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해체 명령
흑사회는 지부에 돈을 쌓아 놓지 않는다.
그들이 악착같이 모은 돈은 모두 흑사회의 본성 깊숙한 창고에 있었다. 반짝이는 금화들과 보석들이 창고에 잘 정리되어 있었다. 흑사회 정도의 문파를 운영하는 데는 상당한 규모의 지출이 필요하다는 것을 감안해도 많은 돈이다. 거기다 흑살문에 황극린에 대한 살행 의뢰로 10만 냥을 사용했으며, 의뢰를 중단하기 위해서 또 10만 냥을 내야 하긴 하지만…….
‘당분간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군.’
그렇게 쓰고도 돈은 많이 남을 것이다.
그 외에 다른 것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당연히 황극린이 찾는 것은 영약이다. 이젠 1갑자가 되어서 내공이 더 늘어날 필요가 없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공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중원에는 황극린보다 수배나 많은 내공을 품은 무인들도 여럿 있었다.
허나, 아쉽게도 창고에서는 영약은 보이지 않았다.
오래전에 실전되었다고 알려진 무공서들이 몇 보였을 뿐이었다. 혹시나 하여 무공서를 살펴보았지만, 황극린이 관심 가질 만한 수준의 무공은 아니었다.
그렇게 일각 정도 창고를 뒤져 보던 황극린이 두꺼운 마대 자루에 돈을 채워 넣기 시작한다.
그는 그것에 10만 냥이나 채워 넣었다. 먼저 해야 할 것은 흑살문에 의뢰된 살행을 취소하는 것이다.
‘흑살문…….’
흑사회주랑 싸우며 황극린은 자신의 실력이 훨씬 뛰어나다는 걸 깨달았다.
특히 내력이 늘어났기에 뇌전의 기운을 이용해도 꽤 내공이 남는 편이다. 과거였다면 백뢰 한 번 쓰고 반절 이상의 내력을 소진했을 테지만, 확실히 강해졌다.
하나, 그렇다고 자만하지는 않는다.
흑사회주가 자신이 사대마제의 실력에 버금간다고 착각한 것처럼, 자만은 자신을 좀먹는 독이었다.
사대마제는 중원제일의 기재라 평가받는 이들이, 절세의 무공을 익히고 수십 년의 세월을 수련한 절대자들이다. 당연히 황극린은 지금 그들의 힘에 미치지는 못한다. 거기다 사흑련에 오른 문파들은 문주만 강한 게 아니다.
흑살문의 특급 살수가 얼마나 대단한 이들인지 잘 알고 있다.
황극린 또한 과거에 특급의 벽을 넘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오랜만에 지원조랑 만나는 건가.’
흑살문에는 살수도 있지만, 그들을 지원하는 이들도 있었다. 살수들이 중원 전역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지원조는 황극린이 살수 시절에도 꽤 도움을 받았다.
그들에겐 나쁜 감정은 없었다.
결국, 문제는 혈고독을 이용하여 인간을 납치하고 살수로 만드는 높으신 간부들이었다. 그들 또한 과거의 황극린처럼 이용당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황극린이 창고를 나가려고 할 때.
즈즈즉.
즈즈즉.
기괴한 소리가 들린다.
‘혈고독.’
황극린의 감각이 아니었다면,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흑살문주가 가져왔던 호리병과 생김새는 같았지만, 색이 달랐다.
성수신의에게 거의 다 죽어 가는 혈고독을 가져다줬지만, 살아 있는 상태로 암수 두 마리를 가져가진 못했다. 인간의 체질을 바꾸려 노력했던 성수신의라면… 어쩌면 혈고독을 해결할 방법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게 가능하다면 흑살문에서도 구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뭐, 흑살문의 살수 대부분이 설사 혈고독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더라도 제안을 거절할 것이 분명하기에 아쉬웠지만 말이다.
일단 혈고독은 챙겨 가는 게 좋았다.
‘잠시만.’
문득 황극린이 자리에서 멈춘다.
그러고 보니 혈고독을 처음 만든 문파가 배교라고 했던가?
만약 배교가 아직 멸문하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면, 어둠 속에서 힘을 키우고 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뭐, 황극린이 207호로 살아가던 시절엔 그들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아마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거나, 굳이 중원에 존재를 드러내서 다시금 무림공적에 오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는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미래는 언제든 바뀔 수 있으니.’
그에 대한 대비는 해 두는 게 좋으리라.
황극린은 걸음을 옮겨 진의 밖으로 나갔다.
* * *
황극린이 먼저 향한 곳은 흑사회의 중강지부다.
중강지부는 흑사회의 지부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다. 실제로 중원 곳곳에 퍼진 지부에 명령을 하달하는 곳이 바로 중강지부였기 때문이다.
