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흑살문
흑주가 독을 먹는다는 사실은 북해를 빠져나온 직후 알게 된 일이다. 동면을 택할 정도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흑주는 따스한 기후가 되어서도 비실비실하여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과거였다면 황극린이 휴식을 취할 때 알아서 사냥감을 잡아 왔을 텐데,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을 뿐이었다.
황극린은 흑주가 걱정되어 성수신의에게 데려가야 하나 싶었지만, 우연한 상황에 흑주가 힘을 되찾을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독을 먹는 것이었다. 우연히 지나치게 된 하오문의 지부. 그곳에서 흑주는 독 냄새에 이끌려 본능적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호리병에 든 독과 그걸 들고 있던 노인의 피까지 빨아 먹었다.
결과는 흑주의 완전 회복.
마치 동상에 걸린 듯이 움직임이 굼떴던 흑주는 다시금 활발해졌다.
더 놀라운 일은 다음에 벌어졌다.
흑주는 인간의 몸에 있는 ‘독’만 빨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에 노인은 피가 빨려 기겁했지만, 조금 뒤 황극린에게 충격적인 말을 하게 된다. 몸 안에 있던 독기가 사라졌다며 감사를 표했다.
흑주는 중독된 사람을 해독할 수 있었다.
본래 인면지주가 가진 능력인지 아니면 흑주만의 능력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인면지주가 인간을 잡아먹었으면 먹었지, 친절하게 인간의 피만 빨아 먹는 경우는 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아무튼, 좋은 발견이었다.
황극린은 독에 어느 정도 내성이 있다. 하지만 만뇌문의 문도들에게 언젠가 흑주의 능력이 필요할 때가 올 것이다. 무림에서 독을 쓰는 문파는 사천당문과 만독문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황극린은 흑주의 능력을 이용하여, 소년을 살리기로 했다.
흑주는 소년의 팔에 기다란 이빨을 박아 넣고 독을 쭉쭉 빨아냈다.
“피는 먹지 마라.”
- 끼이이이.
흑주가 뒷발을 들며 알겠다는 듯이 답한다.
최근 들어서 사람의 말을 더 잘 이해하는 듯했다.
“쿨쿨…….”
소년은 황극린의 손길로 전해진 따스한 기운에 잠에 푹 빠져 있었고, 흑주는 어느샌가 소년의 독을 모두 빨아 먹었다. 황극린은 소년의 맥을 한 번 짚어 본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여기서 기다려라.”
- 끼이이이이!
흑주가 마치 떼를 쓰는 것처럼 달려와 황극린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는다.
“기다려.”
- 끼이…….
황극린이 이제 향할 곳은 흑주를 데려가기 힘든 곳이다. 거기다 혹시 모를 상황에 소년을 지켜야 한다. 이왕 이렇게 된 것, 황실과 연을 만들어 두는 게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황극린이 떠나가자 흑주가 기괴한 소리를 몇 번 내더니, 몸을 확 웅크린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여러 개의 눈이 작은 숨소리로 잠을 청하는 소년에게로 향했다.
- 끼?
소년이 눈을 뜬다.
마주한 것은 입가에 피를 묻히고 있는 괴물 거미였다. 거기다 안면에는 인간의 얼굴 형상이 매달려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아난다.
“으, 으아아악! 사, 살려 줘어어어!”
흑주가 뒤를 돈다.
그리고 뒷구멍에서 무언가를 푹 방출했다.
“흡!”
흑주표 특제 거미줄에 입이 틀어막힌 소년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망치려 한다. 하지만 진득하고 튼튼한 거미줄은 소년의 행동을 제약했다.
소년이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되자 흑주는 다시금 몸을 웅크리고 입구를 지킬 뿐이었다.
* * *
‘오랜만이로군.’
흑살문.
복수의 대상이었지만, 무턱대고 보이는 흑살문도를 모두 죽일 수는 없었다. 대책 없이 그랬다간 표적이 될 뿐이었다. 이미 흑사회는 황극린을 대상으로 한 살행을 맡긴 상태였다. 그것부터 무효화해야 한다.
표적이 된 본인이 살행을 무효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예외가 있었다.
계약서의 원본이 있으면 된다.
황극린은 이미 흑사회주에게서 원본을 강탈했다. 거기에 더해 살행 의뢰비와 같은 수준의 돈이 필요하다. 그것도 흑사회의 금고에서 가져왔다. 중강현의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반점. 이곳이 흑사회의 지부 중 하나였다.
흑사회는 살수들의 살행을 돕기 위해 많은 조력자를 중원에 배치한다.
