들이 누구에게도 죽지 않도록 훈련시켜라.
뇌불 어르신의 말씀이다.
그분의 명령은 거역할 수 없었다. 명견살검 구자광은 만뇌문도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혹독하게 훈련시키고 있었다. 거기다 문도들의 의지도 대단했고, 재능도 상당했다.
특히 묘연골을 타고난 백온후와 절맥증을 타고났던 비청하의 성장이 가파르다.
두 사람보다 재능은 부족하지만, 백건악은 노력으로 두 사람을 따라가고 있었다. 구자광은 왜 제자를 가르치는지 깨달으며, 문도들을 가르치고 있다.
문도들이 성장하는 것을 보면, 자신이 성장하는 것보다 더 기뻤다.
묘한 감정이다. 사실 그가 처음 황극린을 제자로 받으려 했던 이유는 무림에서 편하게 살아가기 위해서였다. 말 한마디면 진수성찬을 바치는 수하를 원했었다. 하지만 막상 문도들을 가르쳐 보니 그것보다 큰 기쁨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세가 비틀어졌다! 백온후!”
“아, 넷!”
아직 어린 백온후였지만, 무공에 대한 열망은 대단히 강하다.
형제의 목숨을 구해 준 은공, 황극린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수련해야만 했다. 특히 묘연골을 타고났기에 타고난 감각이 뛰어났다. 구자광의 한마디에 비틀어진 자세를 수정한다.
“백건악! 벌써 지쳤나! 너보다 어린 동생들이 쌩쌩한데?”
“아닙니다!”
백건악은 죽기 살기로 버티고, 검을 휘두른다.
그의 장점은 강력한 의지였다. 두 사람보다 재능은 떨어지지만, 집념과 끈기만큼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비청하! 내공을 조절해라! 절맥증을 앓았다고 하여 내력을 펑펑 써도 되는 줄 아느냐!”
“예!”
비청하가 짧게 대답하며, 내력을 조절한다.
그는 셋 중에서 내공을 다루는 재능이 가장 뛰어났다. 그렇기에 그의 장점을 살릴 수 있도록 훈련해야 했다.
“장로님께서 돌아오셨을 때, 지금 너희의 얼빠진 모습을 보면 얼마나 실망하시겠나! 어엉?”
황극린을 언급하니 세 문도의 움직임이 확연히 변화했다.
저들에겐 이것이 최고의 자극이었다.
“초식 하나를 펼칠 때마다 외쳐라. 황!”
“황-!”
“극!”
“극-!”
“린!”
“린-!”
구자광은 새로운 구호가 마음에 드는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던 중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엉?”
“엉-!”
수련에 열중하던 문도들은 어색함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상당한 집중력이다.
하지만 그들의 집중력을 단번에 깨트리는 목소리가 존재했다.
“오랜만이구나.”
세 문도의 움직임이 돌처럼 굳는다.
그리고 벼락처럼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는…….
황극린이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주공의…….”
그리고 그의 곁에 선 제갈수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단 한 명만이 그를 주목했다.
명견살검이 광견살검일 때의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