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일석삼조
일단 확실한 건 하나다.
무림맹에서 청해성 서녕지부는 확실히 썩은 곳이 많았다. 귀도방도들의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정파의 무공을 익히지 않고, 사파의 무공을 익혔다. 또한, 행동거지를 보아도 정파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암영대의 2조장 안백리는 그들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홀로 독단적으로 그들을 비호할 수 있었을까? 아니다. 당연히 지부장의 암묵적인 허가가 떨어졌을 것이다.
지부의 안전을 도모한다거나 하는 핑계가 있었겠지.
또한, 귀도방을 대충 정파 문파로 취급하여 뒷말이 나오지 않게 처리했으리라. 본성에서 대대적인 감사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쉬이 파악할 수 없는 문제다. 거기다 귀도방이 이처럼 무림맹 지부에 대놓고 찾아오는 경우는 잘 없었으리라. 그들의 간부가 황극린에게 붙잡힌 것이 문제였다.
그렇기에 안백리는 결국 파면의 위기에 처했다.
또한 뇌옥에 투옥되게 되었는데… 황극린은 제대로 처벌이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었다.
그는 아마 투옥되지 않고, 무림맹 지부를 탈출할 것이다.
지부에선 그를 추적하라는 명이 ‘조용히’ 내려질 것이다.
그의 예상은 맞아들어 갔다.
어두운 밤.
복면을 쓴 사내가 담장을 넘는다. 그의 냄새는 확실히 기억해 두었다. 2조장 안백리였다.
스으으…….
그리고 그 뒤를 기척을 감춘 황극린이 따른다.
일단 여기까지는 예상이 맞았다.
안백리는 탈출을 감행했다. 지부장의 허락이 있었으리라. 황극린의 다음 예상은 그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복직은 힘들 수도 있겠지만, 안백리 같은 성정을 가진 놈이 할 행동은 하나다.
복수.
아니, 무림인이라면 당한 것에 대한 복수는 꼭 갚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강호에서 복수는 강력한 원동력이 된다. 거기다 안백리와 같은 사람은 그런 성격이 더욱 도드라진다. 은혜는 갚지 못해도 원수는 갚을 사내였다.
‘천흉은 알게 모르게 청해성의 사파 조직과 연이 있을 거다.’
운이 정말 좋다면, 천흉에게로 찾아갈 수도 있으리라.
아마 그렇게까지 운이 좋진 않을 테지만…….
황극린은 은밀하게 안백리의 뒤를 밟았다.
복수심으로 인해 뜨거운 콧김을 마구 내뿜으며 급히 달려가는 안백리였다.
* * *
“제기랄! 감히 이 안백리를 건드렸겠다! 등위군! 황극린!”
욕설이 절로 튀어나온다.
복수는 자신이 직접 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의 실력으로는 황극린을 꺾을 수 없으리라. 귀세춘과의 비무를 보며 확신했다. 그는 언젠가 천하칠대고수의 반열에 들 수준의 고수였다. 용봉지회의 우승자라고 하여 다 같은 급은 아니다. 황극린은 우승자 중에서도 재능으로는 최상위의 반열에 들리라.
그런 놈의 미래를 꺾어 버려야 한다.
화려하게 인생을 살아가기 전에 여기서 죽여 버리면 놈은 얼마나 억울할까?
아니, 그것보다 더 고통받아야 한다.
그래야지만 이 울분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감히 날 건드린 것을 후회하게 해 주마.’
무림에선 혼자 강하다고 되는 게 아니다. 물론, 천하칠대고수급으로 강하다면 또 모른다. 그들을 잡으려면 초절정에 이른 고수가 열 명은 달라붙어야 하니까. 하지만 무림에 고수는 많았다. 잘난 맛에 살아가다 보면 적을 만들기 마련이고, 어떤 고수라도 행동의 대가를 치른다.
황극린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아직은 후기지수다.
무공은 강할지 몰라도, 강호에서의 경험은 부족하리라.
