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얼지 않는 호수
북해.
살을 부수는 혹한의 추위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곳. 황극린 또한 북해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흑살문에 북해빙궁의 궁도를 살해해 달라는 의뢰를 남길 문파는 없었으니까. 애초에 북해빙궁에 어떤 고수가 있는지도 중원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황극린은 최대한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북해의 경계를 넘었다곤 하지만, 북해의 중심부로 갈수록 경계는 더욱 심해질 것이며 빙궁도들의 경지도 더욱 뛰어날 것이다. 잠행술과 은신술에 자신이 있는 황극린이었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봉황의 패로도 출입을 막은 것을 보면, 북해에 무슨 일이 벌어지긴 했을 것이다.’
아마 내부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북해빙궁을 잘 알지 못하지만, 대개 문파가 그러하듯 권력 싸움은 어딜 가나 존재했으니까. 아마 그런 종류의 문제가 아닐까 싶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북해의 경계 부분만 감시가 심하고 중심부로 갈수록 경계가 옅어질 수도 있었다. 빙궁 내부에서 세력 다툼 따위가 있다면 인력 모두를 경계에 투입하진 않았을 테니까. 하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다면…….
‘궁주가 다쳤을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오히려 평소보다 경계는 더 삼엄해졌으리라.
애초에 북해빙궁 쪽으로 갈 것은 아니니 정확한 사정까지는 파악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현 상황에 대해 대비하려는 자세는 필요했다. 그것이 살수의 자세다.
황극린은 급하지 않게 최대한 주의하며 지도에 의지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저기서 쉬면 되겠군.’
동굴을 발견했다.
황극린이 추위에 강하다곤 하지만, 완전한 내성이 있는 건 아니다. 거기다 추위만이 유일한 문제가 아니었다. 황극린의 초감각은 꽤 넓은 곳까지 닿을 수 있었지만,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거센 바람은 항시 주위를 살펴야 하는 황극린에게 피로감을 선사했다. 또한,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은 황극린의 체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당연히 쓰러질 정도로 지친 건 아니다.
하지만 쉬어야 할 장소가 나오면 체력을 비축해 두는 것이 생존을 위한 방식이다.
‘무림맹에게 쫓기던 때가 기억나는군.’
물론, 그때보다 훨씬 상황은 좋았다.
당시 황극린은 단전이 깨져 내력이 새어 나가고 있었으며, 무림맹의 추격대는 집요했다. 특히 광기와도 같았던 남궁운혜의 집착은 살수로서도 꽤 무서운 수준이었다. 지금은 그를 쫓는 이들은 없다. 눈길을 거닐면 발자국이 남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눈보라가 발자국을 지워 버린다.
특히 황극린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곳으로 움직였기에 빙궁도들에게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잘 자고 있군.’
행낭을 열어 보니 흑주가 몸을 웅크린 채로 동면(冬眠) 상태에 빠져 있었다. 추운 지방에 사는 거미는 거의 보지 못했으니 아마 흑주에겐 극악의 환경이리라. 조심스레 자신의 털옷을 벗어 흑주에게 덮어 준다.
신속하면서도 안전하게 얼지 않는 호수로 향하여 영물을 해치워야 한다.
황극린이 가부좌를 틀고, 운기토납으로 내공을 채운다.
사아아아…….
폐를 얼려 버릴 것만 같은 차가운 바람이 코를 타고 들어온다.
‘으음.’
하지만 그리 고통스럽지 않았다. 황극린의 세맥은 뇌불의 비동에서 영약을 취할 때부터 성장했다. 표현하자면 강화(強化)나 진화(進化) 정도일까?
마치 몸이 혈풍뇌전신공을 익히기 위해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몹시 의아한 일이긴 했다. 황극린의 체질이 본래 이러했다면, 과거 흑살문의 살수로서 살아갔을 때도 그랬어야 한다. 하지만 왜 과거로 돌아온 시점부터 이렇게 변화했을까?
