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하나의 변수
황극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가 떠나갔다. 그는 약속대로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패배한 적은 무조건 죽이라는 궁주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한다. 중원의 무인들 또한 자비를 베푸는 경우가 잘 없다고 알고 있었기에 감사함보다는 의아함이 앞선다.
“소궁주님, 괜찮으십니까!?”
흑나찰과 등운선녀가 소궁주에게 다가온다. 그녀들도 다쳐서 절뚝거리면서도 안위를 묻는 모습이 애처롭다.
“전 괜찮아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궁에 지원을 요청하실 겁니까?”
“…….”
궁주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당연히 황극린의 추격은 계속되어야 했다. 하지만 소궁주는 결단을 내리기로 했다.
“아뇨.”
“궁주님이 진노하실 겁니다.”
흑나찰의 걱정은 빈말이 아니다. 그녀의 진노는 북해의 그 누구도 감당하기 어렵다. 그건 소궁주라 할지라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부궁주가 궁주에게 진노를 사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황극린, 그게 가명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는 북해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건 불가능…….”
북해의 축복.
혹은 저주.
북해빙궁의 여인들은 혹한의 추위를 견딜 수 있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지닌 체질 때문이었다. 특히 궁주의 피를 물려받은 소궁주는 음기와 냉기에 거의 해를 입지 않을 정도로 내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열기나 양기에 취약하긴 하지만… 북해에서 그러한 기운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사내가 어떻게 북해의 축복을 받았다는 말씀입니까?”
“한빙백골소혼장이 통하지 않는 걸 보셨잖아요.”
한빙백골소혼장.
역천의 무공이라 불리며 장법이 펼쳐지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얼려 버린다. 구음절맥을 타고난 소궁주만이 펼칠 수 있는 무공으로 이것에 당한다면 빙궁도들의 세맥과 장기들도 얼어 버린다.
그런데 황극린이라는 사내는 그것을 버텨 냈다.
아니, 아무렇지 않게 흘려 냈다.
“과도한 음기는 사내에게 치명적입니다. 그건 여인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음기를 타고났는데 어떻게 멀쩡히 살아 있을 수 있는 겁니까?”
흑나찰의 의문은 당연했다.
음기를 품은 사내아이들은 한 살이 채 되기도 전에 모두 죽었다. 그건 초대빙궁주인 빙백마후도 치료하지 못했다. 북해빙궁이 여인들만의 문파가 된 이유도 다 그러한 북해의 ‘저주’ 때문이었다.
“그걸 알아봐야겠죠. 어쩌면 본궁의 ‘그것’을 끊어 낼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될 수도 있어요. 그는 뇌전의 기운을 지닌 무공을 익혔죠. 어쩌면 그게 체내의 음기를 상쇄하고 있을 수도요.”
“아……!”
북해빙궁에선 빙공을 익힌다.
당연히 과거에 화공계의 무공을 익혀 음기를 상쇄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뇌전의 기운을 담아 보려 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냉기와 뇌기는 어우러질 수도 있으리라.
“돌아가죠. 책임은 모두 제가 지겠어요.”
“죄송합니다, 소궁주님.”
“아니에요.”
세 여인이 빙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차피 지금의 전력으로는 황극린을 사로잡을 수 없었다.
‘왠지 다시 만날 것 같아.’
소궁주의 직감은 잘 들어맞는 편이었다.
허공을 바라보고 있으니 황극린의 얼굴이 떠오른다.
왜 그의 얼굴이 익숙한 걸까?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 것일까?
* * *
콰앙-!
빙옥궁의 별실.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으며, 공간엔 음산하고 기괴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그곳에 한 여인이 팔과 다리가 묶인 채로 던져졌다.
북해빙궁 소궁주 한도린.
그녀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헐떡이고 있었다. 그녀가 ‘추위’에 벌벌 떨고 있었다. 북해의 축복을 받았고 구음절맥을 타고났던 그녀에게 추위를 느끼게 할 존재는 한 명밖에 없다. 빙궁주의 체벌. 그녀는 명령을 수행하지 못한 죄로 체벌을 받고, 별실에 갇히게 되었다.
“…….”
그리고 별실엔 그녀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부궁주 한소연.
빙천마후의 뒤를 이어 새로운 궁주가 될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북해의 관습이나 문화에 반발하여 이렇듯 오랜 기간 ‘벌’을 받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체벌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부궁주 한소연의 목소리엔 안도가 담겨 있었다.
