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빙옥궁
빙옥궁(氷玉宮).
북해의 패자인 북해빙궁의 한 명뿐인 부궁주가 기거하는 궁이었지만, 왜인지 분위기는 삭막하다. 분명 궁의 겉모습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특별한 얼음으로 만들어진 높은 성벽과 그 안에 장식된 옥. 햇빛을 받으면 찬란하게 빛나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런데도 보는 이로 하여금 을씨년스러운 기분을 느끼게 한다는 것 자체가 기묘했다. 궁 전체에 깔린 음울한 기운은 함부로 접근하기가 힘든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빙옥궁에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발을 들여 놓는다.
“궁주님을 뵙습니다.”
“궁주님을 뵙습니다.”
어느샌가 소복을 입은 두 여인이 나타나 깊게 허리를 숙여 중년 여인에게 인사한다. 북해빙궁에서 궁주라 불릴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북해빙궁의 궁주 빙천마후(氷天魔后).
중원인들은 그녀를 사대마제 중 한 명이니 빙천마제(氷天魔帝)라 칭하지만, 빙궁주는 자신을 빙천마후라 칭하고 있었다.
“부궁주는?”
“별실에 계십니다.”
“그래, 물러나라.”
“예.”
훗날 궁주가 되어야 할 이가 머무는 빙옥궁이었지만, 현재 부궁주는 ‘별실’에 머물고 있었다. 찬란하고 화려한 빙옥궁의 음울한 기운은 별실에서부터 스멀스멀 퍼져 나가고 있었다. 참으로 오싹한 기운이다.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던가?
애초에 북해는 일 년 내내 눈보라가 몰아치는 곳이다.
거기서 부정적인 감정이 더 섞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순수한 빙(氷)의 기운은 음(蔭)이 되고, 결국에는 마(魔)로 변질된다.
마인(魔人).
넓디넓은 빙옥궁에 음산하고 음울한 기운을 퍼트릴 정도로, 부궁주는 마기(魔氣)에 침식되었다.
그리고 북해빙궁의 궁주 빙백마후는 그러한 부궁주를 걱정하긴커녕 비웃을 뿐이었다.
궁주가 되려면, 마를 지배해야 한다. 마에 지배당한다면 궁주의 자격은 없었다. 단지, 그녀의 자질이 아깝기에 아직 부궁주의 위(位)를 유지시켜 주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면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서 말이다.
궁주가 별실로 들어서자 두 발이 강철 족쇄에 단단히 묶인 여인이 산발하여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다. 궁주를 보면 예를 차려야 하건만 그녀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네가 재밌어할 소식이 있어서 들려주러 왔단다.”
“…….”
“해웅이 죽었다는구나.”
“……!”
여인의 작은 몸이 움찔했다.
동시에 산발했던 그녀의 머리가 꼿꼿하게 변하며 공중에 떠오르기 시작한다. 기괴한 장면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귀신으로 착각할 수준이었다.
“넌 해웅을 아꼈었지. 아니, 해웅의 내단을 취하려고 했었던가?”
“…상관없어요.”
어느샌가 부궁주의 머리카락이 가라앉았다.
“상관없다? 내가 널 굴복시키려고 죽였다고 생각하느냐?”
“…도린인가요?”
“오랜만에 북해에 침입한 쥐새끼가 죽였단다.”
“…….”
“선녀와 나찰 그리고 소궁주까지 보냈으니 조만간 잡히겠지. 옛 기억이 나지 않으냐?”
부궁주는 가만히 듣고만 있을 뿐이다.
“네 어리광을 받아 주는 건 이제 질렸구나. 그러니 이제 미래를 바라볼 때가 되었지 않으냐? 언제까지 이곳에 갇혀 있을 생각이더냐?”
“그렇다면 풀어 주세요.”
“마지막 기회를 주도록 하마. 선택은 네 몫이란다.”
마지막 기회라는 말에 부궁주의 마기가 폭주하듯 늘어난다.
가공할 만한 내력의 양. 그것은 빙궁주 빙천마후도 놀랄 만한 수준이었다. 이 힘을 올바른 방향으로 썼다면, 빙궁은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었을까?
“과거의 일은 과거로 묻어 두는 게 좋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본녀 또한 그러하지.”
“정녕 당신이 인간인가요?”
“네게 그런 말을 들으니 어색하구나.”
“…….”
빙천마후가 몸을 돌린다.
그녀의 입가엔 기분 좋은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화가 난 부궁주를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굴복하여라, 모든 북해의 아이들이 그러했듯이.”
나 또한 그러했듯.
빙궁주는 마지막 말은 내뱉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굴복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연의 섭리에 올라탔을 뿐. 그렇기에 그녀는 북해빙궁의 ‘마후’가 될 수 있었다.