이러한 의문은 혈풍뇌전신공을 익힐 때부터 품고 있었지만, 북해의 음기를 흡수하는 순간 문득 심층 깊숙한 곳에서부터 치고 올라왔다.
‘인형혈삼(人形血蔘).’
가장 그럴듯한 이유다.
아니, 황극린은 그 영약 때문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인형혈삼이 황극린의 체질을 바꾸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서 말이다. 그렇다면…….
‘현재’에는 인형혈삼이 존재할까?
즈으으으-!
평소 하던 대로 운기행공을 했을 뿐이었지만, 왜인지 황극린의 코로 흡입되는 기운의 양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인식의 전환. 개념의 발견. 무공에선 창의력이 필요한 경우가 많았다.
누구도 겪지 못한 ‘기연’을 겪은 황극린은 다른 무림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개념으로 무공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 끼이익……!
황극린의 주위로 음기가 몰리자 추위가 더욱 거세진다.
동면에 빠진 흑주가 저도 모르게 몸을 잘게 떨어 댔다.
북해(北海).
생명이 쉬이 적응할 수 없을 정도로 극한의 음기를 품고 있는 장소다. 중원 오악(五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한 기운이 잠들어 있다.
천혜의 자연이 들끓는 이곳에는 왜 북해빙궁만이 자리를 잡고 있을까?
과거 황극린이 백씨 형제에게 말한 적이 있듯이 극도로 순수한 기운은 ‘약’이 되는 경우보다 ‘독’이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평범한 내공심법으로는 북해의 거센 기운을 담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황극린은 그것이 가능했다.
단순히 소모한 내공을 채우려고 시작한 운기행공이었건만, 어느샌가 황극린은 무아(無我)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 * *
우지끈! 콰직. 콰지지직.
황극린이 움직일 때마다 완전히 꽁꽁 얼어 버린 옷이 부서지듯 요란한 소리를 냈다.
‘꽤 시간이 지났다.’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하루 이상은 지났다는 걸 알 수 있다. 황극린이 운기행공을 시작했을 때가 늦은 밤이었으며, 지금도 밤이었다. 또한, 배 속에서 천둥소리가 요동치고 있다. 황극린은 본능적으로 행낭 속에서 얼어붙은 육포를 꺼낸다.
당연히 그대로 먹는 것은 아니다.
황극린의 단전에는 뇌전의 기운이 잠들어 있었다. 황극린이 내력을 끌어 올리자 순식간에 얼어붙은 육포가 맛있게 익어 갔다. 직화 구이가 아니라 뇌전 구이였다.
“그렇군. 영약은 결국 주변의 기운을 끌어당겨 만들어진 자연의 ‘단전’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어.”
황극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번째 육포를 꺼냈다.
콰지지직-!
뇌전으로 구운 것은 처음인데 참으로 맛이 좋았다.
“세상이란 경이롭군.”
황극린은 문득 깨달았다.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강해지고 있다. 어쩌면 자만할 수도 있었다. 미래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절세의 무공을 익히고, 영약과 영물의 내단을 취해 성장했다.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남들과 다른 것은 분명했다.
하나, 자만할 수는 없었다.
그런 황극린의 모든 기연은 자연의 장난으로 치부될 만큼 작았으니까. 지금도 보라. 동굴 밖에는 생명을 얼려 버리는 눈보라가 쉴 새 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저것을 내공으로 환산하면 어느 정도나 될까?
천 년?
만 년?
“…….”
피식.
황극린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상에 비하면 자신은 작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자신의 한계가 어디인지, 무공의 끝이 어디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천하를 논하는 고수들은 황극린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아니면 인간의 한계에 부딪혀 좌절하고 있을까?
언젠가 뇌불과 다시 만난다면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황극린은 배를 채운 후, 동굴에서 떠나갔다.
* * *
얼지 않는 호수.
이런 추위에도 얼지 않는 호수가 있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사실이다. 황극린은 동정호처럼 넓은 북해의 호수를 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성을 터트렸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지금 그는 경이로운 자연경관을 구경하러 온 게 아니었다.
