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동행 제안
마령.
그녀는 혈마교주의 딸이자 마도삼가(魔道三家) 중 하나인 묵룡천가(墨龍天家)의 피를 이어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묵룡천가의 대공녀인 천가령이 그녀의 어머니였다.
묵룡천가에선 뱀 영물 독각화망(獨角化蟒)을 길러 왔다. 영물을 길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먹이를 제공해 준다면 영물 또한 굳이 인간을 공격하지 않게 된다. 거기다 묵룡천가는 수많은 마공을 통해 어느 정도 영물을 제어하는 데 성공했다.
마령이 키우는 비비는 독각화망의 새끼 중 하나였다.
영물이 새끼를 낳는다고 하여 모두가 영물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운이 좋게도 비비는 영물이 될 수 있었다. 영물이 보통의 동물보다 오래 살아가는 건 맞지만 영생(永生)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현재 묵룡천가의 독각화망은 노화하여 죽어 가고 있었고, 그녀가 기르는 비비는 또 다른 자식을 낳아야 했다. 묵룡천가의 무공은 독각화망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독각화망이 만들어 내는 독액을 이용하여 묵룡천가는 무공을 더 발전시킬 수 있었다.
독(毒)을 이용한 수련.
마공이라 가능한 해괴한 수련 방식이다.
마령은 묵룡천가의 주인이 되는 것으로 그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혈마교주의 딸이기도 하면서, 제자이기도 하다. 언젠가 십만대산을 호령하려는 목적이 있는 그녀에겐 비비의 새끼를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아쉽게도 뱀은 스스로 자식을 잉태하지 못한다.
비비와 짝짓기를 할 늠름한 수컷을 찾아야 한다. 당연히 들판에 흔히 굴러다니는 뱀은 비비와 교접할 수 없다.
그렇기에 마령은 영물이라는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떤 영물이죠? 설마 뱀 영물인가요?”
마령이 뱀처럼 은밀하게 움직여 황극린에게 도달했다. 단숨에 그의 품속을 뒤져 숨어 있는 영물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다. 정파의 여식이었다면 이런 무례한 행동을 하진 않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혈마교의 출신이다. 그곳에선 원하는 게 있으면 말보다 손이 빨라야 한다. 그래야지만 목표를 성취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왜인지 황극린은 잡히지 않았다.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통에 마령은 짜증이 치솟았다.
‘이것도 피해?’
마령은 무공에 자신이 있었다.
호위도 없이 혼자서 강호행을 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묵룡의형수(墨龍意形手).
독각화망 어미인 묵룡의 움직임을 따라 창안한 무공. 사냥감을 노리는 뱀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는 것이 특징이다.
은밀하면서도 빠른 손놀림으로 황극린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초감각을 가진 그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었다.
‘이제 막 용봉지회에서 우승한 후기지수 맞아?’
용봉지회에서 우승한 건 꽤 대단한 일이다.
정파 후기지수 중에서 두각을 나타낸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정파 후기지수 중 최고라 말할 수는 없었다. 용봉지회는 애초에 3년마다 이루어지는 대회였고, 용봉지회에 나오지 않은 후기지수 중에서도 강자는 분명히 존재하리라.
애초에 기성 무림인이 참가하는 대회가 아니지 않은가?
그렇기에 마령은 은근히 황극린의 실력을 얕잡아 보았다. 하지만 막상 그를 잡으려 하니 간발의 차이로 놓치고 만다.
“이익!”
약이 잔뜩 오른 마령이 손을 휘둘렀다.
그러던 중 일이 벌어진다. 황극린의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흩날린 것이다. 감추어 두었던 그의 눈동자가 드러난다. 뇌불이 보고 깜짝 놀란 그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눈빛. 마령은 그를 잡으려는 것도 잊어버리고 시선을 빼앗긴다.
“어……!”
눈이 드러난 것으로 이렇게 사람이 달라 보일 수가 있단 말인가?
마령 또한 혈마교에서도 손꼽히는 미녀였다. 특히 보랏빛의 머리카락 때문인지 그녀의 외모는 더욱 빛이 난다. 그렇기에 그녀는 수많은 미남미녀를 보면서도 딱히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애초에 무인(武人)에게 중요한 건 외모가 아니었다.
그런데 황극린의 외모는 무언가 달랐다.
자연스레 심연(深淵)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혼을 빼앗길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도 시선을 옮길 수가 없었다. 멍한 얼굴로 황극린의 얼굴을 바라보던 마령.
그녀가 고개를 갸웃한다.
“어……?”
그런데 묘하게 익숙하다.
