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내성
광사탑.
돈황의 중심부에서 약 10리 정도 떨어진 장소에 위치한 5층의 웅장한 탑이다. 이곳에서는 기련노괴가 살아가고 있다. 그는 수많은 마두가 모이는 돈황에서도 독보적인 인물이었지만, 사파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정확히 따지자면 회색에 속한 무인이었다. 황극린도 사흑련의 살수이던 시절 그와 만나 본 경험이 있었다.
‘그 덕분에 무림맹의 추격을 한 번 따돌릴 수 있었지.’
황극린은 창천뇌검을 살해한 죄로 무림맹의 척살대에 추격을 당했었다. 계속 단전의 내공이 흩어지는 와중에 그가 선택할 길은 몇 남지 않았었다. 그대로 당하느냐, 최대한 시간을 끌며 도망치느냐.
후자를 택한 황극린은 기련노괴를 이용하여 그들을 따돌린 적이 있었다.
당연히 꽤 좋은 감정이 남아 있었다. 그 덕분에 시간을 끌고 도주할 수 있었고, 그 ‘영약’을 결국 손에 쥘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련노괴와 싸울 생각은 없었지만, 황극린은 마령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광사탑으로 향했다.
‘마령이라.’
혈마교주 혈황마제(血皇魔帝).
뇌불과 비슷한 나이로 ‘마제’라는 호를 받은 만큼 실력은 확실하다. 사흑련의 한 축을 담당하는 혈마교의 교주이니만큼 실력을 의심하는 게 이상하다. 그리고 그는 수많은 자식을 두고 있었는데, 마령 또한 그중 하나다.
황극린은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흑살문에서 한창 임무를 수행할 당시에 그녀가 흑살문에 찾아왔었다. 당시 황극린이 막 하급 살수가 되었을 때니까…….
‘시기상 흑살문에 방문할 때군.’
사실 마령이라는 존재는 황극린에게 딱히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와 마주한 적은 있지만, 딱히 인연도 없었을뿐더러 황극린의 살수 생활에서도 그녀가 미친 영향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었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천흉과 관계가 있다면, 황극린은 그녀를 만나 보아야 한다.
광사탑이 보인다.
화려하진 않지만 웅장함이 엿보이는 높이였다. 가장 높은 층에 기련노괴가 머물고 있으며, 그는 항시 돈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란이 생기면 가장 먼저 찾아가기 위함이라나? 대체 왜 돈황의 평화를 위해서 살고 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고 한다.
몇몇 소문은 있긴 했다.
돈황에서 나고 자란 기련노괴가 싸움에 휘말려 부모님을 잃었다거나 소중한 가족을 잃었다는 소문이 있긴 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소?”
“기도를 올리기 위해 찾아왔소.”
광사탑의 앞에는 일정 수준의 관광객이 있었다.
돈황에서 이질적인 존재인 기련노괴의 존재 때문일까? 광사탑은 일종의 종교적인 역할을 했다.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관광객은 위험을 무릅쓰고 돈황을 방문한다. 물론, 기련노괴가 있는 이상 광사탑은 확실히 안전한 장소라고 말할 수 있다.
“들어가시오.”
딱히 별로 캐묻지도 않는 광사탑의 문지기였다.
황극린은 광사탑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둘러보았다. 은근히 불가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확실히 느낌은 다르다. 중앙에는 자의적으로 공물을 바치도록 커다란 철궤가 떡하니 있었다. 몇몇 관광객은 그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돈을 넣거나 물건을 넣기도 했다.
‘신기하긴 하군.’
중원에서는 불가와 도가가 주를 이루어 세력을 형성했다.
하지만 살막의 흑살문에서 살아왔던 황극린은 그보다 많은 종류의 종교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광사탑도 일종의 종교로 볼 수 있었다. 공물을 바치고 기도하여 마음의 안식을 얻는 종교였다.
기련노괴쯤 되니 이렇듯 알아서 찾아오는 이들도 있다.
황극린은 철궤 앞으로 다가간다.
