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변화의 시작
모든 것은 변수가 될 수 있다. 길가에 흔히 보이는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느냐 마느냐. 만약 목적지로 향하던 길이라면 그 돌부리 하나로 많은 것이 변화할 수도 있다. 만약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는데 머리부터 땅과 부딪힌다면? 정말 운이 좋지 않다면 그것으로 삶을 마감할 수도 있다.
황극린은 사소한 변수가 만들어 내는 큰 변화를 직접 마주한 적이 있다.
황씨 가문에서의 일이다. 본래라면 떠났어야 할 서문취아가 떠나지 않고 황씨 가문에 머물렀기에, 그녀는 창고 안에 1년 동안 박혀 있었어야 할 뇌불의 장보도를 입고 나타났다. 뇌불의 장보도를 빼앗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황극린이 알던 미래에서는 통비원이 녹림의 총채주가 된 것은 8년 뒤다.
그리고 흑사회와 제갈세가가 충돌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상황은 변화했다.
길가에 보이는 돌부리 하나가 수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 하물며 과거로 돌아온 황극린이라면 수많은 변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하나만 생각하면 된다.
그가 알던 미래는 변화한다는 것을 상기하고, 상황에 맞추어 황극린 또한 변화하면 된다. 길가에서 흔히 보이는 돌부리 또한 변수가 될 수 있을진대 황극린의 행동은 얼마나 큰 변수가 될 수 있을까? 그의 선택은 또 다른 변화를 낳을 것이다.
황극린은 감숙성을 거쳐 사천성으로 향했다.
청성산에 흑사회의 본거지가 있다고 했다. 흑사회는 만뇌문을 노리고 있다. 아마 황극린에게 살수가 찾아왔던 것처럼 만뇌문에도 찾아갈 것이다. 어쩌면 이미 흑살문에 의뢰를 맡겼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황극린은 그들을 단죄하러 간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게 강호의 도리라던가? 황극린은 무림인으로서 무림에서 살아가고자 했다.
중강(中江)현.
서쪽으로 청성산이 있으며, 남쪽으로 관도를 타고 내려가면 사천성의 성도로 이어지는 꽤 규모가 큰 현이다. 확실히 청성파의 권역이라 그런지 청성의 문도들이 많이 보인다.
황극린은 노인에게서 제갈세가와 흑사회의 전쟁 소식을 듣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왔다.
“흑사회…….”
북해에서 얼마나 강해졌는지 시험해 볼 좋은 상대라 할 수 있었다.
* * *
마치 황궁의 대전처럼 화려하게 꾸며진 곳에서 흑사회주는 흉신악살과 같은 얼굴로 종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종이에 쓰인 글이었다.
“제갈세가 놈들이 미쳐 버린 게로군.”
흑사회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흑도 문파다. 제갈세가와 정면으로 힘 싸움을 한다면 패배하겠지만, 그들에겐 수없이 많은 흑도인과 쌓아 놓은 자금이 있었다. 거기다 사흑련 중 하나인 혈마교와 흑살문과도 연줄이 닿아 있다.
그렇기에 제갈세가가 겁나지 않았다.
하지만 짜증이 치솟는다. 이놈들이 왜 겁도 없이 흑사회의 지부를 습격하고 있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안 그래도 애지중지 키운 살수들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로 잃었기에 화가 잔뜩 난 흑사회주였다.
흑사회는 고수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흑사회주 본인은 상당한 수준의 고수였다.
정파에서 말하는 천하백대고수 중 최상위에 속하는 실력으로, 웬만한 중소문파는 혼자서 멸문할 실력의 소유자다.
“제갈세가에 서신을 보내라.”
갑작스레 흑사회에 전해져 온 선전포고.
제갈세가에게 직접 이유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허튼 수작질을 부린 것이라면 제갈세가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흑사회주의 말에 장로 중 하나가 잽싸게 앞으로 나선다.
이럴 때 흑사회주의 눈에 들어야 한다.
“어떻게 보낼까요?”
“사천성 성도에서 만나자고.”
“예, 알겠습니다.”
회주가 고개를 돌린다.
“부회주, 자네가 고생을 좀 해야겠군.”
“예, 담판을 짓고 오겠습니다.”
제갈세가에게 겁이 나진 않는다. 국지전으로 간다면 흑사회가 단연코 유리하다. 중원엔 수많은 흑사회 지부가 있다. 그들이 작정하고 제갈세가의 사업체에 훼방을 놓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무인들의 싸움이라고 피를 봐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이 제갈세가를 더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다.
물론, 흑사회도 피해를 입을 게 분명하다.
제갈세가가 육대세가가 아니라지만, 분명히 중원에서는 알아주는 명문가였다. 특히 진법이나 주술에 대해서라면 첫 번째로 꼽힌다.
일단 대화로 풀 수 있다면 푸는 게 좋지 않겠는가?
