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114화 (114/316)

114화 찾아오다

“흑사회에 말인가요?”

“응.”

제갈소희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만독문이 흑사회와 사이가 좋지 않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흑도 문파와 사파 문파가 무조건 가깝고 사이좋다는 편견은 없었지만, 그래도 중재자로 참가한 것이니만큼 흑사회의 편에 설 것이라 예상했다.

‘막상 회담장에 들어가면 태도가 달라질 수도 있어.’

만약 그렇다면 상황이 복잡하게 꼬일 수도 있었다.

“흑사회와 만독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아니. 문파 사이에는 딱히 별일 없었어. 어차피 흑사회 놈들은 우리 아빠가 무서워서 못 까불거든.”

공녀인 두야랑이 흑사회와 악연이 있다는 말인가?

만독문이 사파이긴 해도 중원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문파였다. 당연히 그곳의 직계라면 자부심이 상당하리라. 언제나 힘을 가진 이들은 명예를 갈구하는 법이니까. 두야랑도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공녀께서……?”

“뭐, 그렇지.”

두야랑은 황극린 때문에 이번 회담에 참석하겠다고 자원했다.

만독문주도 알아서 하라고 했으니 그녀 마음대로 이번 회담에서 흑사회에게 경고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황극린과의 관계를 세상에 알릴 이유는 없었다. 황극린은 정파의 문파에 속해 있으며, 만독문은 사흑련 중 하나다. 사흑련 중 하나인 만독문이 만뇌문의 편을 대놓고 들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두야랑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딱히 고민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중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었다. 시원하게 모든 것을 밝히면 좋겠지만, 힘들다. 아마 두야랑이 대놓고 황극린의 편을 들게 되면 만독문이 아니라 만뇌문이 오해를 사게 될 것이 분명하다.

특히 두 문파는 이름도 비슷하지 않은가?

두야랑은 황극린과의 연을 더 이어 가고 싶었다. 단순히 그녀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있었지만, 황극린은 꽤 좋은 친우였으니까. 어쩌면 이번 도움으로 천기피독신주의 대여 기간을 더 늘려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솔직히 그것도 상관없지.’

5년이면 아마 두야랑은 천기피독신주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소문주의 자격도 확실히 얻을 수 있겠지.

“예, 공녀님의 생각은 잘 알겠어요. 하나, 그래도 만독문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피독신주를 가져왔으니 이건 받아 주셨으면 해요.”

“음, 필요 없는데… 성의가 있으니 받아 줄게.”

“감사드려요. 참, 사천에는 처음 방문하신 건가요?”

제갈소희는 일단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두야랑은 딱히 흑사회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차라리 그 부분을 파고들기보다는 사적인 대화로 친밀감을 형성하는 게 우선이라 판단했다.

“아니, 많이 들러 봤지, 사천당문 놈들 때문에.”

“아, 그렇네요.”

그러고 보니 만독문이 흑사회랑 관계가 나쁘다고 해도, 사천당문만 하지 못할 것이다.

사천당문은 정파에서 독을 다루는 가문 중 최고로 꼽힌다. 만독문과는 아주 오래전부터 앙숙 관계였다. 정파와 사파의 관계를 떠나서라도 말이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진 마.”

“네?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 거죠?”

“회담장에서 사천당문이랑 안 싸울 거니까. 이번에는 흑사회 일로 모인 거잖아?”

두야랑의 말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회담의 분위기를 제갈세가 쪽으로 끌어올 수 있었다. 아니, 흑사회의 자존심은 땅에 처박힐 것이다.

‘사천당문도 확실히 포섭해야 해. 당문이 만독문에 시비를 걸 수도 있으니까.’

그럴 일을 사전에 차단하는 게 제갈소희의 역할이다.

이번 일을 잘 처리하면 제갈세가에서도 원로원이나 가주의 평가가 달라질 것이다. 당장 소가주의 자리를 노릴 수는 없으니 차근차근 신뢰를 쌓는다.

제갈소희가 계획을 수정하고 있을 때, 두야랑은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북쪽이었다.

‘황극린은 영물을 잡았으려나?’

두야랑은 그의 체질적인 특성을 아는 몇 안 되는 무림인이었다.

그는 영약이나 영물의 특성을 체질로 삼아 변화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성공적으로 음기의 영약이나 영물을 취했다면, 용봉지회 때보다 훨씬 강해졌으리라.

‘다음에 만나면 내 독공에 당해 달라고 해야지.’

두야랑도 천기피독신주의 힘으로 체질이 조금씩 변화했다.

가주에게 인정받아 다른 독공도 배울 수 있었다. 황극린은 독공의 힘을 확인하기에 최적의 육신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쯤 돌아오려나?’