그들은 살수에게 필요한 경비를 지원해 주거나 정보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그리고 만약 살수가 다치거나 죽는다면 뒤처리를 하는 역할도 맡았다.
외관은 허름한 반점이었지만, 이곳이 흑살문의 지부라는 사실을 아는 건 극소수에 불과하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니 평범한 반점에서 날 법한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난다.
“어서 오세요!”
밝은 인상의 중년 여인이 반갑게 손님을 맞이했다.
“우육탕 한 그릇 주시오.”
“네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잠시 반점을 둘러본 황극린이 문득 묻는다.
“여기 변소가 몇 개나 있소?”
여주인장이 요리를 하며 답했다.
“변소는 하나뿐이죠.”
“열세 번째 변소를 찾고 있는데 말이오.”
“아… 잠시만요. 이쪽으로 가시면 변소가 나와요.”
여주인장이 주방의 바로 옆문을 가리킨다. 황극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좁고 긴 통로를 이동하자 또 다른 문이 하나 등장했다.
“사람이 있소.”
안에서 소리가 들린다.
“네 번 기다리겠소.”
“네 번이라……. 그렇다면 들어오시오.”
기이한 대화 흐름. 이것은 모두 흑살문의 진짜 지부에 진입하기 위한 암호였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지부에 잠복한 살수들이 나설 것이다. 거기다 암호마다 미묘하게 목적이 다르다. 황극린은 살수로서 지부로 찾아온 게 아니라 손님으로서 찾아왔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리로.”
외관은 분명히 작은 반점이었지만, 내부는 꽤 넓었다.
사내의 안내를 따라가니 반점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딱 명문가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분위기의 방이다.
“안녕하세요.”
평범한 얼굴의 여인이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황극린은 그녀가 인피면구를 썼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뭐, 그것을 지적할 이유는 없다.
“처음 뵙는 분이신데, 어쩐 일로 반점을 찾아 주셨을까요?”
“의뢰를 취소하고자 하오.”
“의뢰요?”
흑살문에 의뢰를 맡기는 건, 평범한 사람은 꿈도 못 꿀 정도로 어렵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흑살문은 손님을 가려서 받는다. 거기다 어중이떠중이 같은 표적을 상대하지도 않는다. 사흑련의 자존심 때문일까? 뭐, 흑살문 수준에 동네 잡배를 잡아 달라는 의뢰를 받아들이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아무튼, 그렇기에 의뢰를 취소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겨우 맡긴 의뢰를 취소하려면, 의뢰비와 동일한 금액을 위약금으로 지불해야 한다. 그런 미친 짓을 하는 이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성함과 출신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황극린. 만뇌문.”
“황극린?”
여인이 붓을 놓는다.
또한,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은은히 내비치는 살기. 평범한 이들은 여인의 앞에 서면 왜인지 으스스해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살기를 이러한 방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고 찾아오신 것, 맞나요?”
“그렇소.”
“그렇군요. 상부에 보고하여 취소할 수 있는지 알아봐야 할 것 같군요. 조금 기다려 주셔야 할 거예요.”
“당장 취소를 요구하겠소.”
쿵.
황극린이 떡하니 탁상에 금자를 올려놓는다.
“상부의 허가가 있어야지만…….”
“판단을 재고하시오. 지부원들이 모두 전멸할 수도 있소.”
“…….”
여인이 입을 다물었다.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기에 표정은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대체 뭐지?’
여인은 황극린이 최근에 등록된 1급 표적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를 죽일 살수가 대막에서 달려오고 있다. 물론, 꼭 살수가 죽여야만 하는 게 아니다. 기회가 보인다면 지부에서도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표적을 제거할 수 있었다.
여인은 황극린을 제거하고자 했다.
애초에 표적이 직접 의뢰를 취소하는 게 말이나 되는가? 흑살문의 신뢰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황극린은 그런 여인의 생각을 다 꿰고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지부가 전멸할 수도 있다고? 협박하는 건가?’
감히.
그러한 단어가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내뱉진 않는다.
“지부가 날 공격한다면 난 최선을 다해 싸울 것이오. 자랑은 아니지만, 이곳 지부에 있는 17명으로는 날 막을 수 없소.”
“…….”
이번에도 여인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심장의 박동이 점차 커지기 시작한다. 손에 땀이 흐르고 있다. 살수의 훈련을 받은 인간이라도 감정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었다.
현재 지부에 있는 인원을 정확히 알고 있는 상대 앞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대체 어떻게 지부의 정보를 알고 있는 거지? 아니면 혹시…….