여기에서 영물을 찾아야 한다.
곰이라 했던가?
애초에 여기서 생물이 살아갈 것 같지 않았다. 황극린은 호수로 다가가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손끝이 부서질 정도로 차갑다.
그런데도 왜 얼지 않았을까? 황극린은 손가락을 입에 물어 맛을 보았다.
“퉤.”
욕설이 나올 정도로 짠 물이다. 소금기가 있어서 얼지 않았던 걸까? 이런 물은 짐승들도 마시지 못한다. 그렇기에 더욱 문제가 된다. 만약 영물이 존재한다면… 그놈은 뭘 먹고 사는 거지?
황극린이 눈에 힘을 주고 호수의 아래를 바라본다. 다행히도 물고기가 몇 마리 보였다.
만약 영물이 있다면, 호수에 사는 물고기를 잡아먹고 살리라. 그렇다면 물고기가 떼로 서식하는 장소를 위주로 탐색한다면 영물을 발견할 확률이 높아진다.
황극린이 내공을 끌어 올려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했다.
후각과 청각 그리고 시각으로 영물을 찾아야 했다. 동물의 배변 냄새나 곰의 발자국 따위를 찾아본다.
아쉽게도 당장 주변에서는 그러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첫술에 배부를 생각은 없었다. 황극린은 느긋하면서도 정확하고 신속하게 주변을 탐색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 속도로 수색하다 보면 최소한 한 달이면 영물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사각, 사각.
경쾌한 눈 밟는 소리. 이제는 눈밭을 뛰는 것도 확실히 적응됐다. 아마 딱딱한 지면에서 경공을 펼치면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이런 혹독한 자연환경은 자연스러운 수련의 장소였다.
만뇌문에 돌아가면 문도들에게 좋은 수련법을 전수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황극린은 쉬지 않고 탐색을 이어 갔다.
꼼지락.
그렇게 수색을 시작한 지 세 시진 정도 지났을 무렵이다.
황극린의 품속에 잠들어 있던 흑주가 깨어났다.
- 끼이이이.
“왜 깨어난 거냐?”
이곳은 북해의 중심부.
흑주는 깨어나지 말았어야 한다. 동면은 혹독한 환경에서의 생존 방법이었다.
- 끼이이익.
흑주의 기다란 발이 마구 움직였다.
처음엔 무슨 의민가 싶어 지켜보았지만, 그게 아니다.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평소였다면 알아서 사냥을 해 왔을 흑주였지만, 혹독한 환경에선 움직이기 힘든 모양이다. 황극린이 뇌전으로 육포를 구워 주자 허겁지겁 먹어 치운다.
‘동굴에서 운기조식 할 때, 추위를 견디기 위해 내력을 더 소모한 건가.’
흑주의 배를 만져 보자 확실히 내단의 기운이 많이 소모되었다.
이제껏 황극린은 흑주에 대해 훈련시키며 많은 것을 알아보았다. 영물이라 불리는 동물들은 내공심법을 익히지 못한다. 영물이 내력을 회복하는 방법은 오로지 무언가를 먹는 것뿐이다. 살아 있는 것을 먹을 때가 가장 회복이 빨랐지만, 그래도 육포 뇌전 구이도 꽤 도움이 되는 듯하다.
내리 육포 열 조각을 먹어 치운 흑주가 다시 몸을 웅크리고 동면에 빠지려 할 때였다.
- 그르으으으…….
“……!”
황급히 전투태세를 취하는 황극린이다.
분명히 그의 초감각으로도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다.
- 그르응!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짐승의 포효와 함께 거대한 무언가가 황극린에게 달려들었다.
‘빠르다.’
황극린은 왜 놈을 빨리 발견하지 못했는지 알아차렸다. 놈의 털은 눈과 똑같은 색깔이었고, 냄새도 전혀 나지 않았다. 애초에 혹한의 추위가 사방에서 불어닥치는 북해에서 후각은 그리 유용한 감각은 아니었다.
시각과 후각.