어디선가 이런 얼굴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착각일까?
황극린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서고, 머리를 정돈한다.
이래서 눈을 가리고 다니는 것이었다. 최상급 살수로서 흑살문의 정예였던 그에게 약점이 있다고 하면 이러한 외모다. 물론, 외모 덕에 성공한 살행도 있었지만… 그가 살아오며 겪었던 고초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사내에게도 추행을 당할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왜 가려요?”
마령이 순수하게 묻는다.
“나 같으면 드러내 놓고 다니겠다.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은데.”
“그래서 가리는 것이오.”
황극린은 예의 무심한 목소리로 답한다.
“참! 영물! 설마 뱀 영물인가요?”
아쉽다는 듯 황극린을 바라보던 마령이 소리친다. 뱀 영물이 그리 중요한 건가?
“령아, 그만.”
기련노괴 또한 황극린의 눈동자를 보고 놀란 눈치였지만,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 마령을 말렸다. 어릴 때부터 오냐오냐 들으며 자라서 그런지 버릇이 없을 때가 있다. 물론 그녀의 출신과 실력이라면 겸손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지만, 황극린은 광사탑의 손님으로 온 것이다.
“할아버지, 제가 뱀 영물을 얼마나 찾았는지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뱀이 아니다.”
“네?”
“그렇지 않은가?”
“예.”
어차피 보여 주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황극린이 흑주가 들어간 행낭을 툭툭 친다. 그러자 흑주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어머나?”
마령이 홀린 듯한 시선으로 흑주를 바라본다.
잘 손질된 옥과 같이 반짝이는 여러 개의 눈동자. 거기에 튀어나온 인간의 형상. 기괴하고 징그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마령은 그러한 흑주가 몹시도 귀여웠다.
“인면지주!?”
“그렇소.”
“인면지주가 어떻게 사람을 따르죠? 저도 보는 건 처음이지만… 인면지주는 사람을 먹기에 절대 인간을 따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자신이 인면지주의 냄새를 가지고 있기에 어미처럼 따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이유였다.
“저 뱀이 소저를 따르는 것과 같은 이유겠지.”
“으음…….”
그렇게 말하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반짝이는 눈으로 인면지주를 바라보던 마령이 순간 탄식을 터트린다.
“아! 뱀 영물이었다면 우리 비비랑 교접시킬 수 있었는데 아쉽군요. 정말 아쉬워요…….”
새애애애……!
그때, 마령이 기르는 비비가 혀를 내밀고 위협적으로 황극린에게 다가온다.
그러자 흑주 또한 질 수 없다는 듯 기괴한 소리를 내며 눈을 반짝인다. 당장이라도 독을 쏘아 낼 수 있도록 말이다.
“들어가, 흑주.”
끼이-!
흑주는 본능을 억지로 잠재우고 행낭 속으로 쏙 들어갔다.
그것을 본 마령이 또 한 번 놀란다. 아니, 경악했다.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고요?”
“영물이니까.”
“…….”
마령이 심각한 얼굴로 비비를 바라본다.
그녀는 비비와 함께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동고동락했다. 처음 5년은 잠을 잘 때마다 비비가 그녀를 먹잇감으로 인식하는 바람에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물론, 그 덕분에 무공이 성장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친우라는 느낌이 강하긴 해도 비비는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영물이라고 하여 무조건 똑똑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너무 똑똑하여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할까? 인간을 발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먹이를 주는 조금 다른 인간으로 취급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흑주는 인간의 말을 정확히 알아듣고, 비비와의 기 싸움을 포기하면서까지 행낭에 들어갔다. 흥분하여 황극린에게 조금씩 다가가는 비비와는 다르게 말이다.
타악!
마령이 기세를 내뿜으며 발을 구르자 비비가 조금 움찔하며 물러선다.
“부럽네요. 어떻게 훈육했는지 배울 수 있을까요?”
“딱히 비결은 없소.”
“그래요?”
황극린이 일부러 말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 마령이었다.
다짜고짜 공격을 했으니 적대감을 가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것을 반성하며 마령이 물러선다.
“제가 영물이라는 소리에 실례를 범했네요. 사과드릴게요.”
“괜찮소.”
기련노괴 앞에서 싸울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기련노괴가 황극린에게 묻는다.
“북해로 향하는가?”
“예, 그렇습니다.”
“북해……?”
북해라는 말에 마령이 또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두 사람은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대화를 이어 나간다.
“북해의 깊숙한 곳에는 얼지 않는 호수가 있다더군. 그리고 그곳엔 평범한 곰보다 두 배는 흰 털을 가진 곰이 있다는 소문이 있긴 하네.”
