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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귀귀환-104화 (104/316)

104화 광사탑

“감히 광사탑에서 싸움을 벌였으니 각오는 되어 있겠지?”

기련노괴의 시선이 황극린과 거력도마를 향한다.

그의 시선을 마주하면 보통 주눅이 들기 마련이었지만, 황극린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거기다 기련노괴의 탄지공에 점혈당한 거력도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호승심 가득한 얼굴로 황극린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 두 사람은 할아버지가 무섭지 않나 봐, 그치?”

세에에에엑-!

비비라고 불린 커다란 뱀이 혀를 내민다. 쭉 찢어진 눈동자로 황극린과 거력도마를 바라보았는데, 마치 먹잇감을 바라보는 듯하다. 황극린은 저것이 영물이라는 걸 알아챘다. 크기도 크기였지만, 냄새가 느껴졌다.

‘상당한 수준의 내단을 품고 있다.’

거기다 뱀에게선 낙혼향의 냄새도 느껴진다.

흑사회의 간부 중 하나인 심화절이 사용했던 독이다. 마령이 심화절에게 독의 재료를 전해 준 듯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천흉일까? 그건 확실하지 않았다. 가면을 썼다고 하여 천흉이라 단정 지을 순 없었다.

“거력도마가 난동을 피우려 하여 막았을 뿐입니다.”

“난동을 피워?”

“예, 기련노괴를 찾더군요.”

황극린의 말에 기련노괴의 시선이 거력도마에게로 향한다. 그는 탄지공으로 당한 점혈을 거의 푼 상태였다.

따악!

또다시 손가락을 튕겨 기공을 쏘아 낸다.

“억! 또!”

거력도마의 몸이 작게 떨린 후에 다시금 굳었다.

“이 늙은이가……! 내 싸움을 방해하지 마라!”

“화령공을 익힌 건가?”

“그걸 어떻게 알았나!”

몸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입은 쾌활하게 움직이고 있다. 제압을 당했으면 보통 주눅이 들 만도 하건만, 거력도마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네놈의 사부를 알고 있으니까.”

“뭐, 뭣……? 사부를 알고 있다고?”

기련노괴가 몸을 돌렸다.

그의 뒤에는 광사탑의 무인들이 몰려와 있었다.

“저 사내의 말이 사실이더냐?”

“예, 도를 든 무인이 탑주님을 찾았습니다. 다짜고짜 도를 뽑고 난동을 피우려 하는데, 소협께서 나서서 그를 막았습니다.”

대답을 들은 기련노괴가 황극린을 바라본다.

“일단 감사를 표하지. 자네가 아니었다면 천지 분간도 하지 못하는 놈 때문에 탑의 기물들이 상할 뻔했었군.”

“아닙니다.”

황극린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는데, 그를 바라보는 기련노괴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묘하군. 마치 그림자를 마주하는 듯하군.’

기련노괴쯤 되는 고수들은 기감으로 상대의 수준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황극린은 미묘했다.

약한 것 같기도, 강한 것 같기도 하다.

“자네는 누구지?”

“황극린입니다.”

굳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는 황극린이었다.

기련노괴는 정파와 사파의 중간 지점에 있는 무인이다. 정파인이라는 걸 밝힌다고 딱히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 당연히 그는 사파인들도 배척하지 않았다. 그의 뒤에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뱀을 쓰다듬고 있는 마령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황극린이라… 그렇군. 새로운 용(龍)인가?”

“예.”

새로운 용이라는 말에 가만히 뱀을 쓰다듬던 여인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낸다.

“새로운 용이라면, 설마?”

“용봉지회의 우승자지. 권룡이라고 했던가?”

“호오.”

그녀 또한 용봉지회에 관심이 있었다. 사파와는 달리 정파에선 후기지수를 모아 비무를 펼친다. 거기엔 구파일방이나 육대세가의 후계자들도 참가한다. 보통 우승자는 명문거파라 불리는 곳의 후계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번 용봉지회에선 막 개파한 문파에서 우승자가 나왔다고 하여 화제가 되었다.

돈황은 사파의 권역이었지만, 수많은 정보가 모이는 장소다.

마령도 용봉지회의 우승자의 이름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꽤 화제가 되었다는 것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황극린! 다시 나와 싸우자!”

뒤에서 열심히 점혈을 풀고 있던 거력도마가 외쳤지만, 누구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차라도 한 잔 내어 주고 싶네만, 시간이 있는가?”

“예.”

기련노괴는 사대마제에 버금가는 고수였지만, 위험하진 않았다. 황극린은 살수로 살아가며 그가 죄 없는 이를 해쳤다는 걸 들어 보지 못했다. 돈황에서 그가 싸우는 경우는 단 하나뿐이었다. 자신의 앞에서 피가 튀는 경우. 그는 왜인지 그것을 참지 못한다고 한다.

