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제안
정적이 흐른다.
갑자기 나타난 황극린이 왕동예에게 암기를 던졌다. 흑사회는 단순 무력으로는 당연히 구파일련이나 육대세가 등과 같은 내로라하는 세력들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흑사회가 무서운 이유는 중원 곳곳에 지부가 있으며 그들의 본거지 위치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했던가?
적당히 겁을 주고 이득을 취하는 게 최선이긴 하다. 흑사회가 궁지에 몰리면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 더군다나 회담에서 흑사회의 부회주를 공격하는 건, 정파가 할 법한 행동이 아니다.
사천당문의 원로 당손엽이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선다.
당문이 중재자로 참석한 회담에서 피를 보았다는 소문이 나면 세간에서 어떻게 떠들겠는가? 물론, 회담을 주도한 제갈세가가 더 욕을 먹겠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다. 일단 일이 더 꼬이기 전에 막아야 한다.
“그만!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아시오!”
당손엽이 손을 휘두르자 소매 속에 감추어져 있던 암기가 쇄도한다. 처음 보는 사내가 더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도록 막으려 한 것이지만, 그의 암기는 사내에게 닿지 못했다.
퉁, 퉁.
암기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적어도 상대가 뒤로 물러설 줄 알았던 당손엽이었기에 현 상황에 자존심이 상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사내를 막으려 하는 순간이었다.
“주공!”
제갈수가 후다닥 사내의 곁으로 달려갔다.
‘주공이라고?’
제갈가의 둘째에게 주공이라 불리는 사내가 있었던가? 당손엽이 의아하게 생각할 때였다.
“정말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주공을 위해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무공 수련에만 열중했습니다! 약한 수하는 받지 않는다는 주공의 말씀에 깨달음을 얻었으며, 주공께서 해 주신 조언에 저는 새로운 무(武)의 길을 열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마치 황극린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연습이라도 했던 것처럼 말을 쏟아 내는 제갈수다. 그것을 본 제갈소희가 이마를 짚는다.
여기서 황극린을 탓할 수는 없다.
애초에 제갈세가가 흑사회에 선전포고 한 것은 황극린 때문이었다.
- 황 공자님, 흑사회와의 회담이 틀어진다면 만뇌문이나 제갈세가 모두가 귀찮은 일에 휘말릴 수도 있답니다. 흑도의 복수는 작지만 치졸하며, 사소하지만 악착같아요. 그러니 지금은 암기를 거두셔야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갈소희의 조언은 황극린과 제갈세가를 위한 것이다.
흑도 놈들의 치졸한 복수는 명망 높은 정파의 문파들이 싸우는 방식과는 다르다. 궁지에 몰린 그들이 무인들을 건들지 않고 무공을 익히지 않은 식솔들을 표적으로 삼는다면 골치 아파진다.
제갈소희는 대놓고 황극린을 나무라지 않았다.
전음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그가 들어주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흑사회는 멸문했소.”
- 저들을 조금씩 압박해 가면서… 에?
제갈소희가 당황한다.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의 의미인가? 아니면 황극린이 그들을 멸문하겠다는 말인가?
“흑사회가 멸문했다니요?”
“잠시! 일단 저 사내는 대체 누군데 회담장에서 난동을 피우는 것이오?! 제갈세가의 사람이오?”
억지로 황극린에게 인사하려는 것을 참던 두야랑이 입을 연다.
“권룡.”
“권룡?”
“응, 황극린이야.”
“…….”
이 어린 여인은 왜 자꾸 반말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당손엽이 두야랑을 노려보았지만, 지금 그걸 따지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권룡 황극린이라면, 만뇌문의…….”
“응, 만뇌문의 장로 황극린이야.”
“후우우, 그렇다고 치고… 황 소협이라 했소? 지금 회담에서 거짓을 고한다면 문제가 커질 것이오. 그런 부분까지 중재자로 나선 사천당문이 해결해 줄 순 없는 노릇이고.”
바닥에 쓰러진 흑사회의 부회주 왕동예가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암기에는 독이라도 발라져 있었는지 전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왜 못 믿어? 흑사회가 멸문했다잖아.”
“자꾸 옆에서…….”
두야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하자 당손엽도 인내가 한계에 도달했다.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려는 순간.
“흑사회주는 죽었소.”
“……!”
“흑사회의 지부들엔 해체 명령을 내린 상태요. 물론 말을 듣지 않는 지부도 있겠지만… 흑사회주가 사라진 마당에 흑사회는 그리 무서운 문파는 아니겠지. 아마 다른 흑도 문파들에게 잡아먹힐 것이오.”
“황 공자님, 흑사회주가 죽었다는 말씀은…….”
“내가 죽였소. 그리고…….”
콰지지직!
“으어어억!”