그런 놈을 상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조용히 ‘어둠’ 속으로 향한다. 서녕 중심가에서도 중심부에 위치한 거대 기루 무천루. 그 지하엔 새로운 세상이 있다.
“손님, 예약을 하셨습니까?”
문지기가 예의 바르게 묻는다.
안백리가 조용히 대답한다.
“하얀색의 술을 마시고 싶어서 왔소.”
“예, 안내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무천루에 위치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밟는 누군가의 눈빛이 붉은빛의 광채로 번뜩인다.
‘여긴…….’
* * *
“천하의 암영대 2조장께서 무슨 일로 찾아 주셨을까나?”
호리호리한 체형의 20대 중반처럼 보이는 사내가 말한다. 얼굴은 곱상하여 무림인처럼 생기지 않았고, 꼭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다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이리라. 예쁘장한 얼굴처럼 기다란 손가락도 눈에 띄는 사내였다.
“부탁할 일이 있소.”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젊은 사내가 흥미롭다는 듯이 기다란 손가락을 까닥인다.
“죽여야 할 사람이 있소.”
“안 조장님을 화나게 한 사람이 있는 모양이로군요.”
“만뇌문의 황극린.”
“아아아!”
젊은 사내는 이미 소문을 들었다.
누군가 귀도방의 귀세춘을 처리했다는 소문을 말이다. 지부에서 비밀스럽게 처리해서 정확한 것은 아니었지만, 안백리의 태도를 보아하니 사실인 듯하다.
“그런데 만뇌문의 황극린이라면… 제가 아는 그 사람이 맞습니까?”
“권룡 황극린. 28대 용봉지회의 우승자요.”
“호오.”
젊은 사내의 태도가 바뀐다.
“재밌는 상대로군요.”
“놈을 처리하면 금자 오백 냥과 귀도방의 사업체 3할을…….”
젊은 사내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지요. 셈이 맞지 않아요.”
“…….”
“귀세춘을 죽일 정도라면 상당한 고수라는 건데… 아마 무림에 퍼진 소문보다 더 강하겠지요. 그런데 고작 금자 오백 냥과 귀도방의 사업체 3할은 부족하답니다.”
능구렁이 같은 표정에 당장이라도 일갈하고 싶었지만, 안백리는 꾸역꾸역 화를 참아 냈다.
지금은 그가 을이었다.
“얼마를 원하는 것이오?”
“금자는 됐습니다.”
“그럼…….”
“이제 뿔뿔이 흩어질 귀도방의 무인들을 우리가 흡수할 수 있게 해 주시지요.”
“그건…….”
“지부장님의 권한이라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사내는 안백리와 지부장이 연관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제대로 권한을 행사한다면, 귀도방도 전체가 흡수되는 것도 도울 수가 있다.
“저희가 귀도방이 바치던 것보다 더 많이 바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지부장께 여쭤봐야 하오.”
“이미 지부장께서는 안 대협이 이곳으로 올 줄 알고 계셨을 겁니다. 그분이 워낙 욕심이 많으시잖아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민하던 안백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어차피 귀도방의 공백은 채워야 하고, 다른 문파보단 이곳이 그나마 일 처리가 확실하다.
“좋소. 그렇다면 내가 귀도방의 새로운 방주가 되어…….”
“크크큿… 크하하하……!”
안백리의 말에 젊은 사내가 광기 어린 미소를 짓는다.
“왜 웃지……?”
“죄송해요. 정파나 사파나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이 되어서 말입니다. 크큿.”
“…귀도방은 정파 문파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죠. 안 방주께서 귀도방을 이끌어 주십시오. 당연히 저희의 명을 따라 주셔야 할 것은 알고 계시지요?”
“그리하겠소.”
아마 두 사람은 이제부터 꽤 많은 신경전을 벌일 것이다.
누가 더 많이 뺏기고, 희생하느냐. 능력의 싸움이 될 것이다. 안백리는 자신이 있었다. 이제까지 그래 왔던 대로 약한 이를 짓밟고 위로 올라가면 그만이었다.