흑사회의 부회주는 갑작스러운 제갈세가의 선전포고를 해결하기 위해 사천성의 성도로 향했다.
* * *
제갈세가는 흑사회의 회담을 거절하지 않았다.
중원에서는 문파 간의 전쟁 중에 회담을 갖기도 한다. 사실 전쟁은 선전포고 따위를 하지 않고 다짜고짜 빈틈을 노리는 게 가장 효율적이지만, 무림에선 효율보다는 명예를 중요시했으니까.
제갈세가가 회담을 받아들인 것은 그러한 맥락이었다.
흑사회와의 전쟁은 일단 그들에 대한 경고였다.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경고. 과연 무엇에 대한 경고일까? 그것은 회담에 참석한 두 사람이 강하게 주장한 것이다.
“오라버니, 흑사회는 생각보다 위험한 문파입니다. 그러니…….”
“소희야, 나는 말이다. 주공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
“아뇨, 그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제갈세가의 셋째 제갈소희는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둘째 오라버니인 제갈수는 가끔… 아니, 자주 멍청한 소리를 한다.
‘역시 오라버니가 가주가 되면 제갈가의 명성이 추락하겠구나.’
제갈소희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장남과 차남이 뭔가 하나씩 부족하다. 아주 가끔 똑똑한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특정 부분에서는 미련할 정도로 의아한 행동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제갈소희는 원대한 목표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내가 가주가 되어야 해.’
명문가에서 여인이 가주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니, 정파에선 아예 없다고 하는 게 정확하다. 사파나 흑도에선 가끔 여인이 문파나 가문을 잇기도 한다. 하지만 정파에선 그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제갈소희는 깨어 있는 사람이었다. 허례허식과 구태의연한 전통에 구속받지 않는다. 사실 그녀는 그걸 위해 사파와도 손을 잡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아니, 이미 조금씩 연을 쌓아 두고 있었다.
‘아무튼, 이번 일은 오라버니 덕이 크니.’
사실 제갈세가는 흑사회와 딱히 악연이 없다.
어느 정도 세력을 키운 문파들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제갈세가가 흑사회에게 갑자기 선전포고 한 것은 제갈수 때문이었다.
매일 수련에 미쳐 있다시피 한 제갈수는 황극린이 용봉지회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에 기겁하며 그를 찾아 나서려 했다. 소문으로는 황극린이 친우들도 많이 사귀었다고 하는데, 제갈수는 위기감을 느꼈다. 특히 천하백대고수 중 하나인 광견살검이 수하처럼 행동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제갈소희는 오히려 무리하게 황극린을 찾아가는 게 폐가 되는 행동이라며, 무공을 먼저 수련하라 말했다. 제갈수는 겨우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였지만, 황극린에 대한 정보라면 가진 돈을 모두 털어서 개방을 통해 구매하거나 제갈세가의 정보부대를 이용해서 얻어 냈다.
그리고 최근 제갈수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감히 주공이 속한 만뇌문을 공격한 문파가 있다는 것. 다행히도 만뇌문에선 피해자가 생기지 않았지만, 제갈수는 격노했다.
그는 어떻게든 만뇌문을 습격한 배후를 알아내려 했고, 배후가 흑사회라는 걸 알게 되었다.
당장이라도 흑사회를 부수러 가겠다는 걸 말린 건 당연히 제갈소희였다.
그녀는 이것이 기회라 생각했다.
황극린이라는 무림의 영웅이 될 가능성이 있는 후기지수와 확실한 연결 고리를 만들 기회 말이다.
제갈수와 제갈소희는 가주와 원로원주를 설득했다.
황극린과 만뇌문의 편에 서야 하는 이유.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당시에 동려대협이라는 협의지사가 황극린이라는 소문까지 퍼진 상태였기에 가문의 어른들을 설득하는 것은 비교적 어렵지 않았다. 특히 차남인 제갈수의 강렬한 의지가 있었기에 깐깐한 원로원주에게서 흑사회와 회담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받았다.
이번 일은 깔끔하게 처리해야 한다.
황극린을 돕는 이득보다 피해가 더 크다면, 가문 내에서 두 사람의 입지는 크게 줄어들게 될 것이다.
이미 소가주는 정해진 상태였지만, 제갈소희는 언제든 기회가 열릴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목숨을 걸 수 있는 의기는 정말 멋지고 훌륭해요. 아마 황 공자께서도 이 일을 아시면 오라버니를 보는 시선이 달라지실…….”
“흐흐흐, 그럴까? 그러면 정말 좋겠군! 기대되는구나! 언제 주공과 재회하게 될지 말이다. 내가 용살천각(龍殺天脚) 8성의 경지에 오른 것을 아시면 얼마나 기특해하실까? 기대되지 않느냐?”
조금 전까지 흑사회에 대한 분노를 마구 쏟아 내던 제갈수였지만, 이제는 바보처럼 헤실거리고 있다. 제갈소희는 답답했지만, 화를 내진 않는다.
