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의도대로
“미, 미친 것이오! 귀도방주를 이대로 죽게 할 셈이오……!”
2조장 안백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황극린이 이토록 강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용봉지회 우승자 출신들은 확실히 무언가 다르다는 걸 대충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귀도방주와 비무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건가?
강호에서 수십 년 동안 굴러먹던 노회한 고수가 저리도 쉽게 패배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거기다 더 놀라운 점은…….
‘작정하고 귀도방주를 죽이려는 거다. 심지어 나까지 죽일 생각을 하고 있어…….’
거친 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새하얗게 질린 귀도방주 귀세춘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나설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귀세춘이 죽으면 당연히 안백리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이번에 예정된 발령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발령이 문제랴? 지금 당장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권룡 황극린은 자신마저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감당할 자신이 있다는 걸까?
“대체 어쩌려고……!”
“서로의 목을 건 생사결이었지 않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비겁하게 독으로 상대를……!”
황극린이 한쪽 입꼬리를 올린다.
“사천당문이 그 말을 듣는다면 참으로 좋아하겠군.”
“…….”
친선비무에서 독까지 사용해서 상대를 죽였다면 문제가 된다.
하지만 황극린은 전혀 거리낄 게 없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귀세춘을 죽이려고 목을 걸고 비무에 나선 것이다. 독? 그것도 활용할 수 있는 무기 중 하나일 뿐이었다.
‘비수에 발라 놓은 흑주의 독이 주효했군.’
인면지주 흑주.
녀석의 독은 황극린의 예상보다 훨씬 강력하다. 귀도방주 귀세춘은 정파에서 말하는 천하백대 수준의 고수였다. 그런데 단 한 번 흑주의 독에 스친 것에 불과한데도 저런 상태가 되었다. 물론, 황극린이 최대한 심장에 가까운 곳을 찔러 독을 주입했기에 빠르게 퍼진 탓도 있으리라.
황극린은 독을 사용한 것에 부끄럽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생각하는 무력이란 순수한 힘 따위가 아니다.
강호에서 패배한 이들이 ‘비겁하게 사술을 사용하다니’라고 말할 때가 있다. 자신에게 이해되지 않은 힘은 사술로 취급하기도 한다. 정정당당히 정면으로 싸웠다면 자신이 승리할 수도 있었다? 뭐 그런 변명은 강호에서 통하지 않는다. 결국,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것이고 살아남는 이가 강한 것이다.
그게 무림이다.
독도 마찬가지다. 강호인들은 독을 비겁하다고 생각하지만, 황극린은 그것도 실력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비겁하게 독을 썼다는 안백리에 말에 딱히 화가 나지도 않았다.
“등 조장! 어떻게 좀 말려 주시오! 응? 이러다가 귀세춘이 죽겠소!”
안백리가 이제는 목표를 변경했다.
황극린은 말을 섞으면 말리는 느낌이 든다. 자신이 상대할 것은 구워삶기 좋은 4조장 등위군이다. 그는 정파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무인이다. 거기다 머리가 나빠 매번 이용당하곤 한다. 이번 인사 발령에서도 그가 본성은커녕 암영대 4조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등위군의 눈빛은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저놈은 여기서 죽어야 하오.”
“뭣……? 지금 제정신이오? 귀도방은 청해성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문파요!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그러시오? 방주의 복수라도 하겠다면 어쩌시겠소? 그리고 서녕지부장께서 이 일을 가만히 두고 보시겠소? 등 조장 당신은 한 번 더 찍히면 이제 진급은 물 건너간 거라고!”
“진급? 그게 무슨 상관이오?”
등위군은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고민을 했다.
이대로 황극린이 안백리에게 당하는 걸 지켜보아야 하는가?
귀세춘과 황극린의 비무를 지켜보아야 하는가?
그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무림에 발을 들여 놓은 후기지수가 위험한 길로 빠지는 걸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다.
그런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자신이 무림맹에 들어온 이유는 무엇인가? 의(義)를 행하고 협(俠)을 받들기 위해서다. 그런데 오늘 자신의 모습은 어떤가? 후기지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뒷짐만 지고 있지 않았던가? 그게 자신이 생각하던 의협일까? 아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때부터라도 바뀌어야 하지 않겠는가?
평생 이렇게 살 순 없었다.
“진급 따위는 관심 없소. 이번 일은 처음부터 나와 관련이 있었으니 내가 감당하겠소.”
“당신이 어떻게 감당하려고? 절대 감당하지 못해!”
“나 또한 목숨을 걸고 감당하겠소.”
황극린이 목숨을 걸고 귀세춘과 생사결을 했듯.
자신도 그리할 것이다.
“미친놈!”
결의에 찬 등위군의 말을 듣던 안백리의 입에서 결국 욕설이 터져 나왔다. 모두 다 미친놈이었다. 귀도방의 방주를 중독시켜 죽이려는 놈이나 그걸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나서는 놈이나 다 똑같이 미쳐 있다.