“참, 황극린이라는 자의 무공 수위는 어느 정도인가요? 직접 보셨지 않습니까?”
“천하백대고수의 상위급.”
“상위급이라……. 하기야 귀세춘이 패배했다면 그럴 것 같군요. 솔직히 저희가 손해 보는 장사입니다. 용봉지회의 우승자를 처리하는 일은 그리 쉬운 게 아니거든요.”
벌써 자신이 할 일을 부풀리는 사내였다.
안백리가 그의 말에 반박한다.
“그가 먹는 음식에 독만 타면 되는 일 아니오?”
“어머, 그게 쉬우면 직접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
암영대 조장의 직위를 잃은 그에게 그러할 권한은 없다.
그리고 지부장 또한 직접 그를 도와주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곳을 찾아왔다.
‘흑사회만이 놈을 처리할 수 있다.’
인신매매나 하는 흑도 단체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흑사회의 규모는 상상 이상으로 크다. 그들은 최근 하오문의 세력을 집어삼키며 더욱 거대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막지 못한다면 아마 거대 사파 문파의 출현이 예상된다. 당연히 안백리에게 그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내가 말실수했군. 미안하오.”
“호호, 아닙니다. 사과해 주시니 마음에 담아 놓지 않겠습니다. 역시 안 대협은 대화가 잘… 응?”
갑자기 사내가 눈을 끔뻑끔뻑 뜬다.
길쭉한 콧망울이 벌렁거린다.
“킁킁. 이거,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무슨 냄새 말이오?”
“피 냄새가…….”
젊은 사내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피 냄새가 난다는 말이오? 아무런 냄새도…….”
젊은 사내.
그는 젊어 보였지만 흑사회의 10대 간부 중 하나였다. 젊은 외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40대에 가까운 나이다. 무공 수위 또한 대단히 높았다. 특히나 그의 후각은 평범한 이들을 아득히 초월한다.
물론, 초감각의 경지에 올라 있는 누군가보단 못하지만 말이다.
“꼬리를 달고 오셨군요.”
살의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일어서는 사내.
옥면가람(玉面伽藍) 심화절.
“꼬리라니 그게 무슨…….”
방 구석에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나타난다.
“네, 네놈이 어찌 여기에……?”
“잘됐군. 흑사회의 지부가 여기에 있을진 몰랐는데 말이야.”
“……!”
어떻게 흑사회라는 것까지 파악하고 있단 말인가?
이곳은 비밀스레 운영되는 흑사회의 지부였다. 외부적으로는 하오문의 지부라고만 알려져 있었다.
“일단 두 사람은 살려 주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다.”
“어머, 목소리가 참 매력적이시네요. 살려 두고 진한 대화라도 나누고 싶지만…….”
심화절의 입꼬리가 쭈욱 올라간다. 하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본 회의 소중한 인재를 죽인 이와 대화나 나누고 있을 수는 없겠죠.”
심화절이 소매 속에서 작은 구슬을 꺼내 깨트려 버린다.
신속한 움직임이다.
“쿨럭……! 이게 무슨……!”
옆에 있던 안백리가 가장 먼저 봉변을 당했다. 밀폐된 공간에서 구슬 안의 연기가 자옥히 맺히니 숨이 턱턱 막혀 온다. 그리고 동시에…….
‘내, 내공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심화절이 말한다.
“안 조장님께서는 구경만 하시지요. 내공을 잃어버린 무인이 얼마나 추악하게 변할 수 있는지 지켜보는 것도 참 재밌을 거랍니다.”
찡긋.
그런데 심화절은 방 안을 가득 메운 연기에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는 것처럼 여유로이 움직였다.
“이곳에 찾아온 것은 하책 중 하책이랍니다, 권룡 황극린 소협.”
그가 붉은 윗입술을 핥는다.