이번에는 딱히 피가 튀지도 않았으니 문제가 없다.

거기다 기련노괴와 차를 마신다면 마령에 대해서도 은근슬쩍 정보를 얻어 낼 가능성이 있었다. 애초에 그는 마령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광사탑으로 온 것이다. 거력도마 덕분에 자연스레 기련노괴와 대화할 기회를 얻었다.

“올라가지.”

기련노괴가 말을 내뱉으며 다시금 손가락을 튕겼다.

압축된 기운이 거력도마의 급소를 때렸다. 이제까지 고래고래 소리치던 거력도마였지만, 이제는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확실히 대단해.’

한 시대를 풍미하는 절대고수 중 하나.

그를 보고 있자니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기련노괴와 지금의 뇌불이 싸우면… 누가 이길지 궁금하군.’

어쩌면 두 사람은 접점이 있을 수도 있었다.

뇌불은 과거 무림을 헤집어 놓으며 무림공적에 오른 대마두였으며, 기련노괴도 과거엔 사파의 대마두로 통했다. 그가 광사탑을 회색 문파라 천명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물론, 비교 대상은 현재의 뇌불이었다.

만약 전성기를 비교한다면 당연히…….

‘뇌불이 더 강하겠지.’

* * *

황량한 느낌의 방이었다.

사방으로 난 커다란 창이 인상적이었다. 이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돈황 전체를 감시할 수 있으리라.

“자네의 사부가 누군지 물어도 되겠나?”

기련노괴의 질문에 황극린이 찻잔을 내려놓는다.

“사부는 없습니다.”

“없다?”

“예.”

굳이 따지자면 뇌불이 사부였지만, 그 이름을 밝힐 수는 없었다. 이미 그가 무슨 무공을 익혔는지 알고 있는 자들이 있었기에 언젠간 알려질 사실이었지만, 굳이 스스로 밝힐 이유는 없었다.

“홀로 무공을 익혔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대단하군.”

의심이 갔지만 기련노괴는 딱히 따져 묻지 않았다. 어느 무인에게나 비밀은 있는 법이다. 자신도 마찬가지였고, 옆에서 커다란 뱀을 쓰다듬는 여인 마령도 그러했다. 그래도 기련노괴는 호기심이 생겼다.

대체 어떤 무공을 익혀야 저런 기운을 품을 수 있을까?

거력도마의 열기를 감당한 것을 보면 화공계의 무공을 익힌 것 같기도 하지만, 왜인지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왜인지 그에게선 ‘살수’의 느낌이 났다. 그것이 기묘했다. 보통 권법을 쓰는 이들은 이토록 은밀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보통은 거력도마처럼 거센 기운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이런 건 잘 묻지 않네만, 자네를 이리 마주하고 있으니 물을 수밖에 없군. 어떤 무공을 익혔는가?”

“그건 말씀드리기 곤란하군요.”

“그런가.”

기련노괴는 딱히 캐물을 생각까진 없었다.

그가 대답해 주면 좋았고, 대답하지 않으면 그 나름대로 추측을 하는 재미가 있으리라.

“권룡이라 했으니 권법을 익혔겠죠. 제가 한번 맞혀 볼까요?”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마령이 말했다.

왜인지 그녀의 보랏빛 머리가 더욱 진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러시오.”

평소의 황극린이었다면, 그녀의 말을 깔끔히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령이 천흉인지 알아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천흉은 그가 죽여야 할 대상 중 하나였으니까.

“만뇌문이라고 했던가요? 이름으로 유추해 볼 때, 뇌전을 다루는 무공을 익혔을 가능성이 크겠군요.”

그녀는 계속 추리를 해 나갔다.

“사부가 없다고 했으니 아마도 현재는 활동하지 않는 고수의 무공서를 기연으로 얻어 독학했다고 봐야겠죠? 뭐, 그것도 거짓말일 수도 있지만… 그건 그냥 넘어가 드리도록 하죠.”

마령은 즐거운 표정으로 무공의 이름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제가 무공에 관심이 많아서 말이에요. 일단 생각나는 무공을 말씀드리자면… 뇌음신권(雷音神拳), 뇌공권(雷公拳), 벽력신권(霹靂神拳), 뇌천권(雷千拳) 등이 있겠군요. 모두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무인들이었지만 그들의 무공의 후계자가 무림에 나타난 적은 없죠.”

황극린이 마령에 대해 아는 것은 혈마교주의 직계라는 사실뿐이다.

사실 흑살문에서도 잠깐 마주쳤던 것뿐이지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었다. 단지 보랏빛의 머리카락이 인상에 남아 이름을 기억했을 뿐.

마령이 눈을 빛내며 말한다.

“아마 제가 말한 무공 중에 황 공자께서 익히신 무공이 있겠죠?”

황극린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마령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언의 긍정이라 생각했는지 그녀가 입꼬리를 올린다.