“아무튼, 일단은 이번 회담을 잘 끝내야 해요.”
“회담이랄 것이 있겠느냐? 어차피 우리의 의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면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흑사회는 오랫동안 흑도에서 군림한 문파예요. 몇몇 거대 문파가 그들을 소탕하고자 했지만, 아직도 중원에서 활발하게 세를 넓히고 있죠. 그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뒤를 봐주는 세력이 있군?”
“네, 당연히.”
“으음, 설마 사흑련 중 하나는 아니겠지?”
“그럴 가능성이 크죠.”
사흑련이라는 단어에 제갈수가 조금 긴장한다.
그 또한 무림을 아예 모르진 않는다.
“그럼 이번 회담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더냐?”
제갈수는 제갈소희가 자신보다 똑똑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의 말을 들으면 중간은 간다. 그리고 이번 일은 주공을 위해 나선 일이다.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풀어내야 한다.
“명분을 얻어야 해요.”
“명분?”
“네, 무림에서 명분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답니다. 왜 제갈세가가 흑사회와 싸우는 건지 만천하에 알리는 거죠. 그게 생각보다 중요하답니다.”
“어떻게 명분을 만들 생각이더냐?”
“제가 회담장에서 다칠 거랍니다.”
“다친다고?”
“네.”
제갈수의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진짜로 다치는 건 아니에요. 그들의 눈을 속일 거랍니다.”
“어떻게?”
“그건…….”
제갈소희의 계획에 제갈수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흑사회가 우리를 먼저 공격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셈이냐? 회담장엔 우리밖에 없지 않느냐?”
“그래서 중재자를 섭외했답니다.”
“중재자라고?”
“네, 사천당문과 만독문이에요.”
사천당문은 그렇다고 치고, 만독문이라고?
그들이 왜 중재자로 합류한다는 말인가? 사흑련은 웬만한 일에는 잘 움직이지 않는다. 그 콧대 높은 구파일련보다 더 엉덩이가 무겁다고 소문이 자자했으니.
“사천당문이 중재자로 참가한다고 정보를 몰래 흘렸거든요. 아마 그래서 회담에도 참가하는 걸 거예요.”
“그런데 만독문이 우리의 의도대로 움직여 줄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갈소희는 이번 회담이 자신의 능력을 원로원에 증명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제갈세가의 명성을 드높이면서도 황극린에게 도움이 된다. 그런 방향으로 상황을 주도하면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패를 준비해 놨으니까요.”
제갈소희가 품속을 매만진다.
그녀는 7년 전부터 딴마음을 품고 있었다. 어떤 누구와도 손을 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사파나 흑도라도 크게 상관없었다. 정(正)과 사(邪)의 구분은 그녀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번 기회에 만독문과도 인연을 만들 것이다.
“그러니 회담이 있는 성도엔 저희가 먼저 도착해야 해요.”
“그래, 알겠다. 서두르자.”
* * *
사천성 성도(成都)의 청학객잔.
이곳은 흑사회와 제갈세가의 회담이 이루어질 장소였다. 물론 파국으로 치달을 회담이었지만, 제갈세가는 만발의 준비를 했다. 제갈세가의 문인(文人)들은 일회성 진법을 설치하고 가문의 직계들에게 닥칠 위험을 최대한 대비하고 있었으며, 차남인 제갈수는 흑사회의 부회주를 기다리는 동안 무공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리고 회담을 이끌 제갈소희는…….
“안녕하세요? 제갈세가의 제갈소희라 해요. 만독문의 공녀님을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설마하니 이런 거물이 올 줄은 몰랐다.
대충 만독문 분타의 간부 정도가 오지 않을까 했다. 그런데 월척도 이런 월척이 없었다. 만독문주의 직계라니 말이다.
“어, 안녕.”
짧게 머리를 자르고, 왜인지 위험한 냄새를 풍기는 여인이 싱긋 미소를 짓는다.
“제가 이렇게 먼저 만나 뵙자고 청한 이유는…….”
제갈소희가 만독문의 대공녀를 설득하기 위해 준비한 패를 꺼낸다.
“이건 본가에서 만든 피독주(避毒珠)랍니다.”
“그래?”
여인은 심드렁하게 피독주를 바라본다.
딱히 흥미가 없어 보였다.
‘이 물건의 가치를 알면 달라질 거야.’
제갈소희가 피독주의 효능이 어떠한지, 만독문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설명하려 한다. 만독문과 거래를 튼다면 제갈세가의 자금줄이 하나 더 늘어나게…….
“근데 나 중재자로 온 것 아니야.”
“그게 무슨 말씀…….”
씨익.
만독문의 공녀 두야랑. 그녀가 시원한 미소를 짓는다.
“흑사회한테 경고하러 온 거야.”
제갈소희의 야심 찬 계획이 첫 단추부터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