두야랑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황극린이 이미 사천성에 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회담장에서 흑사회는 당연히 만독문이 자신들의 편을 들어 주리라 생각했다. 당연한 추론이었다. 반대편에는 사천당문이 있었으니 그들과 기 싸움을 벌일 것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흑사회의 부회주 왕동예는 첫날부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흑사회가 잘못한 것 같은데.”

첫 시작은 두야랑이었다.

그녀는 중재자 역할로 참가한 것이지만 다짜고짜 흑사회를 범인으로 몰고 갔다. 선전포고 한 것도 제갈세가였으며, 사실상 현 상황은 흑사회가 억울한 시점이다. 그런데 사파 문파 중 하나인 두야랑이 그런 자세를 취했으니 회담장은 흑사회가 죄인이라는 분위기가 되었다.

“두 소저, 저희 흑사회는 제갈세가에 어떤 도발이나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던데? 너희 사람들 납치하면서 팔아먹잖아? 거기에 제갈세가 사람이 있었던 것 아니야?”

“그건…….”

사실이라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만독문도 인간을 납치해서 독의 효용을 알아보는 실험을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흑사회가 보기엔 만독문도 똑같았다. 하지만 회담장에서 만독문을 적으로 돌릴 수가 없었다.

“흑사회가 잘못한 것 같습니다. 제갈세가에 끼친 피해를 최대한 보상해야 할 겁니다.”

사천당문의 원로 중 하나인 당손엽은 두야랑의 말에 찬성했다.

사실 만독문의 의견에 동조하는 건 정말 싫었지만, 제갈소희가 회담 전에 그를 찾아와 부탁한 것이 효과가 있었다.

“저희는 제갈세가에 어떠한 피해도 끼치지 않았습니다!”

왕동예는 당황하여 소리쳤다.

그때 제갈소희가 심각한 얼굴로 말한다.

“흑사회는 본가뿐 아니라 다른 정파의 문파도 공격했다고 알고 있어요.”

부회주 왕동예의 표정이 굳는다.

“만뇌문에 살수를 보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라 생각하시나요?”

“만뇌문은 먼저 본회의 지부를 공격했소. 당한 것은 갚아 줘야 하지 않겠소?”

“흑사회 서녕지부가 멸문했다고 들었어요.”

“그렇소! 그러니 당연한…….”

“제갈세가도 당연한 행동을 취했을 뿐이랍니다. 제갈세가는 만뇌문과 동맹 관계거든요.”

동맹이라고?

이제 막 개파한 만뇌문이 제갈세가와 그런 관계였다는 말인가? 뭐, 아예 예측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선전포고를 할 만큼 가까웠을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선전포고를 한다면 만뇌문이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제갈소희의 말이 끝나자 두야랑이 의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는 제갈세가가 흑사회에 선전포고 한 것이 만뇌문 때문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내가 더 활약해야 하는데…….’

두야랑이 더 과감하게 나서기로 한다.

“흑사회가 만뇌문이나 제갈세가에 최대한의 보상을 해 주지 않으면, 만독문은 이번 회담에서 중재할 생각이 없어.”

“보상이라뇨? 손해로 따지면 저희의 손해가 더…….”

“그건 모르겠고, 잘못한 건 너희잖아?”

“당문에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부회주 왕동예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분명히 평화를 위한 회담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중재자로 참가한 문파는 줄창 흑사회만 압박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제갈소희나 제갈수 또한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사실 이번 회담은 두 사람의 능력을 확인하기 위한 자리이기도 했다. 하지만 제갈소희가 능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상황이 술술 풀려 간다. 마치 하늘이 돕는 것처럼 말이다.

분명 좋아해야 하지만 제갈소희는 약간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많은 걸 준비했는데…….’

진짜 같은 피와 상처를 낼 주술을 피부에 걸어 놓았다. 회담장에서 흑사회가 먼저 공격했다는 명분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가 없어졌다.

만독문의 공녀 두야랑은 마치 자신들의 일처럼 나서서 흑사회를 압박하고 있었다.

“저희는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건 제갈세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맞아요. 전쟁은 무고한 백성들이 다칠 수도 있죠. 그러니 흑사회에선 본가와 만뇌문에 대한 사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야 할 거예요.”

제갈소희의 말에 왕동예가 답한다.

“하지만 전쟁을 피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흑도인들의 성향은 다 비슷하다. 영리하지만 당한 것은 반드시 되갚아 줘야 한다.

“그래요? 그건 제갈세가도 마찬가지인데.”

“흑사회가 그렇게 나온다면 사천당문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나도 가만히 안 있을 거야.”

두야랑만이 가문을 말하지 않고, 자신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했다.

그 미묘한 차이를 제갈소희는 알아차렸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일단 오늘 회담은 여기서 끝내는 게 좋겠군! 중재자라고 온 이들이 제갈세가의 편만 들고 있으니 제대로 된 회담이 성사될 수가 없지!”

“네, 그러세요.”

제갈소희는 활로를 터 주었다.