아무리 초감각이라 명명한 황극린의 예민함이라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은밀했다.
애초에 북해는 놈의 터전이었다.
황극린이 맡지 못하는 냄새도 놈은 맡을 수 있을 것이고, 그가 보지 못하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북해에선 황극린의 감각보다 놈의 감각이 더 예민하고 뛰어나다.
그렇기에 황극린이 미소 지었다.
만약 저것이 작정하고 숨거나 도주했다면, 황극린이라도 찾기가 힘들었으리라.
‘육포가 구워지는 냄새를 맡고 다가온 모양이군.’
- 끼이이익!
다시 동면에 빠지려던 흑주가 발광하고, 다리를 흔들어 댔다.
“괜찮다. 가만히 있어라.”
흑주를 진정시킨 황극린이 순식간에 암기를 출수했다.
아주 미약하지만 ‘뇌전’을 담아서 말이다.
- 그허어엉!
곰… 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큰 그것이 포효한다.
두꺼운 가죽과 털 때문에 암기가 제대로 꽂히지 않았다. 거기다 더 놀라운 점은…….
‘피했어?’
황극린이 날린 암기 중 명중한 것은 두 개.
다섯 개를 날렸으니 세 개는 피한 것이다. 그마저도 제대로 박히지 않았으니 놈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사아아악!
마치 눈이 아니라 평지를 달려오는 듯한 속도.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의 일격에 황극린이 허리를 숙였다.
쉬이익!
“……!”
황극린은 또다시 놀랐다.
등에 스치는 감각 때문이다.
분명히 놈은 방금 일격에…….
‘내력을 담고 있다.’
분명히 피해 냈지만, 등에 전해지는 한기(寒氣)는 놈의 발길질에 내력이 담겨 있었다는 걸 뜻한다. 흑주 또한 거미줄에 내력을 담을 수 있었으니 처음 보는 건 아니었지만, 놀라운 일이었다.
쉬익! 쉬이익!
놈은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쉴 새 없이 앞발을 휘둘렀다.
놈의 손톱에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맺혀 있었다.
마치 인간이 조공을 익힌 것처럼 말이다.
- 캬아아아악!
놈이 활용하는 무기는 손톱뿐만이 아니다.
거대한 입과 기다란 송곳니. 황극린의 상반신을 그대로 삼켜 버릴 기세로 입을 벌려 돌진한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르냐 하면…….
‘모용가아의 쾌검보다 빠르군.’
- 크르응!
황극린이 내력을 끌어 올려 큰 움직임으로 피해 냈다. 간발의 차이로 피해 낼 수 없었던 이유는 이곳이 북해였기 때문이다. 지금 황극린은 본신의 실력을 7할도 채 끌어낼 수 없었다. 하지만 놈은 최적의 장소에서 싸우고 있었다. 마치 북해빙궁의 궁도들이 북해에서 훨씬 강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황극린이 피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피하는 와중에도 암기를 출수하여 놈의 몸에 총 5개를 꽂아 넣었다. 물론, 큰 타격은 없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 크르르으!
놈이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몸에 박힌 암기를 바라본다.
이 정도는 아프지도 않다는 듯이.
황극린 또한 놈을 바라보며 마주 웃었다.
암기를 던진 것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벼락을 맞아 본 적이 있더냐?”
- 크르응?
당연히 황극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곰 영물이다.
“한번 맛보아라.”
황극린은 흑주의 거미줄이 강철로 만든 검보다 내력이 더 잘 깃든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무림에서 최고의 실로 평가받는 천잠사(天蠶絲)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수준으로 튼튼하다는 사실 또한 말이다.
그가 던진 암기는 황극린과 연결되어 있었다.
흑주에게서 뽑아내어 가공한 실 중에 뇌전에 녹지 않는 것만 추려 낸 뇌섬사(雷纖絲)로 말이다.
콰지지지지직-!
황극린의 손끝에서 혈풍뇌전신공 백뢰(百雷)가 터져 나왔다.
“크허엉엉엉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