“제가 말이죠. 재능 있는 사람들을 좋아하거든요. 인간이 무공으로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느냐를 연구하는 게 제 일이라서요. 뇌전과 관련된 무공을 익혔다면, 그를 뒷받침해 줄 무공서를 그냥 드릴 수도 있는데…….”

그때 기련노괴가 나선다.

“령아, 손님이다.”

마령이 기련노괴에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쉰다.

“광사탑에서 나가서 말해도 되는 거죠?”

“그건 상관하지 않는다. 하나, 광사탑 안에서는 그럴 수 없다.”

“네에. 알겠어요, 할아버지.”

마령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한쪽 눈을 깜빡였다.

마치 광사탑 밖에서 보자는 듯이 말이다.

‘그녀가 심화절에게 마라역천공을 준 것은 확실한 듯하군.’

마라역천공.

그것은 중원의 무학과는 궤를 달리하는 무공이다.

마공(魔功)은 자연의 기운을 단전에 품는 것과는 달리 여러 시도를 한다. 가령 심장이나 머리에 단전을 만드는 시도를 한다거나… 인간의 정기를 흡수하여 단전에 품는다거나 하는 것들이 모두 마공에 속한다.

즉, 사망교가 가지고 있는 소녀환희공이나 흡성대법도 마공의 한 부류였다.

그녀가 천흉일 가능성이 커진다.

그렇기에 황극린의 고뇌도 깊어졌다.

‘사망교의 교주인 천흉을 죽이는 것과 혈마교주의 딸을 죽이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만약 그녀를 죽이려고 한다면, 절대 들키지 말아야 한다.

혈마교는 사흑련 중에서도 가장 강대한 세력을 일구고 있다. 흑살문을 아직 처단하지도 못했는데, 그들과 싸울 수는 없었다. 아직 만뇌문은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렵군.’

그리고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다.

그녀가 천흉인지 아닌지 말이다.

“소저, 물어볼 게 있소.”

“네, 말씀하세요.”

“혹시 안휘성에 갔던 적이 있소?”

“안휘성이요?”

마령이 고개를 갸웃한다.

안휘성이 어딘지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걸 묻는 걸까?

“한번 갔던 적이 있죠. 왜요?”

“아니오. 안휘성에서 소저와 닮은 사람을 본 적이 있는 듯해서 말이오.”

그런데 왜인지 마령의 표정이 차갑게 변한다.

“저랑 닮은 사람을 봤다고요?”

“그렇소.”

“혹시 대화도 나눠 보셨나요?”

“그건 아니오.”

마령은 왠지 심각해진 얼굴로 침묵하기 시작했다. 무공을 이야기할 때는 무언가 쾌활함이 보였지만, 지금은 왜인지 모르게 음산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기련노괴가 그녀를 흘끔 바라보더니 입을 연다.

“아무튼, 자네가 나서 주어 피해가 최소화됐으니 감사를 표하고 싶은데, 혹시 원하는 게 있나?”

기련노괴는 맺고 끊음이 확실한 사람이다.

이대로 황극린을 보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광사탑의 기물들이 상하지 않은 값을 치르긴 하겠지만 황극린과의 연을 이어 가진 않을 생각이다. 그가 흥미로운 무인인 것은 맞지만, 무림에 기인인사는 넘쳐 흐른다.

“금자를 원하면 금자를 주고, 만약 알고 싶은 게 있다면 답해 주도록 하겠네.”

황극린이 잠시 고민한다.

기련노괴라면 어쩌면 북해에 있는 영물이나 영약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 보게.”

“북해에 영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영물이라… 자네의 품속에서 기척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말인가?”

황극린은 그의 말에도 딱히 당황하지 않았다.

기련노괴쯤 되는 고수는 아무리 흑주가 기척을 감췄다고 할지라도 알아챌 수 있는 기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영물들은 내단을 품고 있으니 초고수의 반열에 든 무인에겐 들킬 가능성이 있었다.

“어? 지금 뭐라고 하셨죠? 영물을 가지고 있다고요?”

황극린의 말에 마령이 벌떡 일어선다.

“뭐예요? 어떤 영물이죠? 설마 뱀 영물인가요?”

그녀의 눈동자가 강한 집착으로 번뜩이며 황극린에게 다가와 손을 뻗는다.

황극린은 당연히 그녀에게 흑주를 내어 줄 생각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길을 피해 낸다.

그녀의 손 또한 황극린을 쫓아 물결을 타듯 움직였지만, 황극린의 옷깃에조차 닿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 심통이 났는지 마령이 내공까지 끌어 올리며 손을 뻗는다.

황극린은 무심하게 마령의 손길을 피해 낸다.

움직임이 커졌기 때문일까? 황극린의 두 눈동자를 가리고 있던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흔들려,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 어……?”

가까이서 그의 얼굴을 마주한 마령의 표정이 두 번 바뀌었다.

놀람과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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