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귀귀환-107화 (107/316)

107화 비장의 수

봉황의 패.

북해빙궁이 왜 ‘태양’을 상징하는 봉황을 숭배하는지는 대부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북해 깊숙한 곳에서 살아가며 대체로 중원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고, 북해빙궁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대부분 죽었다. 황극린과 마령이 북해에 진입하려 하자 경계를 서던 궁도들이 다가와서 포위한 것만 봐도 그들의 폐쇄성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왜 봉황을 숭배하는가?

그것은 북해빙궁의 궁도들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 저주 혹은 천형(天刑) 때문이었다.

북해빙궁 출신의 여인들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음기(陰氣)를 품고 있는데, 궁주의 직계는 그 음기가 극한으로 치우쳐 구음절맥(九陰絶脈)을 타고나기도 한다.

구음절맥은 타고난 음기로 단명을 부르는 불치병 중 하나로, 권세를 누리는 명문가의 자제도 구음절맥에 걸리게 되면 치료하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다.

인간이란 조화로운 동물이다. 음과 양의 조화가 적절해야지만 살아갈 수 있다.

적당한 수준으로 음기가 양기보다 많다면 오히려 도움이 되겠지만, 극한의 음기를 몸속에 품고 있는 구음절맥증은 대부분 치료하지 못했다.

하지만 북해빙궁의 출신들은 달랐다.

먼 옛날, 빙궁을 세웠다고 알려진 초대 궁주 빙백마후(氷魄魔后)는 절맥증을 치료할 방법을 찾았다. 그녀는 천하를 논할 경지에 올라 있었으며, 누구보다 오래 세상을 겪어 보았다. 빙백마후는 구음절맥증을 앓고도 죽지 않을 방법을 찾아냈으며, 그것을 활용할 방법까지 찾아냈다.

어떠한 실험을 통해 방법을 알아냈는지는 모르지만, 빙백마후의 치료는 효과가 있었다.

구음절맥증을 앓고도 죽지 않았으며, 체내에 품은 음기를 활용하여 무공을 익힐 수도 있었다.

사흑련 중 하나인 북해빙궁의 탄생은 빙백마후가 만든 치료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들은 단일 문파로서는 혈마교 다음가는 세력을 일구었다.

하지만 치명적인 문제점이 존재했다.

북해빙궁이 북해에만 박혀 세상으로 나오지 않는 이유. 빙백마후의 치료법은 오직 여인에게만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백, 수천, 수만.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내아이가 죽어 갔다. 아들과 딸. 둘 다 배 아파 낳은 자식이다. 아이를 배 속에 품은 어머니는 자식에게 모정(母情)을 가지게 된다. 아들이냐 딸이냐는 어머니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북해빙궁에선 몹시도 중요한 문제였다.

남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북해빙궁의 아들들은 채 한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

세맥이 얼어붙을 정도로 강렬한 음기는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아이들에게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선사한다. 그것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할까? 치료할 방법은 없다. 그렇기에 북해빙궁의 여인들은 사내아이를 낳게 되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아이의 목숨을 거둔다. 채 일 년도 안 되는 삶을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보내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으로 만들어진 북해빙궁의 신성한 의식 중 하나다.

북해빙궁은 그렇기에 중원에 나서지 않는다.

저주와 천형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중원인들에게 그러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중원인들은 빙궁의 관습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빙궁의 여인들은 북해에만 머물고 있다.

또한, 누구도 들어올 수 없게 북해의 경계를 감시한다.

그게 바로 북해빙궁이 생뚱맞은 봉황을 숭배하는 이유였다.

태양의 신수라 불리는 봉황.

태양은 세상 어느 것보다 강렬한 양기(陽氣)를 품고 있다. 존재하는지도 의문인 봉황을 숭배하다 보면 언젠간 은혜를 내려 주지 않을까? 자연스럽게 북해빙궁은 봉황을 신성시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봉황이 각인된 패를 가지고 있다는 건, 북해빙궁의 몇 없는 귀빈이라는 뜻이었다.

마령이 남자인 황극린을 데리고 자신 있게 북해로 향했던 이유가 바로 봉황의 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빙궁에 무슨 일이 있나요?”

“네가 알 필요 없다.”

“하아, 추위를 참아 가며 여기까지 왔는데…….”

마령이 황극린의 눈치를 본다.

이제 어떡해야 하는가? 봉황의 패가 통하지 않으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북해로 들어갈 수 없었다. 감시의 시선은 북해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으리라. 중심부로 갈수록 추위는 더욱 거세지고, 북해빙궁의 궁도들은 더욱 강해진다.

기련노괴조차도 북해빙궁에 가는 것을 말릴 정도였으니…….

“돌아가라.”

키가 큰 여인의 말에 마령이 한숨을 내쉰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황극린과 함께 북해로 온 이유는 그가 적당한 실험체인지 확인하기 위함이다. 영물을 어떻게 길들였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봉황의 패를 깨트리겠어요.”

