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이별과 만남
“읍읍읍!”
황극린을 보자마자 황실의 핏줄을 이어받은 소년이 발버둥을 친다. 하지만 흑주의 실은 소년의 힘으로는 풀어낼 수 없을 정도로 몹시 튼튼했다. 하지만 그런 흑주의 실도 황극린이 손을 한 번 휘저으니 종이처럼 찢겨 나갔다.
물론 내공을 이용한 것이었지만, 거미줄에 묶여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공포에 떨던 소년은 깜짝 놀랐다. 자신은 혼신의 힘을 다해도 풀어낼 수 없었는데, 사내는 대체 얼마나 힘이 센 걸까?
가만히 몸을 웅크려 잠을 청하던 흑주가 깨어났다.
황극린의 앞에서 배를 뒤집어 깐 후, 애교를 부린다. 마치 칭찬이 고프다는 듯이 말이다. 황극린이 배를 만져 주자 그 무서운 거미가 끼이이,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터트렸다. 물론, 그것을 듣고 있던 소년은 소름이 끼칠 뿐이었지만 말이다.
“손목을 내라.”
“왜 손목을……!”
소년은 황급히 두 손을 등 뒤로 숨겼지만, 어느새 접근한 황극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소년이 황극린의 손길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상태는 좋아졌군. 물론, 독이 없어졌다고 해도 요양은 해야 할 것이다.”
“킁! 그, 그래. 고, 고맙구나……!”
소년이 당황한 탓인지 혀가 꼬여 말한다.
당장 해야 할 말이라곤 그것밖에 떠올리지 못했다.
“나와라.”
소년은 황극린의 명령에 따라 감옥에서 빠져나갔다.
코를 스치는 비릿하고 진득한 피 냄새. 그것을 맡자마자 속이 울렁거렸지만, 참아 냈다.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은 소년이다. 이런 것에 흔들려서 되겠는가? 거기다 왜인지 저 남자 앞에서만큼은…….
‘울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거미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린 것 같았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던가? 사내는 소년을 얼마나 우습게 볼까?
‘난 그런 것에 울음을 터트려선 안 돼!’
그래도 다행이라 말할 점은 소변은 누지 않았다는 정도일까? 인간이 극도로 공포에 젖으면 하체에 힘이 풀리고 실수할 수도 있다고 들었다.
‘왜 이런 생각까지……. 그건 그렇고, 다 죽였잖아!’
소녀는 화들짝 놀랐다.
그토록 무섭게 느껴지던 흑사회의 무인들이 깔끔하게 죽어 나자빠져 있었다. 그리고 흑사회에 납치되었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모두 풀어 준 걸까? 아니면…….
문득 소년은 의문을 떠올렸다.
저 사내를 믿어도 되는 걸까? 아무리 자신을 구해 줬다고는 하지만… 누군지도 모르지 않은가?
“머, 멈추어라……!”
용기를 낸 소년이 말한다.
다행히도 황극린은 소년의 말을 들어 주었다.
“뭐지?”
“크음……! 구해 준… 것은 고맙습… 구나! 하나, 나는 네가 누군지 알아야 한다! 그, 그러니까!”
“만뇌문의 황극린.”
“아?”
“별호는 권룡이라더군.”
별호는 뭐 자신이 짓는 게 아니었다.
황극린은 소년에게 자신의 정체를 쉽게 밝혔다.
“너는?”
“나요? 아……! 내 이름은…….”
말해야 할까?
소년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목숨을 구해 준 사내에게 이름을 알려 주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진짜 이름을 말할 것인가? 아니면…….
“내 이름은 원일이다.”
황극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런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었지만, 그의 성은 유추할 수 있었다.
‘주원일.’
그는 주씨 황제의 피를 이어받은 것 같았다.
뭐,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긴 했다.
“그렇군. 가자.”
“어……? 그래.”
소년은 황급히 황극린을 따른다. 그러다가 문득 배가 움푹 파인 시체를 본다. 마치 맹수가 뜯어먹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사내가 가지고 있는 거미가 먹은 건가……?’
생각만으로도 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저런 영물은 난생처음 보았다. 북경에서 황제가 뒷마당에서 영물을 키우기도 했었지만, 저런 괴물 같은 것은 키우지 않았다. 모두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들만 키웠다. 그리고 인간을 먹는다? 그런 패륜적인 맹수들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야. 애초에 호랑이나 곰은 사람을 잡아먹지. 저 사람의 애완 거미… 가 사람을 잡아먹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여러 복합적인 생각을 하며 황극린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샌가 눈이 부셨다.
“악!”