그 뒤로는 마치 뱀처럼 생긴 용, 이무기의 조각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무기라…….’
용(龍)이 아니라 이무기를 숭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득 궁금함이 일었고, 그 궁금증이 곁가지를 뻗어 나아간다.
‘이무기라는 게 정말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황극린은 영물인 흑주의 발전을 지켜보았다. 흑주는 인간처럼 ‘내력’을 활용할 수 있는 단계가 되었다. 아마 흑주는 인면지주 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존재가 아닐까 싶었다. 애초에 인간과 소통하는 영물이 몇이나 될까? 흑주와 황극린은 소통하며 조금씩 ‘싸우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황극린은 인면지주를 위한 보법을 만들고 내공심법을 만들어 보고 있었다. 영물에게 무공을 익히게 하려는 것이다. 흑주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마치 무공을 배우는 인간처럼 말이다.
황극린의 입장에선 흑주가 매우 신기했다.
인간과 소통하는 것도 그렇고, 내력을 다루는 영물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지 못했었다.
‘물론, 영물들 입장에선 무공을 익히는 인간이 신기할 수도 있겠지.’
영물뿐 아니라 과거 자연을 지배했던 맹수들에게 인간은 허약한 사냥감에 불과했으리라. 하지만 인간이 무기를 들고 무공을 익히면서 호랑이나 곰 따위는 인간의 사냥감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그렇기에 황극린은 이무기의 조각상을 보며 생각했다.
‘실존했으면 좋겠군.’
이런 놈이 진짜 있다면…….
황극린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녀석의 내단을 취하면 몸에 어떤 변화가 찾아올까? 생각만으로도 짜릿한 기분이었지만, 이런 종류의 영물은 발견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아마 황극린이 사냥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황극린이 그렇게 조각상을 바라보고 있을 때.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난 거력도마(巨力刀魔)다! 기련노괴야, 썩 나오너라!”
40대 중반의 무림인. 피부의 색이 까무잡잡한 것을 보았을 때, 남쪽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그는 돈황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지 않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네놈이 그렇게 강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돈황에서 기련노괴의 소문을 알고 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자신을 거력도마라 칭한 무인은 그런 소문보다 자신의 실력을 더 믿는 듯하다.
황극린은 기회를 포착했다.
광사탑의 1층은 관광객들의 방문이 허용된다. 하지만 2층부터는 다르다. 광사탑과 직접적인 연이 있지 않으면 올라갈 수 없었다.
‘괜찮은 제물이로군.’
솔직히 광사탑에 오를 방법이 있어서 찾아온 건 아니었다. 황극린은 뛰어난 후각으로 냄새를 찾으려 했을 뿐이다. 그런데 마침 미친놈 하나가 등장했다. 기련노괴의 관심을 끌 만한 존재였다.
황극린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의 앞으로 향했다.
“얼른 나와라! 나 거력도마가 기다리고… 응? 네놈은 무어냐?”
황극린은 그의 실력이 상당하다는 걸 깨달았다. 황극린은 화산파의 자하신단을 취한 뒤로 더욱 감각이 예민해졌는데, 단순히 정파의 무공을 익혔느냐 사파의 무공을 익혔느냐에 그치지 않고 냄새로 내공이 얼마나 진한지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최소한 초절정에 올라와 있다.
그런 실력이 있으니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소리쳤을 테지만, 황극린은 광사탑의 무인들보다 먼저 거력도마의 앞에 섰다.
“이곳에선 소란을 피울 수 없소.”
“뭐야? 네가 기련노괴냐? 아니지. 너처럼 어린놈이 노괴일 리가 없지.”
거력도마의 기세가 거칠게 변해 간다.
“난 강자랑 싸우고 싶어 여기까지 찾아왔을 뿐이다! 사대마제 놈들은 어딘지도 모를 곳에 숨어 있으니 그나마 만나기 쉬운 기련노괴를 찾아왔다!”
“그렇군. 그럼 나랑 겨뤄 보는 게 어떻소?”
“흥, 애송이엔 관심이…….”
순간 황극린의 신형이 흐려졌다.