“…….”

봉황의 패를 가지고 있다는 건 북해빙궁에게 귀중한 은인이라는 뜻.

당연하게도 몇 번이고 북해빙궁의 ‘자비’와 ‘도움’을 요구할 수 있다. 일정한 선만 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봉황의 패를 깨트린다. 그럼 북해빙궁과의 관계는 그대로 단절되는 것이다. 지금 마령은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것이다. 황극린이 대체 뭐라고 봉황의 패를 포기해야 하는가?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혈마교주의 가르침을 상기했다.

말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가치의 힘이 담겨 있다고 했다. 만약 교주의 위(位)를 물려받으려면 내뱉은 말은 꼭 지키라 했다. 감시하는 이가 없더라도 말이다.

그녀는 황극린과의 약조를 지키기 위해서 봉황의 패를 영구적으로 포기할 각오를 다졌다.

이제는 그의 은근한 시선에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어떤가요? 이 정도면…….”

당연히 허락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일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결연한 각오를 다졌다고 해도 말이다.

“불가.”

“봉황의 패를 포기하면서 고작 북해에 출입을 하겠다는 말이에요.”

마령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대체 왜…….”

마령이 따지려 들자, 키가 큰 여인이 고개를 젓는다.

“봉황의 패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서 너희를 죽였을 것이다. 다행으로 알고 돌아가라.”

“전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려는 겁니다. 봉황의 패는 서로 간의 약조가 아니었나요? 약조를 깨트릴 생각이라면, 저도 더 이상 말로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마령의 기세가 돌변했다.

그녀는 차기 혈마교주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꿈을 가졌을 정도의 인재였다. 거기다 그녀의 진짜 실력은… 황극린의 품속의 영물이 뭔지 알아보려 할 때와는 전혀 다르다. 그녀는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 십만대산에서 나와 홀로 행동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러한 마령의 기세를 느꼈기 때문일까?

북해빙궁의 궁도들 또한 포위망을 좁혀 왔다.

그리고 그때.

황극린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 물러납시다.”

“…….”

여기서 물러나자고? 이제는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 생각했지만… 황극린이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한 마령이 말을 아낀다. 그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북해까지 왔다. 당연히 여기서 포기할 이유가 없으리라.

아마도 황극린은…….

‘몰래 북해에 들어가려는 거야.’

성공 가능성이 얼마나 희박하든 간에 지금은 굳이 황극린에게 따져 묻기보다는, 북해빙궁에 의심받지 않기 위한 말을 내뱉는 게 더 중요하다.

“정말 포기하셔도 괜찮겠어요? 북해까지 어떻게 왔는데…….”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는 마령의 목소리.

황극린이 그녀에게 장단을 맞춘다.

“어쩔 수 없지 않겠소? 북해빙궁에서 출입을 허가하지 않는다면… 포기할 수밖에 없지 않소? 여기서 싸운다면 눈밭에 구르는 시체가 될 뿐이겠지.”

“하아… 그렇겠네요.”

두 사람이 포기하는 듯하니 키가 큰 여인이 약간 누그러든 목소리로 말한다.

“봉황의 패는 다른 곳에 사용하는 게 좋을 거다.”

“그래야겠네요. 그런데 북해에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봉황의 패를 사용할 기회가 있을 까요?”

“본궁에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라. 궁에 보고한 뒤, 가능한지 알려 주겠다.”

“지금 당장은 없어요. 북해에 들어가는 것밖에는요.”

“그건 안 된다.”

“어쩔 수 없네요.”

어깨를 으쓱한 마령이 뒤로 물러선다.

“그럼 조용히 떠나도록.”

“네, 언젠간 다시 뵐 수 있으면 좋겠군요.”

“…….”

“참, 이렇게 된 마당에 하나만 질문해도 될까요?”

“뭐지?”

“얼지 않는 호수에 영물이 산다는 소문은 사실인가요?”

굳이 사실을 말해 줄 필요는 없었지만, 봉황의 패를 가진 주인에게 그 정도 호의는 베풀 수 있었다.

“아마도… 있을 거다.”

“아, 그렇군요.”

“하지만 출입을 허가할 수는 없다.”

“네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럼 저희는 조용히 떠나도록 할게요. 너무 무섭게 바라보지 말아요.”

“…….”

황극린과 마령이 북해의 경계에서 떠나갔다.

빙궁도의 시선은 두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 이어졌다.

빙궁도의 시선이 닿지 않은 곳에서, 마령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다.

“어쩌시려고요?”

“본래 계획대로 할 생각이오.”

“몰래 잠입하려는 생각인가요?”

“그렇소.”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불가능해요. 아니, 가능하지만 황 소협이 죽을 수도 있어요.”

황극린 또한 알고 있었다.