‘기감으로 숫자를 모두 파악했다는 말인가? 그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는 건가?’
흑살문 내부 평가에서 표적 황극린의 등급은 1등급이다. 초절정 수준에서도 최상위급에 속하는 실력자. 언젠가는 천하칠대고수에 필적한 실력에 오를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지금 황극린이 보여 주는 모습으로 추정컨대…….
‘말이 안 되지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대로 끌려다닐 수만은 없었다.
“본문의 문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죠.”
“알고 있소.”
“그러니 그런 협박은 통하지 않습니다.”
“협박이 아니오. 단지 사실을 말해 주는 것뿐.”
황극린이 여유롭게 차를 마신다.
그 행동이 왜인지 참 거슬린다. 흑살문인 걸 알면서도 직접 찾아온 표적. 독이 섞여 있을지도 모르는 차를 마신다? 자신감인지 자만심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표적이 의뢰를 취소하는 경우는…….”
“그래서 원본 계약서를 가져왔지 않소?”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계약서는 위조된 것이 아닌 원본이 확실했다. 이것으로 상호 간의 계약서를 파기하면 계약은 취소된다. 굳이 상부에 보고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단지… 여인은 조금 자존심이 상했을 뿐이다.
살수라는 존재는 언제나 포식자의 입장이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경험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지금 황극린의 태도는 마치 자신이 갑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표적은 그래서는 안 된다.
여인이 황극린에게 반박할 말을 고민하고 있을 때.
“여기서 처리할 수 없다면 성도로 가겠소.”
“…….”
여인은 자존심을 부릴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성도지부로 가서 계약이 취소된다면, 그녀의 경력에 흠이 가게 된다. 그녀는 상부의 인정을 받아 최상급 살수의 직위를 얻었다. 흑살문에서 직위는 절대적인 권력. 상급 살수 이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거기다 흑살문은 실수 한 번으로 직위가 추락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선택하시오.”
“액수를 확인하세요.”
여인의 말에 복면을 쓴 사내가 나타나 마대 자루의 돈을 세어 본다. 금자 10만 냥이라 꽤 오래 걸렸지만, 불평불만 없이 묵묵히 셈을 할 뿐이다.
“맞습니다.”
꽤 시간이 지난 뒤 사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인이 저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흑살문의 지부 아래에선 모두가 그녀의 통제 아래였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통제를 벗어나는 사람을 만났다. 원래는 흑살문의 표적이었으나 이제는…….
“살생부에서 내려가실 겁니다.”
“고맙소.”
황극린은 당연히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여인이 황급히 그를 불러 세운다.
“언젠가 의뢰를 맡기실 일이 있다면, 꼭 중강지부를 찾아 주세요.”
“그러겠소.”
황극린이 말뿐인 약속을 남기고 떠나갔다.
그가 나가자 여인의 앞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모두 복면을 쓰고 있어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정보 수집차 추적을 시작합니까?”
“아니. 쫓다가 죽을 거야.”
“예.”
“그냥 보내 줘.”
“존명.”
상급 살수 두 명이 여인의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황극린, 내부 평가 등급을 상향 요청 해야 할 수도 있겠어.’
흑살문은 이름이 어느 정도 알려진 무림인들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여 순위를 매기고 있었다. 사실 황극린은 중원 전체로 따져도 100위권에 간당간당한 수준이다. 후기지수 중 특출 난 재능과 실력을 지닌 건 맞았지만, 중원에 고수는 많았다. 특히나 명성을 떨치지 않고 가만히 무공을 갈고닦는 재야의 고수들이 즐비한 곳이 중원이다.
‘최소한 50위권인가.’
100위와 50위의 격차는 상당하다.
거기서 10위씩 올라갈 때마다 상당한 격차를 만들어 낸다.
천하칠대고수 중 하나에 들어간 남궁세가의 가주 창천뇌검이 14위에 올라가 있으니 흑살문의 순위가 얼마나 깐깐한지 알 수 있었다. 죽지만 않았다면 금분세수한 무림인도 모두 포함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 사내가 몇 살이라고 했지?’
표적 근처에 자리를 잡은 지부에는 정보가 모두 전달된다.
황극린의 나이를 살펴본다.
‘말도 안 돼!’
황극린은 아직 약관(弱冠)이 되지도 않았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여인은 순간 황극린을 당장 죽여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촉박함을 느꼈다.
지금 벌써 저런 수준에 오른 고수가 몇 년이 지나면 얼마나 더 강해질 것인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