빙궁주가 별실에서 떠나가자 부궁주의 몸에서 거대한 마기가 꿈틀거린다.
빙옥궁의 음울함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 * *
- 아우우우우-!
하얀 갈기의 늑대들이 울음소리를 낸다.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는 모양새였지만, 아무래도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다. 멀찍이 서서 수십 마리의 늑대들을 지휘하던 흑색 무복을 입은 여인이 고개를 갸웃한다.
“으음, 이상하군. 전혀 흔적이 없어.”
“냄새를 지운 게 아닐까요?”
그와 반대로 전투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백색의 비단옷을 입은 여인이 흑색 무복 여인에게 대답한다. 두 여인은 북해빙궁의 최고 전력 중 하나인 나찰과 선녀였다.
흑나찰(黑羅刹)이 고민하는 듯하다가 입을 뗀다.
“반대로 간 것 같군.”
“반대요?”
“도주하는 법을 잘 알고 있는 놈이다. 중원 방향으로 도망치려다가…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도망친 거지.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흔적이 없을 수가 없어.”
하얀 갈기의 늑대들은 북해에서 기르는 최고의 맹수들이다.
인간의 후각과 시각을 아득히 초월하여 사냥감을 쫓는다.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도 빙궁의 늑대들의 추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추론할 수 있는 건 하나다. 침입자는 북해에서 도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북해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으리라.
“그렇군요. 그럼 방향을 바꾸어야겠군요.”
등운선녀(登雲仙女)가 말없이 먼 곳을 바라보는 한 젊은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세 여인의 복장에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모두 북해의 한파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지 얇은 옷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젊은 여인은 세 명 중에서도 가장 얇은 옷을 입고 있다.
북해빙궁에서 얼마나 얇은 옷을 입느냐는, 실력보다도 ‘재능’을 나타낸다. 얼마나 빙(氷)의 기운과 가까운가? 추위를 타지 않을수록 빙공의 재능이 높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녀는 북해빙궁주의 핏줄이었으니까. 대대로 북해빙궁주의 직계들은 구음절맥을 타고난다고 한다. 구음절맥에서도 또 차이가 존재했지만… 그녀는 언젠가 빙궁주가 될 여인이었다.
선녀와 나찰이 기다리는 가운데, 소궁주 한도린이 입을 열었다.
“수리들이 한백평야 쪽으로 날아가고 있어요.”
“한백평야라면…….”
북해에서도 가장 황량한 곳으로 사실 거의 가치가 없는 땅이라 할 수 있었다. 가장 추웠으며, 동물들도 살지 않는 땅. 넓기만 해서 그런지 음기도 정순하지 못하다.
“가죠. 침입자는 그곳에 있을 거예요.”
소궁주가 앞장서자 흑나찰과 등운선녀도 뒤를 따른다. 동시에 북해빙궁의 궁도 수십 명 또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세 사람만으로도 충분히 침입자를 사로잡을 수 있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빙궁의 1급 궁도 열 명과 2급 궁도 스무 명이 함께했다.
타다닷!
마치 눈이 아니라 평평한 땅에서 경공을 펼치는 것처럼 빠른 속도. 애초에 빙궁도들의 경공은 무언가 달랐다. 땅을 박차는 게 아니라 마치 미끄러지듯 이동하고 있다.
아우우우우-!
그렇게 한백평야에 가까워지자 흰색 갈기의 늑대들이 거친 울음을 터트린다.
오랜 추적에 굶주린 늑대들이다. 녀석들의 후각은 미친 듯이 예민해진 상태였다. 이질감이 느껴지는 곳으로 늑대들이 달려간다.
“저기.”
소궁주가 말하자 흑나찰이 손가락 세 개를 펼치고, 좌우로 빙글빙글 회전한다. 그녀의 명령에 따라 궁도들이 넓게 포위망을 형성한다.
흑나찰과 등운선녀 그리고 소궁주는 포위망을 지나 늑대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늑대들은 거칠게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땅에 숨었다?”
흑나찰이 기가 찬다는 듯이 말한다.
어디서 온 놈인지 모르겠지만, 한백평야의 추위를 견디려면 끊임없이 내력을 사용해야 했을 것이다. 굴을 팠다고 하더라도 중원인들은 이곳의 추위에 적응할 수 없으리라. 거기다 추위만 있는 게 아니다. 얼마나 식량을 비축했을지 모르겠지만, 놈은 칠 주야가 넘게 도주했다. 굶주림은 추위에 필적할 만큼 북해에서 무서운 적이었다.
“어쩌면 벌써 죽었을 수도 있겠군요.”
등운선녀가 아쉽다는 듯이 말한다.