바닥에 쓰러졌던 흑사회 부회주 왕동예가 죽었다.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벌벌 떨다가 말이다. 황극린이 묵철 비수를 회수했다. 뇌섬사로 연결되어 있었기에 언제든 뇌전을 방출할 수 있었다.
“이제 부회주마저 죽었으니 흑사회는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겠소?”
당손엽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아무리 무공이 고강하고 최근 명성을 떨치고 있다고 해도…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거짓을 고하는 건 위험하다. 그리고 증거도 없이 말만으로 모든 것을 믿을 수는 없었다.
“사실이 아닐 경우 책임을 져야 할 것이오.”
“그러겠소.”
황극린이 고개를 돌린다.
오랜만에 보는 제갈수. 사실 그에 대해선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융중산에서 만나 인연이 되었고, 그가 훗날 각법으로 명성을 떨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조언을 해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는 황극린의 수하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수련했다.
풍기는 기세만으로 그의 성장을 알아볼 수 있었다. 융중산에서 인면지주에게 당할 뻔했던 허약한 문인은 사라졌다.
한 사람분의 몫을 해 줄 수준으로 성장한 제갈수.
“열심히 했구나.”
제갈수가 주먹을 꽉 쥐고, 어깨를 파르르 떤다.
“고생했다.”
이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서, 잠을 줄여 가며 수련했던 걸까?
제갈수는 눈물이 핑 돌았지만 겨우 울음을 참아 낸다. 이런 일로 눈물을 흘린다면 주공께서 자신을 어떻게 보겠는가? 그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제갈소희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황 공자님의 말이 사실이라면…….’
* * *
모든 게 사실로 드러났다.
흑사회의 지부는 비밀스레 운영되고 있었지만, 제갈세가는 전쟁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동안 흑사회 지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대부분 지부는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채고 제 살길을 찾고 있었으며, 어떤 지부는 자신들이 흑사회 전체를 운영하겠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중구난방(衆口難防).
하나가 되어 결집한다면 흑사회는 위협적인 문파다. 무인들의 무위는 대단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오히려 약하기에 더 까다로운 문파다. 하지만 지휘 체계가 한순간에 증발해 버렸기에 흑사회는 그저 그런 흑도의 문파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작 며칠 사이에 말이다.
“황 소협의 말이 사실이었군. 대단한 일을 해내셨소. 흑사회를 벼루던 문파들이 많은데 만뇌문이 그걸 해낼 줄이야……. 강호에서 만뇌문을 칭송할 것이오. 사천당문을 대표해서 황 소협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겠소. 처음에 의심했던 것, 내 사죄드리오.”
“괜찮습니다.”
당손엽의 태도는 바뀌었다.
다짜고짜 나타나서 회담을 망친 황극린이 그리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대세를 거스르는 것처럼 미련한 행동도 없었다. 지금 만뇌문은 강호에서 가장 주목받는 문파 중 하나였다. 그는 황극린을 의심했던 것을 사죄하고 감사를 표한 뒤, 회담장에서 떠나갔다. 적절한 판단이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제갈세가의 두 남매와 만독문의 두야랑이었다.
제갈수는 잔뜩 긴장한 채로 황극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력을 인정받긴 했지만, 아직 곁에서 그를 보필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황극린에게 직접 묻기엔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가 거절한다면…….
“황 공자님 덕분에 일이 잘 풀리게 되었어요. 노고에 감사드려요.”
제갈소희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황극린에게 인사한다.
“아니오. 제갈세가가 나서 준 덕에 흑사회가 만뇌문에 대한 공격을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지. 오히려 내가 고맙소.”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고맙다.”
황극린의 말이 맞았다.
흑사회는 황극린이 벌인 일로 만뇌문을 공격하려 했었다. 뇌불이 있었기에 그나마 안심이 되었지만, 그래도 공격당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은가? 제갈세가가 선전포고를 했기에 흑사회도 만뇌문에 대한 적대 행위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어… 감히 제가 주공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제갈수는 지금이 적기라 판단했다.
“지금부터 주공을 곁에서 모셔도 되겠습니까?”
황극린은 제갈수의 얼굴을 마주했다.
굳은 결의와 함께 상당히 긴장한 것이 보인다.
“좋다.”
“으아-!”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질러 버린 제갈수였다. 하지만 황극린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후회할 수도 있는데 괜찮겠나?”
“후회라니요? 절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황극린이 순식간에 제갈수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에는 흑사회의 부회주를 끝장낸 묵철 비수가 들려 있었다. 예기를 발하는 묵철이 제갈수의 목에 닿을 듯 말 듯하다.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죽을 수도…….”
“만뇌문은 적을 늘려 가고 있지,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황극린은 알고 있었다.