“곰이요?”
“그렇다네. 하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이지. 그게 정말 영물일 수도 있네만… 그냥 덩치만 큰 곰일 수도 있다네.”
황극린은 흰색 털을 가진 곰이 영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영물이 사는 곳은 특수한 기후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만년화리가 뜨거운 용암으로 달구어진 물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극한의 추위에서 음기(陰氣)를 품어 내단을 가지게 된 영물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 생각한다.
황극린은 화의 기운에 내성이 생겼다.
그 효과는 거력도마와의 싸움에서 확실히 증명됐다. 보통 음양오행의 속성을 지닌 무공은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지만, 황극린은 그 내성을 기를 방법이 있었다. 특수한 속성의 내단이나 영약을 취하면 된다.
“북해로 갈 생각인가?”
“예.”
“가지 않는 것을 추천하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빙궁이 있기 때문이네.”
북해빙궁.
사흑련의 거대한 축 중 하나로, 여인으로만 이루어진 문파로 알려져 있었다. 흑살문에 속해 있으면서도 황극린 또한 북해빙궁의 궁도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그들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구역에 침범하는 침입자를 그냥 두지 않는다.
극도로 폐쇄적인 문파. 사흑련에 묶여 있었지만, 다른 사흑련의 문파들과도 교류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황극린은 그들과 접촉할 위험을 감수하고 북해로 향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두야랑이나 광견살검과도 화음현에서 헤어졌다.
“자네가 뛰어난 고수라는 걸 부정하지 않겠네. 아마 무림에서 자네를 상대할 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군. 하나, 북해빙궁은 천외천의 문파. 그곳엔 수많은 빙공의 고수가 있으며 특히 북해에선 빙공의 위력이 극대화되지. 돈황에서 그녀들과 싸워도 위험한 마당에, 북해에서 빙궁의 무인들과 조우한다면… 죽을 것이네.”
기련노괴가 확신하듯 말한다.
그는 사대마제에 필적하는 고수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에 황극린이 방금 마령의 손길을 피하는 움직임만 보아도 그의 실력을 잘 알 수 있었다. 마치 그녀의 움직임을 ‘예측’이라도 한 듯 피해 내는 것만 봐도 대단한 수준의 고수였다.
하지만 북해에서는 그런 움직임을 펼칠 수가 없다.
혹한의 추위에서 몸은 경직되며 감각은 둔화된다. 더 큰 문제는 빙공을 익힌 고수들은 북해라는 환경에서 본래 실력보다 더 뛰어난 무위를 펼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건 괜찮습니다.”
“그런가.”
거력도마의 행패를 막아 준 손님이었기에 기련노괴는 황극린에게 조언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그럼 내가 해 줄 말은 끝이군. 조심하게.”
“감사합니다.”
그때,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던 마령이 입을 연다.
“제가 같이 가 드릴까요?”
“소저가 말이오?”
“네, 저 사실 북해빙궁에 아는 사람이 있거든요. 아마 저랑 같이 간다면… 북해에서 소협을 공격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왜 날 도와주려는 것이오?”
황극린은 마령이 천흉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그건 차치하더라도 혈마교의 교도인 그녀가 함부로 남을 돕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냥? 전 사실 사람을 도와주는 걸 좋아하거든요. 처음 보는 사람한테 절세의 무공을 선물해 준 적도 있을 정도예요. 아, 물론 보답을 바랄 때가 더 많아요. 친절을 베풀면 언젠간 돌아오거든요.”
왠지 뼈가 있는 말이었다.
친절을 베풀고, 황극린에게 무언가를 받아 내겠다는 의미로 들린다.
“어때요? 같이 가실래요?”
기련노괴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마령이 갔으면 하는 느낌이랄까?
“그럼 거절하지 않겠소.”
“시원시원해서 좋네요.”
마령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구석에서 몸을 똘똘 말아 쉬고 있던 비비를 들어 올려 목에 감는다.
“참, 들를 곳이 있었는데…….”
그녀가 막 생각났다는 듯이 말한다.
잠시 고민했지만, 금방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협을 위해서 거긴 나중에 들르도록 할게요.”
황극린은 마령의 현재 목적지가 어딘지 알고 있었다.
아마 흑살문일 것이다.
왜 그녀가 흑살문에 방문하는가?
그리고 마령이 정말 천흉인가?
동행하며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무적인 사실은 북해에는 기련노괴가 없다는 것이다.
‘여차하면…….’
북해에서 마령을 처리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