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109화 (109/316)

109화 중단전

뇌섬사로 연결된 황극린과 곰 영물.

뇌전의 기운이 거칠게 쏘아지자 커다란 육신을 가진 놈은 해괴한 울음소리를 터트리며 몸을 크게 떨어 댔다. 하지만 단번에 쓰러진 것은 아니다. 몸도 상당히 튼튼했지만, 막대한 양의 내력을 가진 내단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놈은 본능적으로 내단의 기운을 끌어 올려 뇌전의 기운을 몰아내려 했다.

콰지지직-! 콰직-!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뇌섬사를 통해 끊임없이 뇌전이 쏘아지고 있다. 이미 피부에 박힌 암기를 빼내지 않는 이상 황극린의 뇌전을 막아 낼 순 없었다. 놈은 뇌전의 기운에 맞서느라 암기를 떼어 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확실히 놈은 강했지만, 황극린 같은 적과는 싸워 본 경험이 없었다.

암기를 꽂은 채, 그것을 통해 뇌전을 쏘아 대는 상대와 싸워 본 경험이 어찌 있으랴? 거기다 뇌전이라는 기운 또한 기가 막힐 정도로 파괴적이다. 체내를 녹여 버리겠다는 듯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가는 강렬한 기운.

잠시 뒤, 결국 놈의 거구가 크게 들썩였다.

쿵!

한쪽 무릎을 꿇은 놈의 입가엔 진득한 침이 줄줄 흘렀으며, 두 눈동자는 뒤집혀 흰자위만 보이고 있었다.

“크헝헝-!”

단말마의 포효 소리와 함께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온다.

놈의 힘을 알았으니 방심하지 않고 뇌전을 쏘아 대던 황극린. 그의 표정이 굳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싸움이다. 영물은 황극린의 예상보다 훨씬 강했으며, 꽤 요란스럽게 싸워 주었다. 특히 곰 영물은 위태하게 쌓여 있던 눈의 산이 흔들릴 만큼 거대한 비명을 질러 댔었다.

그렇기에 그들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정지!”

어느 순간, 수십 명의 털옷을 입은 여인들이 포위망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개중엔 털옷이 아닌 속이 약간 비치는 소복을 입은 여인들도 있다. 황극린은 대번에 소복을 입은 여인들의 ‘음기’가 충만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음기가 약한 여인들은 털옷으로 추위를 견디고 있었지만, 소복을 입은 여인들은 얇은 옷을 걸쳤을 뿐이지만 전혀 춥지 않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운이 나쁘게도 얼지 않는 호수 부근에서 경계 임무를 서던 북해빙궁의 궁도들이 잔뜩 몰려왔다. 황극린은 내력이 얼마나 남았는지 점검했다.

‘놈을 처치하는 데 거의 내력의 삼분지 일을 소모했다.’

혈풍뇌전신공의 백뢰는 상당한 수준의 내공을 소모한다.

내력을 아끼려고 했었으면 아마 전투가 더 길어졌으리라. 그렇기에 다행이라고 할까? 황극린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타닷!

눈 위를 달리는 것은 꽤 많은 체력이 소모됐지만, 이미 북해에서 경공을 펼치는 데 적응한 황극린이다. 그는 단번에 쓰러진 곰에게 다가갔다. 동시에 묵철 비수에 검강을 담아 휘둘러 놈의 아랫배를 갈랐다. 가른 직후 손을 집어넣어 내단을 꺼낸다.

사냥꾼들이 숙련된 손놀림으로 곰의 웅담(熊膽)을 채취하는 것처럼 말이다.

“제압해.”

소복을 입은 여인이 말하자 북해빙궁도들이 마치 하나가 된 듯이 움직인다. 확실히 북해 가장 깊숙한 곳에서 경계를 서던 여인들이었으니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손이 얼어붙을 것 같은 내단이었다.

거기다 사방으로 좁혀 오는 빙궁의 포위망. 조금만 방심했다가는 크게 다칠 것이다. 제압하라고 했지만, 여인들의 얼굴에선 살기가 엿보이고 있었다.

‘그걸 써야겠군.’

사실 그가 진심으로 싸운다면 여기 있는 빙궁도를 모조리 전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체력적으로도 문제가 있으며, 내력이 부족한 황극린에게 이들과 정면으로 맞붙는 건 사치였다.

이곳에 있는 빙궁도를 쓰러트린다면, 또 다른 빙궁도들이 황극린을 추격할 것이 분명하다. 물론 여기서 도주한다 해도 크게 상황이 바뀌진 않겠지만, 굳이 힘을 아낄 수 있다면 아끼는 게 좋다.

두근!

이제껏 황극린이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힘.

혈풍뇌전신공은 단전뿐 아니라 ‘심장’에도 내력을 쌓는다.

아니, 내력이라기보단… 피의 농도가 더 진해진다고나 할까? 혈맥에 흐르는 피의 양이 더욱 많아진다.