‘안 된다. 이대로 가면 다 끝장이다.’
감히 귀세춘을 이긴 황극린과 싸울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지금은 물러서야 할 때이다.
안백리가 비무장을 떠나가려 한다.
등위군이 그것을 막아 세우려 했지만, 황극린이 만류했다.
“괜찮소.”
“예?”
“그가 가서 할 수 있는 건 없소. 어차피 돌아올 때쯤이면 귀세춘은 죽어 있을 테니.”
귀세춘이 몸을 파르르 떤다.
“내, 내가 죽는다고……? 헛소리……! 헛소리 마라! 나, 난… 난 죽지 않는다아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선 귀세춘이다.
그의 눈동자엔 독기가 서려 있었다. 흑주의 독은 실시간으로 그의 육신을 좀먹고 있었지만, 그는 일어섰다. 내공으로 겨우 독기를 억누르고 있었다.
“죽는 건 네놈이다. 내가 네놈을 기필코… 죽일 것이다!”
“황 소협!”
등위군이 깜짝 놀란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경련하고 있던 귀도방주가 별안간 황극린에게 쇄도했다. 그의 손톱에는 거무튀튀한 기운이 일렁거리고 있었는데, 몹시 위험해 보였다. 지금 황극린이 방심하다가 그에게 당하면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등위군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최상의 상태일 때에도 귀세춘의 공격은 황극린에게 닿지 못했다. 동귀어진의 수를 쓴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 간에는 절대적인 격차가 존재한다.
빠각!
황극린의 주먹이 귀세춘의 안면에 꽂혔다.
바위가 갈라지고 부서지는 둔탁한 소리가 퍼져 나간다.
“……!”
비무장 위로 아름답게 비산하는 피와 뇌수.
주먹 한 방에 귀도방주 귀세춘 머리통을 터트려 버렸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소?”
황극린의 시선이 비무장을 벗어나던 2조장 안백리에게로 향한다.
“이미 죽어 버렸는데.”
“……!”
안백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중독됐다고 하더라도 죽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황극린은 보란 듯이 그의 머리통을 잔인하게 깨트려 버렸다. 그의 행동은 정파 후기지수의 그것이 아니었다.
‘마귀… 아니, 이놈은 혈귀다…….’
진득하고 뜨거운 피가 뚝뚝 떨어지는 황극린의 주먹을 보고, 안백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당연히 서녕지부는 발칵 뒤집혔다.
성의 가장 높은 곳에서 유유자적 여유를 만끽하던 지부장이 튀어나왔으며, 지부의 간부들도 모두 소집됐다. 서녕지부에서 귀도방의 위세를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지부 내에서 귀도방의 방주가 죽었다.
“안 조장!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한 것이오!”
지부의 간부들이 빙 둘러앉아 있었고, 그 중심에는 2조장 안백리와 4조장 등위군이 있었다.
“귀세춘과 권룡이 비무하려 했다면 막았어야지! 그걸 허락했소!”
으드득.
평소엔 자신의 눈치만 살피던 놈들이 윽박을 질러 대고 있으니 안백리의 표정이 볼만했다.
“제가 귀세춘이 죽을 줄 알았겠습니까? 권룡이 그토록 잔학무도할 줄 누가 알았겠…….”
등위군이 안백리의 말을 자른다.
“권룡은 제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줬을 뿐입니다.”
“등 조장, 말을 가려서 하시게. 이번 일은 권룡의 독단적인 범행으로…….”
“범행? 당신이 귀도방에서 돈을 받고 뒤를 봐준 게 범행이 아니던가?”
“미친놈! 내가 돈을 받고 뒤를 봐주었다고!”
안백리가 벌떡 일어서자 서녕지부장이 손을 든다.
그의 얼굴에는 귀찮음과 짜증이 가득했다.
“모두 닥치시오.”
“…….”
“…….”
작게 한숨을 내쉬는 서녕지부장.
그는 말년에 대충대충 쉬어 가며 무림에서 은퇴하고자 서녕지부로 왔다. 서녕지부가 막대한 임무를 맡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무림의 권력은 본성에 모두 집중되어 있었다. 정파 내에서의 세력 다툼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화되고 있었다.
“모든 상황을 고려하여 판결을 내리도록 하겠소.”
지부장은 회의를 열기 전에 모든 것을 결정한 상태였다.
“암영대 2조장 안백리.”
“예.”
“사파의 종자들과 내통한 죄로 직위를 박탈하고, 뇌옥형에 처하겠소. 형량은 차후에 이루어지는 회의에서 결정하도록 하겠소.”
“……?”
과감한 서녕지부장의 결정에 모두가 뜨악한다.
“지부장님-!”
살의마저 엿보이는 안백리.
그의 시선에도 지부장은 눈도 끔쩍하지 않는다.