북해에 침입하는 건 상당히 위험하다는 걸.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갈 순 없었다. 거기다 여인에게 얼지 않는 호수에 영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조건 죽을 거예요.”

“죽지 않소.”

마령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굳이 북해까지 와서 영물을 찾는 건지도 의문이었지만, 그게 목숨을 걸 이유가 된단 말인가?

“후우, 그럼 각오해야겠군요. 은신술은 꽤 자신 있긴 하지만 이런 추위 속에서 잘 펼칠 수 있을지는…….”

마령은 당연히 자신도 함께 들어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황극린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혼자 갈 것이오. 마 소저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북해의 중심부로 갈수록 추위는 더 심해질 것이오.”

황극린은 북해의 경계에 와 있는데도 추위를 타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마령은 추위를 견디는 데에 꽤 내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혼자 가겠다고요? 그 위험한 곳을?”

“굳이 둘이 갈 필요가 있소?”

“그건… 정이 있으니까요?”

“위험을 감수할 필요까진 없소.”

“어머?”

마령이 살짝 놀란다.

정이 있다는 말에 황극린이 부정하지 않은 것이 새삼스러운 느낌이다. 평소의 황극린이라면 차갑게 부정해야 정상이다.

“알겠어요. 추위를 타는 제가 함께 가면 방해가 될 게 분명하니…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죠.”

마령은 누군가에게 질척거리며 들러붙지 않는 성격이다.

황극린이 마음에 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말대로 자신은 방해가 될 것이 뻔하니까.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말하시오.”

“기회가 되면 절 죽이려고 했죠?”

“…….”

마령에겐 남들이 가지지 못한 타고난 감각이 있었다.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이라고 할까? 아니면 감정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할까? 인간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동행하며 꼭꼭 숨겨 둔 황극린의 감정을 알아챘다.

그는 살의(殺意)를 품고 있었다.

황극린은 조금 놀랐지만,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소.”

“왜 살의를 거두신 거죠?”

“그럴 이유가 없어졌소.”

황극린은 석 달 동안 마령과 동행하며, 그녀가 천흉인지 알아보았다.

과거에 천흉을 만나 보진 못했지만, 천흉의 특징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소녀환희공을 ‘대성’했다. 소녀환희공이 어떤 무공인지 알았기에 마령이 천흉이 아니라는 걸 파악할 수 있었다.

“본교와 관련이 있는 건가요?”

“아니오.”

“후우, 다행이군요. 황 소협과는 솔직히 싸우기 싫었거든요.”

마령이 손을 내밀었다.

“이건…….”

“가져가세요. 제가 장담컨대 황 소협은 북해빙궁의 추격을 받게 될 거예요.”

그녀가 내민 것은 봉황의 패였다.

“이게 있으면 한 번은 살려 줄 수도 있지 않겠어요?”

황극린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각자의 목적에 따라 동행했을 뿐이다. 그런데 굳이 이런 호의까지 베풀 필요가 있는가? 그런 황극린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마령이 말한다.

“제가 사람은 잘 보거든요.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날 배신할 사람인지 아닌지를 파악할 수 있죠. 또한, 사람의 가능성이 느껴지기도 해요.”

“가능성?”

“네, 대성할 사람인지… 아니면 순간에만 빛날 사람인지 알 수 있답니다. 참, 제가 이런 능력을 가졌다는 건 누구에게도 발설하면 안 된답니다.”

황극린이 눈이 가늘어진다.

그녀의 말을 듣다 보니 의문이 떠올랐다.

“언젠간 제게 보답하셨으면 해요. 뭐, 목을 내놓으라거나 하진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진 마시고요.”

마령은 이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봉황의 패를 완전히 잃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도박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은가? 어떤 것을 거느냐에 따라 돌아오는 게 달라진다.

‘당초 계획대로 흑살문에 가야겠어.’

황극린이 죽어도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기다리면, 언젠가 기대하지 않은 장소에서 만날 기회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마령이 깔끔하게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마 소저, 하나 물어볼 게 있소.”

* * *

북해빙궁 제8경계대.

수십 명의 북해빙궁의 궁도들이 조용히 눈밭으로 뒤덮인 북해를 감시하고 있다. 사실 북해에 찾아오는 인간은 몇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였지만, 여인들은 방심하지 않고 대화도 나누지 않으며 경계를 서고 있을 뿐이다.

‘봉황의 패의 출입을 거절한 건 보고를 해야겠지.’

제8경계대장 한유라는 진중한 표정으로 붓을 들었다.

북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궁주께 보고되어야 한다. 경계대장이 사소하다고 판단할지라도 궁주의 생각은 다를 수가 있었다.

한유라가 붓을 들고, 작은 등불에 의존하여 오늘의 일을 기록하는 순간이었다.

사아아…….

어두운 그림자가 제8경계대의 감시망을 뚫고, 북해의 경계를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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