벌을 받아 추위에 벌벌 떠는 소궁주에 대한 걱정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두 사람은 거의 원수지간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사이가 나빴으니까.
“…기분이 좋으시겠군요?”
“딱히. 시간이 늦추어졌을 뿐이야. 궁주의 집착은 날이 갈수록 심해질 것이니까.”
“때가 되면 당신은 죽게 되겠군요.”
“그렇겠지.”
소궁주가 보란 듯이 미소를 짓는다.
“전 당신처럼 살진 않을 거랍니다.”
“너무 장담하진 말아라. 궁주도 처음부터 저러진 않았다. 너 또한 빙궁의 마공을 익혔으니 결국 똑같아질 거다.”
내려다보는 말투.
예전부터 부궁주의 저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 포기하고 북해에서 도망쳤다가 잡혀 온 주제에 말이다.
“궁주님이 뭐가 어쨌다는 거죠?”
“너도 알지 않니? 그녀가 미쳐 있다는 걸.”
“아뇨.”
궁주의 성격이 포악하긴 하지만 미쳤다곤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부궁주는 모르겠지만, 소궁주는 궁주가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녀는 북해빙궁의 번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중이었다.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하는 사람에게 이런 소리를 듣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런데 왜 침입자를 놓친 거지?”
“…….”
“날 위해서인가?”
“설마요!”
소궁주가 참지 못하고 소리친다.
말이 되는 소릴 해야 듣고 있을 것 아닌가? 평소에는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소궁주였지만, 부궁주의 앞에만 서면 감정의 제어가 힘들어진다. 어쩌면 별실 내부에 퍼진 마기(魔氣)의 존재 때문이 아닐까? 소궁주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침입자가 예상보다 훨씬 강해서 놓친 것일 뿐이에요.”
“그렇구나. 혹시 나 때문이 아닌가 했지.”
“부궁주님을 위해서 제가 그럴 이유라도 있나요?”
부궁주가 힘없이 숙이고 있던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럴 이유는 없지.”
이런 누추한 환경에 갇혀 씻지도 못하고 있었지만, 부궁주의 외모는 진흙 속의 진주처럼 찬란히 빛나고 있다. 소궁주는 그녀의 외모에 질투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빙궁의 여인들은 대부분 객관적으로 빼어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소궁주는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한다.
실로 오랜만에 마주한 부궁주의 얼굴. 그런데 왜 그녀를 보고 있으니… 그 사내가 떠오를까?
‘북해빙궁의 여인들은 아들을 낳을 수 없냐고 물었었지.’
당시엔 빙궁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불쾌한 질문이라고만 여겼다. 그는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말해 주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부궁주를 보고 있으니 의아하다.
“하나 물어볼 게 있어요.”
“네가 나에게 질문을 다 하고, 별일이구나.”
“황극린이라는 사내를 알고 계신 가요?”
“아니. 모른다.”
“그래요?”
“그건 왜 물어보는 거지?”
“아니에요.”
굳이 부궁주에게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그 이름을 듣고도 부궁주는 전혀 당황하지도 않았고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만약 그 사내가 부궁주와 관련이 있다면… 최소한의 반응이라도 보여 줬어야 한다.
부궁주 또한 관심이 없는지 더 묻지 않았다.
단지, 평소처럼 고개를 푹 숙일 뿐.
“…….”
그렇기에 소궁주는 보지 못했다.
부궁주의 턱이 쉴 새 없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황극린은 전력으로 질주하여 북해를 빠져나왔다.
단순히 말로만 전력이 아니다. 황극린은 1갑자가 된 내력을 모두 다 소모할 정도로 열심히 달려갔다. 그 이유는 당연히 사대마제 중 하나인 북해빙궁주와의 만남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침입자 한 명을 잡으려고 북해빙궁의 궁주가 직접 나서는 경우는 잘 없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황극린이 곰 영물을 취해 또 한 번의 성장을 이루어 냈다고 해도, 이미 절대자의 반열에 올라선 무인과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 북해는 빙궁의 무공이 최적의 효율을 보여 주는 곳이었다. 굳이 불리한 곳에서 싸울 필요는 없다.
“하아… 하아아…….”
황극린이 숨을 터트린다.
북해의 경계를 빠져나오고도 계속 달려왔다. 허벅지가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잠시 쉬면서 숨을 고른다.
북해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렸다.
‘이름을 말한 건 실수였군.’