이미 상세 보고를 통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파악했다. 용봉지회 우승자인 권룡 황극린과 귀도방주 귀세춘의 비무. 서녕지부에서 아무리 귀도방이 정파 문파라고 주장해 보았자 중원에서는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다.
최근 소림의 제자 천덕을 꺾고 우승한 황극린과 사파의 마두와의 싸움.
안백리를 살리고자 한다면…….
‘나도 끝장난다.’
일이 커지면 커질수록 지부장에겐 손해다.
고작 암영대의 2조장이 마음대로 귀도방원을 풀어 주려 했던 것은 지부장의 암묵적인 허락이 없었다면 불가능하다.
“권룡에겐 사파의 대마두를 처리한 공훈을 높이 사 서녕지부장의 이름으로 상패를 지급할 것이오.”
극단적인 결정에 술렁이던 회의장이었지만, 눈치 빠른 이들은 어딜 가나 존재하는 법이다.
“역시 지부장님! 옳으신 결정입니다.”
“맞습니다. 귀도방과 내통한 죄는 참으로 크지요!”
“권룡에겐 상패와 더불어 상금도 지급하는 방향으로…….”
등위군의 얼굴이 밝아진다.
‘황 소협께 피해가 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일이 잘 풀리는구나!’
역시 무림의 정의는 살아 있는 걸까?
자신이 마음을 달리 먹었기 때문에, 죽음조차 각오했기에 이렇게 일이 술술 풀리는 걸까?
등위군이 슬쩍 안백리의 눈치를 살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더 이상 지부장에게 따지고 있지 않았다. 분한 눈빛은 그대로였지만, 겨우 참고 있는 듯하달까?
‘상황 파악이 빠른 놈이니 여기서 난리치면 더 불리해진다는 걸 알고 그러는 걸까?’
아무러면 어쩌랴?
황극린은 결국 어떤 피해도 보지 않고 지부장급의 상패를 받게 되었다. 만약 그가 무림맹에 입맹하게 된다면 큰 힘이 될 것이다.
‘얼른 가서 황 소협께 소식을 알리고 싶군.’
등위군은 회의가 빨리 끝나기만을 소망했다.
* * *
“황 소협, 모두 잘 해결됐습니다. 이제 안백리는 권력을 잃었습니다. 지부장님께서 뇌옥형에 처한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형벌일 것입니다!”
신난 등위군이 황극린에게 보고한다.
하지만 왜인지 그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그렇소?”
“예, 그리고 지부장급의 상패와 상금을 함께 내리실 겁니다. 그것만 있으면 황 소협께서는 무림맹 입맹 시험을 그냥 통과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
“아, 혹시 무림맹에 입맹하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그래도 상금의 규모가 꽤 큰 것 같으니…….”
등위군은 황극린의 반응에 조금 실망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모두 잘 해결되는 것 같았다. 자신은 물질적으로 받은 게 하나도 없었지만, 황극린을 통해 진정한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 대단히 만족하고 있다.
그런 등위군을 바라보며 황극린이 말한다.
“지부장이 안백리의 행동을 눈감아 주었다는 건 알고 있소?”
“그건…….”
등위군이 그것마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단지, 심각한 사안에서는 그래도 옳은 결정을 하신다고 생각했다. 그는 세상을 어둡게만 보지 않았다. 아무리 나쁜 사람에게도 좋은 면이 하나라도 있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지부장이 아니던가? 안백리를 깔끔하게 쳐 내고, 귀도방도들까지 잡아들이라고 명하셨다. 확실히 마음을 정하신 것이다.
“안백리의 형량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했소?”
“예, 그렇습니다…….”
황극린이 한쪽 입꼬리를 올린다.
안 그래도 놈을 처리하지 못해서 조금 찜찜했다.
“아마 놈은 오늘 지부를 떠나게 될 것이오.”
“예? 지금 호법대의 감시를 받고 있습니다.”
“서녕지부의 호법대이지 않소.”
“그게 무슨… 설마……?”
황극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 등위군의 표정이 하얗게 질린다.
설마 지부장이 뒤로 안백리를 빼내려고 한다는 말인가?
“지부를 빠져나간 안백리가 누굴 찾아갈 것 같소?”
부끄럽게도 등위군은 대답할 수 없었다.
이제 막 강호에 출두한 무림초출보다 자신이 아는 게 더 없었다. 무림에서 오랫동안 굴러먹었지만, 막상 이루어 놓은 게 없다. 그런 자괴감이 엄습한다.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
“나도 모르오.”
“예?”
“혹시 놈이 찾아가는 이가 내가 찾는 사람일 수도 있지 않소?”
황극린은 분명히 누군가를 찾기 위해 청해성에 왔다고 했다.
납치범을 찾고 있다고 했던가?
“그러니 뒤를 밟아 봐야지.”
황극린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분명 눈앞에 있는데도 그의 기척이 희미해지는 듯하다.