찰나의 순간 거력도마가 흠칫 몸을 떨더니 거대한 도를 꺼내 휘둘렀다.
“이놈 보게?”
거력도마는 확실히 광사탑에서 소리칠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도법은 마치 팽가의 그것처럼 위력적이었으며… 또한, 강렬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광사탑 내부의 공기가 후끈해지고 있다. 광사탑의 호위들이 달려왔지만, 그 열기에 가까이 다가오지 못한다.
‘이제 누군지 알겠군.’
처음에 황극린은 거력도마가 누군지 알아채지 못했었다.
단순히 겁 없이 기련노괴에게 싸움을 걸다 사라질 비운의 고수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도법을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는 아주 유명한 무인이다.
십대마군(十大魔君).
사대마제보다는 못하지만, 일정 수준에 오른 사파의 고수들을 묶어 놓은 별호. 아마 흑사회의 회주도 현재 십대마군에 속하고 있으리라. 현재의 거력도마는 아직 유명해지기 전이라 마군의 별호까지는 얻지 못했을 테지만, 조만간 십대마군에 속할 수 있으리라.
다른 마군을 죽여서 말이다.
당연히 그는 여기서 죽을 인물이 아니다. 황극린이 알기로 그는…….
‘화도마군(火刀魔君) 사국천. 그는 광사탑주의 수하로 알려져 있었지.’
알려져 있었다고 생각한 건 황극린이 소문으로만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넌?”
거력도마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열기를 내뿜는다.
거대한 도는 열기를 전달하기에 안성맞춤인 병기였다.
“어떻게 화령강(火靈强)에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지?”
거력도마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한다.
보통 자신의 타오르는 도를 마주하면 기겁하고 도망치곤 한다. 하지만 눈앞의 젊은 놈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마치 자신이 내뿜는 열기가 아무렇지 않은 듯이 태연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딱히 뜨겁지 않아서.”
“뭐? 크흐, 신기한 놈이로군. 광사탑주를 만나러 왔는데 이런 신기한 놈이 있을 줄이야. 그럼 어디 이것도 버티는지 볼까?”
콰아아아-!
그의 도에서 시뻘건 불길이 솟구치고 있었다. 단순히 열기를 띠는 것을 넘어서 화염을 만들어 낸다. 검강이었다. 그는 초절정 고수 중에서도 상위급에 오른 고수라 할 수 있었다.
“자아, 이것도 막아 내 봐라!”
화룡열토(火龍熱土).
거대한 도를 휘두르자 사방으로 불꽃이 터져 나간다. 소란을 피우는 그를 제압하러 왔던 광사탑의 무인들이 화들짝 놀라며 도망친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 열기는 피해야만 한다. 막아 낼 성질의 무공이 아니다. 사실 도법이라 하기엔 애매하고, 그것은 마치 하나의 주술(呪術)과도 같았다.
콰라라라랏-!
광사탑의 1층이 후끈 달아오른다. 이대로 가다간 조각상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황극린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꽃을 피하기는커녕 그곳으로 손을 뻗을 뿐이었다.
“으하핫핫핫! 어떠냐! 화룡열토는 강철마저 녹여 버리는 최강의 무공이다!”
하지만 거력도마는 이내 얼굴을 굳혔다.
젊은 놈이 이 공격에 바로 죽지 않을 것이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뭐냐, 네놈?”
황극린은 그의 열기에는 전혀 영향이 없는 듯 태평하게 있을 뿐이다.
“뭐냐고!”
더 놀라운 점은 머리카락이 하나도 타지 않았다는 점이다. 거력도마는 자신의 타오르는 불길로 상대를 민머리로 만드는 것을 즐겼는데, 싸우다가 보면 대부분 반들반들한 머리를 드러내며 치욕의 감정을 드러낸다.
반탄지기를 육신에 두르는 건 쉬웠지만, 머리카락은 다르다.