중강지부의 장원은 외관으로 보면 평범한 무림 문파의 그것과 다른 점이 없었다. 거기에 장원의 입구에는 소선문(簫仙門)이라는 지극히 정상적인 이름의 현판이 걸려 있었다. 항주지부가 외부적으로는 포목점을 운영한 것처럼, 중강지부는 무림 문파 중 하나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검은 달에서 왔다.”
황극린은 흑사회주에게 들은 대로 답했다.
그러자 문지기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실제로 장원 내부를 보니 평범한 문파와 같은 모습이다. 아마 저들은 정말 소선문의 문도들일 것이다. 눈속임을 위하여 키우는 문도들이겠지.
황극린은 흑사외 중강지부의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흑사회의 무인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냄새로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그들은 익힌 무공부터가 다르다. 정파의 내공심법과 사파의 내공심법은 다른 냄새가 났다. 그것이 진하게 배어 있는 장소를 찾으면 그만이었다.
서쪽에 위치한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없어 보였지만, 꽤 많은 무인이 지하에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항주지부에서 맡았던 오물 냄새가 진동하여 황극린의 코를 자극한다. 아마 이곳에서도 납치된 이들이 노예처럼 팔릴 준비를 당하고 있으리라.
황극린의 행동은 지체가 없었다.
숨어 있는 무인들에게 암기를 던져 보이는 족족 목숨을 거두었다.
“컥!”
“네놈은 뭐냐!”
소란스러워지자 가장 안쪽의 방에서 거의 알몸이나 진배없는 중년인이 검을 쥐고 허겁지겁 뛰쳐나온다.
“중강지부의 부지부장인가?”
“어,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흑사회 중강지부 부지부장 주삼청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부지부장에 오를 정도면 눈치 하나는 잘 본다. 뭐, 눈치가 없더라도 눈앞의 사내가 호의적인 목적으로 지부를 방문했다고 생각할 순 없으리라. 그의 손에 죽은 무인만 수십 명. 거기다 그와 비슷한 규모의 무인들이 멀찍이 서서 포위하고 있었지만, 전혀 긴장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너희에게 마지막 임무를 하달하러 본성에서 왔다.”
“보, 본성이라고요?”
흑사회 본성에 들어갈 수 인원은 제한적이다.
부지부장도 딱 한 번 그곳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그만큼 흑사회주의 신뢰를 받는 이들만 드나들 수 있는 곳이 본성이다. 그런데 저 사내가 본성에서 나왔다고? 그런데 왜 흑사회의 무인들을 죽인단 말인가?
“이 서신을 흑사회 각 지부에 보내도록.”
서신을 읽던 부지부장이 화들짝 놀란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각 지부장들에게… 흑사회는 해체되었으니 지부를 정리하라……? 대협, 이게 무슨 소리…….”
“말 그대로다. 흑사회는 해체됐다.”
“……!”
당연히 믿을 수가 없었지만…….
사내에게서 풍기는 위험한 기운에 부지부장이 긴가민가한 듯이 고개를 갸웃한다.
“이거면 증명이 되나?”
“헙!”
황극린이 꺼낸 것은 흑사회주가 아끼는 애검 광룡보검(光龍寶劍)이었다. 저것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검집에는 광룡의 양각이 마치 살아 있는 듯이 새겨져 있었다. 부지부장에 임명될 때, 그는 광룡보검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흑사회주의 광룡보검이 젊은 사내에게 있다는 말은…….
‘흑사회가 끝났구나!’
부지부장의 판단은 빨랐다.
“대협께서 주신 서신을 똑같이 복사해라! 그리고 각 지부에 특급 인장을 찍어 전서구를 통해 보내도록 해라!”
“어…….”
“빨리빨리 움직여! 죽고 싶나!”
“예!”
부지부장의 명령에 모두가 몸을 움직인다. 황극린이 다 죽여 버리지 않은 이유는 손을 덜 쓰기 위해서였다.
“눈치가 빠르군.”
“가, 감사합니다!”
“중강지부에서 납치한 이들도 모두 풀어 주도록 해라.”
“아,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뭐지?”
“이번에 새로 들어온 이들 중에…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가 있는데… 그놈을 풀어 주게 되면… 아마 관군의 추격을 받을 수도, 크흠……!”
차라리 죽이자는 건가?
황극린이 일리가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황실이라면 위험할 만하군.”
“예예, 맞습니다! 황실은 언제나 무림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지요. 저희가 납치했다는 걸 안다면… 아마 대협께서도 피해를 입으실 수도…….”
부지부장은 은근슬쩍 황극린과 공감대를 형성하려 했다.