황극린은 그를 배려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주변을 경계하는지 잠시 멈춰 있었다.
“가지.”
“으, 으응!”
주원일이 호다닥 황극린을 쫓아간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지금 그는 자신을 납치하려는 게 아닐까? 이용하려는 게 아닐까? 이미 그는 ‘진짜’ 이름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왜인지 걱정되지 않았다. 황극린이 강제로 자신을 따르게 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 아닌가?
주원일의 아버지는 무림인을 항시 경계하라 하셨지만, 목숨의 은혜를 입은 사람까지 경계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어느샌가 두 사람이 중강현의 중심가에 도착했다.
거대한 성과 황실의 깃발이 펄럭이는 게 보였다.
“여긴…….”
“들어가자.”
“잠시만… 요!”
소년이 황급히 황극린을 말린다.
“왜?”
“관청에 들어가는 건 안 된다요!”
반말하려는 건지 존대를 하려는 건지 이상한 소년의 말이었지만, 황극린은 그의 신분을 짐작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거기다 오래도록 갇혀 있었으니 제정신이 아니리라.
“나는…….”
주원일은 고민한다.
이 사실을 말해야 할까? 황극린이 황실과 관련된 사람이 아니라면 원일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관청으로 찾아왔으리라.
그의 아버지는 막강한 권력을 쥔 인간이다.
하지만 황실에는 그와 맞먹는 인간이 최소한 둘 이상이 존재한다. 이대로 홀로 관청에 들어가게 된다면… 다시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커진다.
“나는… 내 진짜 신분은… 그게……!”
“황제의 아들이겠지.”
“……!”
주원일이 기겁했다.
그걸 알고 있다는 말인가?
“당연히 관청으로 바로 가면 또 다른 위험에 처할 수도 있을 거다.”
“그, 그건……!”
사내는 황실의 세력 관계를 꿰고 있다는 말인가?
정말 다른 세력에서 보낸 무인인가?
“그건 네가 헤쳐 나가야 할 문제다.”
“……!”
주원일이 움찔한다.
황극린은 분명히 그를 구해 준 덕으로 황실과 연을 쌓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주원일을 애지중지 사천성에서 북경까지 데려다줄 생각은 없었다. 그의 할 일은 여기까지다. 관청까지 데려다줬는데도 주원일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어차피 거기까지인 인연이다.
소년은 왠지 서운한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의심이 갔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의 큼직한 등이 안심이 됐다. 마치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는 듯한 안락함과 든든함. 그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기 때문일까? 진짜 이름을 밝힌 이유도 본능적으로 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난 네가 살았으면 한다.”
“왜…….”
“그럼 살아서 빚을 갚을 수 있지 않나?”
“…….”
소년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속물적인 사내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황극린이 말하는 빚이 왜인지 꼭 살아라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래, 조언 고맙구나. 난 꼭 살겠다. 그리고 황극린, 네게 꼭 빚을 갚을 것이야!”
근엄한 말투.
어린아이가 내뱉을 법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지만, 왜인지 어울린다고 황극린은 생각했다. 흑주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렸던 소년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강단이 있다. 사실 어린 나이에 흑사회에 납치되어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
“만뇌문 황극린, 언젠간 꼭 빚을 갚겠다. 그러니…….”
이걸 말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자네도 꼭 살아남아라.”
무림이 위험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황실보다 더 위험한 곳이 무림이다. 중원 전역의 패권을 놓고 매번 피 튀기는 싸움을 하고 있다. 사내의 실력이 강하지만, 그보다 더 강한 사람이 언제든지 나타난다.
무림에 고금제일인이라 불리는 인간이 없는 이유였다.
황실은 무림을 경계하는 만큼 무림을 공부한다. 그건 주원일도 마찬가지였다.
“고맙군.”
황극린이 소년에게 무언가를 건네준다.
작은 약병과 단검이었다.
“이건……?”
“약병에는 독이 들었다. 목숨을 지키려면 그런 수단은 갖추어 놓는 것이 좋겠지.”
주원일은 겁이 났지만, 최대한 손을 떨지 않으려 주의하고 그것을 받아 들었다.
“관청 안까지 데려다줘야 하나?”
“아니, 괜찮네! 나 혼자 가지.”
소년의 기세가 갑자기 달라졌다.
우물쭈물하며 황극린의 앞에서 말을 더듬을 때와는 확 달라졌다.
‘이게 제왕의 자질이라는 건가.’
어린 나이에 대견하다고 생각한 황극린이다.
뭐, 여기까지 했으니 만약 소년이 정말 살아남아 북경까지 간다면 언젠가 목숨값을 받을 날이 올 것이다.