“…….”

황극린의 초감각이 한 차원 더 높은 수준에 올라섰다.

빙궁도의 포위망은 빈틈없이 촘촘했으며, 그것을 빠져나갈 길은 정면으로 돌파하는 길밖에 없어 보였지만… 혈풍(血風)의 힘을 발현한 황극린에겐 보였다. 자그마한 틈이 말이다.

타다닷!

“빙혼문쇄진(氷魂門鎖陣)을 펼쳐라!”

소복을 입은 여인은 황극린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경계대의 감시에 걸리지도 않고 얼지 않는 호수의 주인 해웅(獬熊)을 처치했다. 해웅은 북해빙궁에서도 꽤 희생을 감수해야 할 만큼 강인한 영물 중 하나다.

황극린의 실력은 최소한 ‘선녀’나 ‘나찰’급에 올라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방심하다가 놓칠 바에야 최선을 다하여 사로잡는다. 만약 사로잡지 못하면 최소한 죽인다.

‘감히 해웅을……!’

해웅은 북해빙궁도 간부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영물이다.

놈의 내단을 취하면 막대한 내력을 얻을 수 있을진대 왜 처리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북해빙궁주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때가 되면 수확하겠다는 빙궁주의 명에 따라 북해빙궁도 누구도 해웅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물론, 잡기도 쉽지 않았지만 말이다.

거기다 놈은 아무리 봐도 사내였다.

감히 금남(禁男)의 북해에 겁도 없이 발을 들이밀었다면 당연히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막아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빙혼분쇄진이 완성되었다. 총 다섯 겹의 포위망을 구축하여 상대를 완벽히 가두어 놓는다. 빠져나가려고 해도, 정면으로 돌파하려 해도 진을 구축한 무인들의 내력이 모두 소진할 때까지 무너지지 않는다.

이것은 설령 ‘나찰’에 오른 빙궁도라 하여도 쉽게 빠져나갈 수 없었다.

북해빙궁의 제2경계대장 한교란은 당연히 그를 막아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황극린이 어느샌가 빙혼문쇄진을 빠져나간 것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디…….”

“어떻게 이렇게 빨리…….”

황극린을 코앞에서 놓쳐 버린 빙궁도들이 당황한다. 빙혼문쇄진은 제2경계대에서 주력으로 익힌 진법이다. 진법이란 여러 명이 힘을 합쳐 소수를 상대할 때 특화되어 있다. 당연히 진법에 갇힌 이는 본실력을 제대로 끌어낼 수 없었다.

그런데 황극린은 빙혼문쇄진의 압박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듯이.

아니, 도리어 빙혼문쇄진 덕에 더 빨라진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빙혼문쇄진은 완벽해 보이는 진법이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진법은 없다. 어느 진법에나 작은 ‘틈’이 있기 마련이다. 실전에서 그것을 찾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황극린은 한 차원 진일보한 초감각으로 그것을 해냈다.

거기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기민한 야생동물의 그것과 같았다. 고양이나 호랑이의 반응속도는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다. 그런 고양이나 호랑이가 신법(身法)을 익힌 느낌이랄까?

“마, 막아라!”

평소에는 전혀 당황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 제2경계대장 한교란이었지만, 방금 보여 준 황극린의 움직임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

북해에서 몰아치는 혹한의 추위에선 중원인들은 본실력을 모두 낼 수 없다. 하지만 빙궁도들은 다르다. 태어날 때부터 음기를 타고난 여인들은 북해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놀릴 수 있었으며, 빙공의 위력도 훨씬 강해진다.

그런데 방금 보여 준 황극린의 움직임은…….

나찰이나 선녀… 그 이상이었다.

“대, 대장!”

“어떻게!”

벌써 네 번째 포위망을 빠져나간 황극린. 그리고 네 번째를 통과했다고 빙궁도들이 감지하고 있을 때, 황극린은 빙혼분쇄진에서 벗어났다.

“투척검!”

보통 사냥할 때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검을 던져 도주하는 적을 공격한다.

빙궁도들이 당황한 상태였지만, 경계대장의 명에 따라 검을 투척한다.

쉐에에엑-!

쉐에에엑!

스무 개가 넘는 검이 황극린과 그의 경로로 투척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에게 명중하는 건 하나도 없었다. 마치 뒤통수에도 눈이 달려 있다는 듯이 말이다.

애초에 빙혼문쇄진도 손쉽게 통과한 사내였다.

그런 투척검에 당할 리가 없었다.

“쫓아라-!”

본능적으로 명령했다.

명령에 충실한 제2경계대의 대원들이 앞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황극린과의 거리가 벌어진다.

어떻게 된 것이 사내는 더욱 빨라지고 있는 듯하다.

“잡아라! 잡아야 한다!”

당연히 그들은 황극린을 사로잡지 못했다.

중단전(中丹田)의 힘을 발휘한 황극린의 육체 능력은 그들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으니까.