어차피 하루 만에 회담이 끝날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최종 결정권은 회주에게 있었다.

‘회주에게서 의견을 듣고 난 다음에도 저런 태도라면 제갈세가의 승리야.’

그땐 부회주의 화를 돋우어서 원하는 상황을 연출할 수도 있다.

아니, 솔직히 지금 상황에선 굳이 그런 과격한 연출을 하지 않아도 제갈세가나 만뇌문이 이득이 될 상황으로 유도할 수 있었다.

사실 제갈세가 입장에서도 피해 보상을 받는 선에서 끝나는 게 가장 좋았다. 본거지가 어딘지도 알 수 없는 흑사회와 전쟁을 한다면, 당연히 두 문파 다 상당한 피해를 입을 것이다. 사천당문이나 만독문이 적극적으로 나서 준다고 확신할 수도 없었고 말이다.

“두 소저, 잠시 따로 이야기 좀 합시다!”

“어, 그래.”

첫 번째 회담이 싱겁게 끝났다.

제갈소희는 떠나가는 두야랑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쾅! 쾅!

검은 기운이 물든 주먹으로 탁상을 내려치자 산산조각이 났다. 부서진 나뭇조각이 튕겨 몇몇 수하의 피부에 스쳤지만, 누구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은 흑사회주의 분노가 더 심각했다.

“만독문 놈들이 진짜 작정을 했군……!”

악독하기로 따지면 흑사회나 만독문이나 비슷하다. 독을 다루는 문파이니만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그들의 독공이 발전할 수 있었던 건, 과거 수많은 백성을 희생하여 결과를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인신매매를 한다고 흑사회를 압박해?

첫 번째 회담이 끝나고 흑사회주는 부회주에게 명령을 내렸다.

만독문에 뇌물을 먹이라고 말이다. 당연히 뇌물을 먹이지 않았기에 만독문의 공녀가 흑사회를 압박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웬걸?

두야랑은 뇌물을 받자마자 땅에 던져 버렸다고 했다. 성의가 부족한 듯하여 다음 날 더 큰 뇌물을 건네주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만독문은 이번에 작정하고 회담의 중재자로 참석한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중재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의견들을 내 보아라!”

흑사회주의 진노에 부복한 일곱 명의 간부들이 황급히 생각해 둔 방법을 보고한다.

“흑살문에 도움을 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혹시 모르니 지부에 은폐 명령을 내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차라리 혈마교에 도움을 청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

수하들의 보고를 듣던 흑사회주가 말한다.

“이게 다 만뇌문 그놈들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만뇌문의 황극린이라는 놈이 서녕지부를 멸문했을 때부터 상황이 묘하게 꼬여 갔다. 그가 항주지부를 멸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가? 거기다 놈 때문에 오래전부터 키운 살수 부대의 8할을 잃어버렸다. 이래저래 손해가 너무 크다.

“이미 흑살문에는 의뢰를 맡겼다.”

금자 십만 냥.

황극린이라는 후기지수의 목숨값이었다. 아무리 중원 전역에서 돈을 갈퀴로 쓸어 모은 흑사회라고 해도 쉬이 내놓기 힘든 액수였지만 흑사회주는 결단을 내렸다. 흑사회를 건든 이들에겐 어떻게 해서든 복수한다는 모습을 중원에 보여 주어야 했다.

“혈마교에 서신을 보낸다.”

이렇게 되면 이 분야의 최고봉을 불러오는 수밖에 없었다. 만독문은 솔직히 흑사회가 감당하기 힘든 문파다. 사천당문이나 제갈세가는 그나마 대응이 가능하지만, 만독문과 전면전을 하게 된다면 흑사회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것이다. 흑도를 가장 잘 처단하는 건 정파가 아니라 사파였다.

혈마교.

그들은 문파라기보단 하나의 종교였다.

그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이번 위기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만독문도 혈마교와 충돌하는 것은 원치 않을 것이다. 제갈세가가 사천당문과 만독문을 끌고 왔다면 이 분야에서 최고봉을 데려오면 된다. 물론, 그들의 힘을 빌리는 대가는 아주 클 테지만… 저들에게 강제로 뺏기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그렇게 흑사회주가 혈마교에 보낼 서신을 작성하고 있을 때였다.

“회, 회주님……!”

“뭐야? 정신 사납게! 서신을 쓰고 있는 게 안 보이는가?”

“그… 저기…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잠시 고개를 갸웃한 흑사회주가 인상을 찌푸린다.

이곳은 흑사회의 본성.

아무도 그 위치를 알지 못하고 있는 곳이다. 이제까지 손님이 방문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설마 청성파에서……?”

“아, 아닙니다! 그게…….”

“흑살문인가.”

“그, 그것도…….”

흑사회주의 얼굴에 살기가 깃든다.

그러자 수하가 황급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화, 황극린이…….”

“누구라고?”

“권룡 황극린이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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