어떻게 요리할까?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를 때까지 고문할까? 참 재밌을 것 같았다.
‘용봉지회의 우승자를 내 손으로 만지는 날이 올 줄이야.’
안백리가 뒤로 물러서며 외친다.
“조심하시오! 놈은 귀세춘도 순식간에 제압한 고수요!”
“낙혼향(落魂香)은 천하칠대고수라도 쉬이 막아 낼 수 없는 극상의 독이랍니다.”
“이, 이게 낙혼향이라고? 잠시만, 그러면 나는 어쩌란 말이오?”
“황극린을 처리하고 해독제를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찌… 쿨럭! 쿨럭……!”
이미 바닥에 쓰러져 죽을 것처럼 기침하는 안백리였다.
심화절은 재밌다는 듯이 그걸 바라보고 있었다.
“저요? 제가 익힌 무공이 조금 특별해서 말입니다. 특정한 독에는 전혀 타격을 받지 않는… 응? 뭐지?”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히 황극린 또한 저렇게 바닥에 뒹굴어야 정상이다. 내공으로 독 기운을 몰아냈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태평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여기는 사방이 뻥 뚫린 공간도 아니다. 낙혼향이 방 안을 가득 메워 자신도 숨 쉬기가 조금 거북할 정도였다.
그런데 왜…….
“이건 나도 처음 보는 독이로군. 산공독의 일종인가?”
“산공독과 비슷하긴 하지만 이건 금자 천 냥을 주고도 구매하지 못하는… 잠시만요. 황극린 소협? 왜 아무렇지 않게 서 계신 거죠?”
심화절은 황극린이 연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낙혼향에 이리도 멀쩡한 사람이 있을 수가 없다. 미리 잇몸에 박아 두었던 해독단까지 복용한 자신도 이리도 숨이 차는데 말이다.
‘지금쯤 내력은 움직일 수 없을 거야.’
무림인이란 다 비슷하다.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면, 그저 그런 인간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만다.
“후후후, 아닌 척해 보았자 소용없답니다. 이미 독이 세맥 곳곳에 침투하여 단전에까지 미쳤겠지요? 단전이 돌덩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은 어떠십니까?”
“…….”
“무림인이란 참 웃기지요. 내공 하나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말이에요. 낙혼향은 그 빈틈을 파고드는 최고의 독. 중독되지 않으려면 오히려 내력을 가라앉히는 게 더 좋다는 걸 모르고 내공으로 독을 누르려 한답니다. 당신처럼 말이에요.”
심화절이 다가온다.
내공을 사용할 수 있는 고수와 내공을 사용할 수 없는 고수.
수준 차이는 명확하다.
그가 귀세춘을 이겼다고 하더라도… 그건 정상인 상태가 아닌가?
심화절은 귀세춘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고수다. 물론, 전투 경험이 귀세춘보다 떨어지긴 하겠지만 그러한 차이는 낙혼향으로 모두 극복이 가능하다.
‘어린아이와 어른의 싸움이라 할 수 있지. 후후후훗!’
심화절이 느늣하게 다가가 손을 뻗는다.
어떻게 하면 황극린에게 더한 고통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말이다.
“낙혼향이라는 거, 더 가지고 있나?”
“응? 후후후, 세 개는 더 있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혹시 몰라 하나 더 터트려 놓았으니까. 당신은 이걸 극복할 수… 으응……?”
황극린의 기척이 사라졌다.
뭐지?
퍼억!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복부에 꽂히는 권격.
그의 주먹에는 뇌전이 담겨 있었다.
“이거 영물에서 뽑아내서 만든 독 맞지?”
“꾸에에엑……! 대, 대체… 어떻게……!”
한 대 맞았을 뿐인데,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속에 있는 것을 모두 게워 냈다.
이처럼 강한 주먹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가 뭐라고 했지?
“일석삼조인가.”
“당신, 무슨 소리를…….”
황극린이 입꼬리가 올라갔다.
“꽤 재밌는 독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