애초에 세맥이 통하는 부위가 아니었으니까. 넓게 기막(氣幕)을 펼친다면 막아 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내공의 낭비였다. 거력도마가 펼치는 화령강은 파괴력으로는 어떤 무공에도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놈은 기막을 펼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거력도마는 본능적으로 젊은 놈이 열기에 내성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당연히 그의 자존심이 구겨진다.
자신의 화령강은 누구도 막아 낼 수 없어야 한다.
“이노오오옴!”
그는 다시금 단전 깊숙한 곳에서 거대한 기운을 끌어냈다. 조금 더 많은 내력을 담으면 아무리 내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버텨 낼 수 없을 것이다. 그 여파로 광사탑의 1층 대부분이 녹아내릴 것이다. 아마 광사탑의 귀물인 조각상 또한 그러하리라.
“이것도 어디 한번 막아 보아라!”
그렇게 거력도마가 다시금 도를 휘두르고, 도의 궤적에 따라 불꽃이 터져 나온다. 확실히 거력도마가 십대마군으로 불리게 되는 이유를 직감할 수 있었다. 그의 무공은 지독히도 파괴적이었으며, 내력은 천하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많았다.
“어떠냐!”
이번에는 황극린이 당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착각했다.
“따뜻하군.”
“뭐? 따뜻? 지금 따뜻하다고 한 거냐?”
“그것으로는 날 이길 수 없소.”
황극린은 지금 ‘감탄’하고 있었다. 열기에 내성이 생겼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그도 모르고 있었다. 화도마군이 전력을 다한 듯한 공격을 적은 내공만 쓰고도 막아냈다.
약간의 반탄지기를 두르기만 해도 그의 공격을 원천 봉쇄 할 수 있었다. 애초에 대결이 성립되지 않는다. 거력도마가 그를 이기려면 도법으로 승부를 보아야 하는데…….
“어느 틈에!”
보법은 황극린이 한 수… 아니, 두 수 위였다.
거력도마의 뒤를 점한 황극린이 말한다.
“이놈! 설마 화룡의 현신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설마!”
화룡의 현신이라는 게 뭔지 몰랐지만, 아마 그의 무공과 관련되어 있다고 유추할 수 있었다.
“내 화염을 막을 자는 화룡의 현신뿐이다! 네놈은 화룡의 현신이 분명…….”
그때였다.
광사탑의 입구에서 음울하면서도 거대한 기운이 터져 나온다. 황극린과 거력도마가 싸움 중에도 그곳으로 시선을 돌릴 만큼 강렬한 기파였다.
“뭐야?”
“당신이 찾던 광사탑주요.”
“그래? 그딴 건 관심 없다.”
“…….”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련노괴를 찾던 놈이 말을 바꾼다.
“난 네놈만 있으면 된다. 내가 너를 태워 버리면 최강의 화염을 가졌다고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자, 이것도 받아 보아라!”
하지만 이제 황극린은 싸울 생각이 없었다.
기련노괴가 있는 걸 알면서도 싸우는 건 자살행위다.
“그만하지. 주인이 왔으니 예를 갖춰야지.”
“어딜 도망치려고!”
그때 기련노괴가 손가락을 튕긴다.
“억!”
탄지공.
정확히 급소를 맞은 거력도마의 몸이 휘청인다. 그의 얼굴에 분노가 깃들었지만, 몸을 움직이진 못하고 있었다.
‘기공으로 점혈을 했다. 물론, 거력도마라면 금방 풀 수 있겠지만…….’
황극린이 기련노괴에게로 시선을 향한다.
상성으로 거력도마를 압도하던 황극린이었지만, 그의 실력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를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것으로 제압했다. 수준 차이가 극심하다.
“광사탑에서 싸운 벌을 받아야겠구나.”
기련노괴가 중얼거리며 황극린과 거력도마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뒤에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머, 할아버지가 화가 났나 봐. 그렇지, 비비?”
머리를 보라색으로 물들인 한 여인.
아니, 애초부터 보라색의 머리카락을 가졌을지도 몰랐다.
그녀의 목에는 사람 팔뚝만 한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마령이로군.’
그리고 그녀에게선 낙혼향의 냄새가 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목에 휘감긴 뱀에서 나는 냄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