그렇게 황극린이 떠나려 한다.
그때 주원일이 황극린을 부른다. 그리고 그가 무언가를 던졌다.
“진주언가!”
“음?”
“그 동전을 들고 언가를 찾아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네!”
황극린이 오랜만에 놀랐다.
진주언가는 무림 세가 중에서도 문인을 꽤 배출한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황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주씨 성을 가진 소년이 진주언가를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황극린의 머릿속에 뇌불의 비동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 진주언가의 가주 언상중은 몰래 만나던 여인이 있었다. 황실의 여인이었고, 참 아름다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그것을 눈감아 주는 대가로 얻어먹은 술만 금자 백 냥은 족히 넘을 것이다! 크크, 그땐 참 재밌었는데 말이지.
언상중이 몰래 만나던 여인.
어쩌면 주원일은 그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이 아닐까?
‘신기한 동전이군.’
주원일이 던져 준 동전은 눈으로 보기엔 아무런 양각이나 음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손으로 만져 보니 미세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 목숨값은 비싸네! 그걸로 다 갚은 것이 아니야! 그, 그러니까…….”
멀찍이 떨어진 소년의 목소리가 떨리는 게 느껴진다.
“다음에 꼭 다시 만나자!”
후다닥!
소년이 관청 쪽으로 달려 나간다. 잠시 후, 관인들에게 붙잡히는 모습을 보았지만 소년은 그들에게 호통을 치더니 사과까지 받았다. 마지막 순간에 주원일은 황극린이 아직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채 관청 안으로 들어갔다.
‘근데 주원일과의 연은 어쩌면 독이 될 수도 있겠군.’
황제는 수많은 자식을 낳는다.
주원일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그의 출생의 비밀이 황극린이 예상하는 그것이라면… 독이 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잘 풀린다면 몇 배의 득을 볼 수도 있으리라.
‘그래도 잘됐으면 좋겠군.’
황극린은 그가 준 동전을 품속에 챙기고, 걸음을 옮긴다.
이제 그가 향할 곳은… 서녕이었다.
* * *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흑사회주의 답신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가요?”
“회주께서 얼마나 바쁘신 줄 아시오?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오!”
부회주 왕동예는 당황했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그 또한 흑사회에서 막대한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결국 흑사회주의 명령에 따르는 수하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중요한 회담에서 흑사회주의 의견은 필수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흑사회주에게서 전서구가 오지 않고 있었다.
‘지부를 찾아가야겠어.’
어쩌면 지부에서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워낙 세 문파의 압박에 당하는 통에 지부에도 찾아가지 못했다.
‘이놈들은 대체 뭘 한다고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야?’
이미 흑사회 성도지부장은 해체 명령이라는 흑사회주의 직인이 찍힌 서신을 받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는 이미 사천성 성도에서 도망쳤지만, 부회주는 아직 거기까지 알고 있진 못했다.
“오늘 회담은 취소하는 것으로 합시다. 난 지부로 가야겠소.”
하지만 제갈소희는 그에게 틈을 내어 줄 수 없었다.
이대로 그를 압박하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어 낼 수 있다. 부회주의 약조라도 확실한 명분이 된다. 그것을 문서화해 제갈세가의 명분을 만들어야 한다.
“불가능해요. 당신이 어디로 도망칠 줄 알고요? 수하를 시켜 다녀오시면 되잖아요?”
“내가 도망친다니? 난 흑사회의 부회주요.”
그의 눈동자에 어둠이 맺힌다. 제갈소희는 그에게 겁을 먹진 않았지만, 확실히 일신의 실력이 꽤 대단하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제갈수가 동생을 위협하는 왕동예에게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잠시만요! 으학! 무슨 힘이 이렇게 세지?”
“멈춰!”
회담장은 객잔을 통으로 빌려 진행되고 있었다. 일 층에서는 사천당문과 흑사회 그리고 제가세가의 무인들이 교대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대체 어떤 놈이 세 문파의 회담에 찾아와서 행패를 부린단 말인가?
특히 사천성의 패자라 불리는 사천당문의 원로 당손엽이 눈썹을 꿈틀였다. 하필이면 지금 경계는 사천당문의 무인들이 서고 있었다.
당손엽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누군가 3층으로 올라왔다.
“어?”
“헉!”
“아?”
각자 다른 목소리로 놀람을 표시했을 때였다.
“……!”
“……!”
사내의 행동에 모두가 몸을 굳혔다.
“컥… 네놈, 무슨 짓… 을…….”
왕동예의 몸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객잔으로 올라온 사내에게서 출수된 암기가 흑사회 부회주 왕동예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