* * *

“후우우…….”

오랜만에 거칠게 숨을 내쉬는 황극린.

처음엔 중원의 방향으로 달려갔지만, 어느 순간 발걸음을 돌려 북해의 더 깊숙한 곳으로 달려갔다. 왜 중원 쪽으로 도망치지 않았느냐고? 당연한 일이다. 중단전의 힘은 무한정 사용할 수 없었다. 중단전은 하단전보다 내력의 양이 더욱 적었다.

이 상태에서는 결국 따라잡히고 만다.

결국 도주할 때 중요한 것은 체력의 배분이었다. 당장 도주할 수도 있었지만, 추격대의 수가 더 많아지면 황극린의 중단전으로도 쉬이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과 마주할 것이다. 그렇기에 황극린은 선택을 했다.

북해에서 곰 영물의 내단을 취하기로 말이다.

놈의 이름이 해웅이라는 것까지는 몰랐지만, 최소한 융중산에서 잡았던 인면지주보다 더 큰 기운을 담은 내단이라는 건 알고 있다.

이걸 취하면 어떻게 될까?

만년화리를 취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빙공에 한해서라면 황극린은 상당한 수준의 내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물론, 내성도 만능은 아니다.

황극린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고수에겐 내성이 있더라도 빙공에 당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북해에서 빙공에 내성이 생긴다는 큰 이점을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오늘 마주했던 빙궁도들을 보며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들은 혹한의 추위에서도 전혀 제약을 받지 않고 움직였다.

황극린이 추위에 강하다고 하지만, 빙궁도처럼 추위에 완벽한 면역이 있다면 더 쉽게 도주할 수 있으리라. 거기다 한차례 도주 경로를 꼬았으니 쉽게 추격할 수도 없을 것이다.

‘북해에서의 경공은 확실히 도움이 되는군.’

마지막 순간 황극린은 본능적으로 최소한의 마찰로 눈을 밟았다.

최대한 발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답설무흔(踏雪無痕) 수준의 경지는 아니었지만, 그와 비슷하게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이 쌓이고 쌓여 경공의 수준 또한 진일보하리라.

황극린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광활한 평야에서 눈을 파내 구덩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몸을 뉜 다음 눈을 덮는다. 주변에 동굴이나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은신처가 몇 보이긴 했지만, 오히려 이곳에 더 안전할 것이다.

꼭 내단을 취할 때, 가부좌를 틀고 하란 법은 없었다.

일자로 누운 황극린이 눈 속에서 곰 영물의 내단을 쥔다. 치명적인 냉기에 손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내공으로 보호했다고 하더라도 순수한 빙정의 기운은 확실히 생명에 치명적이다.

황극린은 그것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만년화리, 그 이상.’

이것이 그에게 어떤 변화를 만들어 줄까?

얼마나 더 발전할 수 있을까?

황극린은 지체하지 않고 내단을 입에 삼켰다.

* * *

“보고드립니다, 궁주님.”

“부궁주가 또 발작을 일으킨 것이더냐?”

궁주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살의가 일렁이고 있었다. 부복한 여인은 그 살의에서 새어 나온 냉기에 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절대자의 위엄.

그 누구도 빙궁주의 앞에서는 감히 경거망동할 수 없다. 설령 나찰이나 선녀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아닙니다. 칩입자가 있습니다.”

“침입자라…….”

그런데 왜인지 빙궁주는 침입자라는 말에도 딱히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목소리에는 그리움마저 배어 있었다. 빙궁주는 누구를 떠올리는 것일까?

“신원 파악은 했나?”

“한 달 전에 봉황의 패를 가지고, 북해의 출입을 허가해 달라고 찾아왔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하나로 파악됩니다.”

“그렇군.”

“그리고 또… 해웅이…….”

해웅이 당했다는 말.

빙궁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얻으려고 북해에 온 이들이 여럿 있었지만, 정말로 해웅을 처치한 사람은 처음이로군. 사내의 나이는 몇으로 보이던가?”

궁주의 앞에 부복한 빙궁도가 속으로 조금 당황했다.

왜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않지? 거기다 나이는 왜 묻는 걸까? 물론, 빙궁주를 의심하진 않는다. 다 이유가 있을 것이리라.

“보고에 따르면 머리카락에 얼굴이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20대 초반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그렇군. 흑나찰(黑羅刹)과 등운선녀(登雲仙女) 그리고 소궁주에게 출정 명령을 내리도록.”

한 명의 나찰과 한 명의 선녀.

북해빙궁에서는 최고의 전력이었다. 거기다 빙궁 역사상 최고의 기재라 평받는 소궁주까지.

빙혼문쇄진을 빠져나갔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추격에선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궁도가 빠져나간 후, 빙궁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만에 부궁주를 만나러 가야겠구나.”

그녀의 얼굴엔 왠지 모를 악의가 깃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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