강호에서 주목을 받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 지금 당장은 만뇌문을 인정하는 듯하지만, 틈을 보이면 치고 들어올 이들이 차고 넘쳤다. 거기다 최근에는 흑살문, 북해빙궁과도 충돌이 있었다.
당장이야 잘 해결된 듯 보였지만… 방심하는 순간 황극린이 지금껏 이뤄 왔던 것들이 한 번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 외에도 당장 언급할 수 없는 문제가 꽤 있었다.
아마 만뇌문이 강호에서 자리를 잡아 갈수록 위협이 다가올 것이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제갈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황극린은 괜히 수하로 받기 싫어서 이런 변명을 늘어놓을 사내가 아니었다. 아마 황극린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가정을 해 보았다.
당연히 죽기 싫다. 오래도록 살고 싶었다. 삶이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그는 인면지주에게 죽을 뻔한 당시에 절실히 깨달았다.
고민을 마친 제갈수가 콧김을 내뿜었다.
“적이 많다면, 적을 이길 수 있도록 더 강해지겠습니다. 주공의 곁을 지킬 수 있게 더 노력하겠습니다.”
제갈수는 알고 있었다.
최근 많은 성장을 이루었던 제갈수였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 그렇기에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지금도 황극린이 접근하는데 반응조차 하지 못했지 않은가? 황극린이 말하는 적은… 아마 그와 비등한 위험을 지니고 있으리라.
“지켜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사실 제갈수를 받아들이는 것도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니다.
그는 이미 명문가 중 하나인 제갈세가의 직계였다. 그런 직계가 이제 막 개파한 만뇌문에 소속된다는 것 자체가 문제의 여지가 있었다.
뭐,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제갈세가와 만뇌문이 동맹 관계가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황극린이 제갈소희를 바라본다.
그가 알기로 제갈소희는 야심이 많은 여인이다. 또한, 능력도 출중하다. 황극린은 그녀가 아직 자신의 모든 재능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언젠가 그녀는 뜻을 이루기 위해 능력을 모두 내보일 것이다.
그 전에.
황극린은 제갈소희의 능력을 이용하기로 했다.
아마 그녀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닐 것이다.
“최근 녹림의 일로 제갈세가가 곤욕을 치른다고 들었소.”
녹림.
흑사회가 확고한 지휘 체계를 가지고 중원 전역에 세력을 일구었던 것과는 달리 녹림은 가진 힘에 비해 비교적 평가가 박했다. 하지만 현재 녹림의 총채주가 된 제갈창해의 등장으로 녹림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었다.
“예, 원로원에서 그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지요.”
거기다 통비원은 제갈세가나 구파일련에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황극린이 살수로 살았던 과거에도 제갈창해는 무림맹을 무척이나 괴롭혔었다.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제갈세가는 궁지에 몰리게 될 것이다. 결국, 녹림의 주인이 제갈세가 출신인 제갈창해이기 때문이다.
“제갈 소저가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돕겠소.”
“…….”
제갈소희가 황극린을 마주한다.
제갈세가를 돕는다고 한 게 아니다. 제갈소희가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했다. 그 미묘한 차이를 파악하지 못할 그녀가 아니었다.
‘뭔가 알고 있구나.’
제갈소희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황 공자님의 도움이 있다면 든든할 것 같군요.”
그녀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 * *
- 표적 혈귀(血鬼) 추적 보고서.
어두운 방 안, 작은 등불 하나에 의존하여 한 사내가 보고서를 읽어 나가고 있었다. 꽤 많은 양의 보고서였지만, 넘기는 속도가 몹시 빠르다. 보고서를 읽는 사내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마지막 장을 덮은 사내.
조용히 입을 연다.
“결국, 발견하지 못했다는 거군.”
사내가 손가락으로 탁상을 톡톡 친다.
고민할 때 나오는 버릇과 같은 것이다.
고민하던 그는 문득 다른 보고서를 꺼내 들었다.
흑사회의 멸문과 황극린이라는 사내에 대해서 정리된 보고서였다. 최상급 살수 중 하나인 57호가 작성한 보고서. 거기엔 믿을 수 없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황극린이 위험 순위 50위권에 올라야 한다는 것이 보고의 핵심이다.
“만뇌문이라…….”
전혀 연관이 없어 보였지만, 그렇기에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다.
“13호.”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사내는 13호가 대답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말을 할 수 없었던 벙어리였다. 목울대의 진동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사내는 그곳에서 퍼지는 작은 진동을 느꼈다.
“만뇌문을 조사해라. 그곳의 문주가 누군지, 황극린이 어떻게 빨리 강해질 수 있었는지도.”
명령을 받은 13호의 기척이 사라진다.
같은 최상급의 살수라도 급이 다르다. 그는 최상급 살수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자로 통하며, 특급 살수 중 하나인 암귀(暗鬼)의 직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