궁주의 명령은 침입자를 사로잡아 오라는 것.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한 침입자가 스스로 죽어 버렸으면 그녀들도 변명거리는 있는 셈이다. 거기다 궁주가 아끼는 소궁주도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보았으니 잘 말해 줄 것이다.
“비켜.”
늑대들이 눈을 파내는 게 답답했는지 흑나찰이 앞으로 나선다.
그녀의 손바닥에 흑색의 강기가 맺혀 있었다.
수십 마리의 늑대들이 몰려 눈을 파냈던 것보다 흑나찰 한 명이 눈을 파내는 속도가 더 빨랐다. 단단하게 굳은 눈이 흑나찰의 손짓 한 번에 쪼개져 사방으로 흩날린다.
“시체가 상할 수도 있어요. 조심하세요. 그래도 온전하게 가져가는 게 궁주님의 진노를 줄일 수 있을 거예요.”
“그러지.”
등운선녀의 조언에 그나마 힘을 조절한 흑나찰.
갑자기 그녀의 움직임이 뚝 멈춘다.
“왜요? 시체가 부서졌나요?”
“아니.”
“그럼요?”
“단단하다.”
“네?”
“너무 차갑다.”
흑나찰의 목소리에는 당황이 섞여 있었다. 빙공을 익히는 선녀들과는 다르게 나찰들은 태어날 때부터 살인귀가 되기 위한 수련을 받는다. 그렇기에 웬만한 일에는 당황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나찰 중 하나인 흑나찰은 당황하고 있었다.
거기다 지금 그녀의 말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차갑다고요?”
북해빙궁도들은 태어날 때부터 추위에 강하다. 그녀들이 차갑다고 느끼는 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다 흑나찰은 나찰의 피를 이어받았다. 몇몇 이들은 저주라고 하지만, 북해 내에서 그녀들의 체질은 축복이었다.
생명이 살 수 없는 혹독한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는 축복이다.
흑나찰은 그러한 자연의 축복을 상당히 물려받았다. 그런 그녀가 차갑다고 말할 정도라면…….
“하악!”
흑나찰이 무언가를 만지고 기겁하며 손을 뗀다.
그녀의 손바닥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등운선녀와 소궁주가 황급히 흑나찰의 곁으로 향한다. 대체 뭐를 만졌길래? 빙궁주의 신물인 만년빙옥(萬年氷玉)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설마 추격자를 찾다가 그러한 신물을 발견했다는 건가?
소궁주와 등운선녀가 조심스레 땅을 바라본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움푹 파인 눈 사이로 보이는 건 찬란한 만년빙옥이 아니었다.
“손?”
인간의 손이 분명하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인다.
“저 손을 만지고 차갑다고 한 건가요? 손은 괜찮은 거죠?”
“아니, 아프다.”
“…아프다고요?”
소궁주가 조심스레 땅을 파헤친다. 흑나찰이 저렇게 반응했다면 확실히 문제가 있다. 일단 눈을 더 파내서 저게 정말 사람의 손이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렇게 어느 정도 눈을 파내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이 드러난다.
“소궁주님, 만지지 마십시오!”
흑나찰이 경고했지만, 소궁주 한도린은 손을 움직여 사내의 머리카락에 손을 대었다. 눈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 왠지 모르게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렇게 소궁주가 사내의 머리카락을 걷는 순간이었다.
“뒤로 물러서십시오!”
“감히! 소궁주님의 옥체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시체의 손이 움직여 소궁주의 손목을 낚아챘다.
하지만 이미 사내의 머리카락은 걷어진 후였다.
“…당신, 뭐죠?”
의아함과 당혹감이 가득 담긴 소궁주의 목소리.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소궁주였기에, 흑나찰과 등운선녀 또한 당황하고 있었다.
“황극린.”
그리고 이제 막 해웅의 내단을 모두 취한 황극린 또한 입을 열었다.
“황극린……?”
“넌 누구지?”
“전…….”
소궁주가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썩 손을 치우지 못할까!”
흑나찰이 발작하듯 손을 뻗는다. 그가 노리는 것은 황극린의 하체였다.
“흡!”
황극린이 냅다 소궁주를 던져 버리고, 흑나찰의 공격을 피해 냈다. 구덩이에서 빠져나온 그는 무언가 신기하다는 듯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등운선녀나 흑나찰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내공이 왜 이렇게 많이 늘었지?”
평소 혼잣말을 잘 하지 않는 황극린이었지만, 의문이 가시질 않아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감히 북해에 칩임해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겠지.”
흑나찰과 등운선녀의 육신에서 가공할 만한 기운이 폭사된다.
그리고 멍하니 황극린을 바라보던 소궁주 또한 전투태세를 갖추며 말한다.
“일단 제압할 테니, 사로잡혀 주시겠어요?”
당연히 황극린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