막 내단을 취한 시점이라 판단이 흐려졌다. 거기다 왜인지 빙궁의 소궁주를 보는데,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자신도 모르게 황극린이라는 이름을 밝혔다. 뭐, 이미 그가 돈황에서 지도를 구하고 마령과 동행했다는 정보가 있었으니… 언젠간 빙궁에서도 황극린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기에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대비만 잘한다면 말이다.
‘어머니는 북해빙궁의 궁도일 가능성이 있다.’
소궁주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아마 거짓을 말한 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는다. 돌이켜 보면 황극린은 어머니가 죽는 걸 직접 보지 못했었다. 단지, 어린 황극린이 아버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 뿐.
세상에 ‘절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한번 죽음을 겪고, 과거로 귀환한 황극린이 더욱 잘 알고 있었다.
‘상관없지.’
황극린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207호라는 이름을 받은 이후로 그는 부모와의 추억 따위는 모두 잊어버렸다. 하물며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지금은 아득하기만 하다. 단지, 음기가 가득한 내단을 취했는데 내력이 확 늘어난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혹여나 만나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살아 있어 언젠가 이야기를 나누려 할 땐 굳이 거절하지는 않을 테지만, 지금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만날 필요는 없었다.
잠깐 휴식을 취한 황극린이 다시금 걸음을 내디딘다.
음양의 조화가 갖춰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영물의 내단을 취했기 때문일까? 조금만 휴식을 취해도 피로가 빨리 풀린다. 회복력이 확실히 좋아졌다.
‘일단 개방이나 하오문을 찾아야겠군.’
중원까지는 꽤 남았다.
하지만 그는 중원의 소식을 들을 필요가 있었다. 북해에 가 있는 동안 만뇌문에서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는지 걱정된다. 뇌불이 있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어머니의 존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만뇌문은 황극린이 돌아갈 집이었기에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극린은 달리고 달려 허름한 객잔 하나를 발견했다.
규모는 작았지만, 냄새가 난다. ‘독’을 사용하는 객잔은 무림과 연관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정보를 사러 왔소.”
“으응? 무림인이시오?”
“그렇소.”
“딱히 판매할 정보라고 할 건 없는데…….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소문 정도라면 모를까.”
하오문은 중원이 아닌 변방에도 존재했다.
물론, 정보의 질은 그리 높지 않겠지만 말이다. 수염이 지긋한 노인은 하오문도이긴 했지만, 아마 무림과 밀접한 삶을 살아가진 않을 것이다. 아마 독을 가지고 있는 것도 괴한의 습격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 수단일 것이다.
“어떤 소문이 있소?”
허름한 객잔의 주인이 알 정도의 소문이라면 꽤 큰 건일 거다. 인구가 많은 현으로 가려면 여기서 며칠은 더 달려야 했기에 일단 최소한의 정보만 듣기로 했다.
“어디 보자아아… 무슨 소문이 있더라……?”
볼을 긁적긁적하는 노인에게 은자 한 냥을 건네준다.
그러자 헤벌쭉한 미소를 지은 노인이 입을 열었다.
“크음, 배포가 큰 소협이구만? 일단 최근에 녹림의 총채주가 바뀌었다고 하오. 뭐라더라? 정파의 명문가 출신이랬는데?”
“제갈세가?”
“아아아, 맞소. 제갈세가.”
벌써?
무언가 이상하다. 통비원이 녹림의 주인이 되는 건 적어도 8년은 지나야 한다.
‘미래가 바뀌었군.’
황극린의 존재 하나로 인해서 많은 것이 바뀌긴 했다.
이미 그는 겪어 보았다. 본래 황씨 가문의 창고에 박혀 있어야 할 뇌불의 장보도를 떡하니 입고 있는 서문취아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았던가? 작은 변수였지만, 큰 변화를 만들어 낼 수가 있다.
세상은 유기적으로 변화한다.
아마 황극린의 행동이 변수를 만들었고, 그게 통비원에게까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물론, 어떤 것으로 그런 변화가 만들어졌는지까지는 알아내기 힘들겠지만 말이다.
“다른 소식은 없소?”
“흑사회와 제갈세가가 전쟁을 벌인다고 들었소.”
“음?”
흑사회와 제갈세갈세가라고?
이건 과거엔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다.
‘설마…….’
황극린의 머릿속에 수하가 되겠다며 소리치던 제갈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왠지 그와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