애초에 무림에서도 황실이나 관에 대한 기대는 저버린 지 오래였다. 실상 중원의 치안을 담당하는 것은 명문거파들이었으며, 관군은 사파 문파가 어떤 악행을 저질러도 눈을 감고만 있다. 황극린 또한 황실을 싫어하리라 생각했다.
“어디에 있나? 가 보지.”
“아, 옙!”
지하 감옥 중에서도 가장 넓고 쾌적한 감옥. 그곳에서 10살 남짓으로 보이는 소년이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몰래 눈물을 훔쳤는지 두 눈동자는 충혈되어 있었고, 퉁퉁 부어 있었다.
“이, 이노오옴……! 나, 날 얼른 풀어 주지 못하겠느냐!”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소년이 제법 강단이 있는 목소리로 외친다.
하지만 부지부장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놈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황극린이 자세히 살펴보니 안색 또한 그리 좋지 않았다.
“독을 먹였나?”
“예?”
“뭐, 뭐라!”
황극린은 소년의 몸에서 독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도, 독이라뇨?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주 미약한 냄새였지만, 황극린은 맡을 수 있었다.
“난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황극린이 몸을 돌려 부지부장을 바라본다.
그의 몸이 공포로 떨렸다.
“사실… 지부장께서 명령하신 일입니다.”
“지부장?”
“예, 본성의 부회주님께서 저 아이를 살려 둬서 언젠가 황실과 거래할 것이라 하셨지만… 지부장께서는 그게 불가능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독을 타서 병에 들게 하라고…….”
“내, 내가 독에 중독됐다니…….”
소년이 죽음의 공포에 몸을 떨어 대고 있었다.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열 명의 간부 중 하나인 중강지부장은 흑사회의 본성에서 황극린과 싸우다 처참하게 죽은 상태였다.
“어차피 저 아이는 죽을 겁니다. 대협께서도 굳이 신경 쓰지 않는 편이……. 만약 일이 잘못되면 대협께서도 황실의 진노를 감당하셔야 하실 수 있습니다. 설령 좋은 의도로 움직였다고 하더라도, 황실은 상식이 통하지 않으니까요.”
부지부장은 황극린을 설득하려 애썼다.
그가 찾아와서 흑사회 해체가 담긴 서신을 건네줄 때부터 죽음을 직감했다. 그가 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황극린도 더럽히면 된다.
어디서 왔는지, 대체 무슨 이유로 흑사회의 해체를 명하는진 모른다. 단지, 살아갈 길이 이것뿐이라 생각하는 부지부장이다.
소년이 아래턱을 파르르 떨며 눈을 감고 있었다.
중독됐다는 말에 꽤 충격이 큰 모양이다.
“운이 좋았군.”
“예? 그게 무슨 말씀…….”
황극린은 뒷말을 생략했다.
“컥! 저, 저는 죽이지 않는다… 고…….”
부지부장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끼이이익-!
철창의 문이 열리고, 황극린이 그 안으로 들어간다. 소년은 본능적으로 황극린이 위험한 존재라는 걸 깨달았기에 몸이 떨리는 걸 주체할 수가 없었다.
“무, 무엄하다! 무, 물러서지 못할까!”
황극린이 어쩌면 자신을 구해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인을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무림인이 황실에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듯, 황실의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로 무림을 혐오한다.
본래 중원은 황실의 것이어야 했으니까.
그렇게 교육받고 자라 왔기에 황극린에게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그, 그게 무엇이냐? 대체 그게… 으아아악! 치워라! 그냥 중독되어 죽을 것이다!”
- 끼이이이.
어떤 이가 흑주가 귀엽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객관적으로 흑주는 평범한 인간의 시선에선 징그러운 괴물일 뿐이었다. 저 사내는 무엇이길래 저런 거미를 품에 지니고 다닐까? 그리고 왜 저걸 나한테 보내는 걸까?
“으아아아아아앙! 살려 줘! 살려 주세요!”
공포심을 이기지 못하고 소년이 울음을 터트린다.
감옥에 갇혀서도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있었지만, 흑주의 공포에 벗어나지 못했다.
그때 황극린이 다가온다.
“가만히.”
“흡……!”
“독을 빼내 주겠다.”
자신을 먹이로 주는 게 아니라 독을 빼내 주겠다고?
그리고 왜인지 황극린의 손이 무진장 따스했다. 마치 인자한 어머니의 손길과 같아 마음이 놓이고, 왜인지 잠이 솔솔 몰려온다.
“나는… 나는…….”
소년이 잠에 빠져들었고, 흑주는 지체하지 않고 작은 이빨을 소년의 팔뚝에 꽂아 넣었다.
그것을 황극린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황실이라…….’
황극린이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